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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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근대 이전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였던 통치체들은 베스트팔렌 조약을 계기로 국민국가체제로 재편되었다. 찰스 틸리는 국민국가 확산의 핵심원인을 전쟁에서 찾는다전쟁을 준비 또는 회피하기 위해서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투입할 수 있는 체제가 바로 국민국가라는 것이다. 전쟁은 국가를 만들고 국가는 전쟁을 일으키는 반복 속에서 국민국가의 위상은 강화되었고, 대부분의 인간은 태어나면서 국가에 소속된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국민국가에는 태생적으로 폭력성과 강제성이 내재되어 있다. 국가의 경계가 바뀔 때마다 주변부의 인간들은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국가의 틀 안으로 끌려들어가거나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이 과정에서 경계 밖으로 밀려난 이들이 디아스포라다. 저자는 디아스포라를 전쟁, 식민지배, 노예무역 등 외적인 이유에 의해 폭력적으로 자기가 속해 있던 공동체로부터 이산을 강요당한 사람들 및 그들의 후손으로 정의한다. 삶의 기반은 일본에 있지만 민족적으로는 조선인이고 한국국적을 보유한 저자의 모어는 일본어이다. 저자는 모어가 과거 식민지배자의 언어라는 것, 태어날 때부터 본래 모어여야할 한국어를 빼앗긴 상태라는 것을 늘 거북하게 의식하며 살았다. 이처럼 디아스포라들은 어떠한 역사와 구조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이 분열되어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항상 막연한 불안과 긴장을 강요당해왔다. 디아스포라적 삶의 궤적이란 자신의 아이덴티티로부터 일방적인 추방과 부정, 정체성 분열과정을 거치며 빚어진 수세대에 걸친 삶의 일그러짐을 의미한다.



"식민주의는 타자의 계통적 부정으로 피지배 민족을 절박한 지경까지 몰아넣어 진정 나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제기하도록 만든다." (p. 105)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고, 왜 여기에 있는가?'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관통하는 질문이다. 한 국가의 국민이라는 것의 의미는 국민국가의 틀 안의 사람들에게는 사랑하는 가족과 삶의 기반이 있으며, 고유의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조국이자 고국이며 모국인 곳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조국 (선조의 출신국), 고국 (자기가 태어난 나라), 모국 (현재 국민으로 속해있는 나라)의 삼자 분열로 국민국가를 넘어선 저 어딘가에서 자신의 근원을 찾아야 하는 디아스포라에게 국민의 의미는 전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들에게 이상적인 모국은 모든 형태의 부조리가 일어나지 않는 곳이지만, 현실은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디아스포라들이 언어도, 문화도, 국민으로서의 체감도 없는 모국의 국민으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선택을 한다. 이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 운명에 저항하며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하는 실존에 관한 것으로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다. 그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속한 문화를 거슬러 자기 내부의 역사를 발견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구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어린시절 벨기에에 입양된 미희 나탈리 르무안느가 처음으로 제작한 영화에 한국 출신 입양아가 베트남풍 모자를 들고 등장한 이유는 당시 작가 자신도 한국과 베트남의 문화 차이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의 이력을 국가, 인종, 문화를 둘러싼 차별과의 싸움으로 규정한다.



이 책은 저자의 디아스포라적 시선을 통해 탄생했다. 디아스포라적 시선이란 다수자들이 진리라고 간주하는 것, 불편한 진실에 대한 소수자들의 문제제기를 말한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디아스포라적 예술가들은 주변인으로서 갖는 이중, 삼중의 마이너리티적 속성으로부터 비롯되는 경험과 기억, 욕망을 다루고 있다. 문승근의 활자구에는 뿌리도 없고 토대도 없다. 외적인 힘에 굴복하여 굴려지면서 흔적을 남기는 활자구는 마치 작가의 디아스포라적 삶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쇼니바레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게 된 이미지나 미적 취향의 역사성, 정치성을 폭로하고 있다. 독일인 다수에의 동화와 유대인으로서 정체성의 유지, 양자간의 갈등은 펠릭스 누스바움 예술의 모티프가 되었다.



"나는 근대 국민국가의 틀로부터 내던져진 디아스포라야말로 '근대 이후'를 살아갈 인간의 존재형식이 앞서 구현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p. 6)



월드컵은 전세계 다양한 참가국간의 국가대항전이라는 형식으로 인해 '국가' '민족'이 가진 특성들을 여실히 보여준다. 2018년 월드컵 결승전은 다인종 프랑스와 단일민족 크로아티아간의 싸움이었다. 크로아티아가 백인 슬라브계 단일민족으로 팀을 구성한 반면, 프랑스는 자국의 포용적 이민정책을 대변하듯 엔트리의 23명중 21명을 이민자 출신으로 채웠다. 경기는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인종 갈등을 녹여낸 세대와 인종 갈등 속에서 자라난 세대간의 경쟁이기도 했다. 프랑스의 승리를 지켜보며 나는 에르네스트 르낭을 떠올렸다. 르낭은 민족이란 공동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이미 희생하였거나 희생할 용의가 있는 인간들로 구성된 거대한 결속이라고 하였다. 또한 르낭은 민족 창출의 근본적 요소는 기억이 아니라 망각이라고 주장한다. 더 큰 결속을 위해서는 망각과 용서가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민족은 기억이 아닌 망각의 공동체라는 것이다. 근대 이후 인간의 존재형식에 대한 가능성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함께 하는 삶을 위한 자발적 희생과 기억을 이겨낸 용서는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위로하고 인류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는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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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유령 방과후강사 이야기
김경희 지음 / 호밀밭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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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는 사전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고 얻은 임금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으로 정의된다. 노동자의 정의가 이렇다면 나도 노동자로서 살아온 세월이 꽤나 길다고 할 수 있는데, 내가 노동자임을 인지하고 노동자에게 행해지는 차별과 불합리에 대해 의식화한 기간은 생각 보다 짧았던 것 같다. 그러한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 중 하나는 잡지 <꿀잠>을 만난 것이다. <꿀잠>10개 언론사의 기자 20명의 재능기부로 탄생한 비정규직을 위한 특별잡지다. 지상에서 가장 따뜻한 잡지라는 슬로건처럼 노동자들의 삶과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잡지 판매수익금 또한 비정규 노동자들을 위해 사용한다고 알고 있는데, 아쉽게도 현재는 발간되지 않고 있다.



