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 - A Sad Story Than Sa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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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토리는 내가 지금까지 봐온 어느 영화나 소설의 한 장면을 본뜬 것 같다. 그러나 그건 나만의 인상은 아닐 것이다. 거의 2000년 이상의 시간 동안 우린 유사한 소재를 갖고 좀 더 다른 창의성을 고전에 입히면서 지금까지 문학을 진행시켜왔다. 이제 글로 된 문학에 오감의 모든 것들이 결합된 영화가 개막된 지 오래지만 그 동안 서사의 구조는 역사처럼 긴 유사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내가 본, 그것도 지금까지 가장 흔한 ‘사랑’이란 소재를 다룬 영화라면 어디선가 떠오르는 다른 장면들을 담은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베낀 것이 결코 매력은 아니다. 뭔가 공감할 수 있는 힘을 지는 장면들과 구성이 있어야만 영화는 작은 암실에서의 은밀한 감동을 이끌 수 있다. 그런 감동을 이끄는 매력이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란 영화에 있는 것 같았다. 

고아로서 함께 자란 두 사람, K와 크림이란 남녀의 관계로 원태연이란 시인의 감성을 통해 창조된다. 그들은 각자의 사연으로 한 집에 살게 된다. 한 쪽은 버림 받아서, 그리고 한 쪽은 가족의 불운으로. 원인이야 어떻든 그들의 운명으로 함께 사는 두 남녀에겐 사랑이 싹트지만, 아니 싹틀 운명이지만 남자 K의 집요한 거부로 마음만의 사랑으로 남게 된다. 가족의 질긴 유전병으로 인해 자신의 운명의 끝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 있는 K는 미련 없는 인생은 물론 사랑하는 사람과의 짧은 관계를 걱정하기에 너무 현명하게 결코 크림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크림 역시 우연한 사건으로 K의 현실과 그의 마음을 알기에 어려운 선택을 계속 강요당하지만 자신의 연정대상의 요구를 하나하나 수용하려 한다. 이런 둘 간의 관계에 우연으로 끼이게 된 치과의사의 시선 역시 또 하나의 스토리를 생산한다. 집안과 계층의 결혼을 하려는 상황에서 크림과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결혼이란 과정을 겪게 되는 그의 입장은 사랑과 이해라는 묘한 절충 속에서 절제된 입장만을 강요당하게 된다. 어쩌면 어떤 것을 위한 수단이었지만 그는 그런 처우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지 않는다. 그는 어쩌면 K의 운명에 얽혀버린 또 하나의 사랑하는 자가 된 것이다. 

이런 기이한 세 사람의 만남과 관계는 하나의 스토리를 구성하지만 영화는 K와 크림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각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마음 속의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왜 그렇게 선택했는지, 그리고 그런 선택에서 마음의 쓰라림을 각자의 시선과 독백 속에서 보여준다. 그들은 죽음이란 운명 속에서 상대에 대한 최선의 배려를 하고 있었다. 생의 짧음에 결혼하고자 하는 마음을 굴복시킨 K의 시선과 독백을 통해서 K의 연민을 보여 줬다면 크림의 시선과 독백을 통해 짧은 삶을 살아갈 K를 위해 모든 것을 해 줄 용기와 행동을 보여주는 크림의 고통은 K에 대한 크림의 논리적 답변이었다. 이런 둘의 생각과 행동의 위선과 배려는 사랑의 희생의 의미를 깊이 있게 보여 준다. 이런 둘의 사랑에 묘한 입장이 된 치과의사 차주환은 치졸한 감정 표현보다 둘만의 억눌린 감정을 최대로 이해하며 옆에 서길 주저하지 않았다. 이해했고 용서했다. 탈선 아닌 탈선과 배반 아닌 배반을 나름의 어조로 표현하고 응시하는 그의 표현 역시 사랑이란 배려를 담고 있었다. 

