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 Pa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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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 묘했다.
  처음 들었을 땐, 심리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만 같았다. 그러나 경기도 파주의 이름이란다. 정말 시작부터 의외였다. 내가 살았던 동네의 이름이었지만 영화 속의 파주는 너무 낯설었다. 그리고 영화의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다. 인간의 폐허화된 그런 곳이 형상화된 것이다.
  영화 속에서의 파주는 안개가 자주 꼈고 비가 자주 내렸으며, 어딘지 모를 황량함이 느껴졌다. 안개가 자욱하기도 했고, 자주 비가 내렸다. 그리고 재개발 당하는 주민들의 안타까움이 묻어있는 격렬한 투쟁의 장소가 보이기도 했다. 썩 편한 장소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 속에 있는 인간관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화는 결국 파멸로만 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배려와 사랑을 위한 거짓말은 상대에겐 위선과 배신을 의미하는 것으로만 여겨졌다. 영화의 비극의 핵심이 이것이었고, 누군가의 파국으로만 가야 할 운명을 갖고 영화의 서사는 진행됐다. 영화의 고통의 배경엔 사랑과 오해와의 이율배반적인 관계가 남녀 둘 사이에 존재한다. 과거의 실수로 평생 죄의식으로만 살아가고 있는 남자(김중식)와 언니의 불행을 옆에서 본 후의 분노로 형부에 대한 불만을 간직한 여자(최은모). 이 둘은 서로간의 감정을 확인함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파멸적인 관계 속에 막혀 방황하고 만다. 그리고 배려와 오해는 함께 할 수 없기에 영화는 간단하지 않은 해결을 남길 수밖에 없는 비극을 숨기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불륜이었고 파란이었다.  


  영화는 극단적인 양자택일의 상황으로 주인공들을 몰아간다. 밝힐 것이냐 숨길 것이냐의 기로에 선 것이다. 자신의 언니가, 사실은 자신의 실수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고통과 비극을 알기에, 남자는 숨겼다. 그런 남자를 처제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가족적 관계에 묶이고 만다. 자신의 과오를 알지 못하기에 남자의 선의의 거짓말을 오해로 밖엔 해석할 수밖에 없는 여자의 입장은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고통의 시간으로 몰고 간다. 알고 싶었지만 알 수 없는 진실 속에서 남녀 둘은 서로간의 감정에 따를 수 없었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선의의 거짓말을 갖고 악의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불행의 씨앗을 만들었다. 배려가 사악함으로 보이는 상황이었다. 영화는 인간의 허약한 믿음체계와 인간관계에 대한 지독한 불신을 갖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불신에 가로막힌 사랑, 이 기묘한 관계는 주인공 둘을 파국으로 몰고 간다. 사랑하지만 용서할 수 없는 그이가 되어버린 현실 앞에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파국을 단행한다. 그녀는 남자를 사랑했지만 언니 역시 사랑했기 때문이다. 파국을 선택한 후 파주에서 방황하는 그녀의 얼굴엔 아쉬움과 슬픔들이 겹쳐진다.
  여자가 선택한 방식은 모두에게 불행만을 가져다 주었다. 죽은 언니를 위한 선택이었다지만 오해와 불신에 잉태된 것이기에 건강한 결말을 기약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철거주민들은 자신의 지도자를 잃었고, 처제는 자신을 지금까지 아껴주었던 형부를 잃었으며,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기로 몰아갔고, 사랑도 잃었다. 여자의 치기는 아니었지만 결과는 너무 뼈아팠다. 그녀는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웃을 배신했고 자신이 사랑했던 형부를 감옥에 가뒀고, 결국 버림받았다. 아무도 그녀를 원하지 않은 그곳에서 살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그곳을 떠났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그녀를 받아 줄 수 있는 곳이 사라졌기에.   