<꿀잠>에 강렬한 인상을 받은 건 가벼운 마음으로 첫 페이지를 넘겼을 때였다. 첫 페이지는 잡지 속 화려한 광고에 익숙해진 내게 어쩌면 무심코 넘겨질 페이지였는지도 모르겠다. 잘 차려입은 여성 모델들의 모습은 충분히 눈길을 끌만한 것이었지만, 별다른 특별한 것이 없는 광고라고 생각했고, 광고의 대상 또한 내 관심 분야가 아닌 여성복이었기 때문이다. 페이지를 넘기려는 손가락을 주저하게 만들었던 건 여성모델의 사진 아래에 남겨진 글이었다.



아름다워요. 또렷하고 밝게 빛납니다. 오늘 당신의 하루 어땠나요?
어둡군요. 흐릿합니다. 누구인지, 왜 거기에 있는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 청소를 하고 계셨군요. 깨끗해야 하는 것을 닦느라 더러워진
당신 손안의 걸레를 이제야 보았습니다. 오늘 당신의 하루 어땠나요?



문구를 읽고 나서 다시 사진을 보았다. 사진은 스튜디오에서 광고를 위해 촬영된 것이 아닌 LED조명으로 환하게 밝혀진 대형 옥외광고물을 찍은 것이었다. 그리고 사진 속에는 문구를 보고나서야 비로소 나는 발견할 수 있었다. 모델의 밝은 미소를 부각시켜주는 조명판을 더 빛나게 하기 위해 청소 아주머니가 걸레로 닦고 있는 모습이 불빛에 비춰진 실루엣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광고는 이윤추구를 위해 사람들의 눈을 잡아끌며 상냥한 인사를 건네고 있는 반면 사회의 버팀목인 노동은 어둠 속에 가려져 있었다.



어두운 곳에서는 밝은 곳이 잘 보이지만 밝은 조명 안에서 바라보면 어두운 부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특정부분만을 강조하는 스포트라이트로 인해 땀의 눈물과 소중함을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노동으로 일군 삶이야말로 자랑스럽고 떳떳해야 하고, 그 땀의 웃음이 밝고 아름답게 빛나야 하는 것은 아닐까? 노동이 웃음이 되는 세상, 노동이 보람이 되는 세상을 간절하게 꿈꾼다는 잡지 <꿀잠>의 존재이유와 지향점을 나는 첫 페이지만으로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한 장의 사진만으로 노동자들이 처해 있는 현실을 이 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잡지 <꿀잠>은 내게 '당신의 노동은 안녕한가?'라고 묻고 있었다.



유령이라는 말에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눈에 띄지 않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방과후강사는 특수고용직 또는 프리랜서 직군이라 노동자로서의 법적인 신분 보장을 못 받는다는 의미도 있다.” (P. 114)



방과후강사 김경희가 쓴 <꿈꾸는 유령>을 읽으며, <꿀잠>의 첫 페이지를 펼쳤을 때의 충격과 안타까움을 느꼈다. 학교라는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 수면 밑에 그처럼 다양한 업무형태가 존재했었고, 그 중 40%가 넘는 종사자들이 비정규직이라는 사실을 나는 솔직히 알지 못했다. 사회가 주목하는 대상들을 더 빛나게 하기 위해 기꺼이 어둠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낮추며 암묵적인 희생을 견디고 있는 노동자들이 학교라는 공간에도 있다는 걸 <꿈꾸는 유령>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무엇 보다 가슴 아픈 건 에세이의 제목이기도 한 꿈꾸는 유령이라는 표현이었다. 방과후강사들은 마치 유령처럼 최대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노동을 수행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지 않은, 복도를 서성이는 유령이 된 기분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자신이 지도한 아이들이 자신의 이름이 아닌 정규직 교사의 이름으로 대회에 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심정은 어떤 것일까?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교육을 위해 종사했지만, 방과후학교 박람회에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심정은 어떤 것일까?



꿈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숱한 인내가 필요하다. 또한 특별하고 의미 있는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천과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꿈을 꾸는 사람은 자신을 변화시키며, 더 나이가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P. 191)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정부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국정과제 1로 추진했지만, 비정규직은 늘어나고, 정규직 일자리는 감소하는 등 고용의 질은 오히려 더 퇴보하는 모양새다. 이러한 현실에서 희망은 무엇일까? 저자 김경희는 꿈을 꾸는 사람은 자신은 물론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믿음을 아직 놓지 않고 있다. 또한, 이를 위해서는 실천과 노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나는 저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한 가지를 더 추가하고 싶다. 바로 타인에 대한 관심이다. 타인에 대한 따뜻한 관심 속에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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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21-11-27 22: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쭈욱 글 읽었는데 글 잘 쓰십니다. 밑의 핫뮤직 페이퍼는 저 십대때 월간 팝송 잡지 생각도 나고.. 잭와일드님의 글을 오늘 첨 읽었고 첨 알었습니다. 글 많이 쓰셨는데.. 여적까지 모르고 있었네요. 반갑습니다. 저도 님의 글 읽으니 더 분발해야겠어요~

잭와일드 2021-11-28 18:57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1-11-27 23: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공적 논의와 개인적 노력이 만나는 곳, 그 경계는 어디쯤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잭와일드 2021-11-28 19:00   좋아요 1 | URL
가치를 ‘권위적‘으로 배분하는 과정이 많이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eBook] 핫뮤직(HOT MUSIC) 1998년 11월호 핫뮤직(HOT MUSIC) 97
핫뮤직 편집부 / 컨텐츠코리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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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에는 영화의 환상에 빠져 비극적 삶을 살게 되는 주인공 임병석이 등장한다. 영화를 보면서 허구와 현실을 혼동하며 환상 속에서만 살아가는 주인공의 삶이 안타까웠지만, 수없이 많은 영화들을 섭렵하여 삶에 영화가 체화된 주인공의 영화에 대한 열정은 인상 깊었던 기억이 있다. 주인공과 내가 동일한 이름을 공유한다는 것도 이 영화에 관심을 갖고 기억을 하게 된 중요한 이유였다. 그래서일까? 10회 전 국민 잡지읽기 공모전 참여를 생각할 때 이 영화가 떠올랐다. 만약 이 영화처럼 지금까지의 내 삶을 성장영화로 표현한다면 핵심 콘텐츠와 키워드는 무엇이 될까?

