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영화다 - Rough C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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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세계 사이의 소통은 불가능한 것일까? 아마 이 영화의 시도는 매우 근본적인 차이를 두고 있는 두 세계의 기이한 접촉을 통해 양자의 소통을 시도한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고 무섭게 느껴졌다. ‘영화는 영화다’라는 매우 독특한 영화제목이 갖고 있는 힘은 관객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그 힘만큼이나 영화가 갖고 있는 주제의식은 신선했고 무거웠다. 무엇보다 다른 세계 간의 만남이 과연 좋은 결과를 내놓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제기는 인간이 살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가장 큰 관심사가 될 수 있고, 이에 대한 결과는 매우 의미심장했다. 다른 세계의 타인을 이해할 수 있고 공존할 수 있을까? 영화는 매우 어려운 문제를 갖고 관객들에게 다가왔다.
  별개의 두 세계의 남성이 그저 그런 이유로 함께 영화를 찍는다. 암흑의 세상과 화려한 연예계의 두 남자, 그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모였다. 그들의 공통점이라면 영화라는 환상 속이든, 공포를 무기로 일하는 어두운 사회 속에서 둘 다 주먹을 통해 액션을 업으로 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곳에 대한 은근한 환상이 있었고 동시에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자격지심이 존재한다. 자신과 반대되는 영역에 있고 싶어 하는 이상한 욕망, 그래서 그들은 이상한 인연으로 서로 영화를 찍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각각의 세계관 속에서 충돌한다. 

  영화 속에 또 다른 영화 찍기. 마치 피카레스크식 구성을 갖고 있는 이 영화는 두 세계의 남자가 현실 속에서나, 환상의 영화 속에서나 역시 경쟁하고 결투한다. 현실에서도 부딪히고 영화 속에서도 싸우는 이 황당한 구성을 갖고 있지만 그러나 왠지 모르게 이질감을 느끼지 못한다. 또한 영화에 출연하면서도 그들은 각자의 현실 생활을 하고 있으며, 고달파하고 힘들어하고 애처롭기도 하다. 영화 속이나 현실이란 영화의 밖이나 두 곳 다 불편해 보였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삶의 영역은 지구 위에선 다 같은가 보다.
  그런데 시작이 달랐고 세계가 달랐던 그들이 닮아간다. 그리고 상대 세계에 대한 묘한 환상, 혹은 기대감을 갖고 있다. 부적절한 사실을 기반으로 한 Fantasy 세상, 그것은 어쩌면 부질없는 동경이었을 것이다. 자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살고 싶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이 이 영화에선 가능했고 그것이 바로 영화의 매력을 이끈 힘이었다. 그로 인해, 각자 다른 세계로부터 왔지만 어느 순간 그들은 상대를 동경하면 비슷해져 간다. 영화 속에 보이는 곳은 암흑의 세계, 아니 깡패의 세계이다. 지금까지 그 곳을 배경으로 찍었지만 그들은 분명 다른 곳에서 왔지만 현실과 영화의 이분법은 어느 순간 무너지고 폭력이란 동질감을 통해 그들은 서로 닮아간다.
  인생을 직접 체험하면서 배역을 담당한 배우들은 극히 드물다. 그러기에 극장 상영을 위해 만든 액션영화는 가보지 못한 것에 대한 환상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주 배경으로 사용되곤 한다. 그런데 암흑의 세계의 중간보스가 영화라는 공간에 대한 묘한 기대와 여운을 갖고 있기에 과감히 자신의 직분을 어기면서까지 그곳에서의 인간으로 살고 싶어 한다. 변하고 싶은 욕망은 다른 세계 출신의 인물들 역시 공유하고 있었으며, 서로를 닮고 싶은 욕망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의 행동변화를 일으키고 그것이 결국 그들을 힘들게 한다. 두 세계의 이질감 극복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었고, 그런 차이만을 확인하면서 방황하게 되고 마침내 자신의 세계에서조차 방황하고 만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의 세계에서도 실패하고 만다.
  ‘영화는 영화다’에서 보인 다른 세상에 대한 Fantasy가 여지없이 깨진다. 익숙하지 않았기에 동경했을지 모를 다른 세상은 언제나 동경만으로 이루어졌기에 언제나 그곳으로 다가가면 갈수록 부적응은 물론 실패를 동반한다. 마치 바다에 대한 공포를 모른 채 뛰어들어간 나비처럼, 여행을 동경하면서도 여행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초보 여행가가 겪는 고통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고통이 심해지면서 겪는 패배감을 결코 피할 수 없었다. 이 영화엔 그런 고민과 불안, 그리고 파괴가 서정적으로 형상화된다. 그래서였을까? 마지막의 비극 장면은 더욱 잔인할 만큼 비극적이었다. 