  오해의 무서움을 보여주려 한 것일까? 아님 타인을 위한 배려가 사실은 또 다른 비극의 원인임을 보여주려 한 것일까? 아니면 사랑도 결코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음을 보여주려 한 것일까? 아마도 난 마지막의 물음이 가장 적절한 질문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독한 회의론이 느껴졌다. 사랑에 의한 배려는 결코 그 어떤 것도 해결할 수 없었다. 특히 뒤엉킨 인생의 실타래 속에선 시작부터 엉켰기에 결코 다시 회복될 수 없는 사연으로만 묶이게 된 것이다. 감독의 시선에서 쓰디쓴 인생의 회의론을 읽을 수 있다. 인간의 가장 깨끗하고 아름답다던 사랑이 도리어 문제의 원인이 된다는 이 슬픈 아이러니를 보며, 영화를 통해 본 인간의 관계의 허망함과 인생의 고독한 심연은 어떻든 고달파만 보인다. 그렇게 인생은 쓰디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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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배우들 - Act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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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배우들,’ 정말 도발적인 제목이다. 은근히 이성적인 매력을 자극하는 이 제목은 사람들을 홀리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보고 난 후의 느낌은 어느 인간들의 재미있고 의미 있는 하루를 담은 영화다. 그 속엔 우리들이 알고 있는 환상과 신비감으로 가득한 환타지를 가득 담은 여배우들이 아니라 너무나 인간적인 냄새를 갖고 있는 평범한 인간들이 나오고 있다. 이 역설적인 제목을 갖고 있는 영화를 아마도 많은 관객들은 제목에 이끌려 영화관에 보러 갔겠지만, 그녀들도 평범한 인간임을 확인하며 극장에서 나왔을 것이다.
  역설의 판도라의 상자를 연 '여배우들'란 영화엔 같으면서도 다른 여배우들이 출연한다. 그리고 배우라면 갖고 있는 이중성을 이 영화를 훌훌 털어버리고 자기 이름과 자기 과거, 그리고 자기 상황을 갖고 사실과 거짓 사이를 멋지게 줄타기한다. 배우라는 거짓을 숙명으로 갖는 직업을 갖고 있는 여배우들이, 자신의 본명을 갖고, 자신이 출연했던 과거와 이미지를 바탕으로,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하고, 또 그런 것들과의 연속선을 바탕으로 영화가 진행된다. 이런 구도는 이전에 본 적이 없었던 기발한 착상이다. 그래서 진실처럼 관객에게 다가온다.  




   영화 속에 나오는 인물들, 솔직했는지는 모르겠다. 아니 어디까지 진실인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것이 그다지 중요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영화 속 대사는 그녀들이든, 아니며 다른 여배우들이든, 같은 여배우들이 다 고민하고 걱정하던 내용을 간추리고 극화시킨 것임을 관객들은 대충 알고 있을 것이다. 각종 Gossip이나 연예계 통신들은 그런 보도를 갖고 생활을 연명하고 있으며, 오늘도 어디에선가 그런 것들을 찾으려 열심히 취재하러 돌아다닐 것이다. 그래서 영화 속 어느 여배우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것을 이야기하더라도 그것은 어느 다른 여배우의 이야기일 것이고 진실보다 더욱 진실 같은 이야기로 들린다. 그리고 또 어느 부분에선 자신들의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영화 속의 이야기 중 오직 3분의 1만이 시나리오 상에 있었을 뿐, 나머지는 여배우들 스스로가 만들어야 했던 기이한 영화이다. 다큐멘터리 영화라고 해도 전혀 잘못된 구분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 속에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모든 것들이 반복됐다. 동료배우의 성공을 질시한 모습이나, 새로운 일원으로 참가한 신참이 겪는 묘한 어색함, 일 없어도 있는 척 하는 슬픈 자존심, 그리고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한 눈치 없는 지각, 그리고 위선과 시기, 그리고 다툼 등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인간관계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멋진 기타 선율에 호들갑이 잦아들고 낭만에 젖거나 조촐한 와인 파티에 자신들의 아픔과 고민이 웃고 우는 과정에서 터져 나왔다. 그 속에서 보인 인간적 고민과 연민은 자신들의 환상에서 벗어난 평범한 어느 인간들을 생각나게 했다.
  그래서 가슴이 시리다. 여섯 중 반이 이혼녀인 상황에서 마냥 행복할 것 같은 여배우가 아닌, 어느 한 시점에서의 실패를 경험한 그녀들이었다. 그리고 일자리가 없어 고민하듯 어울리기보다 어두운 곳에서 혼자 있고 싶어하는 인간도 보였다. 다른 사람이 입었던 의상을 걸쳤을 때, 몸에 맞지 않아 당황하는 여자도 있었고, 혼자 있을 때에만 솔직해지는 여배우도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웃을 것만 같던 그녀들이 말다툼한 것도 보였고, 자신의 이혼경력이란 실수로 독한 것이라는 세간의 냉혹한 한 마디에 울보가 된 여자도 있었다. 솔직해선 안 되는 그녀들이기에, 거짓이 생명인 그녀들에게, 과도하게 소비된 사실 하나로 그녀들은 순식간에 날개 잃은 천사가 되고 말았다.   