영화는 제목처럼 비극보다 더 비극적으로 끝났다. 죽을 수밖에 없기에 죽었고 다른 하나는 만나고자 했기에 죽는 선택을 하게 된다. 치과의사의 마지막 배려는 영화의 끝을 상징으로 끝맺으며 인간적 배려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보여준다. 세 중 그 누구도 인간의 헌신의 가치를 배반하지 않았다. 죽은 사람과 남는 사람들의 마음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들은 무척 우아해 보였다. 사랑의 가치는 우아한 관계의 유지니까. 그래서 어쩌면 진정한 죽음은 잊혀지는 것보다, 그리고 사라지는 것보다 인간다움의 상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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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독 밀리어네어 - Slumdog Milliona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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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구성은 현실과 환상의 기묘한 조합으로 구성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영화의 캐릭터 중 오직 한 인물, 즉 주인공만 환상의 대상이었을 뿐 그 이외의 모든 캐릭터들은 현실적인 인간들이었으며, 또한 영화의 배경 역시 현실이었다. 영화의 마지막은 영화 제목처럼 신데렐라로 끝나게 될 운명이었지만 영화는 이제 제목이나 주제만을 확인하기 위해 보지 않는다. 사실 그런 적도 없었지만. 구성 방식과 과정, 그것들이야말로 영화를 보는 재미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영화는 역순행적 구도로 시작된다. 답을 맞추면 맞출수록 액수가 올라가는 퀴즈프로그램에 참석한 자말과 고문당하고 있는 자말이 연속 교차하면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긴장과 궁금증을 동시에 갖도록 이끈다. 이런 화면을 통해 자말의 신데렐라 시리즈는 시작된다.
인도 빈민가의 봄베이는 언제부터인가 뭄바이로 이름이 바뀌었다. 과거 대형사고의 장소였던 곳으로 기억되는 영화의 첫배경인 뭄바이는 영화로 소개될 때 판잣집으로 구성되어 있는 가난하고 슬픈 공간이었다. 그곳 주민들의 삶은 허술한 집만큼 형편없었으며 앞으로의 미래도 쉬워 보이지 않았다. 그런 곳에서 인생을 시작한 두 형제, 살림과 자말은 인생의 비극이 뭔지를 현실 생활을 통해 똑똑하게 보게 된다. 영화 시작부터 쓰레기 매립지를 보여주면서 그들의 재정상황을 보여줬고 힌두교의 회교도 습격을 통해 어머니의 죽음을 보여주면서 그들이 고아가 됨을 확인시킨다. 그래서 그들은 고아가 되었고 그런 와중에 앵벌이를 하게 되는 과정, 그리고 라티카를 만나게 되고 그녀와 헤어지는 서사가 조심스럽고 아슬아슬하게 펼쳐진다.
살기 위해, 그리고 보다 나은 생활을 얻기 위해 두 형제는 안 하는 게 없다. 엉성한 길잡이, 도둑, 그리고 사기 등 그들 형제는 인도의 가난한 출신들이 겪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하면서 인도 사람들의 비극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특히 타지마할에서의 그들의 생활은 화려한 타지마할과 대비되면서 더욱 극명하게 보여준다.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하는 타지마할은 그나마 그들에게 신발을 훔칠 수 있는 장소로서의 역할을 할 뿐이다. 그런 생활 속에서 라티카에 대한 자말의 동경은 결국 자신들이 도망쳤던 뭄바이로 다시 돌아오게 했으며 자말의 환상은 계속 이어져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다시 재회한 라티카와의 재회는 기쁨보단 걱정과 슬픔을 나았고 배신까지 그가 느끼도록 만들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자말은 끊임없는 희망이란 환상을 갖고 있는 캐릭터를 유지한다. 그의 이런 환상과 대비되는 살림과 라티카는 희망을 갖데 현실을 직시한다. 살림과 라티카는 삶의 생존방식을 극단적인 현실에 자리매김하며 그들은 생존을 위해 위태롭고 힘든 선택을 한다. 살림은 앵벌이를 시켰던 자를 총으로 죽이고 라티카는 자말과의 애정보단 현실을 선택하며 자말을 버린다. 이런 점에서 자말이 해피엔딩의 주인공이지만 또 다른 주인공인 살림은 불행의 질곡을 갖게 된다.