  그 자체가 환상적인 세상이긴 하지만 그러나 가능하면 현실이란 것에 기반을 두면서 현실을 상당부분 담으려 노력한다. 사랑하면서 깨지고, 그러면서 갈등하는 그들의 모습은 현실성의 비극성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비현실적인 영화 속에 살면서 도리어 그것이 현실인양 거만한 액션배우의 모습은 깡패의 눈엔 세상의 어느 철부지와 다르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잠깐 담갔던 그 세계에 대한 동경은 거친 세계에 대한 그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고, 잠시나마 이상향 속에서 그의 비극적인 인생의 뜨거움을 식히고자 했고, 어느 순간 거친 면보다 따뜻함을 지닌 인간으로 변하게 됐다. 그러나 그 점이 그에겐 자신이 살고 있는 거친 사회엔 부적절할 뿐이고, 또한 그를 위기로 몰아 넣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속해있는 세계에서의 반대파에게 당하고 만다.
  영화를 다 끝낸 후, 그의 상대역이었던 깡패의 마지막 행동을 보면서 그는 현실과 영화의 구분을 어쩌면 처음 하게 됐을 것이다. 그 거친 모습 속에서 어쩌면 그는 영화의 비현실성을 적나라하게 느낄 만큼 공포를 느꼈을 것이고, 그가 격하게 두들겨 맞으면서 느꼈던 깡패의 무서움을 또 한 번 느꼈을 것이다. 정말 목숨을 걸고 싸우는 세계를 그냥 베낀 영화는 과연 현실과 너무 차이가 났고 날것에 대한 공포를 처음 느꼈을 것이다. 정말 영화는 영화일 뿐이었다. 

  두 세계의 가치관과 행동양식은 결코 화합할 수 없나 보다. 어쩌면 거짓된 매력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있는 영화, 그 자체의 모순이 가장 큰 문제인지 모르겠다. 영화는 언제나 다른 세계의 사람들을 관객으로 초청해서,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묘한 기대감을 충족시키지만, 그 기대감 속에 감추어진 현실이란 이야기, 그리고 영화의 반대편에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이란 냉혹성을 자주 잊게 만드는 야멸찬 속성을 지녔다. 이 때문에 현실적인 곳에서 영화처럼 행동할 경우의 위험성에 대해선 경고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환상에 젖은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은 위험하기 그지 없다. 여기에 각자 다른 세계에 사는 인간들의 방식은 서로 너무 달라서 영화의 허구성을 폭로함은 물론 자기 세계의 살아가는 방식을 다른 세계에 함부로 적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적용일 뿐일지 모른다. 그런 위험성에 상시로 노출되어 버린 현대사회는 그래서 너무 위험하고 무섭다. 영화의 마지막의 공포스런 이분법적 구성은 그래서 오래 기억에 남나 보다. 정말 영화는 영화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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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0-05-13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파라이징의 결과를 누구나 좋다고 할 순 없죠

novio 2010-05-14 00:59   좋아요 0 | URL
그렇겠네요. 이질적인 두 세계의 만남이 언제나 좋은 시너지 효과를 낼 수는 없겠죠.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네요, 이 영화는...

stella.K 2010-05-14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참 괜찮은 영화죠? 저도 인상 깊게 봤습니다.
특히 소지섭의 포스 장난 아니던데요?^^

novio 2010-05-14 19:51   좋아요 0 | URL
소지섭의 재기작이자 강지환의 첫영화였죠. 둘 다 기대이상을 해줬습니다. 저예산영화였지만 매우 고급스런 수준작이 됐죠. 돈이 명품의 조건이 아님을 보여준 멋진 영화입니다.
 
