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서 같은 책...

바람의 화원 1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7년 8월

나는 김홍도와 신윤복을 알고 있다. 조선후기 풍속화의 거장. 김홍도가 고단한 민초들의 삶을 다루었다면 신윤복은 양반과 여인네들의 그림을 그려 당시의 시대상을 한 장의 그림으로 보여준 사람들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리라 생각한다.

이 책은 출간될 무렵에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땐 ‘우리나라 소설이 별거 있겠어...’ 라는 아주 편협한 생각에 빠져 있어서 그저 그런 소설이겠거니 하고 넘겼었다. 드라마와 영화제작에 대한 호기심에 읽어보게 된 이 책은 그 당시 내가 했던 생각들을 순식간에 잊혀지게 만들었다.

보통 기대를 하고 보는 책들은 실망하기 마련인데, 이 책은 실망보다는 오히려 기대이상으로 재미와 감동을 느꼈다. 책이 전반적으로 묘하게 단정하다. 붉은 표지는 자유롭고 강렬해 보이나 겉에 둘러진 검은 테두리가 날아갈 것 같은 이야기를 종이 안에 단정하게 담아두는 듯한 기분이다. 문체가 화려하진 않지만 수묵화처럼 단아하고, 수묵채색화처럼 생기있다. 자극적인 소재나 어투는 아니지만 흡입력이 강해 어느새 책에 빠져들고 있는 나를 본다. 제목은 그대로 바람처럼 자유로워 보이나 그 내용은 자유로운 듯 하면서도 어떤 틀에 잡혀있는 듯 하다. 무게감 있는 김홍도와 자유로운 신윤복의 이야기가 어우러진 것처럼...

양괄식의 책의 구성도 책의 제목을 돋보이게 하는 장치다. 노년의 김홍도가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전개되는데,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수수께기가 풀린 후, 마지막은 다시 몇십년의 시간을 몇 줄의 설명으로 건너뛰어 노년의 김홍도가 젊은 시절 벼락같았던 신윤복의 파격적이고 바람같은 행적을 그리고 있다.

또한 글의 흐름에 맞게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을 번갈아 배치해 자연스레 그림을 설명하고 이해를 돕게 한다. 그림에 대한 해석이 이야기의 흐름 속에 녹아있어 그림에 대한 이해나 감상이 훨씬 더 편하다. 글을 그림에 맞춘 것인지 그림에 글을 맞춘 것인지...... 덕분에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풍속화의 진정한 묘미를 알게 되어 기쁘다. 어떤 미술서보다 흥미있고 알기 쉬운 해설서라고 해도 좋을 듯 하다. 무심코 지나쳤던 우리 그림들을 되돌아볼수 있는 계기가 되어 더 맘에 든다.

책의 내용은 아마 다들 알리라 생각한다. 신윤복이 여자였다는 설정이 확실히 파격적이긴 하나 나는 그 보다는 다른 점에서 이 책의 가치를 찾고 싶다.

학교시험의 단골메뉴이나 언제나 나오는 내용은 고정적이기에 누구나 암기하고 있는 그런 내용이 아닌 조선후기 두 천재들의 삶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하던 도화서의 생활에 대해서, 화원들의 생애에 대해서 알수 있었다는 점에서 역사를 배웠던 사람으로서 작가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 한 시대를 살았던 두 천재들의 고뇌도, 그러면서도 서로를 성장판으로 삼았던 열정도, 시대를 깨뜨리는 그림에 목숨을 걸었던 용기도.... 그림과 함께 책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시대를 앞서간 불운의 군주라는 평을 받았던 정조의 또 다른 일면을 볼수 있어 흐뭇했던 책이기도 하다. 정조라는 군주가 없었다면 신윤복과 김홍도라는 희대의 천재는 그 빛을 보지 못했을까... 하늘이 내린 천재라 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이라면 미치광이가 될 뿐일테니.... 우리가 무슨 복이 있어 조선 후기 세명의 천재를 두었으나, 인습에 사로잡혀 그 천재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했던가. 시대를 살짝 앞서간 사람은 선구자로 칭송받는 경우가 많으나, 시대를 너무 앞서간 사람은 미치광이로 따돌림당하는 경우가 많다. 신윤복의 그림을 보면서도 종이 위의 그림으로만 봤었는데... 책을 읽고난 후 곰곰이 생각해보니 당시 신윤복에 대한 작가의 의견이 절절히 와닿는다.

소설이긴 하나 김홍도와 신윤복의 보지 못한 그림들로 눈이 호강했으며, 도화서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되어 머리가 풍족해졌고, 그간 자극적인 글에 빠져있던 감성이 순화되어 여유로워졌다.

역사의 작은 한 부분을 도려내어 생동감 있게 묘사하기란 어렵다.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면 더더구나 힘들다. 작가의 상상력의 승리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사실과 상상력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어떤 위화감도 갖지 못하게 한다.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도 경계해야할 부분이다. 조심할 것. 사실 속에 교묘히 숨어있는 허구를... 작가도 책 머리에 언급하고 있지만 책의 강렬함에 빠지면 분명 기억이 안날테니....

과연 이 책을 드라마와 영화가 어떤 식으로 소화해 낼지 기대가 되면서도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