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편지 - 유목여행자 박동식 산문집
박동식 글.사진 / 북하우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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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사막에 내리는 이슬처럼 축복 같은 것이지만 제 스스로 멀어지는 바람처럼 가벼운 것이기도 하다. 당신이 여행을 꿈꾼다면 이제 떠나라. 망설임은 그만하면 충분하다.'

 

서문을 읽으며 잠시 망설였다. 이 책, 여기서 덮어두고 나중에 볼까? 이제 개강이 코앞인데, '그래! 이제 망설임은 이만하면 충분해! 떠나자!'라는 굳은 결심을 하게될까봐 두려웠다. 하긴, 여행 에세이를 읽는 동안 마음속으로 그런 외침 외친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이번에도 찐한 가슴앓이 한 번 하겠구나, 단단히 각오하고 낯선이가 여행지에서 보내온 편지를 읽기 위해 페이지를 넘겼다.

 

이 책은 여행가이자 사진가이자 칼럼니스트인 저자 박동식이 베트남, 라오스, 태국, 인도, 인도네시아, 중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지에서 보내온 '편지'이다.(특히 라오스에서 쓴 글이 많아 무척 반가웠다. 내가 여행을 가게 된다면 그 목적지 일순위로 꼽고 있는 곳이기에.) 이 책 속의 글들은 나라별로 구분지어져 있거나, 여행 정보를 알려주거나 하지는 않는다. 만남, 그리움, 인생, 희망, 행복이라는 다섯 가지 주제에 맞추어 이곳저곳에서 쓴 글들이 자유롭게 자리잡고 있다. 그러므로 태국에서 인도네시아로 넘어갔다가, 거기에서 잠시 서울에 들렀다가 다시 라오스에 가 있는다. 저자의 글을 따라 끊임없이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아다니다보면, 마치 내가 자유의 영혼이 되어 이리저리 떠도는 듯한 대리만족에 흡족해지기도 한다.

 

책을 읽다가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 머리를 바쁘게 굴리기를 여러 번. 나도 모르게 책 속에 나온 나라들로 여행을 가는 상상의 날개를 마구 펼치고 있었다.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머릿속으로는 거의 구체적인 계획을 짜는 수준으로 말이다. 개강해도 어차피 강의는 하루밖에 하지 않을텐데, 한 5일 정도만 눈 딱 감고 다녀올까?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이건 뭐 당장이라도 여행가방 싸고 싶어서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서 내가 서문을 읽으며 두려움에 떨었던 거다. '당신이 여행을 꿈꾼다면 이제 떠나라. 망설임은 그만하면 충분하다'라는 말이 무슨 마법의 주문처럼 들려와서. 자꾸 귓가를 울리는 "떠나라, 떠나라"라는 속삭임을 잠시 잠재우며, 가까운 시일 내에 진지하게 여행 계획 한번 짜봐야겠다.

 

책 속의 많은 이야기 중에, 싱가포르에서 친구를 떠올리는 모습이 무척 가슴 뭉클했다. 뜨거운 여름날의 크리스마스를 맛보고 싶어 싱가포르에 가보고 싶다던 친구. 암투병 중이던 어느날, 종로 어느 떡집의 떡이 먹고 싶으니 사다달라는 말을 하고 사흘 뒤, 친구는 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저자는 친구에게 떡을 사다주지 못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었는데, 그게 그만 한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싱가포르에 들러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이곳엔 그 친구가 오고 싶어 했었지, 하고. 여행을 꿈꾼다면 그만 망설이고 당장 떠나야 하듯이, 우리는 '나중'이 아닌 '지금' 해야 할 일들이 참 많은데, 그것들을 늘 "나중에"라는 말에게 맡겨버린다. 그 뒤에 얼마나 큰 회한이 찾아올지 짐작도 못한 채 말이다. 어제 <사미인곡>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스물아홉 살 사진작가 이석주 씨가 전해준 교훈도 그러했다. 3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는 진단을 받은 그가 그 순간에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은, 우리에게 나중은 없다는 것. 나중에 해야지, 나중에 말해야지 했던 것 들에게 '나중'이란 있지 않다는 것. 지금 하고, 지금 말하라고 말하는 그를 보며, 나는 '나중'이라는 단어로 포장해 버려버린 내 삶의 많은 부분들에 미안해 하며 아쉬워하며 많은 눈물을 쏟았다. 컴퓨터 앞에 앉아 이틀 전에 읽은 이 책의 내용을 떠올려 보는데, 어제 방송을 본 영향인지, 싱가포르에서 떠올린 친구 이야기에 다시금 가슴이 아려온다.

 

'삶은 일회성이다. 우리 모두의 길은 각기 다른 길이다. 갔던 길을 되돌아와 새로운 길을 간다고 해서 그 길이 어제의 길은 아니다. 때문에 남과 내가 비교될 수 없으며 나 자신도 동시에 두 개의 길을 갈 수 없으니 그 어떤 삶도 저울질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 사소한 것까지 비교되며 살았다. 이제 스스로의 길을 가야 할 때다.'

 

어떤 말을 들어도 이제는 다 '떠나라'는 말로 들린다. 망설임은 이제 그만. 올해 나의 목표에도 있지 않은가. '비행기 타기~!'라고. 그토록 갈망하면서 왜 자꾸 망설이고 두려워하는지. 올해에는 꼭 가고 말리라. 누군가는 '욕망이 멈추는 곳'이라 표현했던 그곳, 라오스로. 더 이상 '나중'이라는 말에게 내 인생을 맡기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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