허트 로커 - The Hurt Loc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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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개의 세계가 지구에 공존한다. 월급을 받고 하루의 생활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회와 목숨을 걸고 전에 보지도 못한 상대를 향해 총을 겨누고 폭탄을 장치하는 전쟁터가 그것들이다. 두 곳 다 생존을 위해 살아야 하는 장소인 것은 분명하지만 살아가는 방식은 너무 다르고, 그것 때문에 두 곳은 구분된다. 그래서일까, 다른 사회에 있는 구성원들은 상대를 이해하기 힘들고 또한 다른 곳으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옮겨와도 결코 적응하기 힘들게 된다. 그렇게 이 두 사회는 공존하지만 외면한다.
  [The Hurt Locker]가 담고 있는 전쟁터의 세계는 평범한 삶을 지속하고 있는 관객들에겐 낯설기만 하다. 죽음이란 위험이 산재해 있음에도 그곳에서 살고 있는 몇몇 군인은 매우 일상적으로 목숨을 걸고 임무를 수행한다. 그런 내용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폭발물 제거반 EOD가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다.  
  너무 평범해 보였다. 모든 마을이나 도시를 다 파괴하고도 남을 것만 같은 폭탄 앞에서 윌리엄 제임스 중사(제레미 레너)는 다리 보수공사하는 사람처럼 태연히 일을 처리하는 것만 같다. 폭발에 대비하기 위해 독특한 무장을 한 채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지만 폭탄의 험한 폭발 앞에서 과연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할 정도로 위험한 일을 수행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그가 입고 있는 장비와 옷으로는 결코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위험한 일을 수행하는 그의 얼굴과 모습은 단순한 작업을 하고 있는 일꾼 정도로만 보인다. 그의 얼굴만 본다면 전쟁터엔 어떤 위기와 위험도 있을 것만 같지 않다. 평범한 사회의 구성원이 보기엔 그럴 것이다.
  제임스 중사는 그렇게 전쟁에 익숙해 져버린 군인이다. 무려 873개의 폭탄을 제거한 그는 분명 전쟁터에서의 영웅이고 뛰어난 군인 베테랑이겠지만 돌려 말한다면 위험에 너무 익숙해져 버려서 결코 위험에 대한 현실감을 상실한, 위험과 고통이 너무 커서 차라리 망각해 버린 비현실적인 인간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런 그와 함께 임무를 수행하는 JT 샌본 하사(안소니 마키)와 오웬 엘드리지 상병(브라이언 개러티)은 그나마 평범해서였는지 언제나 위험을 느끼고 불안해 한다. 마치 영화를 보는 평범한 세계의 관객들처럼 말이다. 같은 전쟁터란 장소에서도 다른 인간들이 존재하겠지만 영화 속에서 종종 보이는 베테랑들의 모습에선 전쟁의 위험과 고통, 그리고 심지어 잔혹함조차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 속의 그들은 그렇게 변해가는 것이다.
  그런 곳에서 살지만 그들이 최소한의 인간미를 상실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인간미조차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이 전쟁터에선 마련되지 않는다. 죽음 앞에서 슬프지만 다시 총을 들어야만 하는 무서운 세상 속에서 그들은 어느 순간 내동댕이쳐졌고 그것이 그들의 인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전쟁터란 세계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군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그런 따뜻한 마음은 자연스레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미를 느끼지 않고 사는 것이 편하게 된다. 폭탄 제거란 임무에 진력하는 제임스 중사와 충돌하는, 38일만 참아서 본국으로 귀환하는 것을 꿈꾸는 샌본 하사의 소원은 결국 38일간만 비인간이 된다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그런 그들이 돌아간 그들의 원래의 고향이자 마음의 고향인 평범한 세계는, 그러나 그들에겐 이상향이 되고 말았다. 귀한 가족이 살기에 갔지만 그들에게 가족이 살고 있는 그곳은 어느 순간부터 평범하지 않은, 전혀 다른 곳처럼 느껴졌다. 더 이상 그곳에서 편하기 힘들다는 것은 매우 불행했고 평범한 세상에서 적응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그렇게 그들은 변해 버렸고 돌아올 수 없었다.
  불행해 보였다. 오직 한 세계에만 익숙해져 버린 우울한 군인의 모습은 분열되면서도 조화되기 힘든 두 개의 세계의 결코 동화될 수 없는 모습을 확인해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한 인간의 파멸을 보는 것만 같았다. 어느 순간 그에겐 위험이 닥칠 것만 같은 위험은 그러나 애써 무시된 채 그 주변에 엄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우울한 군인은 그것을 피할 수도 없었고 비킬 수도 없었다. 그런 위험이 아니면 결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없기 때문이다. 그건 소외다. 도움을 청하는 것조차도 허락되지 않는 그들은, 위험한 곳에서 구원받을 수 없는 그는 전쟁의 또 다른 피해자일 것이다. 죽은 자들만이 아닌 죽인 자들, 그리고 언제나 위험한 것에 익숙해져 버려서 더 이상 위험에 무감각한 그들은 분명 우리들의 또 다른 비극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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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즈의 문제 - A Matter of Si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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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영화는 아마도 처음인 것 같다. 영화를 보기 전, 이 영화가 미국 영화인 줄로만 알았는데 독특한 언어가 나왔고 어딘지 모를 중동적인 기후가 보였던 것 같다. 중동언어와 같은 느낌, 그리고 독특한 야자수와 어딘지 모를 독특한 풍광, 이 영화는 그런 이색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정말 이색적인 것은 뚱뚱하다는 편견에 도전하는 방법이다. 역시나 희한한 방식으로의 대응이었고 그 속에 담긴 소수자, 혹은 Loser의 반란이 보였다.
  비만, 현대란 사회에서 소외가 되는 여러 이유 중 상당한 크기를 차지한다. 단순히 옷 사이즈가 다른 사람들에 견줄 때, 매우 크다는 점만이 문제가 아니다. 성적 매력을 통해 타인에게 인정을 받는 현대 사회에 있어 과도한 비만은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주기 보다 비호감을 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인간적 매력이나 다른 차원에서의 능력은 무시된 채, 사회적 소외감을 느끼게 되며, 결국 Loser가 된다.  

