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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나의 베아트리체
안토리오 솔레르 지음, 김현철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이상한 일이다. 정말 멋진 책을 접하면 그 책에 대해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부담감? 아마 감동, 희열따위의 단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뭔가'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춤추는 나의 베아트리체>를 5일전에 다 읽었다. 뭔가 끄적이려 했지만, 단 한마디 쓸 수 없었다. 내 가슴을 뒤흔들어 버린, 이토록 '아름다운' 책에 대해 한마디도 할 수 없던 것이다. 대신 옥상으로 올라갔다. 오랜만에 하늘을 봤다. 어느 정도 가슴이 진정되고 난 이런 말을 읖조리고 있었다. '이토록 가슴 아픈 책이란걸 알았더라면 마음의 준비라도 했을 것을…'이라고.
<춤추는 나의 베아트리체>는 회상의 책이다. 화자인 '나'가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미겔리토(미겔 다빌라)를 비롯한 네 친구들의 사랑, 우정, 젊음을 돌아본다. 젊은 시절을 회상한다는 점에서 성장소설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한가지 알았다. 젊음은 국경이 없다는 것을. 스폐인 청년들의 젊음이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사랑을 하고, 우정을 나누고, 상처받고, 그러면서 점점 성장한다. 물론 몇몇 에피소드는 경악할만 했지만^^
네 친구들을 소개 해야겠다. '미겔 다빌라(미겔리토)' 시인을 꿈꾸는 문학청년이지만, 신장병때문에 고통받는다. 룰리와 연인사이. '아마데오 눈치' 멧돼지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멧돼지에겐 '타나 터너'라 불리는 절세미모의 고모가 있다. 만인의 연인인 피나. '바람벽 파코' 파코는 머리숱이 별로 없고 변변찮은 외모지만 집안은 부유하다. 그의 아버지는 자동차에 젊은 여자들의 태워다니며 사랑을 나눈다. '아벨리노 모라타야' 아벨리노는 4인방중 가장 안정된 가정의 일원이다. 유일한 고민은 온 집안이 털이 많다는 것뿐.
<춤추는 나의 베아트리체>의 스토리 전개는 톡득하다. 하나의 스토리의 흐름을 따르는게 아니라, 네 친구를 둘러싼 환경과 사람들을 퍼즐 조각 맞추듯 언급해 나가는 식이다. 예를 들어, 호남형 속옷판매원 루비로사와 관련된 이야기(p.78이하)에 이어, 알미 아카데미의 선생인 카르타고 투구아가씨 관련 이야기(p.82)가 이어지고, 고양이 가죽 벗기기가 취미인 라피 아얄라, 성욕 분출구인 칼라의 뚱땡이, 꼴보기 싫은 난쟁이 마르티네스등의 이야기등이 조각조각 이어진다. 이러한 구성은 한가지 위험성이 있다. 자칫 잘못하면 퍼즐조각들이 따로 놀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산만해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퍼즐조각들이 어찌나 흥미롭게 자기자리를 찾아 가는지, 놀랍다.
네 친구들이 성에 눈떠 가는 과정은 상당히 흥미롭다. 파코의 아버지 알프레드의 자동차에서 여성의 음모를 수집하던 그들, 칼라의 뚱땡이와 어설픈 성관계를 맺는 그들, 맷돼지의 고모 라나 터너를 짝사랑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그들. (이런 모습은 국내영화 <몽정기>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물론 몽정기보다 나이가 더 많아 보이지만.) 조금씩 성장해 가면서 진정한 사랑을 만나게 되고, 특히 미겔리토와 룰리의 사랑은 점점 깊어진다. 그러나, 사랑은 역시 상처를 남기는 것이었다.
호세 루비로사가 룰리에게 반해 버린 것, 이것이 문제의 발단이다. 루비로사 입장에서는 사랑일 뿐이라고 강변할지 모르지만, 이건 악의 기원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루비로사, 난쟁이 마르티네스, 군바리 아얄라는 함께 어울리고, 룰리에게 점점 다가간다. 흔들리는 룰리, 헤어짐과 다시 만남의 반복, 그리고 카르타고 투구아가씨와 미겔리토간의 사랑.(p.266이하) 사랑은 진정 어려운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카르타고 투구아가씨는 굉장히 희화화되고 사람들이 그리 좋아하지도 않지만, 마음이 깊고 멋진 여자란 생각이 들었다. 특히 그녀가 미겔리토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감동 그 자체)
점점 시간은 흘러간다. 자동차에 젊은 여성들을 태우며 사랑을 나누던 알프레드는 노인이 되어가고,(p.346이하) 만인의 연인이었던 피나 역시 화려함을 잃어간다. 한편, 루비로사의 끈질긴 애정공세에 룰리는 갈등하고 결국 룰리는 미겔리토를 떠난다. (사랑이란 한낱 스쳐지나가는 뜨거운 바람일 뿐이구나.) 그리고, 그리고, 루비로사 패거리의 비열한 행각. 너무나 가슴 아팠다. 네 친구들의 우정앞에도 결국 이런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읽어 보시길)
미겔리토는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에게 룰리는 언제나 '춤추는 베아트리체'였다. 루비로사가 준 돈으로 발레학원을 다니며 배운 춤을 미겔리토에게 선보이는 룰리, 그런 그녀를 보며 영원한 사랑을 꿈꾸는 미겔리토. 그의 모습이 너무나 안스럽게 느껴진다. 그의 베아트리체는 그를 떠나갔다. 차가운 말을 남기고…. 미겔리토가 그리던 베아트리체는 어쩌면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건지 모른다. 아니, 인생자체가 신기루 일지도.
처음 <춤추는 나의 베아트리체>를 '회상의 책'이라 했지만 그 말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인생의 책'이다. 유쾌하고 한없이 즐겁지만, 가슴 아프고 모든 것을 앗아가는 인생을 이야기하는…. <춤추는 나의 베아트리체>, 먼 훗날 되돌아 봐야만 읽어낼 수 있는 삶의 한조각 한조각을 때론 유쾌하고, 때론 애절하게 형상화 해냈다. 이토록 아름다운 책은 다시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책을 읽고 주변을 돌아보라. 모든 것이 달라 보일 것이다. 문득 하늘을 바라보고 싶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