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의 선물 - 커피향보다 더 진한 사람의 향기를 담은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이야기
히말라야 커피로드 제작진 지음 / 김영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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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에는 마법이 숨어있다. 굳이 마시지 않아도 그 향만으로도 기분을 포근하게 만들어주는 커피. 맛이 어떤지, 무엇 때문에 빠져있는지 정확히 설명하지도 못하면서 우리는 커피를 즐긴다. 나도 언젠가부터 하루일과에서 커피가 빠지면 어쩐지 허전함을 느끼는 커피 마니아가 되었다. 쉬고 싶고 여유를 즐기고 싶을 때 커피와 함께 하면 남은 하루를 더 씩씩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운이 솟아나기 때문이다. 그런 커피가 어디서 오는지, 누가 만들고 있는지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나 자신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참 신기하다. 그저 막연히 브라질 어디선가 오겠거니 했던 커피가 네팔의 말레 마을에서도 만들어지고 있었다.

히말라야 산맥에 깊숙이 자리한 마을, 아스레와 말레(좋은 사람들이 여기 정착하다라는 뜻). 네팔의 카트만두에 도착해서도 차를 타고 낭떠러지 길을 쉼없이 달려가야 한다. 마을 입구로 가기 위해서는 중간에 차를 포기하고 험한 산길을 올라가야 하는 말레 마을은, 그래서 외지인의 손길이 닿을 수 없었고 도시의 온갖 소음에서 벗어나 천연의 그늘 아래서 커피 농사를 할 수 있었다. 해발 2,000 미터에 자리한 데다 (고지대일수록 커피 열매는 단단해지고 밀도도 높아진다고 한다), 이른 아침 마을 전체를 덮는 안개까지, 농작물의 수확은 어렵지만 커피 농사에 필요한 최적의 환경이 갖추어진 그 곳에서 몇 가구가 커피를 희망으로 여기며 커피 농사에 매진하고 있다. [히말라야의 선물]에는 이런 말레 마을 사람들 각각의 슬픔과 애환, 희망이 담겨 있다.

22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미나. 그녀는 먹성 좋은 네 아이와 장난꾸러기 두 마리의 염소를 책임져야 한다. 남편이 떠나고 어려운 살림에 매일의 양식을 걱정해야 하지만 그녀에게는 네 명의 아이와 커피 농사가 희망이다. 커피를 잘 재배해서 수입이 생기면 아이들을 교육시킬 수도 있고 학용품을 사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다면 한창 젊음을 즐길 나이에 미나는 황무지에 커피 묘목을 심기 위해 잡초를 뽑고 돌을 골라냈다. 말레 마을에서 가장 꼭대기 집에 사는 움나트와 수바커르, 꺼멀라와 그들의 어머니 다니사라. 우등생이었던 움나트는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커피 농사에 매달리지만 폭우로 커피 나무를 잃은 뒤 인도로 이주 노동을 떠났다. 그 뒤를 이어 열네 살 수바커르가 당당한 소년 커피 농부로 거듭난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 가족과 떨어진 멋진 남자 다슈람. 그는 커피가 두 번 익으면 돌아온다고 가족들에게 약속했다. 사랑하는 아내와 귀여운 두 딸을 위해. 말레 마을에 처음으로 커피를 들여온 데브라스, 가장 많은 커피 나무를 소유한 둘씨람, 커피 농사에 모든 열정과 노력을 바치는 이쏘리. 열 살 아들에게 글을 배우면서도 행복한 서른 여덟(으로 추정되는) 로크나트.

비록 힘들고 어려운 살림이지만 그들의 웃음은 눈부시다. 어쩌면 이렇게도 순박하게 활짝 웃을 수 있는지. 가지고 있으면서 더 많이 가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가족의 행복을 위해 정성스레 커피 나무를 돌보는 말레 마을 사람들. 나는 그 중에서도 이쏘리의 이야기가 마음에 남았다.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가난한 살림에 몇 그루 밖에 커피 나무를 가지지 못했던 이쏘리. 하지만 커피 나무에 대한 그의 열정은 말레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인정할 정도로 뜨겁다. 그런 그의 커피 나무가 폭우로 인해 다 쓸려가고 한 그루밖에 남지 않았다. 살아남은 한 그루의 커피 나무를 '희망의 나무'라 부르며 이쏘리는 다시 일어선다. 그리고 다가온 수확의 시기. 1kg에 불과한 수확량을 들고 이쏘리는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절망의 시간을 견딘 후 얻은 눈 앞의 수확에 감사하는 이쏘리의 순박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부분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공정무역에 대해 알게 되었다. 저개발국 생산자에게는 정당한 몫, 공정한 대가가 돌아가도록 하고 소비자는 합리적인 가격에 물건을 구매할 수 있는 운동이라고 한다. 특히 책에 소개된 '아름다운커피'는 저개발국 농부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될 수 있도록 공정무역 원칙 아래 커피를 생산하고 수입하는 곳이다. 말레 마을 사람들의 커피도 공정무역을 통해 올바른 대가를 받고 전 세계로 퍼져나가면 좋겠다. 그래서 이주 노동을 떠난 움나트가 돌아와 상급학교에도 진학하고, 슬픔을 참으며 가족들과 헤어져야 했던 다슈람도 돌아와 가족들과 행복한 웃음을 짓게 되기를.

