황해 - The Yellow S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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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속의 거침없는 폭력은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러웠다. 마치 격렬하게 파도치고 있는 황해의 적막함이랄까? 아니면 거칠게만 흐르고 있는 한국사회의 한 일면이 그렇게 여과 없이 표현되어서일 것도 같다. 파괴적인 속도를 보여주는 자동차 추격전은 이 영화의 백미일 것이다. 차들의 과격한 충돌 속에 묘한 대리만족까지 느낄 수 있었다. 그 속에서 살고자 하는 광기와 죽이고자 하는 광기의 충돌은 두 명의 천재적인 연기자들이 연기력과 맞물리면서 더욱 엄청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우아한 표현 뒤에 숨겨진 영화의 잔혹한 진실이 묻히는 것은 아니다. 나홍진 감독은 전작인 ‘추격자’보다 영화를 더욱 우울하게 형상화했고, 가증스런 현실의 이면을 집요하리만치 추적하고 있었다.
  영화 ‘황해’는 한국사회의 다양한 병적 증후군을 형상화하고 있다. 영화는 소수자 영화이면서 소통부재의 현실을 담은 영화다. 거기에 ‘사랑과 전쟁’이란 TV 드라마 시리즈를 연상시키는 부부의 소통문제가 담겨 있었고, 또한 어느 부부의 오해로 붉어진 비극이면서, 밑바닥으로 내몰린 중국동포의 처절한 생존기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이 얽히면서 희생과 배신을 당연시 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냉소가 깔려있다. 어떤 것도 믿을 수 없는 현대인의 고독한 소외감을 표현하듯, 영화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인간의 절박함이 그대로 투영됐다. 인간이 너무 외로워 보였다.
  난무한 폭력 속에서 인간미는 어느 곳에서 찾을 수 없었다. 이익과 배신이 다반사였고 신뢰는 자취를 감추었다. 믿을 곳은 하나도 없었고, 위로 받을 공간은 하나도 없었다. 배신에 대한 대가는 언제나 복수극이었으며, 용서나 화해는 돋보기를 들이밀어도 볼 수 없었다. 새로운 사실주의인 것처럼 모든 것이 희망찬 것은 하나도 없고 비극으로만 치닫고 있었다. 영화 속의 도끼는 이상하리만치 관객의 시선을 끌었고,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였다. 
 

 

  영화 속의 세상은 정의라곤 하나도 찾을 수 없을 만큼 흉흉했다. 그것은 한국사회의 감춰진 이면의 폭로일 것이다. 정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관계 속에서 가장 기본적인 관계인 부부 관계의 소통부재로부터 영화는 시작된다. 소통의 단절 속에 배신이라는 믿음이 거세지면서 발생하는 인간파멸의 모습은 남의 모습 같지가 않았다. 한국 사회 주변에 언제나 일어나는 볼썽 사나운 모습이다. 여기에 인간 목숨을 거래하는 장면이 시장 한가운데에서 벌어지는 것을 보면서 인간의 가치 하락 수준을 직접 느낄 수 있었다. 목숨 하나만 제거해주면 모든 것이 풀릴 것이란 이야기에서 생명경시를 느낄 수 있지만 인생의 밑바닥까지 하락한 연변의 조선족인 ‘구남(하정우)’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거라도 해야 모든 것이 풀리는 절박한 심정으로 그는 사람을 죽이러 황해를 건넌다. 불법으로 말이다.
  ‘구남(하정우)’은 모든 것이 빼앗긴 조선족이다. 그가 보여주는 모든 것은 무엇이든 해서 괴로운 현실을 탈피하고자 한 어느 조선족의 비애는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밑바닥에 떨어진 자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현실의 우울함을 벗어나기 위해선 무슨 일이든 해야 할 상황이 전개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기준이 도덕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무리다. 생존이 위기인 상황에선 무슨 일이든 해야 하는 것이다. 일면식도 없는 자를 죽이라는 청부에 그냥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자괴감만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삶의 안정이 거세된 자의 비애가 그를 통해 형상화되고 있는 것이다. 버림받은 자에겐 갈 곳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든 그는 결국 버림받았다. 사회적 약자에겐 너무 익숙한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를 세상의 밑바닥으로 몰아가는 '면가(김윤석)'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었다. 그에겐 돈 이외엔 아무것도 필요 없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선 인정사정 봐주질 않았고, 배신과 살인을 밥 먹듯이 했다. 그런 그를 야멸차다고, 아니면 냉혹하다고 비판할 수는 있지만 그런 기준을 가슴에 담지 않는 자에겐 필요 없는 제약일 뿐이다. 차리리 그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처럼 보였다. 문제는 그런 인간은 현실에서 엄연히 존재하며, 사람들의 도덕적 평가 자체를 웃음거리로 만들 만큼 강한 자란 사실이다. 그런 그에게 세상은 어쩌면 관대한지 모르겠다. 그를 통해 얻는 이익을 위해 타인의 불행을 조장하는 행위는 영화 속 곳곳에 숨어 있었다. 그가 도끼를 들고 밤거리를 돌아다녀도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는 현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한국사회인지도 모른다. 
