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닌 그녀
전철 안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눈을 떴다. 나는 한양대 사회교육원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다. 슬쩍 눈을 뜨고는 마치 안 졸았던 사람처럼 태연하게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미 시외로 빠져나온 뒤라 그런지 승객도 별로 없이 한산하다. 맞은편에 구경하기 좋은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정말 심하게 입을 벌리고 자는 여자, 게다가 고개까지 뒤로 젖히고 있다. 그 여자는 자다가 한번씩 깨어 주위를 둘러보기도 했지만 신기하게도 주위 시선에 신경을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세번째 건너 옆자리에 앉아 있었던 여자. 무릎을 건너 건너서 시선을 옮겨갔던지라, 그녀의 얼굴을 보기 전에 내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스포츠센터 가방이었다. 가방끈을 비롯해 전체적으로 낡고 닳았지만, 재질과 디자인은 제법 세련된 가방으로 스포츠센터에 출입하던 누군가의 것이었으랴 싶었다.
원래의 주인이 다른 사람이었으리라 추측하는 것은, 그 가방을 품에 안고 있는 여자의 차림새가 노숙자의 모양새나 크게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군청색 낡은 점퍼에 짤막한 검은색 바지, 거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통굽신발, 그리고 손질하지 않은 긴 머리카락과 화장기 전혀 없는 부스스한 얼굴은 그녀가 노숙자이든 아니든간에 주위 사람들과는 다른 울타리에 속한 사람임을 뚜렷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가 아니었다. 고개를 꺾고 입도 벌리면서 자는 여자는 ‘우리’ 중 하나인지라 사람들이 친근하게 웃었지만, 그녀는 우리의 범주가 아니었다. 그녀 옆자리에 앉은 여자는 몸을 반대쪽으로 밀착시켜 그녀의 몸에 닿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고, 다른 승객들 역시 그녀를 쳐다보거나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마치 가까이 오는 것을 막는 둥근 동그라미가 그녀 주변에 둘러쳐져 있는 듯 했다.
나는 그녀를 한번씩 건너다보았다. 그녀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의식하지 않는다면 굳이 바라보지 않으려 애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가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도 나를 한번씩 건너다보았다. 별 것 아닌 그저 무심한 눈빛의 교환에 불과할지라도, 그것이 어느 정도의 연대감이나 최소한의 위안이라도 줄 수 있기를 나는 마음속으로 희망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과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정류장을 더 스쳤을 무렵, 할머니 한 분이 아이를 데리고 올라탔다. 나는 자리를 양보하고 바로 맞은편인 그녀 앞으로 가서 섰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녀에게서는 노숙자들에게서 흔히 풍기는 그런 냄새도 나고 있었다. 그녀 옆자리에 앉았던 세련된 중년 여자는 문 쪽에 자리가 나자 부리나케 그 자리로 몸을 옮겼고, 이제 그녀 옆자리엔 친구 사이인 듯 보이는 두 여자가 서로 몸을 꼭 붙여 앉아있었다. 창밖으로 흘러가는 풍경들을 바라보면서, 만약 이 허름한 여자가 어느 날 갑자기 부자가 되어 화려한 옷차림을 한다면 이 속에 끼일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녀는 노숙자 세계에도, 부자들의 세계에도 끼이지 못하는 외톨이가 되어 어쩌면 지금보다 더 초라하고 외로워질 것이다.
내릴 때가 가까워져 왔다. 나는 여전히 표정 없는 그녀를 일별하고 전철 밖으로 나왔다. 상큼한 봄바람이 몸과 마음을 가볍게 털어준다. 나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역 밖으로 나와 자전거 주차장으로 향했다. 전철역에서 집까지는 자전거로 15분. 산들바람을 만끽하면서 천천히 패달을 밟는다. 이제 허름한 그녀는 내 머리 속에 사라지고 없다. 내가 그녀에게 잠시나마 가졌던 관심은 그녀의 삶에 어떤 참견도 하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질 뿐이라는 것을, 내 삶 속에 그녀를 들여놓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질 뿐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녀의 무표정한 눈빛이 변하지 않았던 것은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녀는 내 얄팍한 선심이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
나는 왜 더 이상 가까이 가지 못하는 것일까. 그저 지저분한 것이 싫어서? 아니면 내 삶도 버거운데 남의 버거운 삶까지 관여하는 것이 싫어서? 모르겠다... 아마도 그것은 그녀의 표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를 벗어난 이의 표정을 갖고 있었던 그녀. 어쩌면 나는 그녀가 아니라 그 표정이, 우리의 숨은 얼굴일 수도 있는 그 표정이 두려운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