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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훔친 위험한 冊들 - 조선시대 책에 목숨을 건 13가지 이야기
이민희 지음 / 글항아리 / 2008년 6월
평점 :
역사서를 가장한 수준이하의 책들이 횡행하고 있다. 능력도 안되는 저자에 의한, 비슷비슷한 포맷의 책들, 답답하다. 그러다 보니 정말 훌륭한 책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도매급으로 이상한 취급을 당하기 쉽상이다. <조선을 훔친 위험한 책들>같이 훌륭한 책이 밀리언셀러에 준하는 폭발적 반응을 얻지 못하는건 바로 저런 이유 때문이다. 참 안타까운 현실.
<조선을 훔친 위험한 책들>은 조선조의 성리학적 이념과 배치되는 책, 그리고 이와 관련된 사건을 이야기한다.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전략) 그 방법으로 이 책은 일종의 금서들의 사회사라는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사문난적으로 몰린 책과 저자들의 역사는 성리학에 포섭되지 않은 사유를 가장 잘 보여준다. (중략) 시대와 불화한 책들의 역사는 불행함과 안타까움으로 가득하다. 왜 시대와의 진정한 의사소통은 목숨을 담보로 한 모험이 될 수밖에 없는지 이 책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p.5-7) 멋지다. 이런 명확한 주제의식을 바탕으로 하기에, 이어지는 13개의 이야기는 탄탄하고 유기적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인물은 선조대의 병법전문가 '한교'(p.119이하)이다. 조선에 한교와 같이 병법에 뛰어난 인물이 있었다는 것도 충격이고, 그런 그를 철저히 배제했던 현실이 또한 충격이다. 일본군의 백병전을 막기위해 선조는 급히 병법서를 도입한다. 바로 명나라 장군 척계광이 지은 <기효신서>. 하지만, 조선내에 이를 제대로 소화해 낼 인물이 없었다. 이때 유성룡등의 천거로 등장한 인물이 한교이다. 한교는 <기효신서>의 의문점을 명나라 장수들에게 묻고 물어서 <기효신서절요>, <무예제보>(정조대에 편찬된 <무예도보통지>의 원형 p.127참조)등으로 재탄생 시킨다.
또한 한교는 선조말 세력을 확대하던 여진족을 막기 위해 <연병실기>를 조선의 현실에 맞게 정리하고 재창조한 <연병지남> 저술한다. 이는 상당히 빼어난 병법서였지만 채택되지 않는다. 저자는 그 이유로 두가지를 든다. 첫째, 서얼로 벼슬이 미천하고 파벌이 없었다. 둘째, 명과 청 사이에서 유연한 외교를 펼치던 광해군정권의 성격상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 한교의 <연병지남>이 얼마나 빼어난 병법서인지는,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부랴부랴 이를 수용한 것에서 드러난다.
'<심양장계>(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등 왕세자 일행이 수도 심양에서 생활한 일을 기록한 책 p.156)'를 중심으로 인조와 세자의 갈등을 그려낸 부분(p.155이하)도 좋았다. 청나라에 볼모로 간 세자는 조선과 청사이 외교관계에 전력하며 많은 공적을 세운다. 세자의 저런 활동이 절절히 녹아있는 것이 바로 <심양장계>.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심양장계>는 이처럼 소현세자 일행과 청의 다양한 교섭 양상을 통해 미묘한 외교관계를 증언하는 동시에 명, 청 교체기의 중국 정치, 사회, 문화 상황등을 풍부하게 담고 있어 17세기 중국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중략) 한마디로 17세기 동아시아라는 스케일이 큰 삶의 영역을 잘 보여주는 사료라고 할 수 있다.'(p.177)
세자의 귀국과 의문의 죽음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권력에 눈이 먼 인조가 자식을 독살했다는 믿을 수 없는, 도저히 믿기 싫은 이야기. 인조가 취한 일련의 조치는 역겹다. 세자의 귀국을 못마땅해 하다 마중조차 못하게 하고, 아들을 독살하고, 며느리를 누명을 씌어 죽게하고, 손주들을 유배한다.(p.186이하 참조) 또한 왕위계승이 당연한 소현세자의 맏아들 석철을 물리치고 봉림대군에게 왕위를 넘긴다. 인조는 참 치졸하고 잔인한, 무능한 군주였던 것이다.
<조선을 훔친 위험한 책들>은 지금까지 읽은 소위 '대중역사서'중 손에 꼽을 수작이다. 조선조 지배계급이 두려워했던 책들, 그래서 온갖 탄압을 받았던 책들, 그 속에서 조선의 숨겨진 면모을 돌아볼 수 있었다. 쏟아져 나오는 '유사 역사서'속에서 오랜만에 진정 훌륭한 책을 만났다.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읽어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