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바이, 블랙버드
이사카 고타로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와우. 현실이라면 절대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한 남자가 있습니다. '어쩌다보니' 다섯 명의 여자와 사귀게 된 호시노 가즈히코군. 양다리도 아니고 다섯다리나 걸치고 있는 호시노군은 어떤 사건을 계기로 생긴 돈 문제로 2주 뒤에는 '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런 그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은 거구의 여성 마유미. 남의 고통을 즐기는 마유미는, 앞으로 남은 2주 동안 다섯 명의 여자와 제대로 된 이별을 하고 싶다는 호시노군과 함께 그녀들을 방문하죠. 단순히 그녀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싶다는 가학적인 즐거움을 위해서요. 절대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들 콤비를 맞이한 다섯 명의 여자들.

 

이별을 선언한 호시노군과 마유미 앞에서 그와 처음 만난 날의 추억들을 떠올리며 '그것도 거짓말이었어?'를 내뱉고야 마는 그녀들은 나이도 직업도 환경도 다양합니다. 오랜 불륜에 시달리다 이제야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났다는 생각에 행복했다는 그녀1, 혼자 몸으로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는 그녀2, 도둑 흉내내기라는 괴상한 취미를 가진 그녀3, 이비인후과에서 처음 만난 숫자에 집착하는 그녀4, 유명 여배우인 그녀5 까지 모두 호시노군의 이별 선언 앞에서 황망하기 그지없습니다. 게다가 키와 몸무게가 모두 180은 되어보이는 마유미까지 데리고 나타났으니 말이죠. 그렇게 이별을 선언하며 돌아다니는 동안 운명의 그 날은 다가오고, 호시노군은 지금 버스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유미와 함께.

 

책소개에도 나와있는 것처럼 이 책은 소설을 독자들이 우편으로 받아보는 '우편소설'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기획으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작가에게 직접 편지를 받는다'는 형식은 저처럼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죠. 총 6화로 구성된 작품 중 5화를 1화씩 독자에게 발송하고 나머지 1화를 합쳐 발행된 것이 이 작품. 과연 작가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전해받은 그 독자가 누구일지 궁금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합니다. 그 작가가 이사카씨니까요! 던지는 이야기마다 매번 색다른 매력을 선사하는 작가가 바로 이 이사카씨인데요,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코믹하게 영역을 넘나들며 재미를 선사합니다. 제가 단편을 좋아하는 몇 안 되는 작가 중 한 명이기도 해요.

 

호시노군과 마유미, 그녀들과의 아기자기한 이야기들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은 캐릭터의 힘이 큽니다. 마유미라는 존재는 아마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을 거에요. 엄청난 거구이면서도 날렵하고, 늘 사전을 들고 다니며 자신의 사전에는 동정이라느니, 배려라느니 하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다는 걸 직접 보여주는 괴상한 여자입니다. 그녀들이 이별 앞에서 상처받는 모습을 즐기며 그 상처를 더 후비는 데 한 몫 하기도 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굉장한 배려심(?)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정의에 불탄다기보다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이들에게 주먹과 거친 입담으로 대응하는 마유미의 과거가 정말 궁금했지만, 그녀에 관한 단서는 그 어디에도 나와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흥미로운 듯.

 