형으로부터,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말은 그래도 환상을 갖고 살아간다. 영화는 그런 자말에게 동정하듯 우연을 가장한 행운을 계속 선사한다. 다시 만난 형제 살림은 은막의 스타가 아닌 밤거리의 갱단으로 살아가고 있었고 라키타는 깡패의 여인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둘은 생존을 위한 망가짐을 선택했는지 모른다. 이 점에서 그들은 진정한 뭄바이 출신들이다. 반면 자말은 꿈과 의지, 그리고 우연한 행운으로 기회를 차곡차곡 쌓아가며 행운은 그의 주의를 맴돌게 된다. 그런 와중에 출연한 백만장자 되기 쇼는 그에게 막바지의 행운을 선사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자말의 행운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런 행운 뒷면의 슬픈 현실은 또 다른 주인공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주목하도록 이끈다. 즉 살림의 죽음이다. 동생에 대한 죄책감으로 살아온 살림은 갱단을 하기 위한 삶 속에서 자신의 유일한 피붙이에 대한 연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이 삶의 무게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는 동생을 사랑했고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그가 자신의 갱단 두목을 살해하는 과정에서의 돈에 대한 집착은 거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번민을 보여주고 있다.
언제나 가난한 자들은 양자택일의 상황으로 몰리고 있었다. 그것은 라키타도 마찬가지였다.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그들은 자신의 피붙이와 연인을 버려야 했다. 그래서 물질적인 것들을 얻게 되지만 마음 한구석의 고달픔은 그들의 삶을 황폐화시키고 있었다. 살림의 죽음은 이런 점에서 자말의 성공과 대비된다. 자말이 백만장자가 되는 과정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못 배운 자가 박사들도 하기 힘든 최종단계까지 가는 과정에서 자말은 진행자의 속임수에 놀아날 뻔 했으며 경찰들에게 자신이 답을 맞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자신의 과거를 숨김없이 이야기했다. 즉 사생활 보호를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보이는 폭력과 차별은 인도의 현실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여기까지를 본다면 살림, 라키타, 그리고 자말은 같은 부류의 인간일 뿐이며, 가난한 자들의 전형일 뿐이고 그것은 가난한 자들에게 자연스럽게 가해지는 자연스런 고통일 뿐이다.
하지마 마지막은 달랐다. 살림은 죽었고 자말은 백만장자가 됐다. 그나마 차이라면 자말은 악의 소굴로 빠져들지 않은 정도? 하지만 그런 자말이 상위계급으로 올라선다는 것은 인생을 살면서 얼마나 비논리적인지 잘 알고 있다. 또한 자신을 버린 라키타를 계속 생각하는 자밀의 순수성은 사실상 존재하기 힘든 것으로만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우연성을 현실적인 개연성으로 촘촘한 방식으로 피해가면서 영화의 극적 재미를 높이고 있었다. 또한 그런 개연성보단 더 중요한 것이 희망이며 꿈이라는 것을 역설한다. 나 역시 그 점엔 동의한다. 하지만 살림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은 이 영화가 단순한 신데렐라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거꾸로 표현하자면 신데렐라 이야기에 현실을 또한 더해준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어른적 현실과 아이적 동화가 공존하는 영화다. 이 영화는 그래서 많은 감동을 준다. 성공과 좌절을 마치 힘든 줄타기를 하듯 혹독하면서도 우아하게 보여준 걸작이다. 아마 이런 평가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을 것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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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2009-03-12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최근에 재미있게 본 영화인데요. 어른적 현실과 아이적 동화가 공존한다는 표현에 공감합니다..

novio 2009-03-19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후기로 알라딘 이벤트에서 선물을 받았네요. 저야말로 슬럼독 이벤트너가 되었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