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여행자
윤대녕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3년 10월
평점 :
품절


세상사에 대한 고민없이 시간만 흐르길 바랬던 때, 이 책을 처음 읽었다. 감동했다. 환상적인 눈 이미지가 어찌나 뇌리에 강하게 남았던지, 두고두고 읽어야지 읽어야지 여러차례 다짐했었다. 삶의 한페이지를 함께 했던 친구같은 책. 

저작권관리 에이전시 직원인 K의 방문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정체불명의 소녀와 함께, 평소와는 다른 조급한 모습으로 소설가인 화자를 찾은 K. 그는 에이전시로 보내진 '숫자놀이 책'과 편지를 전하며 일본으로 갈것을 청한다.

'선생님은 언젠가 눈雪에 관한 소설을 쓰겠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기억하시겠죠? 그렇다면 이 편지가 어쩌면 선생님께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중략) 숫자놀이 책에 적혀 있는 메모는 보름 동안 눈을 다라다니며 기록한 것들입니다. 제가 눈을 따라 여행한 곳은 일본 동북부에서도 특히 눈이 많이 내리는 곳들입니다. 하지만 저는 끝내 눈 속에 버려진 아이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터무니없이 들리겠지만, 혹시 선생님이라면 그 아이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편지를 써 보냅니다.'(p.22,23)

이제부터 본격적인 일본여정의 시작이다. 숫자놀이책에 적혀있는 메모를 따라, 눈과 아기 울음소리를 따라. '기린 한마리, 코끼리 두마리…'식의 목차는 숫자놀이책에 적힌 메모를 따라 일본을 누비는 여정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메모에 적힌 여정대로, 선 루트 호텔에 투숙(p.42)하고, 술집 '설의 음'을 찾고(p.49), 얼음장같은 오가호텔 306호에도 투숙(p.60)하며 화자는 여성과 아기의 흔적을 더듬는다. 이런 여정은 상당히 흥미롭다. 동시에 메모속 여성의 행적을 뒤쫒는 모습에서 추리소설적 향취를 강하게 느꼈다. 숫자놀이 책을 보낸 여성의 정체, 그녀가 들었다는 미스터리한 아기울음소리의 비밀, 환상적 분위기까지 자아낸다.

'학의 탕'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일본여성 '사와구치 아이'(p.98). 전형적인 일본여성인 그녀와 무뚝뚝한 화자가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을 흥미롭다. 이들의 관계는 아기울음소리를 확인하기 위해 함께 숲으로 가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정점에 오르는데, 소설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이들이 더 깊은 관계로 이어지지 못하는게 아쉬웠음. 또한 이 부분은 서정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의 절정으로,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

화자의 '외사촌 누이와 수'는 구성상 하나의 축이다. (화자와 외사촌 누이의 관계등은 언급하지 않겠음) 주목할 것은, '숫자놀이 책 메모속 여성'과 '외사촌 누이와 수'가 묘하게 오버랩된다는 점이다. 화자는 메모속 여정을 쫒으며, 외사촌 누이와 수의 여정을 생각한 건 아닐까? 그들이 겪은 어려움을 느낀 건 아닐까? 둘 사이의 관련은 깊게 생각할 부분이다. 이런 관점에 힘을 실어주는 부분이 있다. 사와구치 아이가 "'당신아이' 꼭 만나고 가요"(p.195)라고 하자 얼어붙는 화자의 모습, 메모속 여성이 아이의 이를 각지에 묻는 것처럼, 수를 만난 다음 빠진 이를 눈속에 묻는 장면(p.276)이 그것이다. 마지막 장면인, 빠진 이를 눈속에 묻는 행동의 상징성은 역시 더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다.

메모속 의문의 여성은 '남원집'이 등장(p.147)하면서 서서히 정체를 드러내는데, 나중에 읽으실 분을 위해 남겨두겠다. (결국 p.224이하에서 명확한 정체가 드러나며, 사건의 비밀등 모든 의문이 밝혀진다.)

'눈을 소재로 소설을 쓰겠다'던 저자의 의도는 멋지게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환상적이며, 신성하게까지 느껴지는 눈이미지를 절절히 느꼈다. 정말 아껴두고 읽고 싶은 책, 나아가 눈의 여행자가 되어 책속 여정을 따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든다. 겨울철에 읽는다면 한층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꼭 한번 읽어보시길.


* 한국계 일본작가 '사기사와 메구무' 이야기(p.99이하)가 등장한다. 흥미로운건 저자의 다른 소설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에서도 사기사와 메구무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관심작가?^^ <웰컴 홈>이나 읽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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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zydevil 2008-02-11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대녕, 꽤 오래전에 즐겨 읽던 작가입니다. 여행, 우연히 만난 여인, 여관, 엇갈림, 환 그리고 일상 속에 비죽 고개를 내미는 환타지... 윤대녕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아이콘이었는데... 여전한 것 같군요. 아이쿠~ 그리고 보니 이 작품은 2003년작이네요. 오랜만에 이 작가의 책이 궁금해지네요.

쥬베이 2008-02-12 09:21   좋아요 0 | URL
<눈의 여행자> 참 멋진 소설이에요.
윤대녕작가 좀 읽어볼려고요^^ <사슴벌레 여자>도 읽었는데, 소재가 충격이네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