  남과 다르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차라리 어딘지 모를 신비감과 매력을 풍길 수도 있기에 개성적인 표현 등을 통해 장려되곤 한다. 그러나 수준미달인 경우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특히 외관을 통한 매력으로 상대의 관심을 끄는 것이 대세인 요즘, 열악한 외관은 사회적 냉대를 받게 되며, 일종의 사회적 폭력을 받기도 한다. 그 누구도 보기 싫어하고 같이 있기 싫어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 사회적 폭력은 단지 보기 싫단 이유만으로도 기피 대상이 되는 것이다. 부당하다고 이야기하고 싶겠지만, 인간의 감정과 심리가 인간의 합리성을 압도하면서 발생하는 자연발생적인 것이기에, 상대의 마음을 돌이키긴 힘들다. 그렇게 무시당하는 것이다.
  [사이즈의 크기], 좀 희한한 제목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수긍하게 만드는 강점들이 수두룩하다. 영화를 만든 곳이 이스라엘이란 이국적인 장소인데 줄거리 자체도 매우 독특하다. 뚱뚱하다는 이유로 식당에서 쫓겨나고, 다양한 차별을 경험하는 것은 확실히 평범하게 벌어지는 사회적 차별이다. 그런데 뚱뚱한 주인공들이 선택한 것은 다이어트를 통해 평범한 기준에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더욱 살찌려는 역주행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역주행을 선택한 방법도 역시 기이하고 이국적이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볼 때, 이국적인 일본의 전통 스포츠인 스모를 선택한 것이다.
  스모, 더욱 몸이 클수록 강하기에 살을 더욱 찌울 필요가 있는 경기다. 평범하면 안 되는 경기인 스모를 통해 주인공들을 그것을 통해 맘껏 살찌울 수 있는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고 그것을 즐기게 된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이국적인 문화를 지닌 나라의 경기인 스모를 통해 그들은 세상과의 새로운 소통을 시작한다. 비만이기에 당당한,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면서 그곳에서 평범한 사람들과 즐거운 만남을 갖고, 그곳에서 그들과 소통하면서 자신들의 매력을 발산하는 것이다. 

