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을 기다리며
츠지 히토나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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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e my memory...

이 약을 삼키면 미친듯이 격렬하게 춤을 춘다. 그리고 기억을 잊는다. 나를 아프게 하는, 나를 슬프게 하는, 내가 잊고 싶은 그런 기억만. 신종 마약이다.

 

이 약 때문에 시로의 형 지로는 머리에 총을 맞고 식물인간이 되어 누워있다. 시로는 이국적인 외모의 남자에게 '루즈 마이 메모리'가 담긴 란도셀(가방)을 찾아내라는 협박을 받고, 이 일에는 뜻밖에도 지로의 옛 여자친구이자 시로와 묘한 감정을 맺게 되는 도모코가 얽혀있다.

 

이 책에는 많은 이야기가 등장하고, 그 이야기들이 처음에는 중구난방인 듯 불쑥불쑥 어지럽게 튀어나오다가, 나중에는 하나의 끈에 가지런히 묶인다. 태양을 기다리는 영화 제작팀이 있고, 그 감독의 머릿속에 잊혀지지 않는 과거(훼이팡)가 있고, 이국적인 외모의 남자 후지사와의 탄생 스토리가 있고, 그의 아버지 크레이그 부샤르의 일기장이 나오고, 의식속을 헤매고 다니는 지로가 있고, 시로와 도모코의 이야기가 있다. 별 연관성 없어 보이는 이 모든 이야기들이 다 어떤 인연의 끈에 의해 하나로 묶이는 걸 느끼며 온몸이 찌릿.

 

장편 소설이지만, 한 권의 책이지만 이 많은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어, 더욱 풍성한 책읽기였다.

 

나는 '크레이그 부샤르의 수기'에 가장 깊이 빠져들었는데, 특히 원자폭탄 투하를 앞두고 이제 곧 자신이 사라질 세계에 대해 생각하는 장면이 내 마음을 아주 오래 묶어두었다.

 

그런데 숨이 끊어지는 순간의 내 모습은 상상할 수 있어도, 그로 인해 내가 이 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져 무(無)로 돌아간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나라는 존재가, 이 세계 속에서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나는 도무지 인식할 수가 없다. 내가 없는 세계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아무리 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아니, 내가 있기 때문에 세계가 있는 거라고 어려서부터 생각해왔다. 왜냐면, 내가 이렇게 사고하는 가운데 세계가 항상 있는 거니까. 지금까지는 늘 그래왔으니까.

...

내가 없어진 후에도 세계란 것은 남는다고 한다. 어디를 뒤져도 내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 따위, 있어서 좋을 리가 없다. 아니 있을 리가 없다. 왜냐면, 세계란 곧 나 자신이니까. 내가 이렇게 존재하는 자체가, 세계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 아니었던가.(332~333쪽)

 

바로 얼마 전에 '죽는다'는 것에 대해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던지라(자살을 생각했다는 게 아니고, 어느날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이 남자의 심리 묘사가 너무나 절절하게 마음에 와 닿았다. 죽음을 눈앞에 둔 그 두려움, 내가 사라진 뒤에도 아무렇지 않게 남을 세계에 대한 배신감, 무언가 세상에 남기고 싶은 초조함. 결국 언젠가 한 번은 죽음을 맞게 될 우리 모두가 느끼게 될 것인지도.

 

어느날 내 앞에 lose my memory가 툭 떨어진다면 얼른 주워먹고 잊고 싶은 기억들 싹 지워야지,라고 생각했는데, 그럼 무엇을 지우고 싶은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대답이 나오질 않는다. 싫은 기억? 슬픈 기억? 짜증나는 기억? 아픈 기억? 비록 떠올렸을 때 행복해지는 그런 기억들은 아니지만, 그 모든 기억이 뭉쳐져서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에 이것도 그냥 가지고 있고 저것도 그냥 가지고 있고. 결국은 다 내가 그러안고 가야할 기억들이다.

 

 

그래서 그들이 기다리는 태양은 나타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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