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이 당신의 인생을 구할 것이다
A.M. 홈스 지음, 이수현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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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 오늘은 지하철 안에서 무엇을 읽을까 고민하면서 이 책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가방은 이미 교재 두 권과 학생들 과제물로 꽉 차 있었기에 이 책의 두께와 무게가 조금 부담스러웠던 탓이다.

조금 얇은 책으로 챙겨 넣었는데, 계속 이 책이 내 마음을 붙잡았다.

왠지 이 책을 꼭 읽고 싶어, 가방 좀 무거우면 어떠랴 하고는 이 책을 챙겨갔다. 

덕분에 월요일의 지쳤던 내 영혼을 구원받을 수 있었다.

 

이 얼마나 운이 좋은가. 코도 멀쩡하고 날씨도 좋은데, 더이상 뭘 원하겠는가? 어쩌면 모든 사람이 운이 좋은데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모든 것이 무너져내렸을 때조차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것일까? (54쪽)

 

지난 월요일은 유난히 힘들었다. 주말 동안 지친 몸을 다 추스르지도 못한데다 유난히 가라앉은 분위기 탓에 수업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엉엉 울거나, 빨리 집에 돌아오는 지하철을 타고 책 속에 빠져들고 싶었다.

끝도 보이지 않는 깊은 나락으로 빠져드는 것 같은 나를 구원해준 것이 바로 <이 책이 당신의 인생을 구할 것이다>와 토블론 초콜릿(내가 좋아하는 '3대초콜릿' 중 하나)이다.

지친 나를 위로해주는 듯한 책 속 글귀들과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는 이야기에 빠져들면서 스티븐 킹의 추천사를 떠올렸다.

"이 책은 분명 누군가의 인생을 구할 것이다."

적어도, 그 힘들었던 월요일 만큼은, 이 책이 나의 인생을 구한 것이 분명했다.

 

"일단 죽어가는 건 아니니 좋은 일이죠. 그게 중요한 점이기도 하고요. 선생님에겐 시간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언제 호각 소리를 듣고 게임에서 퇴장하게 될지 알지 못하잖아요. 그때까지는 모든 것을 유용한 정보로 생각하세요."

"그러니까…… 살아 있다는 걸 기뻐해야겠군요."

"우리 모두 그래야죠." (37쪽)

 

주인공 리처드 노박이 어느날 갑작스레 찾아온 통증으로 전과 다른 삶을 살게 됐다면, 나는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이 책으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각으로 삶을 바라보게 되었다. 매일매일이 같다고 지겹다고 생각하던 내게, 오늘은 어제와 같지 않고, 내일 또한 오늘과 다를 것이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 해준 책. 지치고 힘들어도, 책을 볼 수 있는 두 눈이 있고, 언제고 읽고 싶을 때 읽을 수 있는 책이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하고 생각할 수 있게 해준 책.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축복임을 느끼게 해준 책.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줄어드는 게 아쉬운 책,을 제대로 만났다. 이어지는 이야기가 궁금해 얼른 읽고 싶으면서도 남은 페이지가 줄어드는 것이 아쉬워 나는 결국 여러 날에 걸쳐 야금야금 그 행복을 맛보았다.

 

그러나 오늘은 모든 것이 다르고, 다르면서도 똑같고, 결코 다시는 같아질 수 없다. (8쪽)

 

그러니까 그날, 아주아주 힘들었던 월요일, 집에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이 책을 읽으며, 토블론 초콜릿을 먹으며 내 마음은 한결 평온해 졌고, 제목 때문인지 이 책이 내 인생을 구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더라는 그런 이야기이다. 이 보옴이 내게 내려준 선물, 이 책을 만나서 참 행복했다.

 

(한 가지 궁금한 건, 리처드 노박이 통증을 느끼며 '그것'인가,라고 생각하는 장면이 몇 번 나오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못 찾았다. 죽음을 굳이 '그것'이라고 표현한 건가? 왠지 뭔가 더 오묘한 무언가가 있을 것 같았는데 말이다. 누가 좀 알려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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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의 눈물 - 사라지는 얼음왕국의 비밀
조준묵 프로듀서 외 지음, 박은영 글, 노경희 스토리 / MBC C&I(MBC프로덕션)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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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인터넷 기사에서 본 사진 한 장이 잊혀지지 않는다.

북극곰 한 마리가 조그마한 얼음 덩어리 위에 옹졸하게 몸을 올리고 앉아 있는 사진이었다.

기사 내용은 온난화로 빙하가 녹아 사라지면서 삶이 힘들어진 북극곰 이야기였던 걸로 기억이 난다.

제 몸 하나 올리기도 힘겨워보이는 얼음 덩어리 위에 앉아 둥둥 떠 있는 그 모습이 어찌나 안쓰럽고 안타깝던지.

 

이 책 표지를 보는데 그때 그 사진이 떠올랐다.