  평범한 곳이라면 우스운 스모 복장으로 그들은 거의 반나체로 거리를 활보한다. 스모를 하기엔 스모 복장을 입는 것을 부끄러워해선 안 된다는 그들의 스승의 지도에 따라 점점 그들은 그런 모습에 익숙해지고, 동시에 많은 진통이 있었고 고통이 있었지만, 살찐 그들의 모습을 점차 긍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런 모습을 역시 그들 주변이 점점 받아들이고 긍정하기 시작한다. 어느새 그들은 더욱 살찐 모습으로 평범만을 쫓은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수준 미달이라서 평범한 사람들이 누리는 기본적인 행복이 박탈된다는 것은 분명 불행이다. 세상의 편견으로 인한 권리의 침해는 그러나 어느덧 거부할 수 없는 대세가 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우리들 생활이다. 더구나 수준 미달과의 만남은 물론 소통조차도 거부하는 현실의 비극은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을 아프게 했고, 그래서 영화의 멋진 반전은 고맙기조차 했다. 과연 현실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든 된다. 그러나 변해야 하는 것은, 평범하기를 갈망하면서 자신의 행복을 남들에 의해서는 물론, 스스로 파괴하기까지 하는 수준미달, 즉 Loser들이라기보다, 그들과 더불어 살기를 거부하려고만 하는 평범한 일반인들이다. 당연하고 진부한 이야기지만 언제나 지켜지지 않는 외모지상주의의 폐단은 이 영화 서사의 기본 뼈대다. 머나먼 곳으로부터 온 이 영화는 이야기를 즐거우면서도 감동적으로 풀어냈으면서도 무척 뼈아픈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세상은 이 영화의 꿈처럼 바뀔 수 있을지 모르겠다. 평범한 사람들이 조그만 노력만으로도 쉽게 얻을 수 있는 행복을 Loser들은 영화처럼 타국의 스포츠인 스모를 배워서라도 자신들의 행복을 찾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일반인들이 자신들의 타성을 질타해야 한다는 진부한 사실을 느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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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0-05-08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어디서 보셨나요?
재밌을 것 같네요.^^

novio 2010-05-08 23:07   좋아요 0 | URL
매우 재미있습니다. 이 영화를 전 시사회로 봤습니다. 지금은 좀 인기가 적어서인지 거의 내렸고 부산 국도&가람 예술관에서 5월 15일부터 하네요. 좀 장소가....
 
집 나온 남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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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하늘이 보였다. 한국에도 미국에나 나올 법한 광활한 하늘이 있다는 것을 이 영화를 통해 안 순간이다. 그런 화면 속에서 느낄 수 있는 낭만성, 무척 좋았다. 어쩌면 촬영기법의 발전을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그를 통해 조성된 낭만적인 분위기는 긴장감으로 가득한 영화의 서사와 대비를 이루었다. 긴박하고 격렬한 서사와의 기묘한 대조, 영화는 매우 신선해 보였다. 각박한 현실을 잊을 수 있는 영화, 본연의 기능이 산 것만 같았다. 그러나 영화의 갈등은 역시나 존재했다.
  현대인의 낭만 중 점차 가장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바로 이해 받는 삶이다. 도시 생활로 인해 각자의 생활을 인정받는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를 얻은 것은 물론 장점은 있다. 그러나 서로의 삶에서 접촉과 만남이 점차 소원해지는 요즘, 이해 받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으며,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단으로 애용되는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이제 대리만족으로만 느낄 수 있는 그 감정은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개연성을 중시하는 순간부터 심지어 영화에서조차 사라지고 있다. 사회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서사 예술들의 한계일지 모르겠다.
  이해 받기를 원하는 아내, 그녀는 그것이 충족되지 못하자 떠났다. 그러나 남편 역시 떠나려 했다. 라디오 방송 중 아주 크게 이혼하겠다는 선언을 한 방송인 ‘지성희(지진희)’는 그렇게 아내를 이해할 마음을 끝냈다. 그러나 그가 알게 된 현실은 아내가 자신을 먼저 찼다는 현실이었다. 버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누가 먼저 했는가 하는 문제를 매우 중시한 ‘지성희’는 자신이 싫다는 아내를 찾고자 여행을 떠나게 된다. 거기에 동참한 남자는 그의 후배이자 아내의 과거 애인이었던 ‘황동민(양익준)’이었다. 이 기이한 관계를 갖고 있는 남자 둘이 여자 하나를 찾아가는 이 영화는 Road Movie가 된다. 무척 오랜만에 본다.
  이해 부족, 현대사회가 언제나 아파하는 이유다. 관계의 과다로 인해, 그리고 바쁜 사회생활로 인해, 도시인은 자신의 옆에 있는 가족이나 사람들에게 신경을 쓰기조차 힘들다. 도시화로 인해 받은 피해자들이면서도, 결국 도시에 살 수밖에 없는 그들, 그렇게 도시인들은 불행하게 살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자신이 그렇게 사는 줄도 모르면서, 아니 외면하면서 살고 있는 그런 사람들, 영화엔 그런 인물들이 주인공이자 조연들이다.   

