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로우크릭 커뮤니티교회
린.빌 하이벨스 / 두란노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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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으면서 먼저는 빌 하이벨스 목사를 하나님께서 쓰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형교회 목사님들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그 시대에 감당한 일이 있어서 그렇게 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과연 구도자의 사도였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라고 하면서 유대인들만의 전유물이라 생각했던 유대특권의식을 깨고 세계적인 복음, 우주적 복음과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에, 교회 공동체에 놓치기 쉬운 끼리끼리 의식이나, 교회안에 세상, 우물안에 공동체, 먹기만 즐기고 운동하길 꺼려하는 생명력 없는 공동체를 꾸려 왔으나, 윌로우 크릭은 다르다. 처음부터 관심은 세상과 비그리스도인에게 향한다. 그것이 어쩌면 이들 교회공동체의 생명력의 비밀이고 건강함을 유지하고 성령이 역사하는 통로가 아닐까?

담임목사의 비전, 교회의 부름이라고 세운 비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비그리스도인을 온전히 헌신된 주님의 제자로 만드는 것이라는 비전을 세우고 그 비전에 따라 교회전체가 움직이는 모습, 함께 헌신하는 모습이 놀랍고, 탁월함을 추구하는(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습은 참으로 본받을 만 하다. 주께하듯 우리도 해야하지 않겠는가?


빌 하이벨스 목사의 리더쉽은 참으로 대단하다. 그는 진정 지도력의 은사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결단력있고, 비전을 보며, 전달할 줄 알고, 동기부여를 하며 격려할 줄 알고 위임하고 세워주고, 운영할 줄 안다. 확실히 은사에 맞는 사역이 필요할 듯 하다. 하나님 나라 완성의 비전을 보고 그 열정을 소유하였는가? 지도력의 은사를 가진자여, 그들이 진정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를 발휘토록 세워주라.

그의 성경 연구의 다양성, 비전을 향한 열정에서 오지 않았을까? 팀 리더쉽 또한 도전이다. 나도 효과적인 팀 리더쉽의 본을 받고 싶다. 21C를 향한 하나님의 교회 사역과 다스림의 패러다임은 은사중심임을 알 수 있으나, 무엇보다 성경을 성경대로 증언하고, 성경의 말씀과 진리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남이 진정 필요하며, 말씀대로 사는 공동체가 절실함을 안다. 그도 또한 성경에 정통하였던 것이다. 자기의 복음이 나온 것이다.

나의 사역에 적용. 확고한 공동체의 부르심을 확인하라. 그리고 팀 리더쉽을 활용하고 리더를 키우라. 무엇보다 부르심 속에 비전을 보고, 핵심멤버와 나누며 열정을 품으라. 그러나 사역은 쉽고 일하기는 쉬우나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은 오히려 더 어렵다. 그러나 함께 해야 한다. 무시할 수 없다. 나를 다스리고, 나를 관리하고, 하나님의 뜻을 묻고, 기도하고,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은사를 살펴 합당한 위치와 역할로 주를 온전히 섬기고 주의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도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눈을 열어 비신자를 바라봐야 한다. 그들이 복음을 기다리고 있다. 앞으로 준비할 2003년 6.8일 전도집회도 캠퍼스에서 전하는 시간들도 기다려 진다.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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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누리 교회 청년부 비전과 사역
라준석 지음 / 두란노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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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누리교회는 과거 오랫동안 나의 관심속에 있었다. 역동적인 예배, 앞서가는 사역, 큰 비전, 쉼없이 계속되는 집회들...

군대에서 군종병으로 근무하면서 가보게 된 온누리 사역축제를 시작으로 나는 많은 모임과 집회, 축제들을 참석하면서 온누리에서 말하는 비전을 보고 함께 감격해 하고 도전도 받고, 거기서 들고 배운 것을 다른사람들에게 나누기도 했다. 지금은 약간의 다른 시각으로 보긴 하지만 온누리의 사역은 분명 이 시대와 함께 호흡하며, 현존하는 많은 교회보다 앞서가는 면이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말씀에 깊이가 약하다는 점이고, 다양한 문화에 부분을 건드리면서, 활동 폭을 넓히고자 하는 비전이 있고, 세상 속에 침투하고자하는 비전과 영향력 있는 크리스챤, 역동적인 예배, 움직이는 사역, 많은 사역의 기회를 제공하다 보니 넓게 또는 다양한 면을 건드리긴 해도, 깊이 있는 사상적인 터치가 약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를 보는 안목 속에서 나오는 시대의 대안을 제시하기에는 아쉬운 면이 있다.


