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이란 무엇인가?

상승이다. 자기부인이다. 이전의 자아에 대한 부인이다. 이전 자아의 모습이 불완전하다는 것에 대한 인정과 더 깊은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과 일치된 영혼의 교제를 향한 갈망의 실현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불완전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나, 나는 불완전하다는 인정이다. 하나님의 영은 내속에서 완전하게 역사하시나 나는 그 영의 요구에 따르기를 싫어하고, 오래 담겨 있던 내 영혼의 찌든 때가 거룩한 영의 요구, 하나님앞에 선 인간으로서 본연의 모습으로의 회귀가 부자연스럽고 어려울 때가 많이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인생은 지속적인 하나님을 닮아감으로, 하나님의 태초에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부여해 주셨던 그 존재로의 회귀이다. 회복이다. 이것을 신학용어로는 성화라고도 하지만, 하나님이 이끌어가시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나 자신의 능동적인 동참과 내 인격에의 적극적인 반응, 자발적인 순종, 자기를 깨고, 현재의 껍질을 벗고 날마다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불가능한 과정이기도 하다. 곧 육체의 연습도 며칠을 운동을 하다가 안하면 다시 군살이 끼기 시작하고, 과거의 게으름의 생활이 다시 반복되려 하듯, 내 영혼에 지속적인 자각과 훈련은 필수적이다.

   경건의 훈련이란 무엇인가?

육체의 연습도 유익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속에 살아가는 모든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범사에 유익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그분의 성품으로 닮아감으로 나의 선택과 그분의 선택이 일치되는 자리에까지 가는 것이다. 그것은 곧 다른 어떤것에 의존함으로 나의 인생을 의탁하고, 또 실망해서 되돌아오는 불완전한 쳇바퀴의 반복이 아닌 완전한 존재를 만나 그분께 의탁하고, 그분과 동행하는 삶의 시작이며 하나님만이 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고,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자리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에 대한 자각이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홀로 섬’이라고 말한다. 이 홀로선 자아는 성령에 의해 지배받게 되며 그리하여 결국엔 하나님의 역사 속에, 그 나라와 계획과 경륜 속에 자신의 삶을 동참시키고, 일치시키는 역사 속에 깨어남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 사람은 다시 다른 사람과의 관계속으로 나와 내 인생에 찾아온 모든 손님과의 따뜻이 맞이함, 봉사의 자리, 그들 각자가 하나님앞에 홀로서도록 도와주는 자리에 까지가 먼저 선 사람의 사명이요 역할이다. 이 전 과정들이 훈련이다. 즉 상승이요, 상승이란 곧 이전의 나에 대한 부인과 내 것을 내려놓는 아픔을 경험해야 한다. 아쉬움, 미련, 그리고 자기 살을 떼어놓아야 하는 듯한 아픔을 경험하게 된다. 롯의 처를 생각해 보라. 멸망받고있는 소돔성에 대해 화려한 과거에 대한 미련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어김으로 소금기둥이 되지 않았던가? 아무리 작더라도 이전의 나에 대한 부인, 나의 환경, 나의 Background, 나의 편의와 안락에 대한 죽음이 우선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상승은 없다. 하나님은 편안한 가운데서 하나님앞으로의 상승을 허락지 않으셨다. 사실 그것은 하나님의 잘못이 아닌 우리의 죄성 때문에 생겨난 결과이며 그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으로서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로의 이끄심에는 고난이 따르는 것이다. 물질의 축복이나, 나의 성공 그 자체가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성공적으로 이끌수 없다. 오히려 그렇게 된 결과에 대한 나의 무익함과 나약함에 대한 고백과 하나님앞에서의 자기부인이 없이는 자기의 의와 잘남이 더 드러내 보이려는 내 영혼의 죄성을 모두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사다리를 탐에 있어서도 다음 윗 사다리로 발을 내 딪는 그 순간은 이전 사다리에서 발을 내 딪고 공(空)의 상태에 먼저 이르는 것 같이(떠있는 공(空)의 상태는 두려움이다) 더 윗단계로의 상승은 공의 두려움의 상태, 이전의 아랫사다리로의 부인이 앞서지 않는 한 나의 존재로서의 상승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상승을 위한 자리와 훈련은 요구된다. 


  군대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군대는 싸움위해 훈련하고,준비하고, 또한 전쟁시에 직접 싸우는 곳이다. 한국의 군대는 육체의 연습이 가장 우선시 되지만 영혼의 군대는 경건의 훈련이 중요하다. Q.T 한다고 모든 훈련을 마쳤다고 생각하지 말라. 싸움은 총만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영적 전쟁은 훨씬 더 심각하다. Q.T만을 해서 싸워 이길 세상이 아니다. 이 시대의 싸움, 이 시대 속에 하나님의 때, 시간, 나라를 구출해내는 가장 큰 싸움(엡5:15, 골4:5)은 사람의 사고,생각,습관을 지배해서 행동을 하게끔하는 세계관, 사상이요, 그것(관점)을 갖게하는 본질과 원칙의 문제이다. 현 시대는 진리의 상대화, 절대적 가치기준의 부재의 시대이다(휴머니즘의 특징). 이것을 어거지로 ‘예수 믿어, 진리라니까, 이게 진짜야’의 무대포의 전도가 효과를 볼 때가 있었다. 그때는 전쟁후 영혼의 갈급함속에 있을 때 가능했으나 지금,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는 것 같은 이 때엔 그들의 생각속에, 문화, 지식, 가치관속에 들어가 진정한 부족에 대해 드러내어 줌으로, 그리고 그 부족함앞에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고 완전한 존재에로, 자신을 택하시고, 부르신 그분께로의 회귀함에 대한 강권과 설득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더 큰 싸움을 해야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영혼의 군대는 어떻게 훈련받는 곳인가?