말레 마을에는 펄핑 (수확할 시기가 된 빨간 커피 열매의 껍질과 과육을 제거하는 과정) 기계도 들어왔다. 이제 그들의 커피는 더욱 좋은 품질로 거듭 태어나 말레 마을 사람들의 열정에 한층 불을 지필 것이다. 내가 커피 한 잔 하며 글을 쓰는 지금도 그들은 커피 나무에 온 신경을 쓰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남일같지 않다. 이 책을 통해, 그리고 지금 마시는 커피 한 잔을 통해 나는 가지 않아도 그 곳 사람들과 친구가 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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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걷기여행 - On Foot Guides 걷기여행 시리즈
프랭크 쿠즈니크 지음, 정현진 옮김 / 터치아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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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그 중에서도 프라하는 저의 로망입니다. 이렇게 되면 여기도 로망, 저기도 로망이냐고 하실지도 모르지만. 그렇습니다. 제가 가고 싶어하는 곳은 모두 저의 로망인 거죠. 여러분도 그렇지 않으세요? 겨울의 홋카이도만큼이나 겨울의 프라하는, 저에게는 말로 다 할 수 없을만큼의 로맨틱함을 가져다 줍니다. 그 로망의 시작은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눈 덮인 카를교. 그리고 겨울밤을 밝히는 반짝이는 불빛들. 저도 그 사진 속에서 주인공이 아니어도 좋으니 배경으로나마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제가 프라하에 가고 싶어하는 이유는 단지 그것 뿐이지만, 떠나기에는 더없이 충분한 이유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올 여름에는 꼭! 프라하에 가자고 친구랑 새끼 손가락 걸고 약속까지 했습니다!

[프라하 걷기여행]이라고 해서 여타의 다른 여행에세이 같은 글을 기대하셨다면 조금, 읽기가 수월하지 않으실 수도 있어요. 제가 그랬거든요. 살살 감성을 어루만져주는 말랑말랑한 책이 아니라 지리책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책이었으니까요. 마치 지리 공부를 하는 것 같은 심정이었어요. 이 책에 수록된 지도는 지도 전문 제작팀이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를 이용해 디지털로 완성했다고 합니다. 건물들이 위치한 평면도를 스케치하고, 인위적으로 거리 너비를 확대한 후 항공 촬영으로 확보한 실사 사진을 이용해 평면 지도에 3차원 건물을 삽입, 각 건물의 세부 사항과 색을 추가하여 지도를 마무리한 거죠.  

이런 지도를 바탕으로 각 번호에 해당되는 설명이 책에 쓰여 있습니다. 지도를 따라가면서 그 곳에 무엇이 있을 지 머릿속으로 상상하면서 책을 읽게 되는 겁니다. 어쩐지 어렵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저는 이 책의 색다른 매력에 그만 흠뻑 빠져버렸습니다. 정말 프라하의 거리 한 가운데에 서 있는 것만 같았거든요. 

[프라하 걷기여행]의 걷기 코스는 모두 12가지-요세포프, 카를교에서 구시가 광장까지, 구시가 광장에서 프라하 시민회관까지, 바츨라프 광장, 성 정문에서 말로스트란스카 역까지, 흐라드차니, 페트르진 언덕, 비셰흐라드 순회, 말라 스트라나, 캄파 공원에서 카를 광장까지, 플로렌스에서 바츨라프 광장까지, 국립극장에서 식물원까지-입니다. 처음에는 뭣도 모르고 책을 읽어나갔는데요, 각 지역마다 특색이 있더라고요. 어떤 곳은 도시의 기원을, 또 다른 곳은 긴장을 풀고 여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는 휴식처를, 혹은 역사의 상처를. 각 코스마다 지닌 특징이 무척 뚜렷해서 어느 한 곳이라도 놓치면 아까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지명이나 사람 이름, 문화재의 이름이 조금 어려워서 그렇지 마지막까지 책을 읽고나면 아마 뿌듯하실 거에요. 