 바라기는 온누리 교회 목사님들의 말씀에 대한 연구와 심도깊은 성경의 사상에 대한 연구 속에서 나오는 깊이있는 대안제시가 필요할 듯 하다.

나는 고민하고 있다. 과연 청중의 중심,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사역을 해야하는 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말씀을 증언하는 사역을 해야 하는 가? 세상적인 사람이 모이게 하는 교회경영을 해야할까? 말씀을 증언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룰까? 이분법적으로 나누긴 그렇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속에서 이뤄지고 성취될 수 도있다. 그러나 성경속의 사상을 접근하고, 바로세워지기엔 크나큰 아픔또한 따를 수 있는 데, 사람의 필요에 너무집착하면 많이 반대쪽으로 와버린 이 세대를 바로 세우기란 너무 힘겨운 일일수 있다.

라준석 목사님은 하용조 목사님을 통해 비전과 영향을 많이 받은 듯 하다. 하용조 목사님은 김준곤 목사님을 통해 비전을 배웠다고 말했다. 하용조 목사님은 큰 비전을 갖고, 뜨거운 열정과 기도, 헌신, 말씀을 전함을 통해 오늘의 온누리 교회를 이뤘고, 93년쯤 부터는 성령사역을 선포하여 청년들이 구름 Ep같이 모여드는 것을 목도하였다고 한다. 청년들은 확실히 굶주려 있다. 나는 이 굶주린 청년들, 갈길몰라 방황하는 청년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수 있겠는가?

이책엔 라준석 청년목회자의 예배, 양육, 사역과 선교, 행복관, 비전과 리더쉽의 단원을 통해 교회의 사역을 소개하고 있다. 그 담임목사님의 그 담당사역자라는 말을 실감한다. 청년을 향한 뜨거운 열정, 오픈된 사고, 앞서가는 의식, 후하고 넓은 마음(통이라고 부르고 싶다). 나는 그렇게 통이 크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내가 배워야 할 마음은 청년을 향한 뜨거운 열정, 사역자로서의 소명감, 그리고 아낌없이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마음, 책을 사는 것을 줄여서라도 영혼의 필요를 채워주고 사랑하고 돌보는 마음이 있을 때 저들의 마음문이 열리지 않을까? 저자가 말하는 행복관. 크리스챤은 행복해야한다는 것은 약간 어패가 있는 듯 하다.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주를 인식하고 견딘다. 주를 바라보며 소망을 갖는다는 표현이 적당하지 않을 까?

또한 한편으로 차근차근 성경을 가르쳐야 한다. 성경속의 생각을 전해야 한다. 내게 컨텐츠를 갖출 우선순위, 사명선언, 시간관리가 필요할 듯 싶다. 많이 만나고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나의 삶은 점점 주님을 닮아가며 제자로서 살고 있는 가를 점검해 보면서 성화의 열정, 주님을 닮아가고자, 그리고 제자 낚는 제자로서의 삶을 향한 열정이 필요할 듯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상적인 학문으로도 발달되어 있는 조직의 경영 면에서도 프로가 되어야 겠다는 생각이다. 조직, 기획, 앞서가는 커뮤니케이션 사고, 앞서가는 의식, 창조적 사고, 배려하는 마음, 그러나 주도적이고, 분명한 목표를 가지며, 소중한 것을 먼저하고 저력을 쌓아가는 사역을 했기에 여기까지 온누리가 오지 않았을 까? 또한 상호이익을 추구하고, 경청하는 사고를 가지며, 시너지를 창출하고, 심신을 단련해온 리더들이 있었기에 이런 사역이 가능했으리라 본다.