  일시적인 유행이란 의미를 지닌 ‘Vogue’란 패션잡지 화보 촬영을 위해 그녀들은 모였다. 그녀들이 바라보고 있는 세상은 그리도 그녀들에겐 차가운 곳이다. 그래도 그녀들은 와인 잔치로 그런 아픔들은 멋지게 털어버린다. 그들간에 있었던 앙금 역시 털어비리고 말이다. 그녀들은 그렇게 기다렸던 보석이 도착하지 않아 결국 찍지 못한 화보를 다음에 다시 찍자고 다짐한다. 그리고 힘들고 외롭고, 언제나 감추어야 하지만 그래도 여배우 생활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세상으로 나갈 차비를 한다. 마치 평범한 사람들이 오뚝이처럼 일어서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녀들의 생활은 힘들지만 또, 그런 생활 속에서 재미도 찾고 왠지 모를 기대를 하고 산다. 눈 때문에 오지 못한 보석을 기약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역시 기다리고 싶다. 그녀들이 다시 멋진 보석이 되어서 우리들의 환상을 선물로서 주길 말이다. 그래서인지 여배우들은 무척 매력적이었고, 영화 ‘여배우들’ 역시 매우 즐거웠고 멋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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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ek 2009-12-24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싶은 영화였는데 때를 놓쳐 땅을치고 있습니다. DVD라도 기대할 수 밖에요.

novio 2009-12-24 13:13   좋아요 0 | URL
지금 이 영화, 극장에서 하고 있을텐데요. 확인하시면 될 것입니다.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 - The Imaginarium of Doctor Parnas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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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 레저, 그는 언제까지나 영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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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게리온 : 파 - Evangelion 2.0: You Can (Not) Advanc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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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이었다.
  영화는 명성처럼 애니매이션답게 화려한 액션과 멋진 모습으로 치장된 내용물로 관객들의 시간을 즐겁게 한다. 그러나 영화의 외피를 조금 벗어나면서 만나게 되는 영화의 진면목은 또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이전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봤던 많은 사람들의 예상처럼 가볍지 않은 주제와 철학, 그리고 무거운 주장과 만나게 된다. 이런 것들이 내가 가장 보고 싶었던 내용이었던 것만 같다. 그것들을 기대했고 역시나 만족했다.
  영화 [에반게리온: 破]에서 본 현실은 부조리한 것들이 엉킨 시간이었다. 전통과 현대의 불편한 관계, 공동체주의와 개인주의의 불안한 동거, 그리고 현실과 로망 사이에서 방황하는 현대인, 그 어느 것도 만족스러운 결합을 이룬 것이 거의 없었다. 그 속에서 있는 인간들의 캐릭터들은 현실의 어느 집단을 상징하면서도 동시에 주체도 될 수 없고 그냥 그렇게 뒤엉킨 채로 살아가는 행복하지 못한 인간들 투성이였다. 그 곳에서의 행복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에반게리온’의 끝없는 문제제기이다.  