먼저 떠남이다. 군대입대하는 모든 사람은 머리를 자르고 부모,친구,형제들과 작별을 하고 입대를 한다. 즉 군사로 모집된 자는 자기 생활에 얽메이지 않는다(딤후2:4). 26개월, 적어도 6개월, 1년은 떠나보자. 자기 생활에 얽메였던 모든 인간관계, 세상의 이해관계, 물질적 유혹들을 벗어버리고 떠나자. 인생자체가 나그네로서의 떠남의 과정이지만 한 순간에 모든 것이 인식되고 성숙되는 것이 아니다. 과정과 단계가 있는 것이다. 어학연수나, 새로운 직장, 외국에서의 생활기회, 군생활, 새로운 학교로 입학.. 이 모든 것들이 지금의 환경과 현재로서의 탈출의 중요한 계기이다. 상승의 기회로 삼자. 본인도 군대에서 26개월간, 미국에서 1년간 영혼의 군대에 입대한 적이 있다. 과거의 나에서 떠나 있었던 것이다. 그 기간 나는  많은 훈련들을, 연단들을, 하나님께서 나를 깨뜨리심을, 내 스스로 나를 깨뜨릴 수 없는 아쉬움과 두려움 속에 있을 때에 친히 나의 연약한 부분, 깨져야할 부분을 드러내 주셨다. 그 드러난 현실과 연약함 앞에 나는 온몸으로 반응하고 신음했다. 나의 한계를 절실히 절감했다 그리고 몸부림 쳤다. 주님 도와주세요. 당시에는 아픔이 있더라도 곧 나는 영혼의 깊은 평안함과 여유, 성숙해짐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나는 계속 영혼의 군대속에 제대하지 않고 입대한 채로 존재해 있다.    


  나는 어떻게 영혼의 군대생활을 하는 중인가?

더 큰 싸움을 위한 장교훈련을 받고 있는 중이다. 시키는 것 만하고, 눈치만 힐끔힐끔 보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것은 이등병 때의 얘기이다. 열외 받으면 좋아하고, 내가 안 다치거나, 내가 걸리지 않으면 기뻐하는 것은 사병 때의 일이다. 이제는 지도자 훈련과정에 있다. 여러분도 자원해서 입대할 생각은 없는 가? 영혼의 군대에 장교훈련 말이다. 가장 큰 훈련은 성경과 언어의 훈련이다. 다분히 감정적인 우리세대의, 우리나라의 신앙은 생각의 게으름과 기복주의적 신앙에 젖어있는 듯 하다.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젖어 들어있다. 70-80년전 안창호선생이 우리 민족의 순진무구, 무지몽매한 민중에게 자각을 외치고 의식과 교육을 외쳤던 선포가 우리의 귓가에 들리는 듯 하며 그런 지도자가 요구되는 시대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 우리의 주변에 지도자가 없다고 원망하지 말고 네가 그 지도자가 되라 ’ 진정한 지도자는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지도자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분별해서 그 뜻에 따라 백성을 인도해 주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가야할 목적과 죽을 곳을 알며 또한 앞서서 먼저 가 보고 다시 돌아와서 그 길을 인도하여 가는 사람이다. 우선되는 본질을 자각하자.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자. 말씀의 본질이 무엇인지 부단히 묻자. 하나님의 특별계시된 말씀, 그의 영이 없는 사람은 깨닫지도 못하는 이 말씀을 은혜로 우리는 받았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는 먼저 받은 자를 통해서 증언될 때에 흘러가는 것이다. 우리는 증인으로 증언자로 설 수 없는 가? 설 수 있다한들 지금 우리는 무엇을 증언할 수 있단 말인가? 교역자만 증언한다고 하면 지금 이 시대 속에서 능력있게 곳곳에 시대의 사상과 세상의 이해관계 속에서, 타락한 문화 속에서, 가치 기준이 전혀 없는 사람들 가운데 어떻게 변혁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말인가? 본질로서의 회복을 외칠 수 있다는 말인가? 본질에 서자. 성경을 보자 깊이 보자, 더 깊이 파자. 한글성경만으로 안된다. 영어성경을 보자. 원어성경을 보자. 성경을 한번 봐서는 안된다. 내 죄성의 깊이만큼, 반복되는 죄의 횟수만큼, 아니 그것을 이기려면 그보다 더 성경을 보자. 그리고 내 것으로 나오자. 내 인격과 내 책임과 내 고백과 내 확신을 가지고 말하자. 그 때에 비로소 하나님은 나의 고백과 증언 속에 말 뿐 아니라 삶 속에 나타나고, 묻어나오는 메시지 속에 기름 부으셔서 역사하신다. 삶의 소명과 목적의식을 분명히 하자. 내가 가야할 길을 발견케 해 달라고 부르짖자(하나님을 모르면, 그분의 나라와 역사를 모른다면 사실 나의 좌표를 찍기도 어렵다. 내 인생의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 속에 동참되는 것이다. 그 역사를 모르는 데 무엇에 내가 요구되고 동참할 것을 어찌 안단 말인가?). 그리고 확연히 드러나진 않더라도 그것이 옳은 길이고, 진리의 길이고 내가 가야할 길이라면 앞서서 가자. 다른 연약한 우리의 동료들, 지체들을 이끌어주자.


