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출판 - 북페뎀 09
강주헌 외 21명 지음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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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문학 번역가를 꿈꾼 지 여러 해. 번역에 관한 책에는 자연히 관심이 간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출판한 <번역출판>은 격주간지 <기획회의>의 잡지 속의 잡지로 선보인 '번역출판'을 단행본으로 엮어 낸 책이다. 모두 21명의 번역가가 쓴 글들이 이 책 한 권에 담겨있다. 평소에 번역서를 볼 때면 역자 이름을 눈 여겨보다보니 눈에 익은 이름이 꽤 많이 보여서 무척 반가운 마음으로 이 책을 만나보게 되었다. 그들이 들려주는 번역에 관한 이야기들은 만나보기도 전부터 두근두근. 오랜만에 만난 번역에 관한 책이라 정신없이 빠져들어 읽었다.

 

1부 번역의 의의,에서는 '번역과 유럽의 발전', '서구자본주의 문명의 일본식 근대화', '다언어 지적 생산물을 자국어로 읽는다' 등 세 편의 글을 만날 수 있다. '번역과 유럽의 발전'에서는 12세기에 유럽에서 번역 활동이 어떤 시대 흐름 속에서 어떻게 진행됐는지, 당시의 번역자들은 누구이고 그들의 번역 활동에는 어떤 특징이 있었는지를 소개한다. '서구자본주의 문명의 일본식 근대화'에서는 메이지 시대 일본이 서양어를 번역했던 시대적, 사회적 환경, 일본의 번역어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던 조선에게 일본의 번역이 가지는 의의 등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다언어 지적 생산물을 자국어로 읽는다'는 필진 중 유일한 외국인 쓰노 가이타로 씨의 글인데, 주자의 독서론, 자동 번역, 문헌 디지털 베이스의 꿈 등에 관한 내용을 만나볼 수 있다.

 

2부 번역출판의 현재,에서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번역출판의 양적 성장과 그에 비해 뒤처져 있는 질적 성장, 국내 번역출판 지원 현황 등에 관한 글을 만나볼 수 있다. 번역의 질적 성장이 더딘 이유에 대해 실력 있는 번역가의 부재, 번역가에 대한 부실한 처우(가 실력 있는 번역가의 부재를 부르기도 한다), 출판인들의 안목 부재 등을 지적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 내용에 특히 크게 공감하며 읽었다.

 

3부 번역가의 출판기회 경험기,를 읽을 때부터는 이미 해가 꽤 기울어 책을 읽기에는 무리가 아닐까 싶었지만(밖에서 오지 않는 버스를 한참 기다리며 읽고 있었다) 책에서 눈을 뗄 수가 없던지라 사위어가는 햇살 아래 눈에 불을 켜고 읽었다. 이 책에서 내가 얼른 만나보고 싶었던 이야기들이 3부부터 등장했기 때문. 프랑스어 전문번역가이자 기획자인 이재형 님의 번역·기획자로 살아가는 이야기, 역시 번역가이자 출판기획자 박중서 님이 들려주는 헌책방에서 건져올리는 보물 이야기, 번역가 김선희 님이 말하는 행복한 번역가의 조건, 출판 기획·번역 네트워크 '사이에' 대표 임희근 님이 소개해주는 '사이에' 이야기와 기획에 관한 이야기 들을 흥미진진하게 만나보았다.

 

4부 번역, 나는 이렇게 한다,는 마치 교과서를 읽는 심정으로 정신 바짝 차리고 읽은 부분이다. '인문학 번역의 람보와 록키'라는 제목으로 강주헌 번역가가 들려주는 인문학 번역 방법,  '문학 번역,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황보석 번역가 풀어 놓는 출판시스템의 문제점, 번역자의 문제점, 의역과 직역에 관한 이야기(!), '경제경영서 번역의 주의사항과 방법론'이라는 제목으로 안진환 번역가가 소개하는 실용서 번역의 원칙과 번역가의 자세에 대한 이야기. 정말 한 자라도 놓칠새라 바짝 집중하고 읽었다.

 

5부 번역과 나의 인생,에서는 번역가 이종인, 권남희, 조영학, 김선희 님의 글을 만날 수 있다. 4부까지 열심히 공부하는 심정으로 읽었다면, 5부는 잔뜩 흥분된 마음을 조금 가라 앉히며 '선배 번역가'가 들려주는 재미난 이야기를 읽는 기분이었다. 권남희, 이종인 번역가의 글은 <번역은 내 운명>을 통해서도 만나본 적이 있어 더욱 반가웠다. 스스로를 번역가가 아니라 '번역쟁이'라고 부른다는 조영학 님은 나처럼 '번역쟁이로서 달랑 번역만으로 생계를 꾸리는 게 소원'인 사람들을 위해 이렇게 충고한다. '이 바닥에 뛰어들기 전에 자신한테 남다른 재능이 있는지, 매달 원고지 1,500매 이상을 부지런히 두들길 인내와 끈기가 있는지, 더 나아가 그 피 말리는 과정을 (참아내는 차원을 넘어) 기꺼이 즐겨줄 광기가 있는지 차근차근 따져볼 일이다. 인생 걸고 애꿎은 도박할 일이 없다면 말이다.' 이 문장에 밑줄을 박박 긋고 가만히 생각해 봤다. 나에겐 남다른 재능이 있나? 매달 원고지 1,500매 두들길 인내와 끈기는? 그 과정을 즐길 광기는? 내 안에서 긍정적인 대답이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왔으면 무척 기뻤을 일인데, 딱히 부정도 못하면서 그렇다고 기쁜 마음으로 긍정도 못한 그런 어정쩡한 마음 상태인 것을 확인하고, 스스로에게 자못 실망스러웠다. 나는 아직도 제대로 정박하지 못하고 떠도는 배였단 말인가, 내 마음 확고하다고 믿고 있었는데. 내 마음을 다시 정비해봐야 할 때가 온 것이 아닌가 깊은 고민에 잠겼다.

 

중간중간에 나오는 번역가 인터뷰도 무척 재미있었다. 인터뷰에서는 제2회 유영번역상을 수상한 김진준 번역가, 어린이책 전무번역기획실 '햇살과나무꾼', 너무나 유명한 일본어 번역가 양억관 님을 만나볼 수 있다. 오랜만에 만난 번역에 관한 책, 그리고 많은 번역가들의 글을 만날 수 있었던 책. 정말 즐거운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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