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 Vegetaria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신비로웠다. 현실이란 공간에서 비현실적인 환상의 공간으로 접근하는 과정은 이해하기 힘든 다양한 상징을 내포했고, 현실을 거부하는 방식이 기존 방식과는 크나큰 차별성을 지니고 있어서 보는 내내 당혹스러웠으며 동시에 공포를 느끼게까지 됐다. 이 영화에서 현실에 대한 잔인한, 혹은 비이성적이거나, 인간의 행복을 전혀 마련해주지 못하는 일면을 재해석하고 분해하는 방식은 너무 색달라서 보는 내내 긴장을 하게 했다. 그러나 그런 긴장감 속에서도 영화는 아름다운 화면과 매력적인 예술적 감각으로 관객을 미지의 환상의 세계로 이끌었고, 현재의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음으로 이끌었다.
  영화의 시작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원인에 의한 거부에서부터 시작한다. 시작을 알 수 없는 거부, 그 시작은 꿈에 의한 것이라고 갑작스레 변한 영혜(채민서)는 이야기한다. 평범할 것만 같았던 그녀의 돌연한 변화는 현실에만 익숙했던 주변의 가족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어쩌면 영혜 자신도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갑작스런 변화에 대해 특별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는다. 오직 그것에 의한 변화만은 영화는 보여준다.
  영혜가 가려는 세계는 역시나 평범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원인에 뒤이어 그녀가 지향하는 세계는 인간적이지 않은, 아니 동물적이지 않은 식물의 세계였다. 육식과 동물에 대한 알 수 없는 거부와 동시에 그녀가 지향하는 식물의 세계와의 마찰은 이 영화에서의 강한 갈등을 만들어 놓은 반목상태에 있는 이분법적인 세계들이다. 영혜는 식물의 세계관을 선택하면서 동시에 동물적인 현실세계에 대해 단호한 거부를 선택한다. 영화는 왜 그런 선택을 했는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런 선택에 뒤이은 세상의 반응과 영혜의 이상한 변화와 집착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영혜의 기이한 행동은 가족들에게 낯설기만 할 뿐이다. 그것은 영화 속의 가족만이 그렇지 느낀 것은 아닐 것이다. 관객 역시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그런 영혜에 대해 세상은 그녀에 대한 거부에 반항하듯 거칠게 그녀를 몰아가기만 했다. 아버지의 폭력, 남편과의 불편한 관계 등 일반인으로선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그녀의 행동에 대해 일반적인 속성을 지닌 영화 속의 인물들은 평범한 반응만을 보이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혹시나 그녀가 다시 동물의 세계라고 거부한 그곳으로 귀향할지 모른다는 생각은 점차 희미해져 간다. 그렇게 그녀는 특별하고 불편한 인간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즉 식물이 되어 가고 있었다. 

  영화를 통한 미적세계를 창조하는 그녀의 형부, 민호(김현성)는 어쩌면 비현실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 또 다른 현실의 부적응자인지 모른다. 세상을 달리 보며, 아니 세상을 달리 보려고 하는 형부, 민호는 평범을 거부하면서, 괴이한 미적세계를 창조하고자 하는 영화 제작자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형상화하고자 원하는 부분을 현실 속에서 찾을 수 없었으며, 언제나 방황하고 있었으며, 예술가로서의 특별한 체험과 그 형상화를 지향하는 그는 언제나 실패했다. 특이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그 역시 현실부적응자일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신비롭기만 한 영혜가 다가왔다. 
  몽고반점이란 기이한 연결고리를 통해 형부와 처제에서 만난 영혜와 민호는 그들이 갖고 있는 세상에서의 가족이란 관계를 벗어나 몸에 아름다운 꽃을 그린 바디 페인팅을 통해 서로간의 동질성을 느끼는 만남을 갖는다. 육체에서의 꽃을 통해 식물의 세계로의 탐닉에 빠져든 영혜와 위험한 매력에 들어가고자 한 민호의 위험한 관계는 매우 고혹적이고 아름다운 페인팅 장면과 육체 위에 한껏 피어난 꽃들의 향연, 그리고 그런 꽃들 속에서 꽃피운 그들의 정열과 애욕, 어쩌면 지금까지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평가될 수 있는 더 없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것은 불륜이었고 파란이었다. 예술이란 장막을 거두어 버리면 나타나게 될 탐닉과 함께 등장하는 불륜은 시작부터 파괴될 운명이었다. 상식과 전통이란 세계관은 그런 것을 허락할 수 없는 것이고 결국 파괴가 될 뿐이다. 그런데 그 파괴는 세상이 아는 한 가장 잔인한 파괴인 것이다. 그리고 그 파괴를 단행한 자는 다름아닌 언니이면서 아내이자 그 불륜에 파괴된 지혜(김여진)가 단행한다.
  동생인 영혜와 남편인 민호와의 묘한 불륜은 이 영화의 압권이라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사랑의 행동을 멋지게 포장해 줄 수 있겠지만 결코 일반인의 시각에선 결코 허락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분노를 대변하듯, 지혜는 그 둘에게 슬픈 분노를 터뜨린다. 그들에게 그녀는 세상의 격리를 의미하는 정신병원으로 강제로 보낸다.   