호시노군은 이제 버스를 탑니다. 마유미가 평소에는 보여주지도 않던 동정심을 발휘해 한 가지 방법을 알려주지만 미련스러울 정도로 착하고 섬세한 이 남자, '남들에게 폐를 끼칠 수 없다'면서 버스에 오릅니다. 호시노군은 어디로 가게 될까요. '버스'의 정체는 뭘까요. 하지만 그런 것들보다 마유미의 행동에 따스한 여운을 남겨주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제목인 '바이바이 블랙버드'는 노래 제목으로 '너와 헤어져 이제부터 행복해진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호시노군은 마유미와 헤어져 행복해질까요, 불행해질까요. 아니, 헤어지기는 할까요. 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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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에게 버림받은 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9
기리노 나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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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무라노 미로 시리즈의 제2탄입니다. 4탄인 [다크]가 먼저 출간되었었는데 예전에 기리노 나쓰오의 책을 한 권 읽었다가 또 몸이 아파진 저로서는 1탄인 [얼굴에 흩날리는 비]가 과감한(?) 도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물론 [다크]의 명성도 자자하여 차마 읽지 못하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큰마음 먹고 읽은 [얼굴에 흩날리는 비]가 의외로 섬세하고 악의 강도(?)가 약한 데다 일종의 서정성마저 (아무래도 비의 영향인 듯) 느껴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표지의 매력도도 한몫 했지만요. 혹시 저처럼 악의가 짙게 묻어나는 작품을 읽은 후에 후유증으로 몸이 아파온다거나 악몽을 꾸는 분들이 계신다면 아직까지 무라노 미로 시리즈의 1탄과 2탄은 괜찮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2탄인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의 표지는 쪼콤 당황스러울 정도로 발랄하지만 책 속 내용은 그다지 발랄하지 않습니다. 표지에 집중하지 않고 '제목'에 집중하시면 될 것 같아요.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이라니, 얼마나 끔찍하고 서러운 밤일까요. 그런 밤에 눈물을 흘렸을 한 명의 AV 여배우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은 무라노 미로. 시크하고 쿨하지만 누구보다 외로움을 잘 타는 이 여인은 조금 찜찜한 기분으로 사건을 맡게 됩니다. AV 제작 회사와의 갈등, 잔인한 협박, 그리고 늘 그렇듯 찾아오는 공허함과 외로움에 허덕이면서도 진실을 찾는 작업을 계속하죠. 그 끝이 아무리 무섭고 안타깝다고 해도 말이에요.

 

이 이야기는 아무리 외면하려고 해도 우리 주위에는 다른 사람을 상처입히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내가 사는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없을 거라 믿고 싶은 마음을 마구마구 파헤쳐버리죠. 젊다고,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라고 모든 것이 통용될 것이라 믿는 무서운 아이들과 타인의 인생따위 어떻게 되는 상관없다고 믿는 어른들 속에서, 하지만 가장 무서운 것은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절친한 사람들의 악의입니다. 그 존재가 가장 신성시 되어야 할 관계에 있는 '부모'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마음일까요. 저는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지만, 그리고 완전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린 AV 여배우의 상처에 살짝 마음이 긁히기도 했습니다.

 

예전에는 탐정일이 참 멋있는 일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요즘에서야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느끼곤 합니다. 알 필요가 없는 인간의 어두운 욕망과 잔인과 언행, 그 어둠 속에 한 번 발을 담그면 무라노 미로처럼 외롭고 쓸쓸한 인생을 보낼 수 밖에 없는 걸까요. 타인에게 곁을 내주지 않을 것처럼 보이다가도 극한의 외로움 속에서 누군가의 손을 필요로 하는 그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쓰다듬어 줄 한 명의 연인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떠올리면 계속해서 '비'가 생각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한없이 가라앉을 것만 같은 그런 날의 차가운 비요. 마음을 허락한 상대에게 자꾸 상처를 받으며 자신을 자책하게 되는 그녀가 누군가와 행복해지는 날을 기리노 여사가 만들어줄 지 궁금하네요.

 

사건 자체와 전개는 나름대로 흥미진진하지만, 제 생각에 결말은 조금 부족한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저런 단서와 사건들을 마구 벌려놓았다가 갑자기 한 번에 모든 것이 매듭지어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급하게 마무리된 느낌이랄까요. 공포와 긴장감이 끝을 모르고 올라갔다가 김이 빠져버린 느낌같기도 하구요. 개인적으로는 2탄보다 1탄인 [얼굴에 흩날리는 비]가 더 매력적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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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계단
루이스 베이어드 지음, 이성은 옮김 / 비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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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팩션을 즐기지 않는 편이다. 늘 있어왔던 성경 파헤치기, 혹은 아직도 어둠 속에 묻혀있는 수많은 미스터리들에 대해 얼토당토 않은 근거를 내세우며, 마치 그것이 정말 놀랍다는 듯 서술되는 이야기들에 지쳤다고 할까. 평소 궁금증을 가지고 있던 소재라 해도 소설로 읽기에는 늘 꺼려졌었고 그 책을 읽는다해도 진실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거라며 스스로를 다독이곤 했다. 그런데 정말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미스터리 팩션을 한 권 만났다. 프랑스 혁명 이후의 파리, 나폴레옹 또한 실각하고 왕정복고를 내세웠던 그 파리에서 루이 16세의 아들 루이 샤를의 존재를 둘러싸고 벌어진 사건들은 생각보다 흥미진진했다. 어린시절 그토록 좋아했던 만화 [베르샤유의 장미]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일까.

