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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 - 개정판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북스토리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1. 오쿠다 히데오 한번 까보자??
오쿠다 히데오는 관심을 끊었던 작가다. 이라부, 마유미에 질릴데로 질렸고, <오! 수다>의 망언엔 정내미까지 떨어졌다. 600페이지 가까운 책(4*6양장이었다면 900페이지 정도는 될 듯)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오쿠다 히데오 한번 까보자'란 생각이 없었다면 아마 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최악>은 평범한 세 사람의 이야기이다. '가와타니 신지로'(A) 가와타니 철공소란 작은 공장을 운영한다. 사장님보단 수더분한 동네아저씨 이미지가 더 어울리는 인물. '후지사키 미도리'(B) 남들은 부러워 하는 은행에서 근무하지만 반복되는 일에 따분해 하고 있다.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 '노무라 가즈야'(C) 한마디로 불량배다. 파친코로 시간을 보내고 강도 짓거리로 한두푼 벌어들인다. 이후 이들 세 사람의 이야기가 번갈아 제시된다. 전혀 접점이 없어 보이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최악의 상황과 친하다는 것^^
2. 세 사람을 괴롭히는 최악의 상황
1) 신지로를 힘들게 하는 것은 원청업체의 횡포(p.64), 종업원 마츠무라의 대책없는 행동(p.280,397), 은행의 갑작스런 융자거부(p.466), 딸의 대학진학문제등이다. 하지만 가장 괴로운 건 공장소음에 대한 이웃의 항의다. 공장 인접지역에 주거지가 하나둘 생기면서, 공장의 영업활동과 주민의 생활권이 충돌하게 되었다.
오타 내외는 항의 선봉장이다. 오타의 말이다. "...수도권이고, 주택이 밀집한 곳이고, 이웃집에서 자동차 시동만 걸어도 아, 누구누구 씨가 어디 나가는구나 하고 알아차릴 만큼 개개인의 생활이 다 보이는 지역이에요. 이런 환경 속에서 어떻게 하면 모두 사이좋게 어울려 살 수 있을까….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가와타니 씨?"(p.179) 신지로는 곤혹스럽다. 나름대로 방음재 시공도 하고, 이것저것 노력하지만 애당초 완벽한 방음을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런 갈등은 계속 쌓이고 쌓이다 오타 폭행사건(p.354)으로 이어진다. 꼬치꼬치 따지고 드는 오타 내외를 신지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다.
<최악>에는 신지로의 입장이 서술되기 때문에, '신지로=약자, 오타 내외=무리한 요구를 하는 재수없는 인간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소설만 놓고보면 분명 그렇다. 하지만, 공장소음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한다. 직접 겪어 보지 않으면 절대 이해할 수 없다. 오타 내외와 주민들의 잘못도, 신지로의 잘못도 아니다. 공장과 주거지를 마구 뒤섞어 버린 도시행정의 탓? 참 곤란한 문제다.
2) 다음은 후지사키 미도리. 미도리는 반복되는 일상과 폐쇄된 은행조직에 답답함을 느낀다. 이것 역시 최악이라 할만하지만, 더 엄청난 일이 기다리고(?) 있다. 미도리는 신입행원 환영캠프에서 지점장에서 성추행 당한다.(p.172) 힘겹게 사실을 털어놓지만, 돌아오는 건 어이없는 반응뿐.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잠깐 껴안은 정도로 공연히 일을 크게 벌일 거 뭐 있어?" / "술이 좀 들어가면 그런 일쯤은 있게 마련이야. 서로 허물없이 어울리는 술자리라는 게 원래 그런 거지. 반대로 여자 쪽에서 남자한테 안기기도 하고 때로는 살살 눈웃음도 치고 그러잖아?"(p.160) 아첨꾼 다마이 과장의 말이다. 지점장 역시 아무일 없다는 듯 당당하다. 피해자인 미도리만 아픔을 떠 안아야 하는 상황.
3) 마지막으로 노무라 가즈야. 가즈야의 삶은 최악 그 자체다. 파친코와 강도짓으로 연명하는 뒷골목 인생. 다카오와의 만남이 다가올 악의 서막이었다. 도둑질(p.130)하다 야쿠자에게 얽히게 된 둘은, 구타당하고 한달 안으로 300만엔을 만들어야 하는 궁지에 몰린다.(p.191) 어쩔 수 없이 금고털이를 하고 운좋게 성공하지만, 다카오는 돈과 함께 사라져 버린다. 비슷한 또래여서 그런지 가즈야의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었다. <라라피포>도 그렇고 오쿠다 히데오는 젊은 군상들을 잘 그려내는 듯.
