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을 기다리며
츠지 히토나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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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e my memory...

이 약을 삼키면 미친듯이 격렬하게 춤을 춘다. 그리고 기억을 잊는다. 나를 아프게 하는, 나를 슬프게 하는, 내가 잊고 싶은 그런 기억만. 신종 마약이다.

 

이 약 때문에 시로의 형 지로는 머리에 총을 맞고 식물인간이 되어 누워있다. 시로는 이국적인 외모의 남자에게 '루즈 마이 메모리'가 담긴 란도셀(가방)을 찾아내라는 협박을 받고, 이 일에는 뜻밖에도 지로의 옛 여자친구이자 시로와 묘한 감정을 맺게 되는 도모코가 얽혀있다.

 

이 책에는 많은 이야기가 등장하고, 그 이야기들이 처음에는 중구난방인 듯 불쑥불쑥 어지럽게 튀어나오다가, 나중에는 하나의 끈에 가지런히 묶인다. 태양을 기다리는 영화 제작팀이 있고, 그 감독의 머릿속에 잊혀지지 않는 과거(훼이팡)가 있고, 이국적인 외모의 남자 후지사와의 탄생 스토리가 있고, 그의 아버지 크레이그 부샤르의 일기장이 나오고, 의식속을 헤매고 다니는 지로가 있고, 시로와 도모코의 이야기가 있다. 별 연관성 없어 보이는 이 모든 이야기들이 다 어떤 인연의 끈에 의해 하나로 묶이는 걸 느끼며 온몸이 찌릿.

 

장편 소설이지만, 한 권의 책이지만 이 많은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어, 더욱 풍성한 책읽기였다.

 

나는 '크레이그 부샤르의 수기'에 가장 깊이 빠져들었는데, 특히 원자폭탄 투하를 앞두고 이제 곧 자신이 사라질 세계에 대해 생각하는 장면이 내 마음을 아주 오래 묶어두었다.

 

그런데 숨이 끊어지는 순간의 내 모습은 상상할 수 있어도, 그로 인해 내가 이 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져 무(無)로 돌아간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나라는 존재가, 이 세계 속에서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나는 도무지 인식할 수가 없다. 내가 없는 세계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아무리 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아니, 내가 있기 때문에 세계가 있는 거라고 어려서부터 생각해왔다. 왜냐면, 내가 이렇게 사고하는 가운데 세계가 항상 있는 거니까. 지금까지는 늘 그래왔으니까.

...

내가 없어진 후에도 세계란 것은 남는다고 한다. 어디를 뒤져도 내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 따위, 있어서 좋을 리가 없다. 아니 있을 리가 없다. 왜냐면, 세계란 곧 나 자신이니까. 내가 이렇게 존재하는 자체가, 세계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 아니었던가.(332~333쪽)

 

바로 얼마 전에 '죽는다'는 것에 대해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던지라(자살을 생각했다는 게 아니고, 어느날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이 남자의 심리 묘사가 너무나 절절하게 마음에 와 닿았다. 죽음을 눈앞에 둔 그 두려움, 내가 사라진 뒤에도 아무렇지 않게 남을 세계에 대한 배신감, 무언가 세상에 남기고 싶은 초조함. 결국 언젠가 한 번은 죽음을 맞게 될 우리 모두가 느끼게 될 것인지도.

 

어느날 내 앞에 lose my memory가 툭 떨어진다면 얼른 주워먹고 잊고 싶은 기억들 싹 지워야지,라고 생각했는데, 그럼 무엇을 지우고 싶은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대답이 나오질 않는다. 싫은 기억? 슬픈 기억? 짜증나는 기억? 아픈 기억? 비록 떠올렸을 때 행복해지는 그런 기억들은 아니지만, 그 모든 기억이 뭉쳐져서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에 이것도 그냥 가지고 있고 저것도 그냥 가지고 있고. 결국은 다 내가 그러안고 가야할 기억들이다.