 나의 사역지인 1청년부도 비전과 꿈을 가진다. 나만의 비전인가? 공동체가 가야할, 함께 봐야할 비전인가? 함께 기도하고 말씀보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보이시리라. 세상의 공동체와는 다른 하나님의 공동체를 이루고, 함께 뜻을 모두어 주의 나라를 확장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시간이 오게하고, 말씀을 계대하리라. 서로를 향한 기도와 사랑을 갖고, 먼저 말씀이 바로 선포되는 채널을 만들고 싶다. 주님 예배가 시작되도록 도와주세요. 함께 그런 얘기가 오갈수 있도록 저를 붙잡아 주세요. 많이 나약해져 있습니다. 힘을 주시길 기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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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간도 1 [dts]
유위강 감독, 유덕화 외 출연 / 스타맥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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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조직’에 관한 영화가 많이 만들어진다. 홍콩영화도 ‘느와르’라는 독특한 영화장르가 판을 쳤다.

이 영화 또한 폭력조직과 경찰간의 숨막히는 첩보, 속고속이는 전쟁과 같은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무간도는 지옥이란 뜻이란다. 결국 조직에서 경찰로 심어논 자가 나중에는 속이고 제거해서 홀로 살아 남는 데, 그 사람이 무간도에 갈 사람이란 뜻으로 말하려 하는 걸까?


악을 제거한다는 자체가 현실의 법자체로 볼때 어려운게 사실이다. 경찰도 속여가면서 악한이들이라고 불리는 사람을 제거하고자 애쓴다. 법을 어기지 않으면 악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인가?


또한 악을 제거하기위한 잘못된 모든 속임과 위장들은 어떤 기준에 의해 정당화 될 수 있단 말인가? 도무지 기준을 찾기 어렵다. 십자군 전쟁도, 미 대륙의 개척을 위한 인디언의 학살도...

내 좁은 생각으론 이 세상이 너무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다. 말씀을 기준으로 삼으려고 하지도 않고, 말씀을 절대라고 인정치도 않는 세상에서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어떤 메시지를 증거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믿고, 그 분의 뜻대로 전할 때 주께서 깨닫게 하시고, 그 진리가 역사하리라.


쉽지않은 세상이다. 나도 이세상에 동화되고, 이 세상순리에 맞장구칠까 두렵다. 하루라도 깨어있지 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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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는 책이 몇 달째 베스트셀러에 올라와있다. 얼마 전에 읽어봤는데 참 괜찮은 책인 것 같다. 지난주 평강과 화목에 대해 설교를 하면서, 우리는 화목케 되었고 화목케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화목케 하는 가장 큰 무기이자, 도구는 칭찬이다.

 사람은 어떤 자극이 왔을 때 반응할 수 있는 존재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인지할 수 있고, 판단해서 행동할 수 있는 존재로 우리를 창조하셨다. 그 자극과 반응사이에 커다란 간격 또한 우리에게 자유의지의 여지로 주셨다. 이 여지를 잘 활용하면 낙심된 사람에게 큰 용기를 줄 수 있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구원의 소망을 줄 수 있으며, 잘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 더 잘할 수 있도록 마음껏 격려도 해 줄 수 있다. 이것은 칭찬의 위력이다.

뭐 잘한 일이 있어야 칭찬을 하지? 나는 올곧은 사람(^.^)이기 때문에 절대 빈말은 못한다. 이것이 나의 태도였다. 내가 보기에 잘하면 칭찬, 못하면 무관심이나 나에게도 피해를 주면 부정적 반응을 보인 것이 나였다. 그런데 잘못했다고 해서 무조건 잘못을 드러내고, 꾸짖기만 하면 안 된다. 바른 반응을 보여야 한다. 우리는 잘못한 것을 지적하기는 쉬운데 잘한 것을 칭찬해주기는 어렵다. 내가 그의 잘못에 지적하고 정죄할 권리가 있는가? 그를 아끼기 때문에 다음에는 그렇게 안하게 하려고? 그것도 죄 된 본성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우리가 판단자가 되어서 잘잘못을 구별해내는 판단자가 되려는 태도 말이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지만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 정말 그를 사랑한다면 그의 잘못을 드러내서 우리의 입으로 꾸짖기 보다는 하나님 앞에, 말씀 앞에 서게 해주어서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 가장 사랑하는 태도일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죠?’라고 묻는 다면 로마서 12장 15,16,18절을 나누고 싶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스스로 낮은 데에서 처해서 바라보라. 그리고 모든 사람으로 평화하라. 이것이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길임을 보여준다.