  지금부터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함께 싸우는 동역자 들과의 관계도 중요하다. 나와 관계한 모든 사람들은 내 영혼의 손님이자 내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부모,부부,자녀,친구,스승,제자,이웃... 이들 앞에 나 자신은 그렇게 못하면서 내 기준과 기대를 내세우지 말자. 그들 각자가 하나님 앞에 홀로서서 하나님과 더불어 문제를 해결하는 자리에 까지 가도록 돕는 자로서 존재하자. 내가 그에게 모든 것을 가르칠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교만함은 버리자. 기대와 기준에 못 미쳤다는 말 속에 나오는 상처에 대한 얘기도 이제는 줄이자. 그리고 각자의 부족함을 나의 연약함과 연약했던 때를 기억하며 오히려 이해하고, 인내와 지혜로 세워주자. 그리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경험할 수 있게 다만 드러내어 주고, 인도하여만 주자. 오직 하나님만이 그 영혼을 변화시키실 수 있다. 우리도 누구의 강압과 권유의 의한 결심보다는 내 스스로 자각하여 깨달은 결심이 더 오래가지 않은가? 엊그제 온 중연,유란,선미,창환...이런 지체들에게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공동체 안에, 내 영혼 안에 들어온 손님으로 맞아들이고 그들을 앞서서 섬겨야 될 것이다. 그들에 대해 나의 요구수준을 내 세우며 기대를 주입하는 것이 아닌 친구로 동역자로, 영혼의 방에 온 어린 손님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함께 각자의 부르심을, 그리고 그 각자가 모인 공동체의 부르심을 묵상하여 보고, 함께 기도하며 우리의 우선되는 것,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한다면 그 또한 목적, 부르심을 점검해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확인되고 나의 부르심으로 받아들여졌다면 앞서서 이끌고 섬겨야 할 것이다.


  글을 맺으면서

7가지 습관을 강의하면서 그 구성자체가 참 우리의 신앙의 훈련과 많이 일치한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하나님 앞에 홀로서서 내 삶의 주체성과 주도성을 회복함과 부르심과 사명을 기억하는 것, 그리고 그 우선순위에 따라 내 삶을 Lead하고 Manage해 나가는 것의 중요성은 얼마나 큰 가? 그리고 나의 승리에 이어서 나만의 유익이 아닌 상호유익을 추구하고, 그의 입장에서 이해한 다음 이해시키는 관점,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함께 합하여, 나와 나의 동역자 들이 합하여 하나님의 비전을 이뤄가는 것(시너지 창출). 이것은 얼마나 값진 것인가? 그리고 7번째 습관으로 지속적인 내 영육간의 쇄신, 영혼의 군대 속에서의 지속적인 훈련. 이것을 우리의 크리스챤의 삶 가운데 정확한 세계관으로 일치시킨다면 참 괜찮은 영혼의 군대속의 훈련과정이 될 듯 싶다. 틀과 과정은 어느 정도 보이는 데 이제 발걸음을 내 딛는 것만 남았다. 시작이 반이다. 발걸음을 내딪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되고, 역사하고 계시다. 우리의 가치가 상향조정되고, 그 가치와 약속과 비전 앞에 나의 내딪는 발걸음과 몸부림이 시작된다면 영혼의 군대에서의 훈련은 내 삶 속에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다만 먼저 자신의 이전 것을 떠나서 더 강한 훈련과 강한 무기를 준비하는 것만이, 더 큰 싸움, 더 깊고, 더 근본적이고, 더 powerful하고, 더 위험하고 외로운 싸움 앞에서 우리의 육체와 영혼의 게으름과 유혹을 깨뜨리고 준비하고 상승해 나가는 것만이, 내 영혼의 전쟁터에서 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역사 속에 살아가는 나로서 승리하며 나를 향한 그분의 뜻을 이루는 삶일 것이다. 이 영혼의 군대에 입대하여 더 큰 싸움을 위한 준비와 훈련을 갖지 않으려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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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라는 약간 생소한 용어를 써보자. 용어가 생소하다고 덮지 말고 끝까지 한번 읽어보자. 가끔씩 늘 상 쓰이지 않던 말과 언어가 나를 깨우는 일을 종종 만나기 때문이다. ‘존재’는 현실에 실제로 있으면서 근원이 되는 실재를 말한다. 영어로 ‘being'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God's being’이라고 하고, 사람의 존재를 ‘Man's being’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사람의 존재 즉, ‘Man's being’을 말하고자 한다. 여기서 존재 즉, being은 진정한 사람의 실재요, 근원이 되는 진정한 사람됨(창조시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 존재)을 나타내는 말로 한정한다(창2:7).