 

 

그래서 그들이 기다리는 태양은 나타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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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출판 - 북페뎀 09
강주헌 외 21명 지음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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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문학 번역가를 꿈꾼 지 여러 해. 번역에 관한 책에는 자연히 관심이 간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출판한 <번역출판>은 격주간지 <기획회의>의 잡지 속의 잡지로 선보인 '번역출판'을 단행본으로 엮어 낸 책이다. 모두 21명의 번역가가 쓴 글들이 이 책 한 권에 담겨있다. 평소에 번역서를 볼 때면 역자 이름을 눈 여겨보다보니 눈에 익은 이름이 꽤 많이 보여서 무척 반가운 마음으로 이 책을 만나보게 되었다. 그들이 들려주는 번역에 관한 이야기들은 만나보기도 전부터 두근두근. 오랜만에 만난 번역에 관한 책이라 정신없이 빠져들어 읽었다.

 

1부 번역의 의의,에서는 '번역과 유럽의 발전', '서구자본주의 문명의 일본식 근대화', '다언어 지적 생산물을 자국어로 읽는다' 등 세 편의 글을 만날 수 있다. '번역과 유럽의 발전'에서는 12세기에 유럽에서 번역 활동이 어떤 시대 흐름 속에서 어떻게 진행됐는지, 당시의 번역자들은 누구이고 그들의 번역 활동에는 어떤 특징이 있었는지를 소개한다. '서구자본주의 문명의 일본식 근대화'에서는 메이지 시대 일본이 서양어를 번역했던 시대적, 사회적 환경, 일본의 번역어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던 조선에게 일본의 번역이 가지는 의의 등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다언어 지적 생산물을 자국어로 읽는다'는 필진 중 유일한 외국인 쓰노 가이타로 씨의 글인데, 주자의 독서론, 자동 번역, 문헌 디지털 베이스의 꿈 등에 관한 내용을 만나볼 수 있다.

 

2부 번역출판의 현재,에서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번역출판의 양적 성장과 그에 비해 뒤처져 있는 질적 성장, 국내 번역출판 지원 현황 등에 관한 글을 만나볼 수 있다. 번역의 질적 성장이 더딘 이유에 대해 실력 있는 번역가의 부재, 번역가에 대한 부실한 처우(가 실력 있는 번역가의 부재를 부르기도 한다), 출판인들의 안목 부재 등을 지적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 내용에 특히 크게 공감하며 읽었다.

 

3부 번역가의 출판기회 경험기,를 읽을 때부터는 이미 해가 꽤 기울어 책을 읽기에는 무리가 아닐까 싶었지만(밖에서 오지 않는 버스를 한참 기다리며 읽고 있었다) 책에서 눈을 뗄 수가 없던지라 사위어가는 햇살 아래 눈에 불을 켜고 읽었다. 이 책에서 내가 얼른 만나보고 싶었던 이야기들이 3부부터 등장했기 때문. 프랑스어 전문번역가이자 기획자인 이재형 님의 번역·기획자로 살아가는 이야기, 역시 번역가이자 출판기획자 박중서 님이 들려주는 헌책방에서 건져올리는 보물 이야기, 번역가 김선희 님이 말하는 행복한 번역가의 조건, 출판 기획·번역 네트워크 '사이에' 대표 임희근 님이 소개해주는 '사이에' 이야기와 기획에 관한 이야기 들을 흥미진진하게 만나보았다.

 

4부 번역, 나는 이렇게 한다,는 마치 교과서를 읽는 심정으로 정신 바짝 차리고 읽은 부분이다. '인문학 번역의 람보와 록키'라는 제목으로 강주헌 번역가가 들려주는 인문학 번역 방법,  '문학 번역,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황보석 번역가 풀어 놓는 출판시스템의 문제점, 번역자의 문제점, 의역과 직역에 관한 이야기(!), '경제경영서 번역의 주의사항과 방법론'이라는 제목으로 안진환 번역가가 소개하는 실용서 번역의 원칙과 번역가의 자세에 대한 이야기. 정말 한 자라도 놓칠새라 바짝 집중하고 읽었다.