 


내가 내린 결론은 음악이었다. 임병석이 헐리우드 키드였다면, 나는 락키드였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나의 10대부터 20대까지를 함께한 추억의 잡지 핫뮤직 (199011월 창간, 20085월 폐간)이 떠올랐다. 10대 시절 나의 틴 스피릿(teen spirit)은 락음악에 있었고, 나는 항상 이에 대한 정보를 갈구했다. 당시에는 음악을 듣기 위해서는 음반을 구매해야 했기 때문에 용돈이 빠듯한 청소년이었던 나는 음반 구매의 실패 확률을 낮춰야만 했다. 오랜 기간 용돈을 모으고 아르바이트를 한 끝에 마침내 음반을 구매하여 플레이하였을 때 내 취향이 아니거나 너무 난해한 음악임을 뒤늦게 깨달았을 때의 낭패감과 상실감은 당시 내가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막 음악이라는 세계를 탐구해가는 내게 핫뮤직은 지도였고 네비게이션이었다. 인터넷이 발달되기 이전이었던 시기에 음악전문잡지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에 대한 최신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고 동시에 좋은 음악을 선별하고 음악관을 확립하는데 지침이 되는 바이블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90년대 당시에는 다양한 음악전문잡지들이 존재했다. 지금 생각하면 다소 촌스러운 지구촌영상음악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던 잡지 'GMV'는 팝음악 전반에 대해 다루었고, 월드팝스도 이와 유사한 성향을 띤 잡지였다. '서브 (Sub)'는 최신 음악 트렌드를 기민하게 반영하고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와 가치에 대해 재조명한 잡지였다. 그 중에서 내가 핫뮤직을 유난히 좋아하고 애착을 가졌던 이유는 락음악을 전면으로 다뤘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18년이라는 세월 동안 지속된 국내 최장수 대중음악 전문잡지였다는 점이다. 단순히 독자의 관점에서 생각해봐도 18년 동안 음악, 그 중에서도 락음악이란 매니아적 취향을 다룬 핫뮤직은 숱한 위기를 겪었을 것이다. 조성진 평론가가 편집장 복귀에 대한 소감으로 온라인의 홍수 속에서도 활자문화를 고집스럽게 지켜야 할 누군가는 꼭 있어야 하며, 음악 쪽에서는 바로 '핫뮤직'이 그 누구의 대열에 포함될 자격이 있다고 밝혔던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장함이 느껴진다.

 


핫뮤직에 실린 해외 뮤지션의 인터뷰, 음반 및 공연에 대한 리뷰, 신보 발매 소식 등은 락음악에 관한 정보를 갈급했던 내게 가뭄의 단비와 같았다. 또 핫뮤직에는 흥미로운 기획기사가 많았다. 평론가와 음악산업 종사자를 위한 사관학교라는 별칭에 걸맞게 핫뮤직은 명그룹들의 데뷔 순간을 조명하거나, 북유럽 신화와 그를 다룬 밴드와 가사들을 다룬 기사, 한국 록의 계보와 명반들을 열거하는 기사 등 다양한 기획기사를 다뤘다. 핫뮤직의 기사를 읽으며 음반 구매 리스트의 우선순위를 작성하고, 리뷰에 언급되었던 음악을 듣고 싶다는 열망 속에서 라디오 프로그램 전영혁의 음악세계를 들으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던 학창시절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핫뮤직의 장점은 부록에도 있었다. 핫뮤직은 부록으로 종종 여러 뮤지션의 노래를 특정 분류에 따라 모은 컴필레이션 음반이나 테이프를 주었다. 이는 당시에는 음악을 다루는 매체였던 만큼 직접 들어보고 평가 후 구매하라는 배려 차원으로 생각했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시대의 변화에 맞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중에서도 2002년 월드컵의 열기가 끝나갈 무렵 Roger waters 라이브 앨범 중 ‘Shine on you crazy Diamond’1번 트랙으로 수록된 핫뮤직의 컴플레이션 앨범을 들으며 감동 받았던 것이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핫뮤직은 락음악을 매개로 다양한 이해관계자를 결집시킨 플랫폼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핫뮤직에 실린 클럽의 광고만 보고 홍대를 찾아가 우여곡절 끝에 밴드를 결성하게 된 크라잉넛은 이제 데뷔 20년이 넘는 인디씬의 전설이 되었다. 광고 이외에도 진정으로 음악을 사랑하고, 뜻을 모아 음악의 한길을 걸을 멤버를 찾는다는 그룹사운드 멤버 모집글이나 악기나 레코딩에 대한 정보에 이르기까지 핫뮤직은 음악을 좋아하는 아마추어부터 프로 뮤지션까지 다양한 수요자층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정보의 바다였으며 음악 생태계의 보고였다. 고등학교시절 핫뮤직을 매개로 음반을 교환하면서 인연을 맺게 된 대구 사는 목수 형님, 밴드 정보 공유로 시작하여 기타 구매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함께한 부산에 사는 펜팔 친구, 이들은 아직까지 락에 대한 열정을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이렇게 고등학교 시절 그리고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핫뮤직은 내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프레시맨 시절 대학 밴드 동아리의 오디션을 기다리면서도 나는 핫뮤직을 읽었다. 사실 음악은 시대의 변화에 가장 민감한 예술 중 하나이다. 음악이 다루는 주제는 사랑, 정치, 평화 등 시대에 민감한 영역들이고 음악은 가사뿐만이 아니라 목소리와 연주가 결합된 음악언어로서 청자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종합예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음악은 다루는 주제와 가사, 그것을 표현하는 사운드가 총체적으로 트렌드를 민감하게 반영해야하는 예술이다. 음악을 다루는 매체가 시대와 그에 따른 음악의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래서일까? 한때 월발행부수 15,000부에 달했던 핫뮤직의 몰락은 너무나 급작스럽게 다가왔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대표되는 시대와 기술의 급격한 변화 속에는 음악 자체의 변화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인터넷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인터넷에서 정보는 빛과 같은 속도로 유통되었고 음악 방면에도 '논객'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최신 정보의 제공자이자 분석과 평가로서 새로운 의미를 제시하였던 '평론가' 집단의 권위도 핫뮤직을 비롯한 음악전문잡지들의 위상도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핫뮤직은 더 이상 내게 음악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유일한 창구가 아니었고, 대학에 진학한 나도 락음악 이외의 관심사가 차츰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핫뮤직은 나의 기억 속에서 멀어져 갔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한 뒤 나는 핫뮤직이 폐간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충격 속에서 관련 소식을 찾아보았다. 폐간되기 직전인 20081월 핫뮤직의 대표이사가 독자들에게 남긴 글이 있었다. 몇 차례의 결간으로 불안해하는 독자들에게 그는 인쇄매체의 불황과 음악시장의 급격한 퇴조로 인해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밝히며, 아무리 매체가 다변화되고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흐름이 빨라지더라도 정돈되고 보존성 있는 인쇄매체의 존립기반까지 와해시킬 수는 없고 오히려 전문 인쇄매체의 정보가 타 매체의 정보 흐름을 리드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이 말을 남기고 4개월뒤 핫뮤직은 폐간되었다.

