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드헌터
요 네스뵈 지음, 구세희 옮김 / 살림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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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스티그 라르손이라 불리는 작가가 있다면 귀가 솔깃해지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밀레니엄>시리즈로 엄청난 재미와 기대를 선사했다가, 계획했던 10부작을 끝마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해 안타까움을 자아냈던 작가,님! 처음 <밀레니엄> 시리즈를 접하고 그 후편이 출간되기를 기다렸던 설레임은 북유럽 문학의 매력으로 나를 이끌었고 그의 죽음을 뒤늦게 알고나서는 한동안 마음이 허전했었다. 자칭타칭, 스티그 라르손의 이름을 걸고 북유럽 문학의 신성이라느니, 기대주라느니 하는 평가를 받아 출간된 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스티그 라르손만큼 내 마음을 사로잡는 북유럽 작가는 영원히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데! 이 작가, 요 네스뵈에게는 조금은 기대를 해봐도 좋지 않을까!

 

북유럽 스릴러의 자존심, 제2의 스티그 라르손, 북유럽의 제프리 디버, 마이클 코넬리, 할런 코벤 등 화려한 별칭을 달고 다니는 이 남자, 노르웨이의 한 록 밴드에서 보컬을 맡고 있는 특이한 전력의 이 남자는(사진 꽤 멋지다!) 현재 북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고 잘나가는 스릴러 작가라고 한다. 그야 처음에는 나도 힘차게 콧방귀를 날려주었었다. 그런 사람들이 한 둘이었어야지! 하지만 호기심은 억누를 수 없는 법.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발단 부분의 설명이 조금 자세하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일 뿐, 기대 이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

 



 

주인공은 업계 최고의 헤드헌터 로게르 브론. 추천한 인재가 단 한 번도 채용 심사에서 거부당한 적이 없는 유능함을 자랑하는 데다, 아름다운 아내에게 갤러리를 선물할 정도로 능력있는 남자지만 그에게는 한 가지 비밀이 있다. 바로 유명한 미술작품을 훔쳐 팔아왔다는 것. 인생의 한 방을 노리는 그 앞에 클라스 그레베라는 거물이 나타나고 로게르는 언제나처럼 그가 가진 미술품을 훔쳐내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비틀리기 시작한 그의 운명. 동업자인 우베는 그의 차안에 쓰러져있고, 평생의 사랑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아내 디아나의 배신에, 진정한 '헤드'헌터에게 쫓기에 되는 로베르. 자신의 인생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내기 위한 그의 고군분투가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스피디하게 펼쳐진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도입 부분이 조금 길다. 보통 작품의 경우 100페이지 정도면 갈등상황이 일어나기에 충분한데도 이 작품에서 100페이지는 여전히 시동을 걸고 있는 상태. 그 탓에 초반 집중력이 조금 흐려지기는 했지만 그 부분은 로게르의 성격과 일이 진행되는 과정을 찬찬히 이해하는 데 필요하기도 하다. 클라스 그레베의 미술품을 훔쳐내기 시작한 순간부터 높아진 긴장감은 작품이 끝날 때까지 그칠 줄 모르고 한 번 발동이 걸린 속도감은 순식간에 책을 읽어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생각보다 잔인하고 구체적인 묘사들에 인상이 약간 찌푸려지기도 했지만 어느새 로게르에게 동화되어 현실에서라면 허세와 열등감으로 가득찬 도둑에 불과한 그를 응원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점은 로게르의 아내 디아나의 인물설정이다. 그녀는 아이를 간절히 원하지만 그녀와는 달리 로게르는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 바로 그 '아이' 때문에 디아나가 사건에 개입하게 되는데,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런 말에 홀딱 넘어가 자신의 남편에게 그런 상황을 초래할 수 있는지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부분의 디아나의 대사는 꽤 마음에 남는다. -뭐든지 균형이 가장 중요해. 건전하고 조화로운 모든 관계에도 균형이 중요하거든. 죄책감의 균형, 수치심과 양심의 가책의 균형.-

 