3. 세 사람의 접점
A,B,C가 중간중간 함께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첫 번째는 신지로가 융자대출 문제로 미도리가 근무하는 은행(갈매기 은행)을 찾는 장면(p.207)이다. 당시 고민이 많았던 미도리는 신지로에게 다소 무뚝뚝하게 대하는데, 이를 신지로는 '동네 공장 아저씨라고 깔보는구나 싶어 적잖이 부아가 났다'(p.222)라고 생각한다. 이야기가 잘 끝난 다음 은행을 나서면서는 '저 아가씨도 찬찬히 보니 꽤 미인이네'(p.225)라며 여유를 부린다.
두 번째는 납품가던 신지로가 차를 훔쳐 도망가던 가즈야를 보는 장면(p.434)이다. 신지로는 가즈야를 보며, '무슨 짓을 한 거야, 저 젊은이는? 마음속 어딘가에서 나보다 힘든 놈도 있구나,하고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라고 생각한다. 신지로는 몰랐을 거다. 나중에 있을 가즈야와의 운명적 만남을. 또한 가즈야를 따라다니는 메구미란 아이가 있는데, 이 아이 역시 A,B,C사이의 접점이다. 좀 더 이야기하면 스포일러이니 이 정도만.
4. <최악>이 매력적인 이유
세 사람의 이야기는 '스피드소설'이란 표현에 걸맞게 흥미진진,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400페이지 정도 미친 듯 읽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쿠다 히데오, 이 사람 어떻게 마무리하려는 거지? 세 사람의 이야기를 어떻게 종합할 거야?' 인기작가 작품의 결말까지 걱정하고 아주 잘한다ㅋㅋㅋ오쿠다 히데오는 역시 노련한 작가였다. <최악>의 최고 하이라이트, 은행강도 장면(p.472이하)에서 신지로, 미도리, 가즈야 (+메구미까지) 네 사람은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이며, 이야기는 절정에 달한다. (또 하나의 하이라이트는 야쿠자 야마구치 패거리와 격투끝에 탈출하는 가즈야, 메구미의 탈출기p.431)
이 작품이 매력적인 이유는, 시작부터 끝까지 독자의 눈을 뗄 수 없게 한다는 점이다. 은행강도사건 이후에도 더욱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다. 바로, 세 사람 아니 메구미까지 네 사람의 대 탈주극. 한 가지만 집고 가자. 그토록 성실했던 신지로가 은행강도와 함께 한다는 것은 언뜻 보면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정황을 찬찬히 돌아보면 이해할 수 있다. 일단 신지로는 은행강도의 공범으로 몰렸고(경찰에서 '3인조' 은행강도라 할 정도), 은행의 횡포와 지점장의 폭언 때문에 신지로의 상태는 이미 이성의 영역을 넘었기 때문이다.
너무 길어질 거 같아 이야기하진 못했지만, 가즈야와 가에데의 만남(특히 가에데가 가즈야에게 구타당하고 울부짖는 장면p.347은 가슴 아팠다), 다카오의 계속되는 배신(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배신하는 개시키-_-), 미도리에게 관심을 보이는 시바타 노인(매일 은행으로 출퇴근 하려고 공과금 자동이체는 결사반대하시는 분^^), 가와타니 철공소의 말 없는 종업원 마츠무라와 태국인 코비(비중은 없지만 항상 웃는 코비가 좋아 보였다) 등도 인상적이었다.
5. 오쿠다 히데오 최고의 책!!
처음에 '오쿠다 히데오 한번 까보자' 어쩌구 했는데, <최악>은 악평을 할래야 할 수가 없는 책이다. 나쁜 마음을 먹었지만, 결국은 상대방에게 감화된 경우라고나 할까?ㅋㅋㅋ 오쿠다 히데오의 <최악>은 '최고의 책'이다.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지금까지 <남쪽으로 튀어>를 가장 좋아했는데, 순위를 조정해야 할 거 같다.
* 양윤옥 역자님의 우리말 작업은 정말 깔끔했다. 역시 대단한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