  영화 [에반게리온: 파]은 현실을 부정한다. 세상에 살고 있는 인류에 대한 지독한 불신이 영화 깊숙한 곳에 자리잡으면서 인류를 위해 뛰는 파일럿들조차 이런 그들의 임무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즉, 인류를 구할 책임의식을 갖고 에반게리온을 타지 않는다. 그들에겐 인류의 생존은 그리 중요한 대상도, 사랑할 대상도 되지 못했다. 그들은 파일럿이 됐을 때가 자신이 가장 편해서, 혹은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을 얻기 위해 억지로 탔거나 하는 우연한 기회가 돼서 탄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들이 지켜야 할 인류에 대한 애정과 사랑은 언제나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나 있었고, 영화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그들은 그냥 타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태운 소위 지도층들의 마음 속에 인류에 대한 걱정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인류의 지도층들은 비밀에 싸여서 오직 자신들만이 아는 어휘들로만 대화를 나눈다. 영화 속 캐릭터들은 물론 관객조차 소외된 채, 그들의 말은 그냥 듣게 되는 것이다. 이런 캐릭터들이 모여 있는 것이 인류가 생존하고 있는 문명이자 破의 대상이다. 
  캐릭터들 모두 상징이었다. 아버지 ‘이카리 겐도’의 모습인 부성은 현실과 사회를 상징한다면 ‘레이’로 대표되는 모성은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이자 새로운 세상을 대신할 이상향으로 제시되어 있다. 아버지와 아들 ‘신지’의 갈망이자 쉼터의 상징인 레이는 그러나 언제나 멀리 있었다. 그 누구도 가까이 할 수 없는 곳에서 미지의 대상이자 기억의 대상일 뿐 손에 쥐거나 느낄 수 없는 기묘한 대상으로 거리감만 느끼는 신비함 가득한 존재다. 이런 레이에 비해, 현재의 여성성을 의미하는 ‘아스카’는 현실적이며, 우리 주위에 있을 수 있는 매우 감각적이고 남성과 여성성 둘을 포함한 중성적 인간이다. 어쩌면 혼자만의 생존을 해야 하는 미래의 인간형일지 모르겠다. 외롭지만 외롭다는 이야기를 해선 안 되는 미래의 우리들. 아스카에겐 그런 진한 고독감과 외로움, 그래도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강인함을 가장한 그런 인간성이 느껴진다.  

  그리고, ‘신지’는 현대의 남성을 상징한다. 전통의 책임이란 굴레를 벗어나고 싶어도 그것에 얽매이고 여성에 대한 강인한 집착이 사라진, 조용히 이어폰만을 듣고 세상과의 단절을 꿈꾸는, 소심하고 고립됐으면서, 자신만의 세상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은 남성이다. 그에겐 공동체에 한 일원으로서의 책임의식을 갖지 못한다. 오직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충실할 뿐이다. 에반게리온에서 그가 강한 자극을 받았던 때는 언제나 자신이 사랑하는 누군가가 혹은 자신이 관심 있어 하는 누군가가 고통에 처해있을 때였다. 그가 살아가는 세상은 협소하기 그지 없었다. 마치 우리들의 누군가들처럼. 그가 꿈꾸는 대상은 신비롭지만 결코 다가갈 수 없는, 그리움의 대상인 레이였고 어머니와 같은 근원적인 것에만 집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만 안주해서 더 이상 밖으로 나오기를 두려워하는 어느 현대인의 모습이다.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야멸차게 이야기했던 어린애 같다는 표현은 야속하지만 그에겐 더없이 적절한 표현이다. 개인주의적이고 피터팬 신드롬에 갇혀있는 그는 어쩌면 현대인의 가장 적나라한 단면일 것이다.
  파멸, 무서운 말이다. 영화에서 보이는 세상에 대한 냉소는 영화가 진행되면서 더욱 부각된다. 현대의 모든 것들이 부정되는 것이고 그 미래 역시 부정되는 것이다. 누구의 계획 하에 진행된다 하더라도 현실을 살고 있는 대다수는 사멸해야만 한다는 주장, 그것이 이 영화의 의지이다. 영화의 대안이자 그 이상향을 의미하는 것은 바로 레이를 통해 보이는 세상이다. 레이는 영화의 주인공인 신지와 그의 아버지의 영원한 갈망의 대상으로 그려진다. 현실의 도시 문명엔 결코 얻을 수 없기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다시 시작하자는 영화의 주지가 바라보는 대상은 인간이란 생명체가 아니라 인간 속에 있는 막연해 보이기만 한 사랑과 본성이란 것이다. 마치 ‘생명파’의 시인들처럼 인체라는 한계를 극복해야만 볼 수 있는 것에 대해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도전으로만 보인다. 그리고 영화 속에 들어있는 인간에 대한 지독한 불신은 사실 허구의 이상향을 기준으로 비판하기에 인류라는 생명체는 거세되어야 하는 혁명론으로 귀착되고, 그 영화에 대한 동의를 관객에게 요구한다. 