사건이 발생하고, 위기에 몰리며, 상황을 파악하여 복수를 하고 일상의 평온한 자리를 되찾는 모든 과정을 거치며 퍼즐맞추기 같은 구성력으로 기대 이상의 재미를 보여주었지만, 아직은 조심스럽다. 그를 정말 제2의 스티그 라르손으로 인정할 것인지 아닌지는 다음, 혹은 그 다음 작품으로 결정되지 않을까. 다른 출판사에서도 곧 요 네스뵈의 작품을 만날 수 있을 듯 하니. 부디 그를 진정한 스티그 라르손의 후계로 인정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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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스콧 스미스 지음, 남문희 옮김 / 비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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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케이블에서 <루인스>라는 제목으로 방영되던 영화가 생각난다. 내가 본 장면은 유적지 같은 곳에서 매우 동양적으로 생긴 남자가 어떤 사람들에게 활을 겨누고 있던 장면이었는데, 그 장면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조마조마해서 얼른 채널을 돌려버렸다. 분명히 두 집단 간의 갈등으로 피가 튀게 되는 잔혹한 공포영화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무서운 것은 활을 겨누던 그들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즐거웠어야 할 여행. 웃고 떠들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미래를 향한 잠깐의 쉼표에 지나지 않았던 순간들이 이제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과거가 되어버렸음을, 그들은 과연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순간의 선택으로 자신들의 운명이 결정되어 버린 것에 대해, 그들도 나도 운명이란 참으로 이상한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어렸을 때는 <사탄의 인형>에 나오던 처키가 제일 무서웠더랬다. 사악한 영혼이 들어간 인형이 지금도 내 침대 밑에서 앙증맞아야 할 손에 칼을 쥐고 두 눈을 희번득거리고 있을 생각에 매일 밤 두려움을 참으며 침대 밑을 살폈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가장 무서운 것은 어쩌면 그런 귀신들이 아니라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더 많이 했었지만, 이 책을 보면 우리가 두려워하고 무서워할 수 있는 미지의 생물들이 얼마나 많은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핑계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런 미지의 존재들에 대해 알면 알 수록 나의 도전감이나 모험심은 금새 꼬리를 내려버리고 만다. 언제 어디서 나도 그들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지 모를 일이므로.

 

제프, 에이미, 에릭, 스테이시의 멕시코 휴가는 즐거웠다. 중간에 독일인 마티아스를 만나 취소되었던 난파선 잔해 구경도 할 수 있었고 유쾌한 그리스인 청년 세 명을 만나 말은 통하지 않아도 호탕하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해수욕, 제트스키, 미니어처 골프에 맛있는 음식들과 한밤의 술파티. 자유로운 시간들은 마티아스가 그의 동생 헨리히를 찾는 데 도움을 달라며 끝을 맺는다. 그리스인 청년 두 명만 제외하고 그의 동생이 있다는 유적지로 길을 나선 그들 앞에 나타난 불안의 징조들, 택시 운전사의 기묘한 언행을 모두 무시하고 그들이 당도한 곳은 무시무시한 덩굴이 우글대는 폐허였다. 그들은 그 곳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덩굴이 우글대는 언덕 아래에는 활과 총을 든 마야인들이 버티고 있을 뿐이다. 도움의 손길은, 없다.

 

작가가 내세운 공포는 두 가지. 첫 번째는 기묘한 식물들의 존재다. 그것들은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생각도 할 줄 알고 사람들을 관찰할 줄도 알며 심지어 그들의 소리를 흉내내고 그들 사이를 이간질 시키기 위해 계략을 짜기도 한다. 만지면 즙이 나와 화상을 입히고 그들 전부를 순식간에 살점 하나 남지 않은 해골로 만들어버린다. 상처가 난 곳으로 파고 들어가 몸 안에서 기생하기도 하고 코와 입을 막아 질식시키기도 하는 무서운 생물.

