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라는 약간 생소한 용어를 써보자. 용어가 생소하다고 덮지 말고 끝까지 한번 읽어보자. 가끔씩 늘 상 쓰이지 않던 말과 언어가 나를 깨우는 일을 종종 만나기 때문이다. ‘존재’는 현실에 실제로 있으면서 근원이 되는 실재를 말한다. 영어로 ‘being'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God's being’이라고 하고, 사람의 존재를 ‘Man's being’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사람의 존재 즉, ‘Man's being’을 말하고자 한다. 여기서 존재 즉, being은 진정한 사람의 실재요, 근원이 되는 진정한 사람됨(창조시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 존재)을 나타내는 말로 한정한다(창2:7).

존재는 어떻게 확인되나? 첫째로 존재는 나를 존재되게 하신 분을 대면할 때 확인된다. 사람은 하나님과 다르게 스스로 존재하지 못한다(출3:14).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부모님과 윗 선조의 계보를 통틀어 말하는 역사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역사를 시작하시고 존재케 하셔서 지금의 나를 있게 한 한 분, 즉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나는 비로소 나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창조하신 그분의 존재에 비추어 나를 바라볼 때, 나의 죄, 즉 흠과 연약함과 한계를 고백하고, 창조하실 때의 그분의 형상과 다른 상태의 나를 발견하게 되어 회복의 소원을 갖게 된다. 

둘째로 존재는 완전한 존재를 대면할 때 확인된다. 불완전한 존재를 대면하게 되면 나의 존재도 불완전하게 나타난다. 제사를 예로 들어보자. 제사의 원래의미는 제사를 주관하는 제주가 자신의 자손들을 옆에 세우고 자신의 신(or 조상)앞에 절하므로 사람을 신의 존재 앞에 세워서 그들의 삶의 경외감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 시대의 제사를 보면 제주는 그런의식을 가졌더라도 자손들은 신 앞에 경외감을 가지고 서기는 커녕, 자신이 신이 되어 신 앞에서의 경외감을 상실한지 오래다. 개인의 인격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형식만 존재하고 내용은 없는 껍데기 제사인 것이다. 수많은 자신의 주관의 신들과 자신이 신이 되어 자신을 비추어 보면 필연적으로 어그러지고, 왜곡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할 뿐이고, 신 앞에 자신을 세운다는 제사도 결국에 형식과 껍데기만 남아 자신의 존재를 비춰보는 데 아무 능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깨지고 구부러지거나 불완전한 거울은 나를 정확하게 비춰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면 지금 우리의 예배는 어떠한가? 예배도 마찬가지이다. 나를 존재(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하셔서 새로운 피조물 된 존재)되게 하신 하나님 앞에, 완전하신 그분을 대면하며 서는 예배가 나를 존재되게 하신 분과 상관없고, 불완전한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와 같이 형식과 자리만의 예배는 아닌가? 예배는 그분의 존재를 대면하는 자리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만이 아니라 삶 전체를 예배로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롬12:1).  

그러면 하나님의 존재를 대면하고 그분 앞에 서면 어떻게 되는 가? 나를 존재되게 하시고, 완전하신 존재를 뵘으로 나는 나의 존재를 온전히 깨닫게 되고 필연적으로 그분과 그분의 영광을 향한 열정을 갖게 되는 한 ‘존재’가 된다. 히브리어에 사람을 뜻하는 이쉬(שׁיאּ)와 불,열정을 뜻하는 에쉬(שׁꔟ)는 같은 어원에서 나온다. 이는 곧 사람은 하나님의 열정으로 인해 지음 받은 존재이며, 그 존재됨이 회복되고, 바르게 인식한 존재는 그분을 향해 그 열정을 돌려드리고픈 열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잘 아는 조나단 에드워드는 조금 다른 표현을 써서 하나님의 영광의 4가지 순환(cycle)으로 말한 바 있다. 곧 하나님 앞에서 나의 존재를 자각하고 그분께 나의 열정의 최대치를 드릴 부분을 삶 속에서 발견하여 드리는 삶이다.  

존재가 되면 어디서 무엇을 하던지 아무 상관없다. 각자가 하나님 앞에 서는 삶, 그분의 계획과 섭리와 통치 속에 자신을 택하여 부르시고 존재되게 하신 그분 앞에 자신의 절대치로 사는 그 삶,을 살면 되는 것이다. 가정에서 가사 일을 하는 주부이나, 학교에서 학업에 충실하는 학생이나, 직장과 일터에서 성실히 생업에 종사하는 어른 등의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차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학력이 차이가 안된다. 직위나 연봉도 차이가 안된다. 성별도 차이가 안된다. 비교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다. 세상의 성공논리로 바라보려하고, 어느 사이엔가 물 타버린 나의 세계관으로 남을 판단하지 말자. 내가 뭘 하고 있다고 어깨에 힘주고 뻐기지 말자. 남의 티를 보기 이전에 나의 눈의 들보를 보며(마7:4) 다만 날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서는 삶, 즉 사람됨의 존재로 존재답게 나의 삶을  살면 되는 것이다. 그 자체가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멀리서 독일어를 공부하는 경하나, 중국어를 하는 주희도 결국 진정한 사람됨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과정과 도구로서 공부하는 것이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무엇을 하는 내가 어떤 졵재이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주님 앞에 서서 나의 존재의 상승됨을 경험하자.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존재는 완전하다. 성령은 완전하게 나를 구속하시고 다른 신자와 동일하게 새 생명을 주셨다. 다만 그 존재에 대한 인식이 다를 뿐이다. 나는 그 인식된 존재로서 얼마나 살아가고자 애쓰는가? 얼마나 하나님의 존재 앞에 자신을 세우고 그분 앞에 서 보고자 분투하고 있는가? 물론 오랫동안 지배하던 죄성이 남아있다. 문제는 누가 끊임없이 나의 존재됨을 인식하며 모순과도 같고 전투와도 같은 그 삶을 어떻게 사느냐이다. 이것은 날마다 죽는(고전15:31) 경험이다. 내가 죽을 때 진정 나는 산다(갈2:20). 또한 그 과정을 통해 나의 존재의 인식의 상승을 경험한다.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의 언어를 통해 나의 죄성의 죽임을 경험하고 나의 상태를 진단하자. 성경의 말씀을 통해 날마다 나의 성령으로 새롭게 된 존재됨을 확인하자. 기도 가운데 영으로 주님과 교제하며 나와 함께하심을 확인하자. 성령을 좇아 살자(갈5:16). 그래서 힘을 얻자. 그리고 그 능력으로 다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는 장군으로, 성실한 일꾼,청지기로 살자.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무슨 일을 하느냐 에는 차등은 없다. 존재가 된 사람은 어디서 무엇을 하던지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맡은 바, 하는 바에 있어서, 가게 하신 길에 있어서 최대치로 살라. 그것이 날마다 주님 앞에 서는 삶을 살면 되는 것이고, 그 가운데 하나님나라는 이미 우리에게 가까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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