저와 친구의 원래 계획은 이왕 체코까지 간 김에 프라하 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들까지 둘러보자는 거였는데, 이 책을 읽고나니 생각이 확 바뀌었습니다. 이 책을 지침서로 프라하를 둘러보려면 무리해서 하루에 두 코스씩 한다고 해도 적어도 6일, 최대 12일이 필요한 셈이니까요. 지금은 저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지만 아마 친구가 이 책을 읽어보면 저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요? 아웅, 여름까지 열심히 일하고 어서 빨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마음이 벌써부터 살랑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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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수탑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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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김전일의 할아버지 긴다이치 코스케입니다. 저는 긴다이치 코스케하면 일본 SMAP의 멤버 이나가키 고로가 생각나요. 제가 처음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를 드라마로 접했을 때의 주인공이 바로 이나가키 고로였거든요. 새가 집을 지은 듯한 더벅머리에 어눌한 말투까지, 소설 안에서 묘사된 긴다이치 코스케는 고로와 참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긴다이치 코스케도 김전일처럼 평소에는 어벙한 모습이지만 사건이 터지고 작은 단서라도 손에 넣으면 실마리를 따라 끈질기게 사건을 추적하죠. 김전일이 항상 외치던 '할아버지의 이름을 걸고!'가 생각납니다. 저 <소년탐정 김전일> 팬이거든요. 홍홍. 

[삼수탑] 은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중 여덟 번째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작품인 듯 합니다. 그 중에서도 이 [삼수탑] 은 네 번의 드라마와 한 번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니 그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되고도 남습니다. 삼수탑. 어떤 생각이 드세요? 삼수탑 중 '삼수'는 '三首'의 한자를 사용합니다. 즉, 세 개의 머리가 있는 탑이란 뜻이 될텐데요, 저도 처음에 제목의 뜻을 알고 오싹했지만 다행히(?) 실제 머리가 아니라 머리의 모양을 본 뜬 조각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고 해요. 그 삼수탑을 둘러싸고 마침내, 또, 사건이 벌어집니다. 

작품의 주인공은 미야모토 오토네. 어린시절 양친을 잃고 백부 (그러나 큰이모의 남편) 의 양녀가 되어 교양을 쌓아온 여성입니다. 어느 날 그녀 앞에 변호사가 나타나 먼 친척에 해당하는 사타케 겐조가 그녀를 백 억엔이라는 유산 상속자로 정했다는 이야기를 들어요. 단,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서는 다카토 슌사쿠라는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얼마 후 백부의 회갑연에서 벌어진 잔혹한 세 건의 살인사건. 피해자 중에는 오토네의 정혼자로 알려진 다카토 슌사쿠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사건을 시작으로 백 억엔이라는 유산을 둘러싼 피의 참극이 시작됩니다. 오토네와 슌사쿠의 결혼이 무산되었을 때는 겐조의 혈육들에게 재산이 분배된다는 사실이 공표된 후 친척들이 하나 둘, 끔찍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 와중에 다카토 고로라는 남자와 연을 맺고 사건의 중심에 뛰어든 오토네. 이 작품은 그 오토네가 사건이 전개되던 시기부터 마무리 될 때까지 집필한 일기 (혹은 유서) 의 형식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를 책으로 접한 것은 [팔묘촌] 이후 처음입니다. 기본적으로 탐정소설을 좋아하기도 하고 시대물에도 흥미가 있어 꾸준히 관심은 가지고 있었지만요.  [삼수탑] 은 특별히 트릭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용 전개는 흥미로운 편이에요. 연달아 사건이 터지고 과연 이 사건이 어떻게 정리되는가를 궁금하게 만드는 작품이거든요. 추리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기본적으로 진실을 알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기 때문에 트릭이나 동기가 적합하다면 주인공이 비호감이라든가 단어 사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낮은 평가를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그럭저럭 읽을만 했다'에 비해 조금 짜게 별점을 준 이유는 이 오토네에 대해 호감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시종일관 존슨즈 베이비 로션의 모델인양 '맑고 바르고 아름답게'를 외치는 오토네는 그저 신파극의 주인공에 지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초반에 오토네는 한 남성에게 겁탈을 당하는데 '아아'하며 탄식만 할 뿐 나중에 똑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도 그저 굴복하고 말아요. 입으로는 백부님과 친구들을 볼 면목이 없네 어쩌네 하면서도 말하는 것과는 달리 행동하는 그녀를 보면 어쩐지 정이 가지 않는다고 할까요. 오토네가 화자이고 극의 중심이기 때문에 그녀가 작품의 전체를 총괄한다고 보아도 무방한 상황에서, 인물에 대한 비호감은 작품 평가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오토네 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들이 쓰는 단어들도 눈에 걸리는 게 좀 있어서-핥듯이 쳐다보는 시선이라는 표현은 꽤 여러번 나와요-완전히 몰입하기는 힘들었습니다.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가 인기가 있는 이유는 저의 이러한 소소한 이유들을 뛰어넘을 수 있는 긴다이치 코스케만의 매력이 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해요. 이번에는 긴다이치 코스케의 활약도 그리 크지 않았고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적어서 아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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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 꿈이 끝나는 거리 모중석 스릴러 클럽 26
트리베니언 지음, 정태원 옮김 / 비채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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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작가 이름과 표지를 봤을 때는 '게임책같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리고 뒤따르는 선입관. 상처라도 입은 듯 한 쪽 손은 코트를 바싹 여미고, 한 쪽 손은 권총이 들린 채 늘어져 있는 남자와 따스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진한 회색의 풍경. 메마른 고독의 냄새만 풍겨나오면 어쩌나 하는 염려 아닌 염려. 표지만으로도 한숨이 포옥 나올 정도의 외로움이 느껴져 선뜻 책을 펼칠 수가 없었다. 고독을 풍기는 남자가 싫은 것은 아니지만 그런 분위기를 만나기 싫은 때도 가끔은 있는 것이다. 결국은 한 탐정이 (혹은 형사가) 외투 깃을 꼭꼭 여미고 고독의 바람을 일으키면서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가 될 거라고, 단순히 그렇게만 생각했다. 