 

주인공들은 그 곳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너무나 강력한 번식력을 익히 알고 있던 마야인들은 그들이 그 언덕에서 한 발도 빠져나오지 못하게 막는다. 도망가려는 사람들의 목숨을 활과 총으로 빼앗으면서. 그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꾸 반복되는 그 일이 이제는 일상이 되어 누군가를 죽이고 그들 중 단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된 걸까. 그 일이 자신들의 마을과 세상을 지키는 일이므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 분위기가 너무나 숨막히고 갑갑해서 책을 읽던 내가 숨이 가빠질 정도였다.

 

두 번째는 그런 잔혹한 공간에 갇혀버린 제프와 에이미, 에릭과 스테이시의 관계와 개개인의 정신세계가 어떻게 붕괴되어가는지를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리더의 자질을 타고난 제프, 늘 불평불만만 제기하는 에이미, 상처를 입고 강박증에 시달리게 되는 에릭과 그나마 덤덤해 보이지만 공포에 사로잡힌 스테이시를 통해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 속에서 네 명의 개성적인 인물들이 어떤 행동을 취하는지, 그들의 심리는 어떠한지를 묘사한다. 네 명의 시선을 통해 전개되는 작품은 그래서 더 무섭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상상한 최고의 공포는 그런 상황 속에서 혼자만 살아남는 경우였다. 결국 그들은 모두 사라지고 스테이시 홀로 남는데 그녀가 텐트 바깥에 앉아 모두와 나누어 먹기로 한 음식을 전부 먹어치우는 장면이 가장 안타깝고 끔찍했다. -전부 다, 그녀는 전부 다 먹어치웠다-라는 문장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아 사라지지 않는다.

 

구조를 기다리던, 정확하게는 남겨두고 온 그리스인 두 명이 자신들을 구해줄 거라 믿었던 그 믿음 그대로 전부가 사라진 후에 그들은 찾아온다. 앞서 5명이 밟았던 길을 그대로 따라서.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친구를 찾아 덩굴이 우글대는 언덕에 올라가 친구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고 있다. 공포는, 계속된다. 영화를 끝까지 보지 않고 채널을 돌리길 잘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그 날 밤, 꿈에서 나는 그 덩굴들과 마야인들과 혼자 남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끝없이 허우적거려야 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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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아래
야쿠마루 가쿠 지음, 양수현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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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인 메세지를 담아 늘 강렬한 의미를 전달해왔던 야쿠마루 가쿠의, 제가 접하는 두 번째 작품입니다.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만든 [천사의 나이프]는 아직 읽지 못했지만 심신상실을 이유로 상대적으로 약한 형벌을 받게 된 가해자와 피해자 가족을 그린 [허몽]은 인상깊었어요. 소년법, 심신상실에 이어 이번에는 성범죄를 다루었는데 그 중에서도 소아성애자들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가 되지 않는 욕망이리라 생각됩니다. 귀엽고 맑은 아이들의 어디에서 말도 안 되는 그런 욕망을 느끼게 되는 걸까요? 제가 즐겨보는 미드에서도 가끔 다루어지는 소재지만 정말 끔찍하다고밖에 달리 이를 말이 없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세상의 모든 부모를 겁먹게 만드는 가장 무서운 범죄자일 거에요.

 

소녀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가 일어날 때마다 과거 그런 범죄 전력이 있던 전과자들이 하나씩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사체는 목이 없고 난자당해 있으며 복부에는 대문자로 S가 쓰여 있습니다. 자신을 사형집행인으로 부르는 범인은, 그런 범죄가 사라지지 않는 한 범죄자들은 계속 목숨을 잃게 될 것이라 발표하죠. 과거 성범죄자에게 여동생을 잃은 나가세 형사는 처음에는 소녀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 사건에 투입되지만, 개인적인 인연으로 성범죄자들을 살해하는 범인을 잡기 위해 뛰어듭니다. 그에게는 가혹하기 이를 데 없는 사건. 그의 마음 속에서도 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급기야 범인은 나가세 형사에게 손을 내밉니다.