 

어렸을 때는 [베르사유의 장미]에 빠져 살았다. 만화책도 소장했었고(그 만화책은 지금 어디로 가버렸을까;;) 영화대여점에서 비디오를 빌려 하루종일 틀어놓곤 했었으니까. 그 때 나의 우상은 오스칼의 곁을 한결같이 지키던 앙드레였다. 앙드레가 총에 맞아 오스칼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는 마치 실존인물이 죽은 것처럼 엉엉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 내 눈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철없는 오스트리아 공주, 흥청망청 삶을 즐기는 한심한 프랑스 왕비였다. 지금이야 그것이 그녀의 전부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그녀의 찬란한 아들 루이 샤를. 이 이야기는 프랑스 혁명 때 탕플 탑에 갇혀 혹독한 생활을 하다 죽음을 맞은 루이 샤를이 실제로는 살아있었을 거라는 추측에서 시작된다.

 

이 작품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바로 실존인물인 외젠 프랑수아 비도크(1775~1857)를 형사로 내세웠다는 점이다. 에드거 앨런 포, 애거서 크리스티, 빅토르 위고, 알렉상드르 뒤마, 찰스 디킨스 등에게 영감을 제공했으며 천재적인 범죄자이자 파리 범죄수사과를 창설한 경찰. 초대 과장직을 맡아 범죄자 적발에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결국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범죄를 저지른 탓에 파면된 인물. 대다수의 미스터리 팩션 작품이 과거의 일을 현대사람들이 문서와 유적을 근거로 해결하는 구성이었다면, 이 작품은 그 시대 사람을 내세워 현실감과 생생함을 제공한다. 비도크는 범죄자이기는 했지만 명석한 두뇌도 갖춘 인물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의 곁에서 사건을 해결하는 주인공 카르팡티에 박사.

 

사소한 것일지 모르나 나는 이 책의 소제목들이 참 마음에 들었다. '모퉁이에서 구걸하던 거지'로 시작하여 '완결'로 끝나는 소제목들 중에는 '징을 박은 부츠에 생긴 일, 위대한 사람이 극악한 폭력의 위협을 받는 곳, 여행이 위험스럽게 보이는 곳, 엑토르란 아이, 슬굴곡근이 다치기 쉬운 부위임을 확실히 알게 된 곳, 샤를로트가 키우던 닭에게 닥친 비참한 운명' 등 개성적이고 재미있는 것들이 가득하다. 해학적으로 보이면서도 시적으로 다가오는 소제목들에 담긴 이야기들은, 제목만큼 긴장을 자아낼 때도 있고 제목과는 달리 슬픔을 쏟아낼 때도 있다. 또한 중간중간에 보여지는 어떤 이의 일기도 좋았는데, 후에 사건의 실마리로 밝혀지는 이 기록에는 테르미도르, 프뤽티도르 등 공화력이 적혀 있어 어쩐지 그 때의 프랑스 냄새가 풍기는 것 같기도 하다.

 