사람은 우는 자들을 보면 동정심이 들어서 그런지 함께 눈물을 흘리고 울어준다. 그러나 즐거워하는 자, 잘한 자를 보면 왠지 모를 질투감이 몰려오고 그를 낮추어야 내가 편안한 마음이 어느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라고 하면서 정작 자신은 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보지 않고, 저 사람이 내 입장을 생각해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한다. 이야~ 이것이 내 모습이구나!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의 저자는 잘못을 했을 때 하는 전환반응과 칭찬의 고래반응으로 사람들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았다. 잠깐 소개하면 전환반응은 5단계가 있다. 1단계, 질책 없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라. 2단계, 부정적인 파급효과를 알게 하라. 3단계, 타당하다면 내가 책임을 져라. 4단계, 일을 분명하게 이해했는지 확인하라. 5단계, 신뢰와 확신을 표현하라. 상대가 원하지 않은 행동을 했을 때 다루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다. 잘못을 말할 때는 항상 그 사람에 입장에서 공감하며, 함께 아파해야할 것 아닌가? 이러는 가운데 그는 안도감과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된다. 성경적인 생각이다.  나는 그 변화하고자 하는 과정을 또한 칭찬하고 격려해 주는 것이다.

 고래반응은 참 신선했는데 4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1단계, 즉시 칭찬하라. 2단계, 구체적으로 칭찬하라. 3단계, 긍정적인 감정을 공유하라. 4단계, 계속 잘하도록 격려하라.

 우리는 아이가 슬퍼하거나 잘못하면 달래고 꾸중하기 바쁜데, 오히려 즐거워하고 잘한 일에 관심을 더 가지고 함께 기뻐하고 칭찬하긴 어렵다. 그러나 그런 기쁨과 칭찬과 격려에 더 집중하는 가운데 아이는 무엇이 부모를 기쁘게 하는지를 알게 된다. 우리의 공동체는 주 안에서 선으로 악을 이기는 기쁨이 넘쳐날 줄 믿는다. 죄에서 이기는 것이 죄의 목록을 다 들춰내서 ‘이거 안하게 해 주세요’라는 고백보다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 지체를 사랑하는 일, 진심으로 칭찬하고 격려하는 일을 통해 그의 지친 어깨는 펴지고, 사랑과 선으로 회복과 치유가 일어나고, 악이 정복되는 역사가 나타날 것임을 믿는다. 이러면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학교에 얼마나 멋진 일이 많이 일어날까!!  

 하나님과 사람사이, 사람과 사람사이에 화목케 하는 것과 관련 없는 비전은 더 이상 비전이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그것은 야망에 불과하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 앞에 세워주고,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되어 존귀한 자라 인정받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의 공동체가 당신으로 인해 기쁘고, 당신은 우리의 공동체에 없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있음으로 우리의 공동체가 있습니다. 당신은 너무 멋있습니다. 오늘 참 아름답네요. 반찬이 어쩜 이렇게 맛있을 수 있죠? 요즘 학업이 많은가 봐요. 열심히 하는 그대가 멋져 보여요 힘내세요(교회 늦게 오면).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칭찬을 멋쩍어 하는 경상도 싸나이가 많은 예수가족교회. 잘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정말 칭찬은 정말 예수가족을 춤추게 할 것 같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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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하나님의 나라


 들어가면서...

이 책을 처음 소개 받은 것은 대학교 1학년 때 인 93년이다. 그때당시 한참 신앙에 대한 불확실성과 회의를 가졌었다. 그때 교회의 나의 순장님은 이 책을 읽어보라고 하셨는 데, 신앙의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었다. 모태신앙인 나에게 있어서는 이책을 보면서 회심(마음을 돌이킴.회의에서->확신으로^_^)했다고나 할까? 이 책은 성경의 통일성을 알려주었다. 20년간 신앙생활하고 막연했던 성경이고 말씀이었지만 하나님이 성경 속에 이렇게 통일성 있고, 일관된 말씀을 하셨다면 분명히 살아계시고, 지금도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이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나의 신앙에는 활력, 하나님이 보고 계시다는 확신, 내 삶을 더욱 열정적이며,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위한 진정한 헌신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결단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서론

이 책은 성경을 읽을 때만다 부딪히는 문제인 어떻게 고대에 쓰여진 그 본문의 의미를 오늘의 세계에 사는 우리에게 바르게 적용하는 가 하는 점을 다루고 있다. 곧 간격 메꾸는 다리 역할을 하기 위해 쓰여졌는 데 그 다리를 세우려면 어떤 종류의 간격이 존재하는 가를 먼저 알아야 하고, 성경의 기본 구조를 앎으로 이 구조위에서 구약 및 성경 전체를 좀 더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을 살아있는 통일체로서 보자.