 

5부 번역과 나의 인생,에서는 번역가 이종인, 권남희, 조영학, 김선희 님의 글을 만날 수 있다. 4부까지 열심히 공부하는 심정으로 읽었다면, 5부는 잔뜩 흥분된 마음을 조금 가라 앉히며 '선배 번역가'가 들려주는 재미난 이야기를 읽는 기분이었다. 권남희, 이종인 번역가의 글은 <번역은 내 운명>을 통해서도 만나본 적이 있어 더욱 반가웠다. 스스로를 번역가가 아니라 '번역쟁이'라고 부른다는 조영학 님은 나처럼 '번역쟁이로서 달랑 번역만으로 생계를 꾸리는 게 소원'인 사람들을 위해 이렇게 충고한다. '이 바닥에 뛰어들기 전에 자신한테 남다른 재능이 있는지, 매달 원고지 1,500매 이상을 부지런히 두들길 인내와 끈기가 있는지, 더 나아가 그 피 말리는 과정을 (참아내는 차원을 넘어) 기꺼이 즐겨줄 광기가 있는지 차근차근 따져볼 일이다. 인생 걸고 애꿎은 도박할 일이 없다면 말이다.' 이 문장에 밑줄을 박박 긋고 가만히 생각해 봤다. 나에겐 남다른 재능이 있나? 매달 원고지 1,500매 두들길 인내와 끈기는? 그 과정을 즐길 광기는? 내 안에서 긍정적인 대답이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왔으면 무척 기뻤을 일인데, 딱히 부정도 못하면서 그렇다고 기쁜 마음으로 긍정도 못한 그런 어정쩡한 마음 상태인 것을 확인하고, 스스로에게 자못 실망스러웠다. 나는 아직도 제대로 정박하지 못하고 떠도는 배였단 말인가, 내 마음 확고하다고 믿고 있었는데. 내 마음을 다시 정비해봐야 할 때가 온 것이 아닌가 깊은 고민에 잠겼다.

 

중간중간에 나오는 번역가 인터뷰도 무척 재미있었다. 인터뷰에서는 제2회 유영번역상을 수상한 김진준 번역가, 어린이책 전무번역기획실 '햇살과나무꾼', 너무나 유명한 일본어 번역가 양억관 님을 만나볼 수 있다. 오랜만에 만난 번역에 관한 책, 그리고 많은 번역가들의 글을 만날 수 있었던 책. 정말 즐거운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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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여행 1 : 그리움 - KBS 1TV 영상포엠
KBS 1TV 영상포엠 제작팀 지음 / 티앤디플러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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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전 7시 40분. 막 잠에서 깨어난 당신에게, 휴일 아침 늦장 부리지 않고 새 아침을 맞아준 당신에게 주는 선물이 있다. KBS 1TV 영상포엠 '내 마음의 여행'. 나는 이 선물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다. 늘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나에게 아침 7시 40분은 한창 꿈나라를 헤맬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런 내게 그동안 밀린 선물을 한 꺼번에 안겨주는 책을 만났다. 산타클로스의 빨간 주머니만큼 커다란 행복을 안겨다 주는 책을. 뭐 그리 착한 일하며 산 건 아니지만 책 부지런히 읽었다고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며 감사히 이 만남을 가졌다.(책읽기 마저 게을리 했다면 이런 예쁜 책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나갔을 거 아닌가!)