미스터리 팩션이라 살인사건도 벌어지고 결국 범인도 밝혀지지만 진실은 역시 손에 잡을 수 없었다. 그냥 내 작은(?) 소망으로는 이 책에 쓰여진대로 루이 샤를이 정말로 살아남았던 것이기를 빌어본다. 다른 미스터리 팩션과 구성은 비슷하지만 격동의 프랑스의 냄새, 이야기, 비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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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 신부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44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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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렇게 애처롭고, 이렇게 안타까우면서, 이토록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또 있을까-이 작품에 대한 첫번째 감상. 글을 써나가면 읽으면서 느꼈던 아쉬운 점 몇 가지가 생각날 수 있겠지만, 만약 그렇다고 해도 이 책의 큰 장점인 등장인물들로 상쇄될 수 있다. 완벽하지도, 모든 것을 갖고 있지도 않고, 허세도 부리지 않으며 있는대로 상처받고 삶이 깨어지지만 울부짖으면서도 다시 일어난다. 놀랍도록 솔직하고 잔인한 '지니아'마저 다른 세 여자와 똑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토니, 로즈, 캐리스가 미치도록 지니아를 증오하고 두려워하며 부러워했던 것처럼, 지니아 또한 그 세 여자 모두를 미워하고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며 자신의 삶과 그녀들의 삶을 바꾸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지니아의 출생, 성장과정, 부모, 그리고 작품의 마지막으로 연결되는 그녀가 가진 미스터리함은 오싹하고 교활하게 다가오다가도 쓸쓸함으로 정리된다.

 

상처와 불안함으로 얼룩진 어린시절을 보낸 세 여자 토니, 로즈, 캐리스는 그런 어린시절을 보냈다는 것 외에도 '지니아'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최고의 친구로,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로, 잔인함과 퇴폐성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당당함으로 세 여자를 사로잡은 지니아. 그녀는 그 세 여자가 열어준 문 안으로 들어가 어느 순간 가장 소중히 생각하는 남편과 애인을 빼앗고 그녀들의 삶을 산산조각냈다. 지니아가 폭탄 사고로 죽었음에도 그녀를 향한 두려움과 증오의 한편에 깃든 어쩔 수 없는 동경은, 일상 생활 곳곳에 지니아의 잔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죽었다고 생각한 지니아가 다시 그녀들의 눈 앞에 나타나고 토니, 로즈, 캐리스는 두려움과 절망에 사로잡히는 한편, 자신들의 인생과 감정을 차근차근 짚어보기에 이른다.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지니아의 정체, 그리고 다시 나타난 목적.

 

지니아는 소위 말하는 팜므 파탈이다. 그 남자가 누구건, 누구의 남자이든 상관없이 자신의 매력을 100% 이용해 기필코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야 만다. 그리고 그 남자에게서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되면 바로 잠적하는데 버려진 남자는 아내에게 다시 돌아가기도 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기도 한다. 악역이지만 어쩔 수 없이 독자의 관심은 지니아에게 쏠리게 된다. '얜 대체 뭐야'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도대체 이 여자의 정체는 무엇이며 진짜 과거는 무엇이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것인가가 궁금해서 참을 수 없을 정도다. 게다가 마지막에 벗겨지는 지니아의 참모습이란!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지니아의 캐릭터는 토니와 로즈, 캐리스가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 아무리 지니아가 헤집고 괴롭혀도, 그녀들은 고통 속에 몸부림치면서도 그래도 진정으로 살아남기 때문이다. 내용적으로는 조금 지루한 감이 있어도 지치지 않고 끝까지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이 캐릭터들의 힘이 참으로 컸다.

 

캐나다 최초의 페미니즘 작가로 평가받는 사람이라 그런지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못났다. 말로만 번지르르하게 사랑한다고 하지 결국 그들이 원했던 것은 모험과 쾌락과 파괴적인 욕망이었으니까. 자신들에게 편안함과 안락함을 제공한 가정을 버리고, 부인이나 애인이 건네는 신뢰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깨닫지 못한 채 스러져 간 남자들. 나는 여자라서 그 남자들을 안타깝고 불쌍하게 바라봤지만, 남자독자들의 감상도 궁금하다. 그런 남자들을 이해할 수 있는지, 기회가 된다면 지니아같은 여자를 만나고 싶은 바람이 있는지.