 제 1장. 구약성경을 읽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1. 먼저 질문해 보자. 읽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구약은 수세기 동안 복음시대의 사건들과 적절한 연관을 갖고 있지 못했으므로 전(前)기독교적인 것으로 보였을 뿐아니라, 저급 기독교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간주되었다. 어떤 사람은 너무 문자적으로 있는 그대로 구약을 적용하려하고, 어떤 이는 자신들과는 완전히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고, 어떤이는 전체적으로 건조하고 지루하고, 장황,귀찮,혼란스러워서 읽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 그러면 읽는 이유는 무엇인가? 구약도 하나님의 계시라는 확신 때문이고, 올바르게 해석된다면, 모두에게 더 많은 흥미를 불러 일으킬 것이다.


2. 알레고리적 해석 vs 종교개혁시대의 해석

성경의 통일성을 파악치 못함으로 초기의 성경 강해자 들은 거짓된 길들로 빠지고 말았다. 자연적인 의미 뒤에 감춰진 ‘영적’인 의미를 찾아내는 일을 하는 것이다. 신약의 내용에 의해, 혹 후에는 교회의 교리에 의해 조절되었기에 합법적인 해석 방법인 듯 보였으나, 알레고리는 신약이 구약을 사용할 때 신약 자체가 적용한 그 조절 방식을 취하지 못 하엿고, 그 대신 구약의 자연적인 의미와 신약의 가르침과의 연관성이 개인의 독창성에 내맡겨질 수 밖에 없었다.

  ex. 어거스틴의 알레고리적 해석 

* 종교개혁의 길.

성경의 권위를 되찾을 때 교회와 구원에 대한 성경적 교리 뿐만 아니라, 성경에 대한 성경적 교리도 재확립하였다. 따라서 개신교의 해석법은 성경의(분명하며 또한 성경 스스로 해석하는) 명료성이라는 개념에 기초된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 밖 - 이른 바 무오한 교회 -에서 가해지는 해석의 권위를 제거함으로써, 성경 자체에 내재된 해석의 원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활용하였다.

3 sola - sola              ( human experimental side )

            sola              ( God's inintitive side)

            sola              ( sole source of authority for christian & the church )

이 모든 것이 christcentric한 표현이다. 구약의 자연적이고 역사적인 의미가 그리스도와 유기적인 연관성을 지니므로 의미를 갖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데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도 그분의 은혜의 사역인 복음 속에서, 즉 나사렛 예수이신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그 절정에 이르는, 살아 움직이는 한 역사의 한 부분이 되는 것. 즉 복음은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예수님의 역사를 통하여 활동하시는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신구약성경은 그 자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과정과 인간을 향한 하나님 자신의 자기계시(self-disclosure) 과정을 전개시켜 놓은 것.


 구약성경은 모두를 위한 것인가?

신약성경 때문이다. 신약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이 성취되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데, 이 약속들은 오직 구약성경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즉 약속의 성취는 오직 그 약속들이 담겨 있는 문맥 안에서라야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신약은 구약에 대한 지식을 전제하고 있다.

구약은 성경이며, 이 성경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으며, 구약은 신약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 가를 근거해서 풀어야한다. 신약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약에 대해 권위있는 해석을 제시해 주는 것이기에 그렇다. 즉 구약의 목표인 복음의 구조를 통해서 구약을 보아야 한다.