  

 

 그런 ‘면가’에게 ‘구남’은 한 번 이용하고 버릴 무가치한 존재로 보인다. 그것이 이 영화의 진정한 공포다. 특히 ‘구남’을 만났을 때, 미안하다는 말은커녕, 빙긋이 웃으면서 죽이고자 달려드는 그의 미친 존재감은 이 영화의 진정한 공포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자신을 악용한 자가 자신을 삭제시키려 달려드는 상황, 부조리하지만 한국 사회엔 이제 익숙한 상황이다. 그 속에서 쫓고 쫓기는 장면은 차라리 우화였다. ‘구남’ 자신이 읊조린 것처럼 다시는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비애와 자신을 이처럼 만든 자들에 대한 분노는 정당했지만 슬프기도 했다. 그의 복수가 성공한다 해도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는 한국에서 있을 수 없었고 고향인 중국 연변으로 가기엔 너무 힘이 없었다. 그래서 황해인지 모르겠다. 영화 ‘황해’의 마지막 장면인 황해에서의 마지막 장면은 바다 같은 세상 앞에 인간이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를 괴롭게 보여준다. 그리고 모든 것들이 파괴되고 질식된 이후 은행 창구에서의 어이없고 기막힌 장면은 이 영화의 과격한 정직함의 끝을 보여주고 있었다. 마지막 장면에서의 희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영화의 마지막은 현실에 대한 과격한 냉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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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01 0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novio 2011-01-01 02:06   좋아요 0 | URL
저도 인상 깊게 봤습니다. 생각을 정리하고 리뷰를 쓰실 것 같은데 무척 기대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 - The Disappearance of Haruhi Suzumiya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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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현실이 현실 같고, 현실이 비현실 같은 구성, 흔한 소재지만 언제나 흥미를 준다. 외계인과 학교를 함께 다니는 비현실적인 시공간을, 현실이라고 강요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예술, 그리고 영화가 할 수 있는 특권이다. 검은 암실에서 상식 밖의 일을 갖고 있다는 암묵적인 동의를 얻는 것이야말로 영화의 장점이리라. 하지만 그래도 현실을 사는 인간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어야 사실 흥행은 물론 예술적 수준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뻔한 사실을 두고 볼 때, 일본 Animation인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 (The Disappearance Of Haruhi Suzumiya)’은 앞서 말한 기이한 협정을 충실히 잘 지킨 영화다.  

  일본 Animation이라는 것을 빼곤, 사전지식이 하나도 없다 보니 영화를 보는 것이 초반에 고역이었다. TV용 시리즈 물인 작품이라 수많은 시간 동안 방영되면서 많은 정보들이 공개되어서 나름대로의 과정이 있었겠지만, 처음 보는 관객이라면, 사전지식이 없는 관계로 이 영화는 다소 당황스럽고 혼란스런 전개를 보여준다. 알고 봐야 즐길 수 있는 영화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귀찮은 영화가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묘하게도 바로 그것이 즐거움을 줄 수도 있는 추리영화와 같다. 또한 그것을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황당한 상황이 진정한 현실이란 암묵적이고 강요된 전제에서 시작하는 이 영화는 기이한 구성원을 지닌 SOS란 고등학교 서클 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다. 외계인과 지구인으로 구성된 팀에서 구심점, 아니 명령을 내리면서 팀내에서 일을 만들고 있는 스즈미야 하루히에 의해 벌어지는 일들이 그것이다. 다가올 크리스마스에 전골파티를 준비하는 것을 시작으로 하는데 일이 이상하게 틀어지면서 언제부터인가 과거가 바뀌고 팀의 일원인 쿈의 일상이 처음부터 바뀌고 만다. 과거가 통째로 변하면서 그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출발점이자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영화는 변화된 삶을 제공하면서 쿈에게 질문을 한다. 자신이 원하던 현재의 시공간으로부터의 변화를 보여주면서 다시 한 번 이전으로 돌아갈 마음이 있는지를. 이 질문은 사실 자신의 현실에 대해 따분하게만 여기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질문을 하고 있는 일반화를 담고 있다. 새롭게 변화된 곳에서 행복을 느끼는지, 그리고 현실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즐겁게 변화시킬 수 있는 의지는 있는지, 너무 타성으로, 그리고 게으르고 살고 있는지 등을 말이다. 영화는 그때부터 단순한 Animation을 벗어나 현실 속에서 타성에 젖은 사람들에게 질타를 하기 시작한다.  