 


핫뮤직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음반은 '소유''소비'의 양면성을 가진 매체였다. 앨범 커버, 가사집, 평론가의 리뷰, 음원이 담긴 CD로 이루어진 음반은 그 자체가 유기적으로 구성된 아티스트의 창작물이었다. 하지만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음반은 빠르게 다운로드 시장에 자리를 내줬고, 다운로드시장도 모바일 시대의 개막과 함께 스트리밍으로 대체되었다. 음악의 디지털 데이터화로 음반이 갖고 있었던 목적 가운데 '소유'가 사라지고 '소비'만 남은 것이다. 스트리밍은 공유의 편의를 위해 볼륨과 음질 등을 규격화한 콘텐츠를 제공한다. 이는 창작자의 의도가 왜곡시킬 뿐만 아니라 작품 자체의 질을 손상시킨다는 치명적인 단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대중들은 음반을 찾지 않는다. 음악은 '소유'가 아닌 스트리밍으로 대표되는 데이터의 '소비'로 전환되었다. 가끔 그때 음악전문잡지에 대한 대중들의 애정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생각을 해본다. 그때의 열정은 지금 세대에게도 유효한 것일까? 경험을 소비하며 순간을 탐닉하는 세대에게 음악잡지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음악을 다룬 텍스트가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까? 음악이 완결된 예술작품으로서, 콘텐츠로서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힘 때문에 음악을 다룬 텍스트는 힘을 잃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브릿팝 (90년대 영국에서 발생한 얼터너티브록의 장르)의 아이콘으로 추앙 받았던 밴드 블러(Blur)의 기타리스트 그레이엄 콕슨은 자신의 5번째 솔로앨범의 제목을 다음과 같이 명명했다.

 


행복은 잡지 안에 있다.”(Happiness in Magazines.)

 


그랬다. 그 시절 내가 매달 출간되는 핫뮤직을 기다렸던 건 잡지를 통해 텍스트로서 구현된 소리를 눈으로 읽어내기 위해서였다. 아니 그 소리는 시각뿐만이 아니라 내 오감을 자극하는 소리였다. 표지와 사진들이 전달해주는 시각적 이미지, 다양하게 표현되는 종이의 질감과 잉크의 냄새, 책장을 넘길 때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감촉, 사각거리는 소리는 총체적으로 잡지가 다루고 있는 음악의 의미를 부연해주는 것들이었다. 내 취향이 온전히 고려되어 있는 한권의 잡지는 나의 영웅이 가장 화려하게 빛나던 시절, 빛나는 미소와 함께 내게 다가왔다. 그레이엄 콕슨의 말대로 이곳에 행복이 없다면 대체 어디에 행복이 있단 말인가? 잡지는 오감만족의 예술이며, 이는 지금 시대에도 유효하다.

 


또한 앨범 커버와 가사집, 음원이 담긴 CD 등이 유기적으로 구성된 음반처럼 체계적으로 구성된 잡지의 편집은 잡지가 가진 큰 장점 중 하나이다. ‘스마트해지는 느낌을 팔겠다는 철학으로 종이 잡지를 만드는 이코노미스트지는 2006년 일주일에 100만부에서 2015160만부로 발행부수가 크게 증가하였다. 온라인상 정보의 홍수 속에 빠져 있던 독자들은 체계적으로 구성된 정보들을 흡수하면서 스마트해졌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인터넷이나 웹진을 볼 때는 자신이 좋아하고 관심이 있는 기사만 클릭하지만 잡지를 통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이야기, 이미지, 아이디어를 만날 수 있다. 필요에 따른 지식검색은 지식의 확장에는 유용하지만 연관된 새로운 주제를 만날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이다. 특정 독자층 및 취향을 고려하여 발행되는 잡지는 이 부분에서 강점을 갖는다. 오늘날과 같은 정보 과잉의 시대에도 독자의 취향에 따라 진화하는 큐레이션이 가능한 것이다.



락키드 출신답게 내 젊은 시절의 한 챕터를 장식하고 있는 핫뮤직에 바치는 헌사도 락으로 마무리를 해야겠다. 이언 헌터의 노래 'Old records never die'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 가끔, 인생에도 끝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죠.

하지만 음악은 어디에나 있어요. 결코 사라지지 않는 명반처럼 말이죠."

(Sometimes you realize That there is an end to life.

But music's something in the air. Old records never die.)

 



작년에 핫뮤직이 온라인과 웹을 통해 부활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대와 기술의 변화는 많은 것들을 바꿔 놓았다. 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 명반처럼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것들이 있다. 그 시절 내가 눈으로 음악을 듣고, 행복을 읽어냈던 것처럼 순간의 경험을 소비하는 디지털 시대에서도 잡지가 우리에게 건네는 이야기는 아직 건재하다. 워크맨과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듣는 히어로가 등장하고 대중은 이제 다시 LP판을 찾는다. 누군가가 종이책 시대는 끝났다고 했지만, 이북은 아직 종이책 시장을 넘보지 못한다. 잡지는 단순히 과거의 향수나 감성에 의존하는 일회성 마케팅이 아닌 새로운 가치를 통해 시대에 적응해나가야 한다. 중요한 것은 잡지가 아날로그와 전통매체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어떻게 독자에게 새로운 경험과 가치를 줄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이 전문 인쇄매체의 정보가 타 매체의 정보흐름을 리드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온라인과 웹뿐만 아니라 지면을 통한 핫뮤직의 부활을 기다리며, 다시 한번 눈을 통해 소리를 듣는 즐거움과 행복을 느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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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11-27 2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핫뮤직이 이북으로도 있군요~!! 저도 핫뮤직 너무 좋아해서 매달 사모았었는데 반갑네요 ㅜㅜ 지금은 다 잃어버려서 너무 슬프더라구요 (부모님이 이사하면서 다 버렸더라구요 ㅜㅜ)

저도 GMV나 서브 보다는 핫뮤직이 더 좋더라구요. 핫뮤직에서 극찬하면 열심히 돈모아서 씨디를 사러 간 기억이 생생하네요 ㅋ 부활했으면 좋겠습니다~!!