 

사회적인 메세지를 담고 있는 소설들이 으레 그렇듯, 이 작품도 '이것이 정답이다'라고 뚜렷한 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과거 범죄자이기는 했지만 이미 죗값을 다 치렀고 지금은 자신만의 생활을 이루고 있으니 그저 용서해야 할까요? 현재 죄를 저지르기는 했지만 개인적인 복수가 아니라 법의 심판을 받게 하는 것이 옳을까요? 그렇다면 피해자 가족들에 남은 상처와 응어리는 대체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요? 결국 직접 당해보지 않으면 우리는 피해 가족들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겠죠. 소설은 드물게도 범인의 아픔까지 보여주는 구성을 취하는데요, 그 범인이 어떤 사건의 범인이냐에 대해서까지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그를 보고 있자면 뭔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전해져와요. 인간으로서 느끼는 연민이겠죠.

 

속도감있고 스릴있게 전개되는 작품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둠 속에서 바닥을 매만지듯 막막하고 고요하기만 해요. 사건해결에 집중하기보다 사건을 뒤쫓아가는 그 과정 속에서 아픔을 느끼는 사람들을 조명하며 그 상처를 우리것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부디 나와 내 가족,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음을 절감했기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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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종의 요리책
카를로스 발마세다 지음, 김수진 옮김 / 비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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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껴지십니까? 제목에서부터 뿜어져나오는 이 강렬한 포스가! 네, 저는 그 포스를 느끼고 한참이나 읽기를 망설이고, 또 읽다가 한숨을 푹푹 쉬며 내려놓고, 또 뭔가 이상해져오는 속을 달래기 위해 한참이나 쉬엄쉬엄 읽을 수밖에 없던 작품이었습니다. 식.인.종. 게다가 요.리.책. 뜨아! 예전에 [금단의 팬더]라는 일본소설을 읽은 적이 있어요. 그 책 표지에는 귀여운 팬더가 풀을 먹고 있었습니다. 먹고 있는 곳이 음식그릇 위이기는 했지만요. 귀여운 팬더이기는 하지만 온갖 것이 음식의 재료가 될 수 있는 마당에 징그럽기는 하지만 팬더라고 예외이겠더냐! 하는 마음으로 읽었답니다. 하지만 내용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하고 제 속을 불편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식인종의 요리책]은 정말 적나라하게도 식.인.종의 요리를 다루고 있죠.

 

이야기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가 제 어미의 가슴을 물어뜯으면서 시작됩니다. 엄청난 고통과 충격으로 어미는 심장마비를 일으켜 그 자리에서 사망. 오래된 건물에 살고 있던 쥐들이 나타나 시신을 처리하는 가운데 아기는 해맑게(?) 살아남습니다. 아기의 이름은 세사르 롬브로소. 그리고 이야기는 시간을 거슬러 세사르 롬브로소의 가족사와 그가 태어난 건물, 정확히 말하자면 레스토랑 '알마센'에 얽힌 역사를 들려줍니다. 레스토랑의 창시자 카글리오스트로 형제가 지은 전설의 요리책 '남부 해안지역의 요리책'이 중심에 있었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죠. 어찌보면 알마센과 롬브로소 가문의 기나긴 역사는 이 책과 함께 해 온 것이 될테니까요.

 

처음 예상했던대로 작품에서 잔혹성과 기괴함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책의 제목만 봐도 유추할 수 있듯, 세사르 롬브로소의 요리는 상상이상었습니다. 아기였을 때부터 풍기던, 피부를 스멀스멀 타고 올라오는 것 같은 어둠의 기운을 풍기던 세사르 롬브로소의 독특한 요리장면은 매우 적나라했거든요. 하지만 예상 외로 롬브로소 가문에 얽힌 역사와 사건들은 무척 흥미롭게 전개됩니다. 단순히 폭력과 살인만으로 포장된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알마센에서 일하게 되었는지, 알마센을 이어받아온 롬브로소 가문의 다른 이들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를 읽는 재미가 좋았다고 할까요. 한편으로는 안타까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평범한 음식을 요리할 때의 감칠맛도 이 책의 매력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어쩐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작품인 [향수]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두 작품은 닮아 있습니다. 세사르 롬브로소가 제 어미의 젖가슴을 물어뜯은 후 그 맛을 음미하며 그에게 미각에 관한 한 비범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장면은, [향수]의 주인공 그루누이가 시장통 생선가게 쓰레기들 틈 사이에서 코를 벌름거리며 천재적인 능력을 타고났음을 암시하는 장면과 오버랩되죠. 마지막 장면 또한 그루누이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루누이는 오직 자신만의 향수를 만들고자 하는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여성들을 살해했다면, 세사르 롬브로소는 자신에게 해를 가할 것 같은 사람들의 목숨을 취했다는 것일까요. 그들 모두에게 죄책감은 없었지만요.