  이때 좀 당황스러웠다. 변화를 위한 노력을 과연 했을까? 자성은 탄식으로 바뀌었다. 자신이 있는 곳에서의 즐거움을 방기한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개인적인 생활이 되고 만 것 같았다. 이전으로 돌아가기 위한 쿈은 큰 위기를 겪는 것을 보면서 타성에 젖은 것을 변화시키는 것이 많이 힘들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것을 변화시켜야만 할 엄청난 과정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극적 긴장감과 아울러 느끼는 Carpe Diem은 분명 퇴폐적인 의미가 아닌, 보다 진중하고 가치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끈한 변화보다 좀 더 현실에 충실할 수 있는 인생, 그런 것이 정말 해보고 싶어졌다. 한 해가 저무는 이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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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레이지 - Outrag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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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력은 여전했다. 그리고 거의 모든 것들이 파멸되는 것 역시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타노 타케시의 영화에 어딘지 변화가 있어 보였다. 캐릭터의 변화들이 눈에 뜨였다. 죽음 앞에서도 배신이란 단어는 그다지 눈에 뜨이지 않았는데 이번 영화, 현실적인, 아니 불신으로 넘치는 것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믿을 수 없는 세상, 그런 것들이 보였다.
  영화는 잔혹했다. 피가 난무해서 잔혹한 것이 아니다. 야쿠자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의형제를 맺었다는 친구가 서로를 배신하면서 상대의 것을 뺏는 장면이나, 자신을 따르는 부하를 내치는 장면에서 불신의 늪이 서로간의 강한 유대감으로 묶였다는 야쿠자 세계에서 범람하고 있었다. 여기에 간계라고 할 수 있는 치졸한 수싸움 역시 존재했다. 이쪽과 저쪽이 대립하고, 치고 박고 해야 이익이 될 것이란 사실을 읊조리고 있는 야쿠자 오야붕의 이야기는 삼류깡패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은 이미 그렇게 변했다.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영화에서 낭만이 사라졌다. 그가 폭력이 넘치는 야쿠자 세계를 그리면서도 인간적 매력이 넘쳤고, 최후까지도 멋있어 보인 남자가 있었다. 하지만 영화에선 그런 인물들보단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너무 하찮게 버리는 인물들로 가득 찼다. 오해를 밥 먹듯 하고, 그런 긴장을 통해 이익을 얻으려는 행태, 그리고 정보부족에 시달리면서 상대의 진의파악에 몰두하는 가엾은 인간들이 보인 것이다. 즉 현실세계 속에서 낭만을 꿈꿨던 그가 현실 속에서 현실만을 담은 것이다.  

   희망이 사라졌다. 미래를 위해, 그리고 많은 동료들의 희생 속에서도 작은 희망이 있었지만 영화에선 희망이 없어졌다. 신현실주의와 경제위기로 인해 더 이상의 파멸이 볼 수 없을 만큼 내몰린 현대인들의 실제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누굴 믿을 수 없다면 배신이 가장 합리적인 행동양식이 될 수밖에 없는 영화 속의 캐릭터들은 바로 언제 해고될지 몰라 몸부림치는 우리들의 현실을 본다. 이것은 결국 자학이란 결과만을 연출하게 된다. 믿을 수 없기에 무슨 일을 하더라도 나중을 염두에 둬야 할 만큼 편집증적인 상태로 내몰리고 말며, 결국 몸담은 조직 속에서도 개인만 남는다는 처절한 철학이 영화 곳곳에 보였다.