잭와일드 2021-11-27 23:28   좋아요 2 | URL
네 저도 음악잡지 중에서 핫뮤직이 유난히 기억에 남네요. 핫뮤직 리뷰를 보고 전영혁의 음악세계도 듣고 리스트 만들어서 고민고민하다가 돈모아서 CD사고 ㅎㅎ

mini74 2021-11-27 23: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 다들 비슷한 추억들을 갖고 있나봐요. 저는 영화지만요. 잡지 열심히 보고 고심해서 용돈 모아 영화 테이프 사고 했던 기억이 나요 언니들이 무료편승해서 아주 기분나빴던 ㅎㅎㅎ글 넘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잭와일드 2021-11-28 08:48   좋아요 2 | URL
네 가끔씩 그때가 그리워지네요 ㅎㅎ

persona 2021-11-28 00: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오랜만에 보네요. 서브는 모르고 있었지만 GMV랑 핫뮤직은 기억나요. 누군가 레드재플린 음악 녹음한 거랑 함께 핫뮤직을 줬던 기억이 나네요. ㅎㅎㅎ 없어지고 참 아쉬웠어요.

잭와일드 2021-11-28 08:49   좋아요 3 | URL
공테이프에 나만의 셋리스트를 만들어서 선물도 많이 했죠. 라디오 기다렸다가 녹음도 하고 ㅎㅎ
 
비정규직 특별잡지 꿀잠 - 10개 언론사 현직 기자 20명과 사진작가들이 기록한 2016년 노동
비정규직 특별잡지 '꿀잠' 편집부 엮음 / 꿀잠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세상을 보고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발견하고 느끼는 것이것이 바로 삶 (LIFE)의 목적이다.

 


이는 잡지 라이프(Life)의 모토이다정확히 표현하자면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가 실제 라이프의 창간사이자 모토인 '라이프를 통해 세상을 보라'를 영화적으로 변형시킨 것이다라이프는 20세기를 대변하는 잡지였다전성기 시절 1,300만부가 넘는 발행부수와 900만장에 이르는 사진 아카이브, 500여명에 이르는 당대 최고의 사진 작가진 등 라이프지는 필름 시대의 아이콘이었으며 '포토 저널리즘'을 개척한 사진잡지였다공황세계대전냉전을 거친 1930년부터 1960년대까지는 글의 장황함 보다는 사진의 강렬함을 원했던 시대였다. 1960년대 미국 전체 잡지판매액의 14%를 차지할 정도로 자타공인 최고의 저널이었던 라이프는 TV와 인터넷의 등장으로 인해 쇠락하기 시작했다. 73년에 라이프지는 주간지 시대를 마감하였고월간지와 특별호 체제로 명맥을 유지해오다가 2007년 3월 종이 잡지로서 마지막 호를 발간하고 온라인 잡지로 전환되었다.



영화 속에서 42세의 '소심남' 월터는 잡지사 라이프에 다니는 평범한 미혼의 직장인이다입사 후 16년 동안 그가 맡은 업무는 필름을 현상하는 것이었다글 보다 한 장의 사진에 담긴 힘을 믿었던 잡지사 라이프에서 현상부서는 핵심부서였지만 디지털 사진이 보편화되면서 필름 사진은 퇴색되어 갔고수작업으로만 가능했던 인화기술 또한 디지털 보정기술로 대체되었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라이프는 종이 잡지를 폐간하고 온라인 잡지로 거듭나기 위해 구조조정에 들어가게 되고경영진은 마지막으로 발간될 종이 잡지의 표지를 전설적인 사진작가 숀 오코넬의 사진으로 결정한다그러나 '삶의 정수'를 담고 있다는 말과 함께 숀이 월터에게 보낸 필름은 어디에도 없었고 월터는 필름을 받기 위해 숀을 찾아서 모험을 떠난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위대한 잡지 라이프에 바치는 헌사다온갖 고난과 역경 끝에 숀을 만나게 된 월터는 필름의 행방에 대해 묻지만 숀은 자네가 깔고 앉고 있잖아진정 아름다운 것들은 관심을 바라지 않아.라고 답할 뿐이다숀의 말은 결국 삶의 정수는 모험과 개척을 통해서 쟁취하는 것이 아님을오히려 음지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한 일상 속에평범하고 지루하기 때문에 더 고귀하고 위대하게 느껴지는 일상의 삶 속에 있음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마지막 표지에 담겨진 의미는 진솔한 삶의 가치를 만들어 가기 위해 같은 시공간에 머물며 함께 노력해왔지만 화려한 축제 뒤편에 가려진 숨은 공로자들그들의 헌신에 표하는 경의와 존경이었다그들의 헌신과 노력은 히말라야 고산지대에 서식하며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실재하지 않는 유령으로 불리지만실존 동물 중 가장 아름답고 신비로운 동물로 꼽히는 눈표범과 닮아 있다진정 아름다운 것은 관심을 바라지 않는다는 숀의 말은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의미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13년 말에 개봉된 이 영화의 전 촬영과정은 디지털이 아닌 필름 카메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또한 실제 현장을 방문해 촬영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세트 촬영이나 컴퓨터그래픽 등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아이슬란드와 히말라야의 대자연을 그대로 카메라에 담았다영화를 보면서 디지털화가 진행되면서 사라져간인간의 온기가 느껴지던 아날로그적인 것에 대한 아련한 기억들이 되살아났다그리고 내 삶 속에 녹아 들어있는 수많은 잊혀지고 사라져간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형태와 이름으로 여전히 내 곁에 남아 있는 잡지와의 추억이 떠올랐다학창시절의 근간이 된 음악잡지 핫뮤직과 영화잡지 키노항상 비장한 마음으로 구입하지만 작심삼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던 굿모닝 팝스와 입이 트이는 영어 시리즈들한창 몸만들기에 빠져 있을 때 쿨가이 콘테스트까지 나가게 만든 멘즈헬스최근에 구독하고 있는 계간 문학동네와 Axt를 비롯한 문학잡지들에 이르기까지 잡지는 내 삶을 구성하는 하나의 영역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행복은 잡지 안에 있다.(Happiness in Magazines.)