  아버지의 모습인 부성은 현실과 사회를 상징한다면 레이로 대표되는 모성은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이자 새로운 세상으로의 대체에 대한 이상향으로 제시되어 있다. 아버지와 아들 신지의 갈망이자 쉼터의 상징인 레이는 그러나 과연 현존하는 사회일지는 불분명하다. 아니 없다. 현재의 여성성을 의미하는 아스카에겐 전혀 그런 것이 보이지 않는다. 레이를 통해 확인하고 싶고 만나고 싶은 그런 인간형은 현재 더 이상 존재하는 않은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현실을 벗어나고픈 인간의 막연한 그리움을 기반으로 만든 영화다. 그러나 영화는 그 이상을 간다.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은 사랑스런 모성애를 기반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를 위해 破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갈망하는 것을 얻기 위해 현재의 우리를 破해야 한다는 이 역설에 대해 현재의 우리는 뭔가 새로운 것을 해야 하고 새로운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는 채찍질로 들린다. 나태와 고집으로 인해 망가뜨린 우리의 주변을 보면서 인류가 생존해 온 방식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이기적이어야만 하는지를 우린 가늠할 수 없다. 우리는 진화를 하면서도 그리워하는 대상만을 더욱 키워만 간 역설적인 상황만을 만들었다. 영화의 破에 대해서 그래서, 난 동의한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자성과 자책도 없이 우린 개인적인 목적에만 집착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만 같다. 그래서 에반게리온의 무서운 경고는 낯설면서도 강한 수긍을 하게 된다. 계속 이럴 것인지 현대인은 스스로 자성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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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ek 2009-12-21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반게리온... 제게는 너무 늦게 도착한 작품이 아닌가 싶어요. 차라리 『건버스터』를 보지 않았다면, 『에반게리온』에 더 빠질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인류는 우주에게 있어서 바이러스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절멸'을 당해도 괜찮다라는 논리. '인류가 살기 위해서 태양계의 행성을 파괴시킬 권리가 있'냐는 질문.. 그런 허무주의에 취해 있어서 『에반게리온』을 볼 때는 동어반복이 아닌가 싶어서 제대로 보질 않았습니다.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왜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는지...

지금와서 다시 그 허무주의에 빠져들기엔 너무 멀리 떨어진 게 아닌가 생각도 들고... 그냥 많이 아쉽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

novio 2009-12-22 14:20   좋아요 0 | URL
'허무주의에 빠져들기엔 너무 멀리 떨어진 게 아닌가 생각도 들고...' 마음에 다가오는 표현이네요. 이유는 모르지만 어딘지 공감이 많이 갑니다 그래도 시간은 언제나 공평하고 누구나 쓰라고 있는 것 같네요. 시간 있으시면 '에반게리온' 서와 파를 한 번 다 보시는 것을 권유합니다. 분명 시간은 님의 편일 것입니다.
 
모범시민 - Law Abiding Citize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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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가 병들어 가고 있다. 사회의 기본가치인 사회구성원들의 안전을 책임지고 그들의 행복을 보장하는 사회의 책임은 점차 방기되어 가고 있다. 이런 무책임한 사회에 대한 말로는 결국 분노와 보복만이 일상화된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을 지닌 공동체일 것이다. 이런 비참한 사회의 모습은 담은 영화가 바로 [모범시민]이다.
  [모범시민]이란 영화는 반어적이게도 사회의 기본적 책무를 다하는 공무원도 없고, 타인의 생명을 인정해주는 시민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 속엔 언제부터인가 사회를 지키기 위한 사회적 노력과 행위는 사라지고 성과에만 골몰하는 직업적 공무원들만 남게 됐다. 아니 직장인만 남게 된 것이다. 이 직장인들 속엔 사회를 지키는 보루인 검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누군가의 피해에 대해 둔감하게 됐고, 사회적 정의와 소속감을 높이려는 행위보단 문제를 대충 무마하는 선에서 모든 것을 종결 짓는 냉정하고 무정한 행위만 남발하게 됐다. 어느덧 직장에서의 성공만을 추구하는 물질만능주의가 판치는 사회가 되어 있었다. 특히 그런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되는 곳조차도 그러기에 영화 속의 현실은 관객을 슬프게만 한다. 