  남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로망의 장소인 야쿠자 세계 역시 세상을 비켜나갈 수 없나 보다. 거칠었지만 그래도 왠지 모를 낭만의 그곳을 만들어주었던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마술은 점점 힘을 잃고 있나 보다. 영화는 같은 위치에 또 다른 인물로 바뀌었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분위기와 관계를 보여준다. 즉 기계의 나사와도 같이 자신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들이 태반인 상황에 놓인 것이다.
  이 영화, 그래서 Modern하다. 도시 한복판에서 상영되고 있는 이 영화를 보고 나올 때의 허무함은 과거완 같은 것도 같았지만 좀 다른 것도 같다. 하지만 언제가 그가 보여줬던 정적인 허무함이 느껴졌다. 어쩐지 다시 다케시 감독의 분위기에 젖은 것 같다. 밤거리에서 고독하게 달리고 있는 밤의 자동차와 함께 걷고 있노라면 말이다. 영화, 참 사람을 고독하게 만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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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 - The Last Statio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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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에서 20세기에 살았던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하나인 '톨스토이(크리스터퍼 플러머)'를 미국감독이 미국자본으로 형상화한다는 것은 이 자체만으로도 흥미거리다. 자본주의적 속성이 담긴 미국자본이 보기에 자신의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전형인 톨스토이는 사실 불편한 대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톨스토이는 위대한 영웅이 될지 아니면 어수룩하게 재산을 낭비한 자가 될지 사실 궁금했다. 하지만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결코 톨스토이는 아니었고, 그를 둘러싼 인간들의 이전투구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톨스토이 영화에 톨스토이는 좀 뒷전이었다.
  톨스토이의 재산을 갖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주체들은 개인적인 미래를 염려하는 톨스토이의 아내와 사회 진보주의자였다. 이런 이전투구 속에서 이 둘은 결코 속물근성만을 지닌 존재로 묘사됐다. 백작이었던 톨스토이의 재산은 어느 누군가에겐 편안한 노후와 자식의 풍요한 미래를 결정시켜줄 수 있지만 또 다른 이에겐 평등주의를 실현하는 공동체운동의 자금으로 쓰일 수 있는 중요한 재원이었다. 이들의 첨예한 대립은 세상에서 살아갈 시간이 적은 위대한 철학가에겐 고통으로 다가왔다. 그의 의지가 변하지는 않았지만 둘 간의 대립은 그를 인간적 고통으로만 몰아갔다.
  미국은 자본주의와 개인주의의 근본으로 자처한다. 오늘날 전세계를 경제위기로 몰아간 신자유주의 역시 미국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런 미국이기에 공동체주의와 평등주의에 대해선 상당히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키곤 했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미국자본의 힘을 빌려 만들었기에 공동체주의에 대한 입장은 부정적이란 느낌이 들었다. 톨스토이와 관련된 영화였는데도 말이다. 영화 곳곳에 담겨있는 공동체주의자에 대한 은근한 부정적 시각은 확실히 영화를 누가 만들었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재산을 통해 노후를 보장받으려는 톨스토이 아내인 소피야 톨스토이와 대립되는 인물로 묘사된 ‘블라디미르 체르트코프(폴 지아마티)’ 역시 그가 추진했던 공동체주의적 인식과는 반대로 독선적이고 야심 있는 인물로만 그려졌다.
  ‘발렌틴 불가코프(제임스 맥어보이)’란 톨스토이의 마지막 비서의 시선으로 진행된 영화는 개인의 인식과 감정으로 진행됐다. 단순히 악처로만 평가됐던 ‘소피아(헬렌 미렌)’의 새로운 해석을 낳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영화는 다소 산만하면서도 차분하지 못한 채 주관적이고 불안한 방향으로만 나아갔다. 갈등 요소가 그다지 크지 못했지만 불안한 시선 속에서 상황은 이상하게만 꼬여만 갔고, 특히 아버지의 죽음의 장소에 도착한 딸의 어이 없는 애정행각은 그 사실의 진위여부를 떠나 자유란 감정을 충실하면서 부모와의 관계 혹은 인간적인 숙연함도 파괴시켜버리고 마는 것 같아 아연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벌어진 애정행각은 불륜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 될 것이다. 그리고 영화 마지막 자막에서 톨스토이의 저작권이 아내에게 다시 넘어간 사연을 담은 자막은 어쩌면 톨스토이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엇나간 사례로서 남았을 것이란 슬픈 이야기가 될 것 같기도 했다. 