 


브릿팝의 아이콘으로 추앙 받았던 밴드 블러(Blur)의 기타리스트 그레이엄 콕슨의 5번째 솔로앨범 제목이다내 취향이 온전히 고려되어 있는 한권의 잡지는 나에게 나의 영웅이 가장 화려하게 빛나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최신 트렌드를 온몸으로 표현해내고 있는 잡지광고 속 모델들의 미소에서는 향긋한 행복이 느껴졌다그레이엄 콕슨의 말처럼 이곳에 행복이 없다면 대체 어디에 행복이 있단 말인가?

 


2018년 서울국제도서전에서는 <잡지의 시대>라는 기획전이 열렸다잡지의 시대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인산인해를 이룬 유명 출판사의 부스에 비해 너무나 한산했다이곳에서 최근 독자들의 선택을 받고 있는 전문 에디터들이 만든 다양하고 독특한 형태의 잡지들을 만날 수 있었다기획전과 더불어 진행된 라운드테이블 분전에서는 편집장들의 생각도 들어볼 수 있었다.



기존의 잡지는 광고주와 독자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던 풍요로운 시대의 잡지다지금은 더 이상 풍요로운 시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하며 보스토크가 태어났다우리는 매호 새로운 주제로 새로운 독자를 만나는 것을 꿈꾼다구성디자인컨셉표지와 종이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새로움을 모색하고 있다.
잡지 보스토크 박지수 편집장 -

 


과거의 잡지는 발행부수가 중요했다잡지는 판매수익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었고 또 다른 수익원인 광고를 필요로 했다하지만 광고 유치는 많은 부수로 대표되는 인지도와 영향력이 있어야 가능했다메인 스트림 잡지가 '매스 저널리즘'을 지향하면서 대중의 흥미를 유발하며 빠르게 소비되는 '스낵 컬처'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잡지를 폐기 처분하더라도 일단은 많이 찍어내야 했고잡지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광고에 실린 물건을 사게 만드는 것이 되었다기자나 편집자를 꿈꿨지만 잡지를 계속 유지시키기 위해선 사업가가 되어야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토로하는 버진그룹 회장 리차드 브랜슨의 말은 기존의 잡지에서 광고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최근 광고와 자본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하면서 컨텐츠에 온전히 집중하는 형태의 독립잡지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독립잡지는 타겟 독자층을 명확히 하고그들이 공감할만한 주제를 선정하여 심층적이고 다각적인 시선으로 분석된 컨텐츠를 제공한다다수 대중을 위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독자층이 필요로 하는 깊이 있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다자신만의 취향을 추구하고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 깊이 알고 싶어 하는 독자들이 많아지면서최근의 잡지는 단순히 읽을거리가 아니라 자신을 대변해주는 브랜드가 되었다인터넷이라는 지식의 바다 속에서 통찰력 있는 전문 컨텐츠를 제시하는 잡지는 네비게이션으로정보의 큐레이터로 기능한다이슈를 회고적인 관점에서 다루는 느린 저널리즘인 최근의 잡지는 정보백화점이 아닌 정보미술관을 지향하고 있다.



이렇게 변화하는 잡지 가운데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잡지가 있다. 10개 언론사의 기자 20명의 재능기부로 탄생한 비정규직을 위한 특별잡지 꿀잠이었다지상에서 가장 따뜻한 잡지라는 슬로건처럼 꿀잠은 노동자들의 삶과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잡지 판매수익금 또한 비정규 노동자의 꿀잠을 위한 쉼터 건립기금으로 사용하고 있다.

잡지 꿀잠의 첫 페이지를 넘기며 나도 모르게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잡지 꿀잠의 첫 페이지는 잡지 속 화려한 광고에 익숙해진 내게 어쩌면 무심코 넘겨질 페이지였는지도 모르겠다잘 차려입은 여성 모델들의 모습은 충분히 눈길을 끌만한 것이었지만별다른 특별한 것이 없는 광고라고 생각했고광고의 대상 또한 내 관심 분야가 아닌 여성복이었기 때문이다페이지를 넘기려는 손가락을 주저하게 만들었던 건 여성모델의 사진 아래에 남겨진 글이었다.



아름다워요또렷하고 밝게 빛납니다오늘 당신의 하루 어땠나요?
어둡군요흐릿합니다누구인지왜 거기에 있는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청소를 하고 계셨군요깨끗해야 하는 것을 닦느라 더러워진 당신 손안의 걸레를 이제야 보았습니다오늘 당신의 하루 어땠나요?



문구를 읽고 나서 다시 사진을 보았다사진은 스튜디오에서 광고를 위해 촬영된 것이 아닌 LED조명으로 환하게 밝혀진 대형 옥외광고물을 찍은 것이었다그리고 사진 속에는 문구를 보고나서야 비로소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 또 하나 있었다모델의 밝은 미소를 부각시켜주는 조명판을 더 빛나게 하기 위해 청소 아주머니가 걸레로 닦고 있는 모습이 불빛에 비춰진 실루엣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자본주의의 꽃이라는 광고는 이윤추구를 위해 사람들의 눈을 잡아끌며 상냥한 인사를 건네고 있는 반면 사회의 버팀목인 노동은 어둠 속에 가려져 있었다.



어두운 곳에서는 밝은 곳이 잘 보이지만 밝은 조명 안에서 바라보면 어두운 부분이 잘 보이지 않는다어쩌면 우리는 특정부분만을 강조하는 스포트라이트로 인해 땀의 눈물과 소중함을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노동으로 일군 삶이야말로 자랑스럽고 떳떳해야 하고그 땀의 웃음이 밝고 아름답게 빛나야 하는 것은 아닐까노동이 웃음이 되는 세상노동이 보람이 되는 세상을 간절하게 꿈꾼다는 잡지 꿀잠의 존재이유와 지향점을 나는 첫 페이지를 넘기며 깨달았다한 장의 사진을 통해 잡지가 가지고 있는 정체성을 이 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잡지 꿀잠은 내게 '당신의 노동은 안녕한가?'라고 묻고 있었다.




'편의점의 코리도라스'라는 제목의 김별아 작가의 에세이도 가슴을 울렸다코리도라스는 우리에게 익숙한 금붕어 보다는 조금 비싸지만기타 열대어 중에서는 가장 싼 어종이다싸다는 건 쉽게 구할 수 있고또한 쉽게 갈아 치울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열대어를 처음 길러보신다면 코리도라스죠그놈은 어항 바닥에서 생활하면서바닥에 남아 있는 먹이까지 깨끗하게 처리하거든요물을 갈지 않아도 안 죽고먹이를 안줘도 바닥을 헤집고 다니며 스스로 해결하지요온순하고 부지런해서 정말 키우기 쉽고 청소도 잘하는 어종이예요고마운 쓰레기 처리 담당이죠.