  그래서 영화 속 주인공인 ‘클라이드 쉘튼(제라드 버틀러)’은 분노했다. 자신의 딸과 아내가 무참히 살해된 것에 대한 분노는 물론, 그런 범죄에 대해 사회적 정의를 세우려는 자들이 거의 없었던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분노가 폭발했던 것이다. 단순히 지켜달라고만 요구하지 않았다. 자신의 억울함으로 해소하고, 자신의 가족에게 불어 닥친 명백하면서도 슬픈 진실을 제대로 파헤치고 제대로 된 판결과 응징을 요구했지만 관료주의와 물질주의, 그리고 대충 끝내려고만 하는 사회적 제도의 허약함을 보고 그는 화를 내기 시작했다. 이것은 공분이었다. 한 개인에게만 해당되지 않은 관객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느낄 수 있는 공분.
  무서운 일이다. 영화 저편에 있는 현대인들의 냉정함이 무서웠고 타인의 피해와 억울함에 등돌린 현대사회의 냉정함이 무서웠다. 현대인들은 분명 나름의 이유는 있을 것이다. 먹고 살기 바쁘고, 평범하게 살아가게 된 자신들의 모습을 보라고. 현대인의 책임을 지키기엔 너무 작아져 버린 자신들에 대한 자책이 있을 수 있고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바쁘게만 살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 역시 힘들기는 마찬가지라고. 그래서 타인은 그냥 타인일 뿐이라고. ‘닉 라이스(제이미 폭스)’ 검사의 생활에서 볼 수 있는 모습들에서 관객들은 충분히 볼 수 있었고 그런 삶이 사회적 책임을 지고 있는 사회 파수꾼에게도 예외는 아님을.
  그래서 안타깝다. 책임과 책무는 사라지고 직업과 직장만 살아 숨쉬는 그런 냉혹한 구조 속에 현대인들 모두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보복을 일삼는 자에 대한 처벌은 사실 남의 이야기이며 자기가 책임지는 한에서 책임만 지면 된다는 생각이 팽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는 냉혹한 지도 모르겠다. 결국 사회는 그에 대한 가해만 했을 뿐 행복을 주지 못했고, 더욱이 행복을 주지 못했고, 마지막으로 그것을 빼앗아갔고, 그것을 다시 찾아주는데도 인색했다. 그래서 보복 당했다.
  사건이 발생한지 10년 후 가족의 죽음을 바로 눈앞에 본 자와 검사는 다시 만난다. 그러나 한 쪽은 피의자로서, 다른 한 쪽은 검사로서 말이다. 그들간에 주고 받는 대화는 단순한 거래를 담은 이야기 이상의 의미를 의미한다. 사회에 대한 조소와 냉소, 그리고 칼 같은 비판이 숨어 있다. 마지막엔 한 쪽은 결국 죽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것이 무슨 공정한 법을 집행해서도 아닌, 사적인 폭력에 의해 죽은 것이다. 영화는 한 개인의 가혹한 불행만을 담았다. 어쩌면 그런 보복에 의해 죽은 자들에 대해 당연한 처벌일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 의견에 동의한다. 그러나 원인제거에 무관심한 사회의 마지막 역시 그렇게 우아하지 못할 것임을 영화는 강력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위험에 우린 모두가 노출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우리 것에 너무 무관심할 때 우린 그런 폭력의 직접적, 간접적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무관심은 분명 죄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사회 자신이 낳은 살인마가 죽어가는 모습을 통해 대충 마무리한다. 그러나 영화가 담고 있는 주제가 얼마나 무서운 주제인지 보는 사람들은 모두 느꼈을 것이다. 자신의 분노를 그런 식으로 푼 주인공에게 그 방법이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심정적인 면에서 동조하고 있는 관객들의 모습에서 사회의 징벌제도의 순수한 목적으로의 회복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이 확인된다는 점이다. 단순히 숫자 놀음이 아닌, 대충 타협을 보고 시간을 줄이기 보다, 제도와 징벌, 그리고 개선의 순수한 목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직업적 편이에 의해 무너져선 안 되는 것 역시 무척 중요하다. 언제나 기본적인 원인이 충족되지 못하고 잊혀질 때, 모든 것은 끝나게 되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영화는 슬프게도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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