  극장에서 위대한 소설가이자 철학가의 영화를 본 이들 중 나이든 분들이 많았다. 아마도 젊은20대에 톨스토이의 사상에 심취했음직한 분들이 과거를 투영하고, 자신이 갖고 있던 삶의 지표를 다시 되새기고, 또한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 위대한 철학가의 생애를 다시 기리는 시간을 만들고자 온 분들이었으리라. 톨스토이란 거대한 사상가를 알기엔 현대의 20-30대에겐 좀 무리인 상황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영화는 그분들을 위한 영화는 아니었다. 위대한 소설가의 이야기보단 그의 주변을 둘러싼 우아하지 못한 이들이 이전투구하고 있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고, 화끈한 애정행각을 아버지의 죽음도 막지 못한다는 묘한 상황까지 나오고 있었다. 위대한 소설가 옆에 있는 속물 같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같기만 했다. 마치 개인주의가 판치는 오늘날의 세상과도 같았다. 미국이 보는 톨스토이는 그렇게 불행하게 봤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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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 크롤러 - The Sky Crawler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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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화에 대한 갈망, 살아가면서 언제나 느끼는 것이다. 이런 욕망은 현실이 바뀌지 않은 채 계속 유지되고 있다는 가정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런 변화 없는 곳으로부터의 탈피는 어느 순간 현대인들의 욕망이자 희망이 되고 있다. 어느덧 현실은 고행이자 비극의 장소가 됐고, 그에 반해 동경의 대상이 된 과거나 혹은 변화를 이끌 미래의 이상향이 현대인의 행복의 시공간이 된 전제 속에서 탈피에 대한 열망이 진정한 행복의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 자신의 주변은 변하지 않은 채 있을까? 정말 현실은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일까? 두드러지지 않고 작지만, 현실은 분명 변하고 있지 않을까? 행복을 위한 변화가 정말 우리 주위에 없는 것일까? 도대체 어떤 변화를 현대인은 갈망하는 것일까?
  시작부터 볼 수 있었던 화려한 공중전은 일본의 과거를 투영해 주는 것만 같았다. 긴박하고 긴장된 전쟁은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전쟁은 아니었다. 처음 듣는 회사들의 이권을 위해 그들은 공중전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들을 처다 보는 시민들의 시선은 무덤덤하다. 아니 관심 없다. 영화 속의 세상은 ‘오시이 마모루’의 영화들처럼 언제나 그랬다. 잿빛의 그림자가 드리우듯 함께 하는 동료들은 있지만 어딘지 모를 고독과 외로움이 존재하고, 그냥 그런 인간관계들만이 존재한다. 그가 없으면, 그녀가 없다면, 또 다른 대안이 다시 재생되고 마는 인간관계, 그렇게 한 개인의 가치는 그다지 중요해보이지 않는다. 그 속에서의 인간들은 그냥 그렇게 살고, 그리고 죽는다. 그리고 죽는 장소는 자기들끼리 중요할지 모르지만 세상의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그냥 그런 전쟁터이다. 그 속에서 시간의 변화는 무의미하다. 누군가 사라지면 바로 교체할 수 있으니 전투기 조종사들의 시간은 사실 같은 시간의 반복이라 여겨질 뿐이다. 그냥 무의미하게 말이다.  