존재는 어떻게 확인되나? 첫째로 존재는 나를 존재되게 하신 분을 대면할 때 확인된다. 사람은 하나님과 다르게 스스로 존재하지 못한다(출3:14).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부모님과 윗 선조의 계보를 통틀어 말하는 역사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역사를 시작하시고 존재케 하셔서 지금의 나를 있게 한 한 분, 즉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나는 비로소 나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창조하신 그분의 존재에 비추어 나를 바라볼 때, 나의 죄, 즉 흠과 연약함과 한계를 고백하고, 창조하실 때의 그분의 형상과 다른 상태의 나를 발견하게 되어 회복의 소원을 갖게 된다. 

둘째로 존재는 완전한 존재를 대면할 때 확인된다. 불완전한 존재를 대면하게 되면 나의 존재도 불완전하게 나타난다. 제사를 예로 들어보자. 제사의 원래의미는 제사를 주관하는 제주가 자신의 자손들을 옆에 세우고 자신의 신(or 조상)앞에 절하므로 사람을 신의 존재 앞에 세워서 그들의 삶의 경외감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 시대의 제사를 보면 제주는 그런의식을 가졌더라도 자손들은 신 앞에 경외감을 가지고 서기는 커녕, 자신이 신이 되어 신 앞에서의 경외감을 상실한지 오래다. 개인의 인격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형식만 존재하고 내용은 없는 껍데기 제사인 것이다. 수많은 자신의 주관의 신들과 자신이 신이 되어 자신을 비추어 보면 필연적으로 어그러지고, 왜곡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할 뿐이고, 신 앞에 자신을 세운다는 제사도 결국에 형식과 껍데기만 남아 자신의 존재를 비춰보는 데 아무 능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깨지고 구부러지거나 불완전한 거울은 나를 정확하게 비춰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면 지금 우리의 예배는 어떠한가? 예배도 마찬가지이다. 나를 존재(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하셔서 새로운 피조물 된 존재)되게 하신 하나님 앞에, 완전하신 그분을 대면하며 서는 예배가 나를 존재되게 하신 분과 상관없고, 불완전한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와 같이 형식과 자리만의 예배는 아닌가? 예배는 그분의 존재를 대면하는 자리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만이 아니라 삶 전체를 예배로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롬12:1).  

그러면 하나님의 존재를 대면하고 그분 앞에 서면 어떻게 되는 가? 나를 존재되게 하시고, 완전하신 존재를 뵘으로 나는 나의 존재를 온전히 깨닫게 되고 필연적으로 그분과 그분의 영광을 향한 열정을 갖게 되는 한 ‘존재’가 된다. 히브리어에 사람을 뜻하는 이쉬(שׁיאּ)와 불,열정을 뜻하는 에쉬(שׁꔟ)는 같은 어원에서 나온다. 이는 곧 사람은 하나님의 열정으로 인해 지음 받은 존재이며, 그 존재됨이 회복되고, 바르게 인식한 존재는 그분을 향해 그 열정을 돌려드리고픈 열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잘 아는 조나단 에드워드는 조금 다른 표현을 써서 하나님의 영광의 4가지 순환(cycle)으로 말한 바 있다. 곧 하나님 앞에서 나의 존재를 자각하고 그분께 나의 열정의 최대치를 드릴 부분을 삶 속에서 발견하여 드리는 삶이다.  