 

마거릿 애트우드의 작품은 이 외에도 [인간 종말 리포트] 를 읽어봤는데, 여전히 내 기억 속에 독특함으로 남아 있다. 그렇게 유명한 작가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이런 저런 상을 많이 받은 데다 내가 신뢰하는 부커 상을 2000년도에 수상했다니 더 관심이 간다. 숲 속의 성으로 순진한 아가씨들을 유혹해서 잔인하게 해치우는 남자가 등장하는 <도둑 신랑>을 모티브로 만들어 낸 [도둑 신부]. 그 도둑 신부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지니아와 세 여자의 관계가 사실적이면서도 깊이 있게 그려진 재미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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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븐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8
가와카미 미에코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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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참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 중 하나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죠. 자신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고 그 어떤 잘못도 저지른 적이 없는 다른 이를, 단순히 즐거움과 쾌락을 위해 배척하고 괴롭히게 되는 인간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요. 그리고 그것이 '이지메'라는 이름이 붙여져 학교에서 공공연하게 저질러지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여러분은 알고 계신가요.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습니다. 무언가 독특한 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향한 적개심? 누군가 한사람을 괴롭히면서 얻게 되는 집단에 대한 소속감? 단순한 쾌락?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어떤 이유를 든다고 해도 누군가를 정신적, 육체적으로 괴롭히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이지메'를 소재로 한 책은 읽고 싶기도 하고, 읽고 싶지 않기도 합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일종의 의무감이 수반되어 있는데요, 어찌됐든 제가 있는 곳에서 혹시나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닌지 은연 중에 불안함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에요. '만약'을 전제로, 혹시나 이런 일이 생겼을 때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이지메를 당한 학생은 물론 가해자의 입장에 선 아이들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등을 생각해두지 않으면, 막상 일이 닥쳤을 때 패닉 상태가 되어버릴 것 같거든요. 항상 그런 각오로 이런 저런 책들을 읽곤 했지만 제 마음 속 대답은 늘 '모르겠다'입니다. 그런 현실이 부디 나의 세상에는 들어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그리고 그 가해 학생들의 마음이란 것을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걱정으로 한가득이 되어 결국에는 '어째서 인간은 누군가를 괴롭혀야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발전해버리고 말거든요. 후자의 경우에는 당연히, 이지메를 다룬 책에 등장하는 잔혹한 묘사들을 마주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헤븐'이라는 아름다운 제목과 파란색의 산뜻한 표지와는 달리 이 책의 내용은 정말 암울하기 짝이 없어요. 급우들(그들을 친구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까요)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나'와 역시 여학생들에게 지속적으로 왕따를 당하는 '그 아이' 고지마. 그들은 고지마의 쪽지를 시작으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마음 속 상처를 나누고 의지하며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 나가려고 합니다-라고 작가는 이야기하고 싶었던 듯 하지만. 제가 이 책을 덮고 떠올린 한 가지 감정은 '불쾌하다'였습니다. 급우들에게 폭력을 당하는 '나'를 바라보는 시간은 참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책을 읽다, 덮었다, 다시 읽기를 반복했죠. 하지만 급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나와 고지마를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더 불쾌했던 것은 상처를 나누는 그들의 '궤변'이(라 할까요) 었습니다.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그들의 마음에 더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다고 할까요. 특히 고지마의 경우에 말이죠.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이지메를 마치 성자의 고난처럼 받아들이는 고지마의 모습이 참 싫었습니다.

 

이지메는 사회적으로 민감하고 심각한 문제입니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아이들의 몸뿐만 아니라 마음에 더 큰 상처를 남기기 때문이죠. 그건 피해 학생에게만 국한된 게 아닙니다. 누군가를 괴롭히는, 그래서 지금은 '잘못'이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가해 학생에게도 상처가 되는 일이에요. 만약 작가가 어른들과 아이들에게 이지메의 폐해에 대해 알리고 싶었다면, 어째서 이지메가 옳지 못한 것인지에 대해 논리적인 이유와 문학작품으로서의 감성을 동반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가가 종국에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 짐작은 가요. 하지만 이지메하는 상황을 묘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거죠. 그런 장면은 오직 불쾌감과 혐오감만을 남길 뿐, 그 어떤 논리와 감성의 동조를 얻지 못해요.

 

유명인들의 자살로 헛헛한 요즘입니다. 생명은 점점 가벼운 것이 되고, 마음의 상처가 몸의 상처보다 더 심각해지는 사회가 되겠죠. 저도 아직은 답을 발견할 수 없고, 그 누구도 결코 '정답'을 제시할 수는 없겠지만, 때문에 그런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잔혹하고 서글픈 폭력의 묘사를 그린 작품이 아니라 희망과 교훈을 줄 수 있는 문학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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