  도망갔기에 잡으러 다니게 된 남편은 그의 추적 과정에서 아내에 대해 몰랐던 점들을 하나 둘씩 자각하게 된다. 과연 부부였는지조차 의심하는 상황까지 몰리게 된 남편, 그것은 도시인들의 일반적인 특성이기도 하다. 아내의 고민, 아내의 과거, 그리고 아내의 가족 등 전혀 예상 못한 내용들에 당황해 하고 그리고 미안해 한다. 그는 그녀를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그런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었다. 믿지 못했지만 믿지 못하게 만든 그런 관계, 어느 부부에겐 그렇게 지독한 불신과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모르는 것이 죄인 것. 영화는 사건의 원인으로 지적한 것이다. 그래서였던 것 같다. 그녀의 과거 하나하나를 알게 되면서 느끼는 자괴감과 함께 밀려드는 미안함은 영화의 후반부를 만들어간다. 그리고 도망한 아내에 대한 용서는 필연적인 결론이 된다.
  보통의 현대의 도시인들처럼 부부, 혹은 가족이란 묶음이 단순한 인간관계의 하나일 뿐 귀하지도 않게 된 그런 사회에서 살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말뿐인 관계 속에서 혼자만의 비밀과 사연, 그리고 인간관계로 살아가게 되는 것만 같다. 물리적으로 공간을 함께 한다고 해도, 결국 타인들끼리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현대인들, 영화 속에서 가득한 세상의 모습이었다.
  부부, 이젠 민법상으로만 친한 관계일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부부라는 관계에만 한정되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주인공 집안에 도둑이 들어 10억 이상의 금액이 털렸다는 이야기에도 집에 가지 않은 모습은 부부든 혹은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서든 그냥 알고 있는 관계와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함께 산다 해도 도리어 미지의 인물로만 느껴지는 모습이 영화 속에서 보일 때, 현대인들의 살아가는 비극을 보는 것만 같아서 슬펐다. 영화는 뛰어난 연기로 빚어진 즐거운 코미디 구성을 띠면서도 그 뒤에 숨겨진 도시인들의 애환이 느껴졌다.   