작가는 도시의 깊은 검은 어둠 속에서 덩그렇게 홀로 빛나는 편의점을 어항에 비유한다편돌이라 불리는 편의점의 비정규직 아르바이트생은 그 어항 속에서 코리도라스가 된다자야 할 때 깨어 있어야 하고 제 때 식사도 하지 못하는 그들은 유통기한이 지나 폐기대상인 제품으로 배를 채운다사람이 음식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이 폐기 대상이 되어 사람에게 선택을 강요하는선택의 주체가 역전된 아이러니한 상황이다갈비찜과 간장게장 등 고급 요리의 이름으로 포장된 인스턴트 제품은 저렴한 가격으로 진짜 맛을 시늉한다.




편의점은 80년대 후반 소비 트렌드의 변화를 주도하며 등장했다드라마 속의 연인들은 최신 먹거리가 질서정연하게 정돈된 편의점에서 데이트를 즐겼고샐러리맨들에게 편의점은 창업 아이템 1순위였다하지만 요즈음의 편의점은 을()들의 공간을 대표한다편의점을 주로 찾는 고객들은 컵라면으로 허기를 달래는 취업준비생들과 소주 한잔으로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하는 노동자들이다최저임금 인상을 둘러싼 논쟁은 졸음과 진상손님들에게 시달리는 아르바이트생들과 임대료와 인건비카드 및 가맹점수수료에 허리가 휘는 점주간의 을()과 을()의 전쟁으로 불린다.



코리도라스들은 편의점이라는 도시의 어항에서 서로를 마주한다.
나는 코리도라스 팬더너는 코리도라스 스터바이...



기술의 발전은 무인 편의점까지 등장시켰다인공지능을 탑재한 결제 로봇이 안면인식을 통해 고객을 관리하고 대화와 상품추천결제 등의 고객 응대 서비스까지 제공한다어항 밖으로 밀려난 코리도라스들은 어디로 가게 될까문득 평창올림픽에서 화제가 된 로봇 물고기가 떠올랐다로봇 물고기는 중앙처리장치가 센서들의 신호를 읽어, 3등분된 몸을 연결하고 있는 모터에 신호를 보내 몸체와 지느러미를 순차적으로 움직여 살아 있는 물고기의 유영을 흉내 낸다스스로 장애물을 인지할 수 있고, 1회 충전만으로 하루 이상의 활동이 가능하다고 한다.



코리도라스는 영역싸움을 하지 않고여러마리씩 무리를 지어 뭉쳐다녀요.



디지털화되어 가는 세상 속에서도 우리는 워크맨과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듣는 히어로에 열광하고 대중들은 다시 LP판을 찾는다폴라로이드와 필름 카메라의 느림의 미학이 다시 주목받고여전히 종이에 매끈하게 인쇄된 잡지들을 읽는다최신 디지털 기술이 우리의 가슴을 울리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가슴 속에는 초월적인 존재를 통해서도 치유 받을 수 없는오직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구할 수 있는 따스함의 영역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다양한 형태와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코리도라스들의 삶에 꿀잠이 깃들길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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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조 사회 1 - 존재의 방식
도선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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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우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그의 등단작 <스파링>을 통해서였다고아원 출신의 문제아가 복싱 챔피언이 되는 다소 진부하다고 할 수 있는 성장 스토리에 흥미를 느낄 수 있었던 건 안정된 호흡 속에 매력적인 캐릭터와 세심한 심리묘사가 돋보였기 때문이었다또한성공에 이르는 과정보다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과 이로 인해 무너져 내리는 과정또 이를 극복하며 성숙해가는 과정에 더 중점을 둔 구성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이 낡고 닳은 소재를 2016년에 읽게 되다니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다니라는 심사평에 공감하며 한동안 소설이 주는 여운 속에 머물러 있었던 기억이 있다후속작 <저스티스맨>도 시대의 사회상을 반추할 수 있는 소설이었다익명성과 정의를 가장한 폭력이 사회악으로 표면화되는 과정을 추리소설 형식으로 표현한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하지만 전작에서 느낀 만족감과 신작에 대한 기대감 속에서 <모조사회>를 처음 접하게 되었을 때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현재에 머물러 있던 작가의 시선은 미래를 향하고 있었고작가는 이를 SF라는 예상치 못한 장르와 스타일로 구현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소설을 읽으며 어쩌면 SF야말로 작가의 몸에 맞는 옷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이 소설은 <모조사회>라는 이름처럼 어쩌면 먼 훗날 인류가 도달할지모를 미래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다루고 있다또한사회 부조리에 대한 문제 제기는 전작들과 맥을 같이하면서도 그 대안에 대한 고민까지 담고 있다특정 세계관과 시스템 속에서의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SF의 장르적 속성을 생각해볼 때 데뷔작부터 이어져 온 작가의 고민을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그릇은 SF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당신은 지금까지 당신의 세계를 살아왔다고 생각해요지금까지 살아온 세계가 진짜라고 믿느냐는 거예요. - 1권 P. 125 -

 

어느 날 도시 한복판에 대지진이 일어나면서 는 갑작스럽게 재난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리게 된다낯설고 신비한 공간에서 눈을 뜬 에게 사람들은 당신이 있는 곳은 지구상에서 인간이 살 수 있는 단 두 개의 대지 중 한 곳인 복지 자본 공동체라고 말한다인류의 헛된 망상이 한순간에 인류를 절멸케 한 바이러스를 출현시켰고살아남은 인류는 유일한청정구역으로 남은 좁은 반도에 새로운 도시 문명을 일구어냈지만 사회 시스템과 분배 방식에 대한 갈등으로 반도의 도시는 다시 모조사회와 복지 자본 공동체라는 두 개의 사회로 나뉘어 각각 독자적으로 성장해왔다는 것이다그러면서 이제까지 당신이 살아온 세계는 인공지능 중앙 통제시스템이 필요에 의해 구축한 시스템 아키텍처이며초확장 현실로 구현된 가상의 세계라고 말한다.