  정신병원, 격리를 의미한다. 세상과의 불편한 관계를 맺게 된 사람들이 치료를 목적으로 가는 곳이다. 그 치료란 것은 현실로 돌아올 수 있도록 이끄는 다양한 방법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병원이란 그 말 자체엔 현실은 옳고 꿈을 쫓는 것은 그르다 라는 기본 전제를 내재하고 있다. 이래서인지 영혜에게 이 곳에서의 치료는 폭력으로만 느껴진다. 정신은 물론 이젠 몸조차 이미 세상을 거부하는 듯 식물로서의 특성만 지니고 있고, 그것만을 쫓고 있었다. 나무의 움직임이 땅 속으로 향한다고 이야기하는 그녀의 모습은 분명 세상에서의 상식이 그녀에겐 잘못된 편견이자 적대적인 의미로만 느껴질 뿐이다. 이제 어느 누구도, 그리고 어디에서든 그녀를 현실의 세계로 이끌 수 있는 것이나 곳은 없어 보였다. 현실에서의 영혜, 그녀는 방황만 할 뿐이고 아파할 뿐이다. 그래서 그곳으로부터 영혜는 벗어난다.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기이한 서사와 구성을 지닌 이 영화는 내용의 파격성과 아름다운 영상으로 인해 관객들은 압도되고 그 파괴력에 놀랄 뿐이다. 동시에 다양한 상징으로 표현될 수 있겠지만, 영화에서 파열되는 이상적인 꿈과 냉혹한 현실간의 긴장을 목도하면서 현실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는 마력을 보여준다. 현실에 대한 거부가 영화 속에서 다소 거칠게 형상화됐지만 그 거부에 대한 인지를 모든 관객을 할 수 있었다. 현실과 다른 생각에 대해 가해지는 폭력성은 영화를 일반화할 경우 주변에 산재해 있음을 알고, 또한 강요된 상식에 의해 통제되는 현실의 인간들을 충분히 볼 수 있었다. 아니라고 할 수 없는 현실의 가혹성은 어쩌면 인간 모두가 몸으로 경험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래서 현실의 잔혹성을 의미할 수 있는 동물의 세계에 대해 영혜는 그렇게라도 저항하려 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땅으로 들어가려 했는지 모른다.
  영화 속의 거부는 다양한 상징성을 낳고 있다. 어떤 이에겐 자연보호를 이야기할지 모르겠다. 어떤 이에겐 가부장적인 세계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아니면 피곤하기만 한 경쟁위주의 세계를 부정적으로 보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내용들은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강력한 부정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 속에서 살고 있는 현재의 인간들의 불운에 대해 비난하면서 식물의 세계로만 침잠하는 영혜의 모습에서 현실은 강하게 부정되기만 한다. 그렇게 현실은 부정되고 관객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할 시간을 갖게 된다. 우린 이 곳에서 행복하냐고...
  그런 영혜를 보고 관객들은 어쩌면 현실의 속성을 각성하고 이해하면, 어느덧 영혜, 그녀의 기이한 행동을 이해하고 어쩌면 부러워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이 도피인지 용기인지 모르지만 불편한 것에 대해 불편하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는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너무 버거운 짐이 되어 가고만 있다. 그래서 현대인은 그런 용기를 저버리고 보지 않으려 할 뿐이다. 그러기에 독특한 행동을 보이는 자들에게 한없이 가혹하게 반응하는지 모르겠다. 마치 인간의 비열함을 폭로하는 것에 대해 자신의 나약함이 폭로되는 슬픈 사연을 무시하기 위해서 말이다. 영화는 어쩌면 인간의 비겁함을 난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식물이 되고자 한 어느 불행하게만 보이는 여성의 형상화를 통해 영화는 자유, 갈망, 타성, 비겁함, 그리고 용기를 차례로 보여준다. 어느덧 영화는 인간 자체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마치 거울처럼 보는 이들의 가슴에 깊은 고민을 이끌어 내고 있었다. 

  영화는 타성에 저항한 영화다. 과거를 통해 현재의 타당성을 이해시키려는 기존의 방식에 대한 거부감이 이 영화에 있었다. 과거의 사유가 무엇이든 제일 중요한 것은 거부란 결과이고, 그것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것이 이 영화의 목표이자 주제의식이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기존영화의 타성을 문제삼고 있다. 동시에 마지막 역시 주인공의 향하는 방향이 어디인지 모른다. 이것 역시 새롭다. 거부에 따른 부적응과 고통이야말로 이 영화가 이야기해주려는 것이지 거부에 따른 부작용으로 주인공의 최종 정착지는 어디이다 라는 설정 역시 타성일 뿐이다. 영화는 모든 면에서 새로운 전개와 시각, 그리고 열린 시작과 결말을 자유롭게 쓰는 다시 없는 기이한 매력을 맘껏 펼쳐 보인다. 이런 매력에 자신의 매력을 한껏 높인 ‘채민서’의 열연은 영화의 수준을 한층 높였다. 아마도 그녀 아니면 영혜라는 독특한 캐릭터의 완벽한 탄생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관객은 물론 그녀 역시 [채식주의자]란 영화의 영혜를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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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ng 2010-03-11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도 원작 못지 않게 '끔찍'한 것 같군요. 저는 견디지 못할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

novio 2010-03-11 12:21   좋아요 0 | URL
전 소설을 읽지 못했는데 비슷한 구성일 것 같아 소설 읽는 것이 조금 무섭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