존재가 되면 어디서 무엇을 하던지 아무 상관없다. 각자가 하나님 앞에 서는 삶, 그분의 계획과 섭리와 통치 속에 자신을 택하여 부르시고 존재되게 하신 그분 앞에 자신의 절대치로 사는 그 삶,을 살면 되는 것이다. 가정에서 가사 일을 하는 주부이나, 학교에서 학업에 충실하는 학생이나, 직장과 일터에서 성실히 생업에 종사하는 어른 등의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차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학력이 차이가 안된다. 직위나 연봉도 차이가 안된다. 성별도 차이가 안된다. 비교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다. 세상의 성공논리로 바라보려하고, 어느 사이엔가 물 타버린 나의 세계관으로 남을 판단하지 말자. 내가 뭘 하고 있다고 어깨에 힘주고 뻐기지 말자. 남의 티를 보기 이전에 나의 눈의 들보를 보며(마7:4) 다만 날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서는 삶, 즉 사람됨의 존재로 존재답게 나의 삶을  살면 되는 것이다. 그 자체가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멀리서 독일어를 공부하는 경하나, 중국어를 하는 주희도 결국 진정한 사람됨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과정과 도구로서 공부하는 것이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무엇을 하는 내가 어떤 졵재이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주님 앞에 서서 나의 존재의 상승됨을 경험하자.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존재는 완전하다. 성령은 완전하게 나를 구속하시고 다른 신자와 동일하게 새 생명을 주셨다. 다만 그 존재에 대한 인식이 다를 뿐이다. 나는 그 인식된 존재로서 얼마나 살아가고자 애쓰는가? 얼마나 하나님의 존재 앞에 자신을 세우고 그분 앞에 서 보고자 분투하고 있는가? 물론 오랫동안 지배하던 죄성이 남아있다. 문제는 누가 끊임없이 나의 존재됨을 인식하며 모순과도 같고 전투와도 같은 그 삶을 어떻게 사느냐이다. 이것은 날마다 죽는(고전15:31) 경험이다. 내가 죽을 때 진정 나는 산다(갈2:20). 또한 그 과정을 통해 나의 존재의 인식의 상승을 경험한다.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의 언어를 통해 나의 죄성의 죽임을 경험하고 나의 상태를 진단하자. 성경의 말씀을 통해 날마다 나의 성령으로 새롭게 된 존재됨을 확인하자. 기도 가운데 영으로 주님과 교제하며 나와 함께하심을 확인하자. 성령을 좇아 살자(갈5:16). 그래서 힘을 얻자. 그리고 그 능력으로 다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는 장군으로, 성실한 일꾼,청지기로 살자.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무슨 일을 하느냐 에는 차등은 없다. 존재가 된 사람은 어디서 무엇을 하던지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맡은 바, 하는 바에 있어서, 가게 하신 길에 있어서 최대치로 살라. 그것이 날마다 주님 앞에 서는 삶을 살면 되는 것이고, 그 가운데 하나님나라는 이미 우리에게 가까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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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신학적 설교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레엄 골즈워디 지음, 김재영 옮김 / 성서유니온선교회 / 2002년 9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복음과 하나님 나라’라는 성경신학 입문서로 비교적 잘 알려진 그레엄 골즈워디의 저작이다. 제작년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흥미롭고, 유익한 제목과 내용을 예상하여 구입하였다. 이 책을 처음 읽을 때의 첫인상은 글이 좀 딱딱하고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당시의 배경지식과 연관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본문을 보기에 한결 수월해졌다. 나의 성경신학과 설교에 대한 전이해가 자라났기 때문에 그러리라 생각된다.

골즈워디는 복음시리즈로 알려져 있다. 복음과 하나님 나라, 복음과 지혜, 복음과 요한계시록...과 같은 책을 통해 성경신학적 내용을 소개해 왔다. 저자가 성경신학을 전공해서 그런지 성경신학의 보급과 대중화에 꽤 큰 공헌을 한 것 같다. 아마 이번 책은 그 내용이 중요한 만큼 그 내용을 전달하는 과정은 설교라는 행위를 통해 있어지기 때문에 설교에 대한 중요성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 설교는 성경신학적 내용의 중요성의 토대위에 전달하는 게 바람직하며, 거기에 따른 실제적인 내용을 곁들여 쓰면서 하나의 지침서로서 이 책을 제시한다.

  평가를 구체적으로 말하기 전에 이 책에 대한 전반적인 주제와 구조에 대해서 논해보고자 한다. 이 책의 주제는 말 그대로 성경신학적인 설교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설명하면서 두가지 큰 주제인 성경신학과 설교를 말한다. 그 두 개의 주제를 연결하고, 그 연결되고 통합된 시각으로 복음주의의 바람직한 설교관을 역설하고 있다. 1부는 설교와 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들을 다루면서 저자가 말하고자하는 두가지의 큰 주제에 대한 개념정리와 실제 성경을 통한 적용에 들어가기 전에 적용을 위한 기본 배경지식을 소개하고 있다.

2부는 설교에 대한 성경신학의 실제적인 적용이다. 여기서는 모든 성경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소개하며 기본적으로 성경의 모든 본문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로 인해 통합된다는 전제하에 장르별로 성경신학적 설교를 소개한다. 여기서는 문학을 성경 계시의 신학적 진리를 전하는 매개물로 보는 관점에서 성경의 주요 문예 장르들을 살펴본다.

1부의 내용에 대해서 살펴 볼 것인데, 여기에는 성경,설교,성경신학 등의 핵심적인 주제들을 다룬다. 성경신학의 핵심은 성경의 통일성이 있다는 것인데,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역사속에서 점진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과정이 다양성속에서 일관성이 있다는 말이다. 즉 구속의 역사가운데 점진적으로 더욱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성경의 통일성을 보는 것이다. 이 사실은 성경의 짧은 본문을 보는 데 있어서도 이 큰 틀안에서 봐야한다는 것이 이 책의 논지이다.  

 이제 내가 읽으면서 나름대로 내린 평가를 쓰고자 한다. 이 책의 논지와 방향, 신학적 관점에 있어서는 대체적으로 동의한다. 그래서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많다. 또한 부정적인 평가도 내용에 대한 반대보다는 이 책의 한계성과 아쉬움에 대한 평가임을 말해둔다.

