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감한 동물 호시 신이치의 플라시보 시리즈 33
호시 신이치 지음, 윤성규 옮김 / 지식여행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민감한 동물>은 현재까지 출간된 플라시보 시리즈의 마지막 권이다. 이후 작품의 출간여부가 미정이라 하니, 어쩌면 말그대로 '플라시보 시리즈의 마지막 권'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런 상징성에 걸맞게 <민감한 동물>엔 빼어난 작품이 많다. 장편으로 선보였으면 했던 놀라운 스토리의 작품, 유명한 이야기를 차용한 작품, 한편의 시 같은 작품 등. 시리즈의 피날레는 역시 화려하고 풍성했다.

[세월]부터 이야기 하고 싶다. 이 작품은 소설이 아니다. 에세이, 혹은 장시라고 할 수 있다. 분량은 한 페이지가 채 되지 않지만, 잔잔한 여운과 묵직한 울림은 대단했다. 삶을 돌아보며 회한에 잠긴 인생 선배의 이야기라 할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그리 길지 않으니 작품 전체를 소개하겠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젊고 아름답고, 무얼 봐도 즐겁고 달콤하고 향기로운 시절의 어느 날. 빨간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절망'이라는 글자. 그게 왠지 마음에 걸려 책을 덮고, 나에게도 언젠가 절망이 찾아오지 않을까 하고 상상해 본다. 그리고 미래의 자신이 절망에 빠져 있는 모습이 이상하리만큼 선명하게 머릿속에 떠오른다. 당황스러워서 서둘러 그것을 머릿속에서 쫓아낸다.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지. 지금 이렇게 즐거운 걸. 그리고 앞으로도 행복으로 가득한 날들이 계속될 거야. 꺼림칙한 환영은 지워 버리자. 하지만 세월이 흘러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고 믿고 있던 것들에게 배신을 당하게 되는 때가 온다. '이게 바로 절망이구나'하고 중얼거린다. 힘없이 창백해진 얼굴로 침대 위에 벌러덩 쓰러진다. 그 순간, 멀리 지나버린 근심 없던 시절의 어느 날이 선명히 떠오른다. 그때 앉았던 의자의 색이 빨간색이었다는 것까지…….(p.180)

[민감한 동물]과 [우주 영웅]은 설정도 기발하고 스토리 전개도 좋다. 순식간에 빠져들었는데, 짧은 분량으로 이 정도의 몰입도를 선사한다는 건 쉽지 않을 일이다. [민감한 동물] 빌딩경비로 일하는 청년이 있다. 순찰을 돌던 그는 놀라운 장면을 목격한다. 쥐들이 떼를 지어 이동하는 모습. 불길한 일의 전주는 아닐까? 뭔가 나쁜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닐까? 고민하던 청년은 다른 빌딩으로 배치해 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그 빌딩에서도 쥐들은 이동은 계속 된다. 이동하는 쥐떼, 무슨 비밀이 있을까?

[우주영웅] 구원을 요청하는 통신문이 소형로켓에 담겨 지구로 온다. 뛰어난 우주 경비대원인 주인공은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 별을 돕기 위해 떠난다. 그런데 우주선 안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린다. 상사의 딸이 몰래 숨어 들어온 것이다. "당신, 멀고 먼 미지의 별에 가는 거지요? 나도 보고 싶어요. 같이 데려가 주세요."(p.21)라며. 이 설정은 생각해 볼만하다. 지금까지 호시 신이치의 SF엔 오로지 남성 주인공 뿐이었고 여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남녀가 함께 우주로 가는 설정은 신선하다. (물론 이 작품도 여성의 존재의의는 미미한데 이게 한계라면 한계) 주인공은 위험에 처한 별을 구할 수 있을까? 위 두 작품은 장편으로 만들어도 재밌을 거 같다. 청년의 일상과 빌딩의 비밀 부분, 우주 경비대원과 상사의 딸의 우주여행 에피소드, 로맨스를 추가해서.

전 자동화, 인간화된 컴퓨터 시스탬 이야기인 [사무실 요정],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구로쓰 살해기 [살의]는 의아하다. 이전 플라시보 시리즈에서 이미 본 작품이다. 편집상의 실수인지, 아주 유사한 다른 작품인지는 찾아서 비교해 본 후에야 정확하게 말할 수 있지만, 전자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30권 이상인 시리즈라 당장 비교하기는 무리) 호시 신이치는 여러 곳에 기고했고, 이후에 작품의 제목을 바꾼 게 상당수다. 아무래도 플라시보 시리즈의 편집자가 '제목이 바뀐 같은 작품'을 다른 작품으로 착각한 것 같다. 이것도 하나의 에피소드네.

아담과 이브 이야기가 차용된 [포획한 생물], 알라딘과 요술램프 이야기가 차용된 [성급한 녀석]도 괜찮았고, 자칭 배우지망생 여자와 스릴러 작가이야기 [반주자], 타임머신을 타고 영주가 있던 시대로 날아간 박사와 조수이야기도 재미있었다. 3개월에 걸쳐 플라시보 시리즈 33권의 서평을 끝냈다. 행복했다. 다른 어떤 말도 필요 없다. 저 한마디면 충분할거라 생각한다. 당분간 호시 신이치의 새로운 작품을 볼 수 없다는 생각이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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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zydevil 2008-10-22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플라시보 시리즈의 대장정을 마감하셨군요. 그간 고생하셨어요. 덕분에 좋은 이야기 많이 소개받았습니다.

쥬베이 2008-10-23 02:06   좋아요 0 | URL
아^^ 고맙습니다ㅋㅋㅋ
저도 처음 시작할때는 이렇게 33권이나 서평할지는 몰랐어요...
사실 호시 신이치는 저도 처음이었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