 

이 책을 읽고나서야 나는 처음으로 '내 마음의 여행'을 만나보았다. 인터넷 사이트 다시보기를 클릭한 후 18분 40초 동안 나는 내 눈을 사로잡는 아름답고 따뜻한 화면에, 따뜻한 커피향 같은 내레이터의 목소리에, 나를 천상으로 데려다 주는 듯한 음악에 그만 사르르 녹아내렸다. 아, 일요일 아침마다 이렇게 좋은 선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쳐왔다니, 이렇게 아쉬울 수가!

 

이 아름다운 화면과 내레이션과 음악을 한 권의 책에 담아 펴낸 것이 바로 이 책 <내 마음의 여행>이다. 한 번이라도 이 프로그램을 본 사람은 이 책이 어떤 느낌을 줄지 짐작이 갈 것이다. 이 프로그램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위에서 내가 옮겨 놓은 미숙한 표현의 감탄들로나마 그 느낌이 전해졌으면 좋겠다.

 

홈페이지의 프로그램 소개를 빌려오자면, 이 프로그램은 기존의 단순한 문화유산 답사기를 지양하고 PD의 시각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조명한, 그리고 알려진 문화유산과 함께 숨겨진 문화유산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주제가 보이는 색깔있는 영상 에세이다. 이 책도 4가지 주제별로 그 이야기들을 엮었다. '그리운 어머니의 품 크고 깊은 계곡의 꿈', '동쪽 섬 새 해 뜨고 파도 위 푸른 소망 만나리', '삶의 길섶에는 저문 강이 흐르고', '삶의 다른 이름 인연'. 그 제목들도 아름다운 시구 같다. 첫장에서는 내 학창 시절을 보낸 곳 밀양이 '들길에 그대 그림자 물 위에 비친 그리움 _ 영남 알프스'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어 있어 무척 반가웠다. 밀양에 10년 가까이 살면서도 가보지 못했던 곳, 이 책을 통해 만나니 어찌나 '나의 살던 고향'이 그립던지.

 

이 책에는 음악도 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음악감동 손지명 씨가 주는 '영상포엠이 담은 12가지 음악선물'이 담겨 있는 것. 프로그램 하나에 음악을 담기 위해 어떤 수고를 거치는지 맛 볼 수 있어 특별한 시간이기도 했고, 그의 탁월한 안목으로 추천해준 음악 목록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다시보기를 통해 영상을 직접 만나보고 나니 이 책에 소개된 음악들도 당장 찾아서 들어보고 싶어진다.

 

아름다운 사진과 글과 음악이 함께하는 책. 삶의 무게에 지친 어깨를 조곤조곤 주물러주는 손길같은, 그리움에 흘러내리는 마음의 눈물 닦아주는 손수건같은, 희망에 부푼 가슴에 더 따뜻한 온기를 더해주는 햇살같은, 그런 소중한 선물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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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사람들 - 양해남 사진집
양해남 지음 / 연장통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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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우리 동네에는 경아 아지매가 있었고, 경아 삼촌과 경아네 소, 우물집 할아버지, 오실댁 할머니가 있었다. 탱자 나무가 무섭게 지키고 있는 오래된 집 한 채도 우리 동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그림이었다. 겨울에 비닐 하우스에서 향긋한 딸기 향기가 풍겨져 나올 때면 인심 좋게 한 대야 수북히 딸기를 가져다 주던 '경아 아지매'를 나는 가장 좋아했다. 평생 논일 밭일 하느라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울퉁불퉁 못난 이가 유난히 눈에 띄었지만, 환하게 웃으며 딸기향과 함께 등장하던 아지매의 얼굴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질 않는다.

 

오랜만에 경아 아지매를 떠올린 건 양해남 사진집 <우리 동네 사람들>을 만나서였다. 이 사진집에는 내 어린 시절 동네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는 '우리 동네 사람들'이, 그들의 미소가 가득 담겨있다. 사진집에서 뜨뜻한 온기가 배어 나올 것만 같다.