구원역사는 진행해나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구원역사의 진행과정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그 목표와 초점을 두며, 거기서 그 성취가 이루어 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역사적 사실들이 오늘날 자주, 개인의 주관적인 영적 체험을 강조하는 다소 신비적인 풍조의 우세로 인해 과소평가되고 있다. 그 복음을 믿는 믿음이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약 2천년 전에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안에서 어떤 일을 행하셨다는 선포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것을 확고히 고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오늘날에는 그 구원 얻는 믿음이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것에 대한 신뢰라고 더 많이 묘사되고, 개인적인 경험으로만 생각되고 있다. 거듭남, 믿음, 성화는 중요하지만 복음의 열매들이다. 이 객관적(구원 역사적)인 사실이 파악될 때에야만 비로소 개개인 그리스도인의 주관적인 경험도 이해될 수 있다. 성경전체의 연관성과 통일성을 아는 관점 즉 'total perspective'는 정말 중요하다


 제 2장. 간격 메꾸기

간격은 시대와 문화의 간격이다. 역사적 문맥의 차이.

* 갈라디아 교인과 우리. 1세기와 21세기의 차이.

- 요 1:12 전도와 연관성? 그러나 1차적으로 본래의미는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메시야로서 육체적으로, 또 문자 그대로 오심을 말하는 것. 대부분 유대인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하고, 인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영접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 인물중심의 성경연구 맹점 - 먼저 그 인물들과 사건들의 역사적, 신학적 독특성을 고려해야한다.


* 해석의 필요성 - etenal relevance, historical particularity사이의 간격.

성경 전체를 꿰뚫는 그런 통일된 주제가 있다면, 성경 메시지의 구조는 성경 해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될 것이다.

- 문맥(context)을 무시한 본문은 변명,구실,핑게(pretext)이다. 함부로 뽑아서 사용해서는 안된다.

즉 성경은 통일성을 지닌 문서임을 기억하자. 그 통일성이 진정한 의미를 지니려면 어떤 성경 본문이든지 그 실질적인 문맥은 성경전체가 되어야하며, 주어진 성경본문이 직접적인 문맥 뿐 아니라, 성경 전체안에 계시된 구원의 전체적인 계획과도 연관을 가져야 그 의미가 더욱 크게 드러나게 된다.

* 요약 - 어떤 한 text는 성경 전체에서 시작되며, 점점 좁혀가서 그 본문의 의미를 비춰봐야 된다.


 제 3장. 구약 성경은 무엇인가?

1. 문학적(literal)인 면.

2. 역사적(historical)인 면.

3. 신학적(theological)인 면.


1. 문학적(literal).

- genre : 율법서, 역사서, 선지서, 시가서. 문자적인 해석이나 단 한가지 해석 방법만을 고집하는 것은 주의하라. 장르별로 접근해야 한다.


2. 역사적(historical)인 면

- 조감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시간과 역사를 초월하여 존재하시지만, 하나님은 역사속에서 활동하시기 때문이다(우리의 인식을 위해). 연관성없이 활동하시는 게 아니라 하나의 일관된 목적을 가지시고 역사의 전과정에서 활동하신다.

구약성경의 역사는 이스라엘만의 역사가 아니며, 하나의 종교 역사 또한 아니다. 훨씬 그 이상이다. 신적, 신학적 역사이다. 종교 역사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다루심을 쓴 하나님 자신의 기록인 것이다.

즉 목적을 지닌 역사이며, 하나님의 활동으로서, 하나님의 성품에 따라 판단되어야 할 인간의 활동으로서 그 사건들을 서술하였다.

하나님의 계시를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들과 의도들을 선포하심으로 인간에게 말씀하시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에 기초하여 활동하시며, 하나님께서 그 사건들을 자신의 말씀으로 해석하시는 이 모든 것을 기록함으로써 계속 증거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이 그 역사의 기록을 조정하는 것이다.

 cf. E.H Car의 역사란 무엇인가?


3. 신학적(theological)인 면.

- 신학이란 무엇인가? 하나님 자신께서 계시하신 하나님에 관한 지식. 성경신학이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인간의 역사 속에서 활동하신 바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연구이다. 성경 연구에 가장 중요한 관심은 하나님의 계시이며, 그 역사라는 시간 속에서 그 계시의 흐름이다.

* 성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의 피라미드


- 우리는 우선 계시, 즉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 가와 신학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것을 그 분께서 말씀하시고 활동하시는 문맥(역사)과 분리시켜서는 안되며, 그분께서 자신의 활동을 말씀하시는 방법(문학)과 분리시켜도 안된다. 그러면 우리는 성경의 다양성과 복합성을 무시하지 않은 채 성경의 본질적인 통일성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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