소설에서 모조사회는 반도라는 한정된 물리적 공간으로 인해 수직형으로 발전한 도시사회로 그려진다하늘을 찌를 듯한 지상의 빌딩과 동력 마련을 위해 지하 깊은 곳까지 개발된 모조사회는 한정된 자원 속에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권력구조도 수직화된 사회다메인 컴퓨터인 퀸과 중앙 통제 시스템이 위치한 원형 구조물의 이름이 콘클라베(Conclave)라는 사실에서 도시사회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교황을 선출하는 추기경단의 선거시스템이 인공지능에 의해 통제되는 시스템의 이름이 되었다는 건 과학이 신이고 종교인실용적 가치가 극대화된 도시사회를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반면 도시사회의 부조리와 불평등한 분배구조로부터 출발한 복지 자본 공동체는 태생적으로 수평사회를 지향하며 발전했다공동체는 자연 속에서 생태계와 공존하면서 공유와 조화와 균형을 최선의 미덕으로 여긴다.


 



소설 속 와 은 서로 상반된 두 사회를 상징하는 인물이다이들은 공동체의 일원이었지만이상향에 대한 타협할 수 없는 차이로 각자의 길을 걷는다과학기술 기반의 실용성을 중시한 는 공동체를 떠나 모조가 되었고과학기술의 잠재력을 인정하면서도 기술이 지향하는 방향과 가치에 대한 고민을 놓지 않았던 은 공동체에 남았다이러한 인물간의 대립은 소설 속에서 주요하게 언급되는 예술가 바스키아의 SAMO 크루를 연상시킨다바스키아는 친구 알 디아스와 SAMO (Same Old Shit) 라는 크루를 결성하며 뉴욕 소호거리를 캔버스 삼아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나갔다하지만 바스키아는 더 유명해지길 원했고반면에 디아스는 익명의 화가로 남길 원했다타협점을 찾지 못한 그들은 SAMO is Dead라는 낙서를 마지막으로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모조가 된 는 SAMO룸으로 칭한 자신의 공간에 을 억류한다영원히 27세의 젊은 화가로 남아 있는 바스키아는 소설에서 영원불멸의 삶과 이상향을 향한 인류간의 갈등을 상징하고 있다.


 

 


어차피 저기서 자기가 뭘 하고 사는지도 모르니까진실이 뭐가 중요하겠어자기만 행복하면 됐지안 그래? - 1권 P. 259 -

 

무지로부터 비롯되는 행복은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는 소설을 관통하는 중요한 질문 중 하나이다인구통제와 자원개발이란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도시사회는 신경회로 컨트롤러를 개발해낸다이는 양자나노기술을 이용하여 신경망을 장악하는 시스템으로 인간의 감각을 왜곡시키고 공간을 조작하여 가상화된 허구의 삶을 현실의 삶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하지만 진실이 왜곡된 삶이 진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불공정과 부조리에 관한 진실을 감추고문제 자체를 해결해야할 대상에서 배제시키는 시각이 사회 시스템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왜곡하고 축소시키는 것 아닐까마치 모조사회가 거짓의 모조 (模造)된 삶이 내포하고 있는 마력 (Mojo)으로 개인을 현혹시키며 착취하는 것처럼 말이다소설 속 의 생각처럼 거짓이란 한번 만들어지면 반드시 원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기 마련이고결국 그것이 진실 전체를 무너뜨리는 것 아닐까?


여러분의 정의가 정말 정의일까요만약 그게 정의라면 그것만이 유일한 정의일까요? - 2권 P. 38 -


소설 속에 등장하는 두 사회는 먼 미래에 인류가 도달할지도 모를 서로 다른 유토피아를 대변하고 있다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유토피아를 꿈꿀 수 밖에 없다인간은 현재의 삶을 딛고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존재이기 때문이다유토피아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대안으로서 바람직한 사회나 미래에 달성해야 할 모델이 되는 것이다이런 의미에서 유토피아니즘은 기본적으로 희망의 철학이다하지만 사회구성원 모두가 동의하는 유토피아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유토피아는 절망을 내포하는 것이기도 하다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이 주장하는 유토피아를 사회가 추구해야할 유일한 대안으로 강조할 때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로 변질될 수 있다누군가 바람직한 미래가 무엇인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그것을 거부하는 타인에게 강요할 때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유토피아는 유토피아를 강요하는 행위와 양립할 수 있을까?

 

작가가 제시하고 있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와 관련된 화두를 보면서 고리끼의 희곡 '밑바닥에서'가 떠올랐다싸구려 여인숙에서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티며 살아가는 밑바닥 삶들 앞에 어느 날 찾아온 노인은 희망이 된다사람들은 점차 그의 희망 섞인 말에 기대를 걸고 꿈꿔왔던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다하지만 노인이 사라진 후 희망에 가득 차 있던 이들은 냉혹한 현실에 직면하게 되면서 꿈꾸던 삶과 현실의 간극만큼의 충격을 안고 이전보다 더 밑바닥으로 추락한다밑바닥에서는 희망은 누구에게나 절실한 것이지만 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은 장밋빛 희망은 더 깊은 절망으로 이끄는 '()'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때로는 희망도 어떤 이들에겐 독이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진정한 절망은 '헛된 희망'을 동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토피아는 단순한 공상에 그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꿈을 간직하고 희망을 노래하는 것은 더 깊은 절망으로 이끄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하지만 우리는 희망하고실패하는 반복되는 과정을 거친 이후에야 비로소 진정으로 희망을 꿈꿀 수 있다현실의 디스토피아에 대한 대안으로 유토피아가 제시되고 디스토피아로 변질된 유토피아를 극복하기 위해 또 다른 유토피아를 추구하면서 인류는 발전해왔다앞으로도 거듭되는 실패를 감내하는 과정을 거치며 인류는 진보해나갈 것이다이상향은 혼자서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타인에게 강요하면서 달성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공동의 삶을 위해 희생하면서 또자발적으로 희생할 용의가 있는 이들이 모여 거대한 결속을 이루면서 이들이 함께 꾸는 꿈은 유토피아가 된다소설 속에서 는 자신의 기억을 되찾는 것을 포기하고인류의 새로운 희망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택한다어쩌면 더 큰 결속을 위해서는 기억 보다 망각과 용서가 필요한 것 아닐까결말의 충격적인 반전을 극복할 수 있는, 인간의 새로운 존재방식과 이상향에 대한 가능성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함께 하는 삶을 위한 자발적 희생과 기억을 이겨낸 용서는 유토피아를 향하는 길이 될 수 있다의 말처럼 행복했던 기억이 있다면 나머지는 감수할 가치가 있는 것이므로...

 

허허벌판에서 바라보는 세상의 끝과 누군가와 함께 보는 풍경은 분명히 다릅니다. - 2권 P. 1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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