 

지금까지 한 번도 '요리'라는 행위 안에 폭력성이 숨겨져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요리하는 그 행위 자체가 엄청난 폭력성을 띠고 다가옵니다. 아름답고 친근한 장면인데 말이죠. 읽는 동안 속이 많이 좋지 않기는 했지만, 잔혹한 장면들 외에 롬브로소 가문의 가족사에 중점을 두고 읽으면 나름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만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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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언제나 네가 있었다
후지와라 신야 지음, 강병혁 옮김 / 푸른숲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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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해 섬세한 눈길을 가진 사람을 존경합니다. 타인의 기쁨, 타인의 슬픔, 타인의 고독에 귀기울이고 눈여겨 볼 수 있는 사람이요. 자신의 생각과 감정만을 고집하지 않고 다른 누군가가 간직한 사연을 존중할 줄 알며 그 깊이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갈 수 있는 것도 탁월한 능력 중 하나일 겁니다. 특히 요즘처럼 오로지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길을 달려가느라 주위를 둘러볼 여력이 없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세상에서요. 달리기를 멈추고 뒤돌아보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요?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다 자부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마음이 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정확한 답은 없겠지만 결국 위로받을 수 있는 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루를 열고 그 하루를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지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될 때가 있으니까요.

 

사진작가로 유명한 후지와라 신야의 에세이, 14편입니다. 그 어떤 드라마보다 드라마틱하고 물을 가득 머금은 꽃잎처럼 촉촉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어요. 지하철 한 정거장을 지나칠정도의, 딱 그만큼의 시간을 할애하면 읽을 수 있는 짧은 이야기들이지만 그 이야기들 속에 담긴 감동과 설레임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이 책 속에 담긴 이야기들은 일본 지하철에 놓이는 무가지 [메트로 미니츠]에 6년 동안 연재한 일흔한 편의 글 가운데에서 골라 수정한 것이라고 해요. 다른 분들도 그렇겠지만 14편의 이야기를 제외한 다른 에피소드들은 어떤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을지 궁금하네요.

 

아마추어 모델과 아마추어 사진작가의 한 순간의 교감, 서늘한 도시에서 느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 어렸을 적 추억을 발판으로 다시 뿜어져 나오는 삶에 대한 의지, 행복했던 시절을 세상의 마지막으로 간직하고 싶었던 부부, 상처받은 동물과 인간의 애정, 우연히 들른 찻집에서 발견한 소소한 감정들, 지하철 한 정거장을 지나는 사이에 일어난 사건, 노화가의 황혼에 찾아온 희생적인 사랑 등. 과연 현실에 이렇게 영화같은 이야기가 존재할 수 있는가를 의심하게 만들 정도의 가슴 따뜻한 에피소드들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것은 찰나, 아주 짧은 순간이에요. 아주 작고 짧은 시간 속에서 인생을 좌우할 선택들이 오고가는 것을 보면 삶의 오묘함에 가슴이 찌릿해져 옵니다.

 

책의 내용들도 그렇지만 서정적인 사진과 한 줄의 시같은 소제목들도 인상적이에요. 코스모스 그림자 뒤에는 늘 누군가 숨어 있다, 오제에서 죽겠습니다, 당신이 전철의 다른 방향을 보았을 때, 거리의 소음에 묻혀 사라질 만큼 작고 보잘것없는 것, 예순두 송이와 스물한 송이의 장미 등 소제목 자체에도 일본 특유의 감성이 전해져오는 듯 합니다. 노작가의 따스한 세상 바라보기에 비 내리는 오늘, 제 마음도 촉촉히 젖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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