 긍정적인 평가는, 첫째로 저자가 성경신학적 설교라는 일관된 관점에 의해 체계적이면서도 다양하게 글의 논지를 풀어나가는 것이다. 성경신학과 설교라는 큰 두가지의 주제를 연결하는 것이 저자의 논지이다. 자칫 커다란 두가지 개념을 한꺼번에 설명하는 데 무리하다고 말할 지 모르겠지만 그가 말하는 진정한 설교는 성경신학적 설교인 것이다. 즉 계시의 역사성과 그에따른 통일성에 근거를 두고 큰 맥락에서부터 본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설교의 위험성을 말하고자하는 저자의 의도에 동의하게 된다.

 둘째는 성경신학에 대한 함축적이면서도, 깊이있는 통찰과 해설이다. 조금 어렵게 느껴질 정도로 빡빡하게 성경의 통일성과 점진적 계시에 대한 설교(예표,약속과 성취,종말론적 목표), 공시적이면서도 통시적인(주기적이면서도 종말적인) 관점에서의 성경신학적 개념정리는 저자가 성경신학에 대해 많은 연구와 유익한 내용을 갖춘 사람임을 알려주었다. 또한 이를 통해 설교자가 하나님의 전체 경륜을 선포하는 묘미를 알려주었다. 

 셋째는 예수님 자신이 성경신학자이면서, 성경신학의 주제로서 인식하셨다는 통찰이다. 예수님이 성경의 주제이고, 성경신학의 주제임을 우리는 알고 있으나, 예수님 자신이 성경을 그렇게 바라보셨고, 말씀하셨고, 그렇게 사셨다는 것은 간과하기 쉽다. 그러나 저자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을 자신과 사역의 관점에서 명확하게 하였음을 지적하고 있다. 잘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의 성취자요, 완성자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인자가 온 것은..., 율법을 폐하려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노라...’등의 예수님의 말씀들은 이 사실을 증명해 준다. 

 넷째는 복음에 대한 관점의 바른 제시이다. 현대의 교회가 갖고있는 교회에 대한 편협한 이해를 지적하고 있는데, 나는 그것이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라고 생각한다. 그 내용은 즉 복음은 자신의 개인의 주관과 감정에 따라서 예수께서 자기 안에 계신 느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하신 일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또한 그 복음에 따른 제자도는 ‘실천되는 칭의’라는 말로 대변하면서 행하신 일이 의롭게 칭해진 내 삶속에 구현되는 것이다. 또한 복음으로 새롭게 적용될 윤리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점을 제시하는 데, 구약의 율법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완성하신 그리스도에 근거를 두고 해석해야 함을 말한다.

 다섯째는 3장에 나와있는 짧지만 성경의 통일성과 포스트모더니즘과의 비교이다. 성경은 통일성이 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상대주의와 혼합주의로 인해서 통일성이 없는 단편화로 치닫거나 불교나 힌두교에서처럼 만물의 일원론적 일체성으로 치닫게 됨을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주를 동일시하는 범신론과 관련이 있으며, 하나님과 피조물의 구별을 모호하게 한다. 이러한 물결은 18C 계몽주의에서 시작되는 데, 계몽주의는 하나님의 존재는 인정하더라도 성경과의 관계성에 대해 의문을 제시함으로 성경의 통일성의 관점에서 다원,상대,혼합,모호의 개념을 창출해 내었고, 인본주의,자유주의적 전제들을 만들어 성경에 대해 많은 손질을 가한 것을 저자는 바르게 바라보면서 분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섯째는 도표를 통한 설명이다. p.166-167에 나와있는 ‘컨텍스트를 무시한 본문 사용과 맥락을 존중하는 본문사용’의 그림은 저자의 논지와 관점인 큰 문맥의 틀, 즉 성경신학적 틀이면서 핵심인 그리스도를 통과하면서 청중에게까지 가는 그림을 가시적이면서도 명쾌하게 제시하고 있다. 구원사와 예표론에 대한 도표또한 구속과 심판, 회복과 완성에 대한 개념과 창조와 새창조로 이어지는 구속사의 과정을 보기쉽고, 이해하기 쉽게 정리해 놓은 것은 이 책의 큰 장점중에 하나이다.

 부정적인 평가에 대해서 말하자면, 때때로 우리가 긍정적인 평가를 뒤집어보면 한편에서는 장점인 것이 뒤집어 생각하면 아쉬움도 함께 동반되어 나오는 경우를 종종 본다. 여기서도 그러한 예를 살펴볼 수 있는데, 첫째로 저자가 성경신학과 설교학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좇다보니 두가지 다 약간은 함축적이고, 어려운 예들을 급하게 표현해 내므로 읽는 독자가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은 성경신학의 입문서가 아니다. 또한 설교학의 입문서도 아니다. 그래서 기본적이 개념정리를 하고 온 사람들이 보게 되는 책이지만, 전문적인 용어와 많은 내용을 짧은 양으로 표현하려 하니 내용이 빡빡한 감이 든다. 그래서 정작 무엇을 읽었는 지 설명하려면 어려움이 따르기도 한다.

