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는 부모와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정말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어요. 다소 건방을 떨어도, 귀엽다고, 정말 귀엽다고 늘 주위에서 그런 말을 들으며 의기양양했었어요. 예쁜 옷을 입고, 당시 유명했던 화가의 모델이 되기도 했었어요. 그런데…갑자기 짓밟히고 망가져 버렸어요. 나 자신이 도저히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더러워졌다고 생각했어요. 부모나 주위 사람들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았어요. 상대가 아버지의 동생이니까, 부모에게 나쁜 이야기를 들려 주고 싶지 않았던 거죠. 할아버지, 할머니한테도 충격을 주고 싶지 않았어요……. 만일 이야기하면, 그들의 평온과 행복을 내가 모두 짓밟아 버리는 꼴이 된다고, 나를 이전처럼 귀여워해 주지도 않고, 사랑해 주지도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하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웠죠. 귀엽고 천진무구한 딸로서 어른들에게 늘 사랑받는 사람이고 싶었던 거예요. 남자는 그런 내 마음을 읽고 이용했던 거죠."-99,100쪽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생활하면서 우리는 자기가 사는 곳을 정리하죠. 그런 일을 가사라고 하지요. 그리고 다음 세대를 기릅니다. 이걸 양육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앞선 세대의 죽음을 지켜본다는 의미에서, 노인간호를 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도 않고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면 오로지 어린아이밖에 없지 않을까요? 물론 생활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하죠. 그것 또한 정말 힘든 일이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그건 사는 장소를 정리하는 가사의 절반 정도에 지나지 않고, 양육이나 간호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일만 하면 그만이라는 것은 어린아이가 밖에서 열심히 놀고, 집에 돌아와서는 모든 것을 어머니에게 맡기는 것과 별 다를 바 없을 것 같습니다. 정말 어른이 해야 할 절실하고 중요한 일은 양육과 노인 간호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이만 먹었다고 누구든 다 어른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사는 현실 세계에서, 어른이 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나 역시 아버지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다는 자괴감 때문에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런 나를 어른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죠.(이어짐)-119,120쪽
정말 멋진 어른을 찿아보기 힘든 세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 어린 사람들끼리 협력하고, 서로를 도울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바로 그게 희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개개의 인간에게 억지로 자립을 강요하는 것이 오히려 많은 사람을 어린아이의 세계로 퇴행시키는 결과가 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119,120쪽
"우리한테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좋아하는 사람과 거리를 두고 있지는 않아 하는 생각이 들어. 너무 상대방의 처지만 배려하다 보면, 오히려 상대에게 깊은 상처를 입히고 마는 수도 있는 거야. 결혼은 하지 않아도, 가정은 꾸리지 않아도 좋아. 그렇지만, 가능하다면 함께 살아갈 상대를 찿는 게 좋지 않겠니? 상대를 인정해 주고, 상대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척 중요한 일이야. 혼자서만 너무 애를 쓴면, 자신은 물로이고, 본의 아니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힐 수도 있는 거야. 모든 것을 혼자 짊어지고 해결하려는 것만이 어른이 취할 수 있는 방식은 아닐 거야. 사람을 믿고, 맡기고, 또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받아들여 주는 것도 사람에게는 좋은 성장의 기회가 되는 게 아닐까? 천천히라도 좋아. 자신의 마음을 열어 봐. 어때…다른 사람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어리광이라도 한번 피워 보라고. 그걸 자신에게 허락해 보면 어떨까……?"-160쪽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참사에 비하면, 우리들의 일상에서 생기는 슬픈 일이나 실수는 하잘것 없는 것이라고 말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늘 똑같이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내는데도 끝없이 생겨나는 문제가 과연 세계적인 참사와 그리 다른 것일까요? 어쩌면 같은 뿌리에서 발생한 경우도 많지 않을까요?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나 자신 아주 사소한 일에도 번번이 두려움에 떨었기 때문에, 변명 비슷하게 그런 생각을 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소한 일에 고민하고 화를 내느라고,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의 아주 일상적인 슬픔과 고통조차 공감하지 못한 채 일에만 쫒겨 지낸 것이 바로 나의 현실이었습니다. 더구나 나는, 도저히 나 자신의 현실을 살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받은 상처와 저지를 죄, 그리고 죄를 저릴렀다는 죄책감에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짓눌린 채 살아왔습니다. 아무리 자기 자신은 현실을 살았다고 생각해도 어디선가 뒤틀려서, 결국은 환상적인 색채마저 품고 있었던 것처럼 여겨지니까요. 언제 이것이 나의 현실, 진정한 나 자신이라고 내 두 손으로 움켜질 수 있는 날이 올까요.(이어짐)-377쪽
전에는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언젠가는 틀림없이 그 날이 올 것이라고 믿고 싶은 심정입니다. 너무도 슬픈 일이 많았지만, 한편으로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허망함에 몸을 맡기지 않고,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할 수 있기를 스스로에게 다짐해 봅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비밀과 거짓말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이지마씨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어른이란 비밀과 거짓말을 간직하고 있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우리들은 고통스런 일이 있을 때마다 비밀과 거짓말로 대응했기 때문에 더욱 슬픈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진실을 밝히는 것이 주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경우에도, 비밀과 거짓말로 피신하지 말고…오히려 진실을 밝힘으로써 발생하는 한층 더 슬픈 비극과 죄악마저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태도야 말로 성장이라 불리는 것이 아닐까요? 미안합니다. 나는 또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군요.'-378쪽
셋이서 같이 얘기했었지. 녹나무에 팔을 두르고, 셋이서 울었었어. 그후에 구멍에 들어가 손을 마주 잡고, 서로 몸을 꼭 껴안듯 기대고, 우리는 줄곧 같은 말만 나누었던 것 같아. 모울, 기억하고 있나? 자네는 이렇게 말해 주었지. 유키도 이렇게 말해 주었지. 우리는 오직 이 말만을, 오로지 이 한 마디 말만을 주고 받았었어. "살아 있어도 괜찮아. 너는…살아 있어도 괜찮아. 정말로, 살아 있어도 괜찮아."-3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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