  하지만 영화는 만족만을 주진 못했던 것 같다. 주제를 위해 만든 시나리오라 한 쪽의 이야기를 긍정적으로 보면서 썼다는 점에서, 예술의 일방적 시선은 통상적으로 인정한다. 예술의 자유로운 선택방법과 그 내용은 어느 사회나 다 인정하고 또 인정받는 것이 다양한 측면에서 좋다고 인정한다. 다만 영화의 앵글을 아내에 집중했다면 아내 역시 문제 많긴 마찬가지다. 남편이 안 아내의 비밀은 근본적으로 아내이기에 남편에게 이야기해야만 했던 사실들이다. 아내는 자신의 문제를 남편이 알 수 있도록 노력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영화를 보는 내내 갖게 됐다. 부부가 관계라고 본다면 사실을 숨긴 것은 거짓일 뿐이며, 결국 아내는 남편을 결혼 전부터 버린 것이다. 이미 그 관계는 불건전했고 파탄이었다. 어떤 점에선 아내의 행동은 자신의 세계에서 나오려 하지 않는 사회의 부적응자로 보일 수 있다. 즉, 나을 것이 하나도 없는 아내의 입장을 미리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점은 어쩌면 과도한 의미 해석과 과도한 인식의 단정이 있었을 수도 있다.
  또한 무리한 요구, 그녀의 행동 역시 영화 속의 사건의 빌미를 제공했다. 즉, 그녀 역시 누군가에게 자신의 자유를 위해 희생시킨 그다지 좋아 보이진 않아 보였다. 어쩌면 이런 면은 현실과 반대인 이상향으로 묘사하고 싶었던 감독의 의중이 강하게 표현되지 않았나 생각도 든다. 어느 것 하나 이해 받지 못한 상황이다 보니 그것이 극도로 인정된 세상으로 가고 싶다는 욕구를 들어주면서도 동시에 상대에 대한 고통을 주는 상황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영화의 구성은 분명 비판의 소지도 있어 보인다. 어쩌면 상대의 입장이나 배려는 없어 보였고, 자신만의 시각에서 모든 면을 해석하려 했고, 그래서 수긍할 수 있는 일처리를 결코 수긍하기 힘든 묘한 구석을 몰고 갔다. 아마도 독특한 스토리를 만들려는 의도에서 그랬던 것 같다. 이런 점이 부각됐다면 영화는 더욱 강한 주제의식을 담았을 것이고 좀 더 설득력이 강하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래도 영화는 신선했다. 넓은 대평원에나 있을 법한 풍광이 한국의 풍경을 배경으로도 볼 수 있었다는 점은 물론 신선한 구성과 내용은 무척 즐거운 것들이다. 엉망이고 뒤죽박죽인 영화 속에서 독특하면서도 쉽게 만나보기 힘든 캐릭터들이 자신만의 세계관을 갖고도 다른 타인들과 잘 조화를 이루었다. 자신들의 피치 못할 사연의 개연성은 부족했지만 그런 약점들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지진희, 양익준, 이문식 등의 뛰어난 연기자들의 공일 것이다. 영화는 아마도 만점을 받기 힘든 구석들을 갖고 있지만, 이하 감독의 다른 작품은 기대할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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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 A Prophet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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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묘한 신데렐라 이야기였다. 이민족이 살 수 있는 비법 전수라는 느낌도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라도 살아야 하는 그들의 우아하지 못한 생활을 보면서 낯선 풍경 속에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치는 그들이 보였다.
  영화의 매력은 방법이야 어떻든 생존해야만 하는 이민족의 세속적인 동화를 보여준다. 어릴 때 버림받고 이런저런 사연으로 감옥까지 오게 된 어느 이민족 고아 출신의 성공담을 담고 있다. 그러나 썩 유쾌한 성공담이 아니었다. 영화에서의 성공이란 마약과 대마초를 잘 팔 수 있어서, 그리고 집단 깡패 사이에서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통해서 얻은 것들이다. 소위 교과서를 통해 들려주거나 할 수 있는 그런 성공담이 아니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런 과정 속에서 볼 수 있는 사회적 냉대, 핍박, 이민족의 서러움 등 다문화 국가에서 볼 수 있는 비극들이 이 한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 있단 점이다. 그것도 문명 선진국으로서 자리매김했다는 프랑스가 그 배경이었다. 어느덧 많은 나라에서 즐겨 인용되는 그런 국가에서 벌어진 일이라 여간 당혹스런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르와르 아닐까 생각이 든다. 허상을 기반으로 이론을 만든 셈이었다.
  주인공의 비극은 너무 가련한 모습에서 시작했다. 자신과 같은 이민족을 죽이라는 코카사스 백인계의 핍박에 어떤 식으로도 대응할 수 없는 무력한 아랍계 소년이 보였다. 말리크 엘 제비나, 그는 결국 그렇게 길들여졌고 노예보단 조금 나은 생활이 보장됐다. 그러나 그는 어느새 자신의 출신지인 아랍계에도 갈 수 없었고, 코카사스계에도 동화될 수 없는, 교도소에서의 이방인이 되고 말았다. 다행히랄까? 그런 그에게 형처럼 좋게 지낸 아랍계 동료도 있었고, 또한 자신의 허상 속에 존재하는, 자신이 죽인 영혼이 그의 옆에 있었다.
  자신이 죽인 자의 영혼은 언제나 그의 옆에 있어 주었다. 어떤 설정일지 모르지만 그의 죄의식의 저편 속에 흐르는 미안함으로 인해 만든 허상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허상은 그의 현실을 옭매는 과거의 흔적이며, 그가 떨치고 싶은 죄의식이었을 것만 같다. 그러면서 그는 성장한다. 6년이란 옥살이가 그의 앞에 놓여지면서 그 기간 동안 그는 점차 어른으로 성장했고, 또한 아랍계로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는 시간이었다. 최악의 장소인 교도소에서 그는 생존을 위한 모든 것을 배우게 된 것이다. 비록 잔인하지만 말이다. 그 교도소, 어쩌면 프랑스의 다민족 사회를 축소한 듯 하다. 그 속에서 벌어지는 참혹하고 기만적인 일상은 세상에 버림받은 아랍계 이민족을 더욱 몰아세울 뿐이었다. 그런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프랑스 백인들 역시 그들과 살아가는 방법을 모르긴 마찬가지이기에, 언제나 폭력이 난무했고 함부로 무시했고, 그리고 그들 역시 어느덧 무시당하고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공존의 지혜를 못 배운 결과는 매우 무서운 것이다. 