라프왕트 (어쩐지 중국 사람 이름같다) 는 이제 53세를 맞는 메인의 경찰이다. 몬트리올의 프랑스계 지역과 영국계 지역의 경계선이 애매하게 되어 어느 쪽 언어도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 중간지대, 이민자들이 가장 먼저 정착하는 곳, 노인과 패배자, 신세를 망친 사람들의 삶이 이어지는 곳, 메인. 그 곳에서는 꿈을 꾸는 것은 사치이고 작은 자존심을 지키는 것마저 굉장한 구경거리가 된다. 그런 메인에서 유일한 법의 집행자인 라프왕트는 오늘도 메인의 안전을 위해 순찰을 계속한다. 결혼 1년 만에 아내를 잃고, 총격전에서 얻은 부상으로 시한부 인생을 사는 남자. 유일한 즐거움은 친구들과 모여 피너클 게임을 하는 정도일까. 어느 밤, 젊은 이탈리아 남자가 칼에 찔려 살해되고 라프왕트는 젊은 신참내기 형사 거트먼과 빛바랜 메인의 역사를 다시 걷는다. 

굉장히 정적인 작품이다. 형사물임에도 범인을 뒤쫓는 숨가쁨, 스릴은 잘 느껴지지 않는다. 라프왕트가 메인을 순찰하듯, 사건은 단서의 문을 열고 또 열면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해결되어 갈 뿐이다. 작가는 이탈리아 청년의 죽음을 전면에 내세운 채 피폐한 메인의 거리, 그 곳에서 숨 쉬는 매춘부, 포주, 음식점과 술집의 주인들의 삶을 하나하나 조명한다. 그 곳에서 라프왕트의 삶 또한 제외될 수 없다. 라프왕트가 다른 것은 그가 메인을 관할하고 순찰하는 경관이라는 것 뿐, 그의 삶 또한 메인에 얽매인 다른 사람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고독이라는 병을 가슴 한 구석에 깊이 묻은 채 작은 설레임과 기쁨을 선사하는 존재가 다가오는 것에도 두려움을 느끼는 약하디 약한 노인일 뿐이다. 겉으로는 강한 척 하지만 늘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고 있을 리 없는 딸들을 상상하는 그 누구보다 연약한 존재. 