 

오전에 다리 수술 때문에 강아지를 병원에 데려가야 하는데, 이른 시간부터 마음이 어찌나 초조한지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르다가 편안한 사진으로 마음을 좀 달래볼 요량으로 사진집을 펼쳐 들었다. 이미 한 번 넘겨보고 꽂아둔 책이었는데, 오늘은 사진집 속의 사진들이, 그 미소가 유난히 마음을 울리며 다가왔다. 마치 그들이 내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주며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모든 게 다 잘 테니까, 걱정하지 마요!" "힘내요, 다 지나고 나면 별 거 아니라니까..." 사진 한 장 한 장 속의 낯선, 그렇지만 낯설지 않은 듯한 이들이 내게 위로의 손길을 건네주어 나는 불안으로 끓어오르던 가슴을 겨우 진정시킬 수 있었다. 참 정다운 존재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지금은 우리 동네에 누가 사는지 모른다. 우리집으로 들어오는 짧은 골목에는 겨우 세 집 뿐이지만, 아주 가끔 골목에서 누군가를 맞닥뜨려도 나는 슬며시 땅만 쳐다보고 골목 제일 안쪽 우리집으로 잰걸음을 놀릴 뿐이다. 그들에게서는 딸기 향기가 나지도, 종일 온몸에 묻히고 다니는 흙냄새가 나지도 않아서일까, 나는 지금 마주치는 이곳의 사람들이 아닌 어린 시절의 우리 동네 사람들이 그립다. 우리 동네 사람이라면 으레 흙냄새 거름냄새가 나야 제맛이라는 듯이. 갑자기 궁금해진다. 추억 속의 '우리 동네'가 아닌 지금 이 동네에는 어떤 이웃들이 살고 있는지...
 

 

이 책을 싸고 있는 겉표지를 벗기면 나오는 이 모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책 뒤에 보니 제본에 대해 짧은 설명이 나와 있다. "이 책의 장정은 책공방이 특허를 소유하고 있는 '누드양장제책'으로, 숨겨져왔던 책등의 신비감을 노출시켜 북아트적인 아름다움을 연출하였습니다." 원래 책을 사면 책표지는 물론 띠지까지도 절대 벗겨내지 않고 소중히 간직하는데, 이 사진집만은 자꾸 '알몸'을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겉과 속이 모두 마음에 쏙 드는 아름다운 사진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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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편지 - 유목여행자 박동식 산문집
박동식 글.사진 / 북하우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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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사막에 내리는 이슬처럼 축복 같은 것이지만 제 스스로 멀어지는 바람처럼 가벼운 것이기도 하다. 당신이 여행을 꿈꾼다면 이제 떠나라. 망설임은 그만하면 충분하다.'

 

서문을 읽으며 잠시 망설였다. 이 책, 여기서 덮어두고 나중에 볼까? 이제 개강이 코앞인데, '그래! 이제 망설임은 이만하면 충분해! 떠나자!'라는 굳은 결심을 하게될까봐 두려웠다. 하긴, 여행 에세이를 읽는 동안 마음속으로 그런 외침 외친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이번에도 찐한 가슴앓이 한 번 하겠구나, 단단히 각오하고 낯선이가 여행지에서 보내온 편지를 읽기 위해 페이지를 넘겼다.

 

이 책은 여행가이자 사진가이자 칼럼니스트인 저자 박동식이 베트남, 라오스, 태국, 인도, 인도네시아, 중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지에서 보내온 '편지'이다.(특히 라오스에서 쓴 글이 많아 무척 반가웠다. 내가 여행을 가게 된다면 그 목적지 일순위로 꼽고 있는 곳이기에.) 이 책 속의 글들은 나라별로 구분지어져 있거나, 여행 정보를 알려주거나 하지는 않는다. 만남, 그리움, 인생, 희망, 행복이라는 다섯 가지 주제에 맞추어 이곳저곳에서 쓴 글들이 자유롭게 자리잡고 있다. 그러므로 태국에서 인도네시아로 넘어갔다가, 거기에서 잠시 서울에 들렀다가 다시 라오스에 가 있는다. 저자의 글을 따라 끊임없이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아다니다보면, 마치 내가 자유의 영혼이 되어 이리저리 떠도는 듯한 대리만족에 흡족해지기도 한다.