  오래 살아봐야 할 필요가 없는 그들을 영화에선 ‘키르도레’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그들끼리의 이야기엔 어딘지 모를 허무가 느껴진다. 도플 갱어라고 했던가? 나와 똑 같은 인간이 어디선가 자신의 삶을 산다는 것. 이 영화 속에선 그런 인간들이 많다. 다만 시간의 선후가 다를 뿐이다. 누군가 전사하면 똑 같은 인간들이 그 빈자리를 채운다. 평생 늙지 않도록 안배된 인간 ‘키르도레’는 사실 소모품일 뿐이다. 사라지면 보충되기에 아쉽지도, 그리고 아쉬울 필요도 없는 그런 존재들이다. 그들이 잠시나마 겪는 시간 역시 개별적이라고 하기엔 너무 일반적이다. 짧다고 강렬하게 사는 것도 아닌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주역인 유명 회사의 이해에 맞추어져 제작된 인간들일 뿐이다. 그래서 그들이 마련한 전투지로 향할 뿐이다. 그리고 아무도 그들을 걱정하지 않는다. 인간적 미련이 있을 뿐이고, 잠시나마 울지 모르지만, 다음의 그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평범, 그들이 사는 세상은 그렇게 평범하다. 변할 것도 없기에 무료하기만 한 그들의 세상을 살면서 ‘간나미 유이치’의 넋두리인 ‘나이를 먹을 필요는 없다’는 그의 말은 현명한 것도 같지만 슬프기도 하다. 그들은 결국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아니 가치있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오늘의 삶이 내일도 연장될 것이란 사실에 전투기 조종사들은 그냥 그렇게 살고 있다. 어른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이 결코 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몸소 느끼고,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직감으로 알고 있는 그들일 뿐이다.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결코 이런 생활을 벗어날 수 없다는 자괴감, 그리고 이런 것을 잊기 위해 그나마 Cool하게 사는 것, 그들에게 하루의 생활은 그래서 차라리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 매우 효과적일지 모른다. 의미가 있다면 그들의 짧은 인생은 얼마나 허무할까? 내일을 기약할 수 있는 인생이 아닌 것에 대한 비극, 그들은 그것을 가슴에 품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할 필요도 없고, 상대를 기억하려는 노력은 더욱 슬플 뿐이다. 변화가 없다는 생각과 자신의 미래가 없다는 괴로움, 영화는 그런 것들로 뒤범벅이 되고 있다. 마치 오늘의 젊은이들의 괴로움을 읽기라도 하듯.
  하지만 그들 주변엔 변화가 있다. 감지하지 못할 뿐. 간나미 유이치의 마지막 이야기는 그런 것들을 이야기한다. 자연의 작은 변화도 변화인 것이며, 그런 것들 속에서의 변화를 통해 새로운 인생을 살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삶의 고통스런 현실 앞에서 무너지면서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젊은이들에게 주는 사랑스런 충고일 것이다. 오늘과 내일이 같다고 10년 후의 오늘이 같을 수는 없다. 모르고 지나칠 뿐, 변화는 있기 마련이며, 새로운 인생에 대한 활력을 찾길 바라는 감독의 염원은 잔인한 마지막 전투 속에서, 그리고 새로운 전투기 조종사를 맞이하는 구사나기 스이토의 웃음 섞인 모습에서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변화는 좋든 싫든 오며, 또한 육체는 어른이 되지 않지만 성숙은 할 수밖에 없는 키르도레에게도 오는 것이다.  


  

  영화는 화려한 전쟁이 있으면서도 잔잔하다. 잔인할 만큼. 그 속에서 볼 수 있는 인간들의 외로움은 변화가 없는 속에서의 고통일 수는 있다. 그런 것을 허무함이라고 표현할지 모르겠다. 미래라는 시간성을 결코 고려할 수 없기에 현실에서의 작은 변화에 둔감해버리면서 현재의 생의 기쁨을 놓치고 마는 어리석음은 분명 인생의 활력을 무너뜨리며, 자신의 가치를 비하하는 슬픈 현실을 자아내게 한다. 하지만 그들 역시 변화하고 성숙하는 것이다. 생명이란 주기를 볼 때는 말이다. 언젠가는 죽을 것이기에 그냥 그렇게 치부할 수 있지만 변화는 오는 것이며, 그 변화 속에서 그들은 살아가고 짧지만 변한다. 인생은 힘들과 외롭고 고통스럽지만 변화하는 작은 것들 속에서 현재의 가치를 찾고 좋은 인간관계를 만들어가며, 그리고 인간의 의미있는 생활과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허무함과 자기 파괴는 결코 변화하지 않는다고 평가절하된 현실에서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포기하지 말라는 영화의 마지막 이야기는 묘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그리고 사실 모든 것은 변하는 것이다. 영화 스카이 크롤러는 죽기 위해 사는 사람들의 이야 기지만 변화를 이야기하고, 우리가 지나치는 변화에 대한 참의미를 들려주고 또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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