 둘째로는 설교의 내용에 중점을 둔 나머지 설교하는 사람에 대해서, 설교를 듣는 청중에 대해서의 언급과 현시대상황 속에서의 설교적 과제는 상대적으로 약하게 제시되었다. 물론 저자가 요즘 나온 설교학에 관한 책들이 효과적인 전달과 설교 준비 방법들에 치중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대안으로서 이 책을 기술한 것은 바람직한 시도이다. 그러나 대안이 될 만한 책은 대안이 될 만한 부분, 즉 그러한 책들에서 다루지 못한 부분들을 다루고 그러한 책이 다루는 부분도 포함해야 된다고 생각한다(물론 9장에 약간의 언급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 책은 ‘성경신학적 설교의 내용에 대한 저술’이라고 생각하는 게 더 바람직하다.

 셋째로는 실질적인 설교 작성의 전 과정을 소개하는 예가 제시되지 못했다. 뒷부분까지 보았지만 맥락 속에서 설교의 주제에 대한 접근은 가능하지만 구체적인 주해에서 성경신학적 과정을 거치면서 청중을 이해하는 해석학을 통해 설교가 나오고 전달이 되는 전 과정에 대한 소개와 제시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된다. 그렇게 될 때에 독자가 해석자로서, 그리고 계속적으로 설교를 통해 복음을 전해야하는 사람으로 실질적인 강단에서의 적용을 하는 데 가까이가지 않을 까 생각된다.

전체를 정리하면, 따로 분리되어 존재하기 쉬운 성경신학적 관점과 설교가 이 책을 통해 조금이라도 정리되고, 접목할 수 있는 관점을 갖게 되었다. 몇 가지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본문을 보는 힘, 성경의 계시의 큰 맥락 속에서 본문을 보는 힘이 길러준다는 면에서 유익하고  한국 강단에 꼭 필요한 부분이고, 훈련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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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생에 가는 길 - 믿음의 길동무와 함께 떠나는 영혼의 순례여정
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윤종석 옮김 / 복있는사람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인생은 나그네길이라고 어느 가수가 노래한 것이 기억난다. 그들이 말하는 나그네 길에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그 뒤에 깔린 듯 하다. 신앙인의 길 또한 나그네길이라고 말하는 데, 앞서 말한 일반인들의 불확실성과는 다르게 목적지가 있고, 목적지에는 기쁨과 감격이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의 개인적인 고백과 신앙내력을 설명해가면서 친근하게 ‘신앙인의 길’이라는 주제를 소개 한다. 신앙의 이해에 집중을 두었던 자신을 돌아보면서 부요함을 누리는 면의 중요성, 그리고 삶 속에 깊이 경험하는 면의  부족함들을 몸소 실감했던 자신을 소개하며 우리자신의 신앙의 길을 돌아볼 것을 초청하고 있다. 기존에 저자가 쓴 조직신학, 역사신학 등의 간결하면서도 명쾌한 면을 통해 이해를 촉구하기 보다는 우리의 삶에 비추어 생각하게 하고, 묵상해볼 것을 권면하는 영성부분에 초점을 둔 영성신학에 출발선에 있는 사람을 위한 책과 같이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이해보다는 실체를 경험함을 강조하며 나의 지적인 영역만이 아니라 행동의 삶의 영역까지 바뀔 수 있도록 천천히 읽어가며 적용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내용의 특징을 몇 가지로 말해보면 첫째로, 우리 신앙인의 여정을 출애굽에 이미지로 비유하여 말하고 있다. 우리는 애굽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는 과정 중에 있으며, 그 과정은 하나님의 창조, 인간의 타락, 주님의 구속사역, 그리고 완성하실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 가운데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 네 가지 과정을 우리의 삶의 과정 가운데 큰 획이며 이정표라고 말한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길을 가기에 회의와 실패, 두려움과 고난이 있음을 또한 말하는 데 이것은 이 세상이 죄 가운데 있고, 내가 죄 된 본성을 지닌 육신의 옷을 입고 있는 한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일으켜주는 오아시스와 같은 회복의 과정 또한 소개하는 데 바로 소생, 안식, 교제, 잔치의 이미지로 말하고 있다. 이 과정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저자는 기독교 영성의 위대한 주제에 관한 조언을 하는 데 그것은 기억과 기대이다. 옛적에 우리에게 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이고, 미래에 주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와 미래사이인 현재를 살아가고 있으므로 죄 된 본성과 어우러져 옛적에 우리를 속박에서 이끌어내신 은혜는 희미해지기 쉽고, 완성하실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소망은 멀게만 느껴지기 쉽다. 그러나 저자는 그 길을 믿음의 행위로 자신을 맡기며 기다리면서 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히치하이크의 소개이다. 나도 과거에 히치하이크를 많이 해본 경험이 있는데 제일 많이 떠오르는 생각은 ‘공짜로 탄다’는 것이다. 저자가 소개하는 믿음의 선배들, 그들이 겪은 삶의 여정과 교훈을 얻고 힘을 얻는 것인데 우리는 그들이 한 시행착오와 유산들을 어떻게 보면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교회가 탄생하고 기독교 2000년의 역사와 함께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발견한 성경의 보고(寶庫)와 자신들의 문화와 외부의 압력을 이기고 나온 복음의 값진 유산들을 접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어깨를 딛고 더 발전되어가고 타락해져가는 이 시대 속에 어려움들을 그때 이겨냈던 믿음의 선배들과 함께 동승함으로 그들을 통해 위대한 지혜의 도움을 얻게 된다.