  감옥이란 최악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 주인공은 살아갈 날을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는 마약을 파는 루트와 판로를 개척했고, 자신의 힘이 되어줄 동료들도 만들었다. 그는 코카사스와 아랍계의 위험한 관계 한 가운데서 기막힌 줄타기로 그 모든 것을 손에 넣었다. 보는 내내 위험한 그의 곡예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신데렐라가 됐다. 멋진 복수도 했다. 그리고 우아한 모습으로 세상으로 다시 살아 나왔다.
  그러나 슬프다. 그가 알아낸 생존방식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얻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언제나 범죄 가까이에 머물 뿐이었다. 언젠가 그 역시 누간가의 표적이 될 수 있는 환경에서 과연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 그는 그런 곳에서 벗어나려는 조그만 의지라도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 방식이야말로 핍박 받고, 멸시 당하는 소수민족의 생존방식 아니겠는가? 그들은 그들의 피부와 그들의 언어로 인해 그들은 언제나 사회에선 타인이고 이용당하고, 그리고 필요 없으면 내쫓겨야 할 운명들이고 또한 그렇게 취급될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생존방식은 어떤 식으로든 육체 노동 아니면 범죄와 관련된 사업이다. 그것을 포기하라고 하기엔 그들이 처한 여건이 너무 험하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당하게 하지 말라고 요구할 수 없는 사회적 딜레마, 그것이 이 영화에서 아련하게 보인다.
  뛰어난 르와르 영화다. 프랑스의 솔직한 단면을 범죄와 관련된 동화를 보여주면서 역설적으로 다민족 사회의 씁쓸한 단면을 보여줬다. 그래서 이 영화에 많은 상들이 갔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본 관객 역시 영화의 아름답지 않은, 솔직한 단면에 수긍할 것이며, 자신들의 사회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 부정하기엔 사회의 부정적인 과거가 너무 많이 쌓였다. 헝클어진 실을 풀 듯, 하나하나 풀어야 할 숙제들이 많은 사회가 된 오늘, 이 영화는 그래서 무거운 느낌을 던져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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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0-04-01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이 영화 꼭 보려고 하는 영화인데 요새 볼 수 있는 마음이 영 잡히지 않고
헤매고 있네요. 조만간 봐야겠어요.

novio 2010-04-01 10:46   좋아요 0 | URL
저도 최근 가족에 일이 있어 마음에 잡히지 않아 영화도 잘 못보고 있답니다. 힘 내시고 좋은 영화들은 꼭 챙겨 보시기 바랍니다

2010-04-07 1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07 1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