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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이름들의 낙원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창비교육 / 2025년 4월
평점 :
** <창비교육>으로부터 지원받은 도서입니다.
[폭력과 두려움에 맞서는 용감한 발걸음을 응원하며]
[사라진 소녀들의 숲]을 시작으로 [붉은 궁], [늑대 사이의 학]까지 역사 속 굵직한 장면을 배경으로 은근한 울림을 주는 작가 허주은. 그의 신간 [잃어버린 이름들의 낙원] 또한 작가가 한국 독자들에게 건네는 목소리 중 하나입니다. <한국 독자들에게> 를 읽어보면 앞의 세 작품 이전에 먼저 [잃어버린 이름들의 낙원] 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요. 2015년 한무숙 작가가 쓴 [만남] 에서 주인공 정약용이 천주교와 연관이 깊었던 서양 학문에 매료되며 펼쳐지는 이야기에 깊은 인상을 받아 태어난 작품입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한 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된 후 조정에는 피바람이 예고됩니다. 모략과 배반, 암살로 궁정이 시끄러운 때, 민가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이 배덕한 자들이라 낙인찍히며 죽어나갑니다. 관비로 팔려 다모로 살아가는 '설'은 세상을 떠났다 생각한 오라버니의 무덤을 찾기 위해 애쓰는 한편, 연쇄살인사건의 비밀을 풀기 위해 포도청 한도현 종사관과 동행하죠. 여염집 아씨가 간직하고 있던 비밀, 죽음에 숨겨진 진실, 그리고 당시의 상황을 둘러싸고 있는 비극적인 사회 상황 속에서, 설의 용감한 발걸음이 시작됩니다.
엄연히 반상의 법도가 존재하는 데다 남녀차별이 당연시되던 시절에,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바삐 움직이는 '설'이라는 캐릭터는 무척 인상적입니다.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어떻게든 정해진 길을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려는 설의 모습은, 허주은 작가의 작품들 속 여성 캐릭터들과 맞닿아 있습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끊임없이 불을 밝히고, 위험을 무릅쓰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당연하게도 그녀들을 응원할 수밖에 없어요. 가진 것을 당연시하며 여성을 무시하는 남자들의 폭력 앞에서도 주저앉지 않는 모습은, 폭력과 차별에 굴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의 불씨를 안겨줍니다.
허주은 작가의 작품을 읽다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어째서 우리는 이런 비통한 시간을 겪을 수밖에 없었는가, 천주교의 가르침에 아무리 큰 충격을 받았다 해도 어떻게 하면 부모가 자식을 고발하고, 자식이 부모를 죽음으로 모는 참담한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는가 되묻게 돼요. 단순 역사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느낄 수 없는 울림. 그 울림이 바로 허주은 작가의 작품 안에서 들려옵니다. 그래서 계속 그녀의 작품을 찾게 되는 거겠죠.
늘 그랬듯, 진실은 밝혀질 것이고 '설'은 어떻게든 살아남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것이라 믿어봅니다. 그리고 이름 없는 자들이 온전히 자신의 이름을 찾지 못한다 해도, 그들의 발자취를 누군가는 기억하고 있다는 것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