메인의 유일한 무법자(?) 라프왕트와는 달리 교과서대로의 경찰의 삶을 실현하려는 거트먼과의 조합이 참 재미있다. 수습형사로서 라프왕트와 사건해결에 뛰어든 거트먼 또한 젊다고 해서 특유의 발랄함과 눈부신 젊음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그가 나이를 먹는다면 라프왕트같은 진중함과 무게감을 지니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만큼 매사에 신중하고 진지한 청년. 머리로는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 똑바로 서 있지만 라프왕트와 함께 행동하면서 그 기준도 모호해진다. 그런 거트먼을 곁에서 지켜보는 라프왕트의 모습은 흡사 의지할 수 있는 아버지를 보는 듯 했다. 의외의 곳에서 간간히 웃음이 나올만큼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커플이었다. 

이 작품의 강점은 역시 분위기다. '고독'이라는 단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고, '퇴폐'라는 단어만으로는 아우를 수 없는 거리 메인에서 그 메인을 닮아가는 남자 라프왕트는 나에게 이상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그것을 연민이라고 불러야 할 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상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진심으로 행복을 비는 마음이 되어버렸다. 결국에는 범인이 드러나지만 앞쪽에서 풍기던 분위기가 뒤쪽에서 드러난 사건의 전모와 그리 잘 어울리지 않아 그 점이 약간은 아쉽다. 엄청난 걸작이 평범한 작품으로 돌아가버린 듯한 느낌. 하지만 <워싱턴 포스트>의 가장 완벽한 느와르라는 평가에 대해 불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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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실격 외 세계문학의 숲 5
다자이 오사무 지음, 양윤옥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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헥헥. 드디어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을 읽었습니다. 생각보다 읽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그다지 두껍지 않은 분량임에도 처음 도전! 하던 그 마음을 유지하기가 참 힘든 책입니다, 이 작품. 세계문학은 늘 마음 한 켠에 약간의 부담을 가지고 첫 페이지를 펼치게 되는데, 일본어 전공자라 그런지 일본의 세계문학은 좀 수월한 편이었어요. 도전! 할 때도 그렇고 작품을 계속 읽어내려갈 때도요. 그런데 이 녀석은 작품의 분위기와 주인공에 대한 몰입이 조금 힘들었습니다. 숱한 자살미수를 거쳐 결국에는 자살에 성공한 작가의 작품이었기 때문일까요. 가늠할 수 없는 어둠의 늪으로 자꾸만 끌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에 마지막까지 읽어낸 저 자신에게 기특하다 해주고 싶을 정도입니다. 토닥토닥. 

작품은 알만한 분은 다 아시는 -나는 그 남자의 사진을 세 장, 본 적이 있다-로 시작됩니다. 어린 시절의 모습에서조차 어린아이다운 모습을 발견할 수 없는 남자. 유복하고 여유로운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인간관계를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저히 알 수 없다는 그, 인간이 가진 감정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던 그는 '인간에 대한 마지막 구애'로 광대짓을 시작합니다. 자신의 마음과는 정반대로 타인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살아가게 되는 삶. 누군가에게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 하나로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나마 정상적인 유년시절을 보낸 그의 인생은, 그러나 가족들과 떨어져 학창시절을 보내는 동안 철저히 파괴되고 이것이 정말 인간의 삶인가 싶을 정도의 타락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저는 작품을 읽을 때 묘사와 문장도 꼼꼼하게 보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감정이입'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등장인물들의 감정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고 당위성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자신이 마치 등장인물이 된 것마냥 상황에 하나하나 반응하게 되는지요. 그런 감정이입이 없으면 등장인물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작품 전체도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은 당연한 거겠죠. 저에게는 이 작품이 그랬어요. 아무리 유명하고 가치있는 세계문학이라고는 해도 저는 이 작품의 주인공이 어째서 이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었는가, 그 점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뭔가 해보고자 하는 의지, 어떻게든 풍요롭게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저 또한 충만하다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만-가 결여된 한 인간이, 그저 인간 세상의 이치를 잘 깨닫지 못하겠고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에 두려움을 느낀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까지 자신의 삶을 내던져버릴 수 있는가, 하는 점이요. 그것을 과연 젊은이의 순수-만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일까요. 

어쩌면 제가 너무 좁은 범위 안에서만 이 작품을 바라보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 번 주인공의 감정에 물음표가 떠오르자 몰입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으니까요. 전 이번에는 다 읽은 것만으로 만족할래요. 다른 책들처럼, 이 작품도 나이를 먹고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기대를 눌러담아 책장에 고이 꽂아두겠습니다. 참, 이 작품 안에는 <인간실격> 외에도 <물고기비늘 옷>, <로마네스크>, <새잎 돋은 벚나무와 마술 휘파람>, <개 이야기>, <화폐> 도 같이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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