 

책을 읽다가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 머리를 바쁘게 굴리기를 여러 번. 나도 모르게 책 속에 나온 나라들로 여행을 가는 상상의 날개를 마구 펼치고 있었다.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머릿속으로는 거의 구체적인 계획을 짜는 수준으로 말이다. 개강해도 어차피 강의는 하루밖에 하지 않을텐데, 한 5일 정도만 눈 딱 감고 다녀올까?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이건 뭐 당장이라도 여행가방 싸고 싶어서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서 내가 서문을 읽으며 두려움에 떨었던 거다. '당신이 여행을 꿈꾼다면 이제 떠나라. 망설임은 그만하면 충분하다'라는 말이 무슨 마법의 주문처럼 들려와서. 자꾸 귓가를 울리는 "떠나라, 떠나라"라는 속삭임을 잠시 잠재우며, 가까운 시일 내에 진지하게 여행 계획 한번 짜봐야겠다.

 

책 속의 많은 이야기 중에, 싱가포르에서 친구를 떠올리는 모습이 무척 가슴 뭉클했다. 뜨거운 여름날의 크리스마스를 맛보고 싶어 싱가포르에 가보고 싶다던 친구. 암투병 중이던 어느날, 종로 어느 떡집의 떡이 먹고 싶으니 사다달라는 말을 하고 사흘 뒤, 친구는 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저자는 친구에게 떡을 사다주지 못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었는데, 그게 그만 한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싱가포르에 들러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이곳엔 그 친구가 오고 싶어 했었지, 하고. 여행을 꿈꾼다면 그만 망설이고 당장 떠나야 하듯이, 우리는 '나중'이 아닌 '지금' 해야 할 일들이 참 많은데, 그것들을 늘 "나중에"라는 말에게 맡겨버린다. 그 뒤에 얼마나 큰 회한이 찾아올지 짐작도 못한 채 말이다. 어제 <사미인곡>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스물아홉 살 사진작가 이석주 씨가 전해준 교훈도 그러했다. 3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는 진단을 받은 그가 그 순간에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은, 우리에게 나중은 없다는 것. 나중에 해야지, 나중에 말해야지 했던 것 들에게 '나중'이란 있지 않다는 것. 지금 하고, 지금 말하라고 말하는 그를 보며, 나는 '나중'이라는 단어로 포장해 버려버린 내 삶의 많은 부분들에 미안해 하며 아쉬워하며 많은 눈물을 쏟았다. 컴퓨터 앞에 앉아 이틀 전에 읽은 이 책의 내용을 떠올려 보는데, 어제 방송을 본 영향인지, 싱가포르에서 떠올린 친구 이야기에 다시금 가슴이 아려온다.

 

'삶은 일회성이다. 우리 모두의 길은 각기 다른 길이다. 갔던 길을 되돌아와 새로운 길을 간다고 해서 그 길이 어제의 길은 아니다. 때문에 남과 내가 비교될 수 없으며 나 자신도 동시에 두 개의 길을 갈 수 없으니 그 어떤 삶도 저울질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 사소한 것까지 비교되며 살았다. 이제 스스로의 길을 가야 할 때다.'

 

어떤 말을 들어도 이제는 다 '떠나라'는 말로 들린다. 망설임은 이제 그만. 올해 나의 목표에도 있지 않은가. '비행기 타기~!'라고. 그토록 갈망하면서 왜 자꾸 망설이고 두려워하는지. 올해에는 꼭 가고 말리라. 누군가는 '욕망이 멈추는 곳'이라 표현했던 그곳, 라오스로. 더 이상 '나중'이라는 말에게 내 인생을 맡기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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