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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모션
사토 다카코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수채화풍 표지, 깔끔한 양장, <슬로모션>은 예쁘고 사랑스런 책이다. 혹시 더럽혀질까 읽는내내 소중하고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겼다.
사토 다카코하면 떠오르는 작품은 제4회 서점대상 수상작인 <한순간 바람이 되어라>다. 젊음의 열정과 도전, 우정을 상쾌하게 그려냈던 <한순간 바람이 되어라>…두 작품은 고교생이 비중있게 등장한다는 점, 전반적인 주제의식이 유사하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뭔가 다르다. <슬로모션>은 등장인물의 미묘한 내면심리를 극적으로 그려낸다. 고교생 '치사'가 바라보는 오빠와 가족, 학급내 역학관계와 친구 오이카와. <한순간 바람이 되어라>의 엔터테인먼트성(이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을 덜어내고 작가의 내면과 좀 더 가까운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왜 <슬로모션>이 사토 다카코의 초기 대표작으로 불리는지 이해된다.
화자는 고교 1학년 '가키모토 치사'다. 사춘기소녀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되기에 '치사'의 미묘한 내면(그리고 치사가 바라보는 다른 인물들의 내면까지)을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다. 치사를 화자로 내세운 구성은 효과적. 치사에겐 사고만 치는 골칫덩이 오빠가 있다. 22살의 가키모토 잇페이. 그는 오토바이를 타다 사고를 당하고 재활을 게을리해 약간 다리를 전다. 치사와 잇페이는 배다른 남매다. (잇페이는 전처의 소생이고, 치사는 새엄마의 소생.) 그럼에도 잇페이는 피가 섞인 아버지와 견원지간이고 피가 섞이지 않은 새엄마와는 잘 지낸다. 미묘한 가족관계.
요시카와 도리코의 <굿모에비앙>과 비교해보고 싶다. 분명 두 작품은 '다른 느낌'이지만, 비교해 볼만한 요소가 충분하다. 먼저, 두 소설은 시점이 유사하다. <굿모에비앙>은 15세소녀 하쓰키의 시점이다. 하쓰키는 날라리 엄마 아키, 날건달 야구의 틈바구니에서 톡톡 쏘는 매력을 발산한다. <슬로모션>의 치사 역시 15세소녀인데다 톡톡 쏘는(^^) 매력을 갖고 있다. (특히 오빠 잇페이를 상대하는 부분) 하쓰키와 치사를 살짝 다른 작품속으로 보낸다 할지라도 큰 문제는 없을 정도다. 또한 미묘한 가족관계도 유사하다. <굿모에비앙>은 싱글맘 아키와 아키의 애인(?)인 야구, <슬로모션>은 새엄마와 배다른 남매.
제목인 '슬로모션'으로 행동하는 소녀를 이야기할 차례다. 치사와 같은 반이고 같은 수영부인 '오이카와 슈코'. 오이카와는 뭐든 느릿느릿 행동한다. 치사의 말을 들어보자. "오이카와는 같은 반 아이다. VIP급 별종. (중략) 마치 머리가 모자란 것처럼 말이 없고 동작도 굼뜨다. (중략) 결정판은 수영이다. (중략) 오로지 평영만 하는데, 그것도 개구리는 둘째 치고 거북이한테도 질 것 같은 속도다. 느리다!"(p.24,25) 오이카와를 바라보는 치사의 시선을 기억해 두자. 벌레보는 듯한 치사의 시선은 점점 변화한다. 주목할 부분.
'오이카와'와 치사의 오빠 '잇페이'는 운명적으로 만난다. 아니다. 다소 황당하게 만나다. 사진찍는게 취미인 잇페이는 치사의 학교로 찾아와 여고생들을 찍는다. 원래 목적은 치사의 친구인 레이코를 찍는 것이었지만, 사고뭉치답게 여기저기 돌아친다. 그러다 한 소녀를 피사체 삼아 사진을 찍어댄다. 그 소녀는 바로 오이카와. "뭐…죠? 왜 찍는 거죠? 뭡니까?" 천천히 그러나 당당하게 말하는 오이카와. "아무것도 아냐. 그냥 취미야. 안 돼?" 이 녀석 역시 능글맞다. "찍지 마세요"(p.58) 누가 알았던가? 이게 사랑의 시작임을.
오이카와를 둘러싼 소문, 뭐든 느린 슬로모션. 아이들은 오이카와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날라리 레이코를 중심으로 오이카와를 괴롭히고, 치사는 고민한다. 이런 괴롭힘내지 학창시절 친구관계와 관련된 부분은 상당히 생생하고 공감이 갔다. (치사의 내면갈등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와타야 리사의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을 읽은 분이라면 연관해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한편,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잇페이는 집을 나가고 오이카와와 동거를 시작한다. 이어지는 이들의 사랑. 사고로 한쪽 다리를 저는 잇페이와 뭐든 느릿느릿한 오이카와, 굉장히 잘 어울리는 한쌍이다. 이들이 발을 맞추어 계단을 올라가는 장면은 둘의 사랑을 극적으로 보여준다.(p.144참조)
그럼 왜 오이카와는 슬로모션일까? 왜 뭐든 느릿느릿할까? 오이카와가 직접 말하는 이유를 듣고 공감했다. 나야말로 슬로모션이 필요한 인간이기에. "아빠 사건(아빠가 도박을 하다 사람을 찌른 사건을 말함)이 일어났을 때, 나도 언젠가 사람 하나쯤은 죽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어. 욱할 때, 옆에 칼이나 쇠파이프 같은 거라도 있으면, 위험하다고 생각했어. 진짜 그렇게 생각했어." "그래서, 그래서, 절대로 화를 내지 않기로 했어. 모든 걸 다 천천히 하기로 했어. 걷는 것도, 말하는 것도, 테크노 로봇처럼 되면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어."(p.126) 그랬구나. 오이카와의 슬로모션엔 저런 아픔과 각오가 숨겨져 있던 것이다.
오이카와와 잇페이의 사랑, 오이카와와 치사의 우정, 어떤 결말을 맞을지? <슬로모션>, 분량은 얼마되지 않지만 품고 있는 감동과 재미는 대단하다. <한순간 바람이 되어라>와 필적하는 가치를 가진 작품이라 생각한다. 거기다 보석같은 표지와 장정까지…소중한 이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은 책, 바로 <슬로모션>이다. 꼭 읽어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