 셋째는 12개의 과정 중에 내 개인에게 더 깊이 공감된 부분을 나누고 싶은데, 그것은 안식과 교제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이다. 안식이 그냥 피곤하니까 쉰다, 즐긴다의 이미지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정한 안식을 하려면 훈련이 필요하고 휴식과 소생의 공간이 필요하며 계획하고 준비할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나에게도 계획되고 준비된 쉼과 안식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사실 목적을 향해 열정적으로 전진하고, 전투하는 삶 가운데 살아감이 먼저 필요하고, 그 삶 가운데 계획되고 준비된 안식은 그 삶을 살아가는 데에 정말 오아시스요, 재충전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이 여정이 지극히 개인적인 작업임을 말하고, 나만의 독특한 정체와 하나님과 나만의 특수한 관계를 반영하여 살 것을 말한다. 매우 공감되는 영역이다. 여정의 이정표를 알고, 다른 사람이 광야를 어떻게 뚫고 갔으며 회복의 오아시스를 어떻게 거쳤는 지에 대한 지식적인 도움만 주는 것이 아니라, 직접 나의 삶에 뛰어들어 내 삶에 주체성을 회복하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삶의 여정의 발을 내딛으라는 것이다. 내게 맡긴 사명과 내가 그 가운데 겪게 될 고난을 감수하라는 것이다. 이 가운데는 큰 산과 같은 믿음의 선배들이 산 삶과는 별도로 하나님 앞에 내가 홀로서는 과정이 요구되는 것 같다. 나는 나만의 여정이 있는 것이다. 이런 저자의 마지막 권고를 들으며 ‘7가지 습관’의 내용과 잘 접목이 되었다. 하나님 앞에서 내 삶의 주도성을 회복하고 책임지는 존재로 살며, 내 삶의 이정표와 같은 사명을 기억하고 고난을 감수하며 그에 따른 우선순위가 정렬되는 내 삶의 정렬의 필요성, 그리고 이웃을 섬기고 세상에서 승리하며 주님의 사명을 완수하는 그 길을 함께 가는 것의 중요성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런 삶 가운데 우리의 삶의 쇄신과 재충전의 오아시스는 꼭 필요함이 느껴졌다. 그렇다. 나도 내 삶의 여행기를 기록해 보자. 내 삶의 여정 가운데 누구보다 생생한 하나님과의 교제가운데의 삶으로의 도전을 즐기며, 그분께서 주신 나만의 길을 따라 특권과 같은 이 삶의 여정을 힘써 살아가자. 그분과 함께 기쁨과 감격의 날이 내 앞에 펼쳐지는 소망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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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징 레인스 - 할인행사
로저 미첼 감독, 사무엘 잭슨 외 출연 / 파라마운트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도일(사무엘 잭슨)과 벤 에플렉이 주인공이 된 영화다.

처음엔 차 사고로 저마다 법정에 가는 길목에서 늦어서, 또는 파일을 놓고와서 서로에 대한 오해와 분노를 공격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 영화에서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연약함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의 죄로서 인간의 연약함을 탓하고 회개할 수 없는 딜레마같은 상황을 접한다. 해결하려 해도 어찌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런 인간의 모습앞에 신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다. 해결점은 자기들 끼리 찾아 나가게 될 수 있으며, 나중엔 인간이 그런 좌충우돌, 산전수전을 거친후엔 자기들끼리 공생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선하게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을 남겨둔다.

어떤이는 돈에, 어떤이는 알코올에, 어떤이는 재난에 빠져서 자신의 불행을 탓하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 채 살고 있는 현실, 그리고 참 복잡하고 분주하고, 한치에 양보도 없으며, 속고 속이고 물고 물리는 현실 사회의 부조리와 부패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나는 나는 과연 어떻게 살고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나는 이런 영화를 어떻게, 어떤 관점과 입장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복음이 실제 사회에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단 말인가? 여기서 얘기한 대로 하나님이 무관심하단 말인가? 하나님이 어떤 택하신 특정 존재에게만 관심을 가지기에 그 존재에게만 임하는 하나님을 기대한단 말인가? 딜레마다. 나도 어떤 대안이 없다. 하나님께 곰곰이 물을 수 밖에. 시대에 뒤떨어진 교회, 복음의 이해, 대안제시가 아니라 시대를 품고 하나님의 시대를 향한 뜻과 말씀을 바르게 대언하는 사역자가 되야 한다. 주께서 아내도 함께 이런 고민을 하고 세워주시길 기도한다.

< 저는 사역자라 그런지 그런 관점에서 리뷰를 쓰네요. 이해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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