'북극의 눈물'이라는 제목도 찡하고.

 

'환경재단 우수 추천도서'라는 이 책은 MBC 창사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북극의 눈물'을 책으로 펴낸 것이다.

북극에서 보낸 300일이라니, 상상이 가지 않는다.

책의 '들어가는 말'에도 이 대서사시를 기록하기 위한 마음이 쉽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다.

그들에겐 낯선 곳을 향한 두려움이 있었다면, 나에겐 낯선 곳을 향한 기대감이 컸다.

지금까지 북극에 관한 책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책은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들을 주 독자층으로 해서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주듯이 친근한 말투로 북극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냥의 계절 - 북극의 봄, 얼음 없는 북극의 여름, 사라지는 툰드라 - 북극의 가을, 얼음왕국의 정령들 - 북극의 겨울.

북극의 사계절이 담긴 기록을 따라가며, 북극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모두 만나볼 수 있다.

그리고 제목에서 예고하듯이 이 책은 단순히 북극의 모습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각 계절마다 북극의 모습이 예전과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보여준다. 변하고 있는 북극의 모습을 알리고, 지구온난화의 위험성을 일깨우고자 함이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북극의 지도는 해가 다르게 바뀌어가고 있다.

마치 지우개로 쓱쓱싹싹 지우듯이, 북극은 조금씩 그 몸집이 작아져가고 있다. 책에 실린 사진을 보니 정말 놀라울 정도다.

북극이 따뜻해지면서 북극에 사는 이누이트들의 삶도 바뀌고 있다. 썰매개를 타고 설원을 달려 사냥을 하러 가던 그들은 이제 사냥이 무섭다. 따뜻해진 북극은 얼음이 제대로 얼지 않고 이곳저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냥을 하다가 순식간에 눈 녹은 물이 덮쳐 오는 바람에 목숨을 잃은 사람도 많다. 그들은 조상 대대로 터를 잡고 살아온 곳을 떠나거나 이젠 사냥꾼이 아닌 낚시꾼으로 삶의 방향을 바꾼다. 살기 힘든 건 사람뿐 만이 아니다. 북극곰도 북극늑대도 바다코끼리도 모두모두 힘들다. 기온이 바뀌면서 사냥도 쉽지 않고 몸을 쉬일 빙하도 마땅치 않아지고 있다.

 

지구온난화의 위험성은 이미 많이 보고 들어왔지만, 이 책으로 다시 만나게 되니 와닿는 크기가 다르다. 지구온난화의 제일 큰 피해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북극의 모습을 1년 동안 기록해 보여줌으로써 그 심각성이 더욱 깊게 와닿는 것이다. 굶주림에 지친 북극곰 어미의 모습을 본다면, 따뜻해진 북극에서 사냥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 이누이트들을 본다면, 북극이 흘리는 그 '눈물'을 절대로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아이들에게도 환경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기에 아주 좋은 책이고, 어른들도 한 번쯤 읽어봤으면 싶은 책이다. 북극이 흘리는 눈물은 단지 북극만의 눈물로 끝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온 인류의 눈물이 될 날이 머잖았다.

 

※ '에스키모'는 '날고기를 먹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며 많은 이누이트들이 '에스키모'로 불리는 것을 모욕적으로 여긴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았다. '이누이트'는 '인간'을 뜻하는 그들의 언어라 한다. 앞으로는 에스키모가 아닌 이누이트라고 바르게 불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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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찬 여행기
류어 지음, 김시준 옮김 / 연암서가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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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도 더 전인 1903년에 씌여진 소설이고, 그 장르도 생소한 '견책소설(정치나 사회의 비리를 폭로하고 규탄한 소설)'이라 하여, 솔직히 재미없을 줄 알았다.

그래도 『아주주간』 추천 중국 소설 100선에 포함된 작품이라 하니, 한번 읽어볼까나 하는 마음으로 집어든 책이었는데, 의외의 즐거움을 만나 아주 행복한 책 읽기였다.

 

저자 류어는 생몰 연대도 불분명한(1857~1909로 추정) 중국의 관료이다. 자신의 행적을 토대로 하여 1903년에 <라오찬 여행기>를 저술하고, 1905년에 그 속편을 써낸 것이 그가 남긴 소설의 전부다.(치수 공사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운 경험으로 치수 관계 책은 다수 저술하였다 한다) 책을 내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정부미를 매매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1909년 유배지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사실 그가 체포당한 이유는 정부미 매매가 아니라, 위안스카이 정부를 향한 과격한 비판이었다 한다.

 

이 책에서 류어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청나라의 정치와 사회상을 폭로, 비판하고 있다. 주인공 라오찬은 먹물 깨나 먹었으나 과거에는 떨어지고 훈장이 되려고 해도 불러주는 곳도 없고, 나이가 많아 장사꾼 노릇을 하기도 여의치 않은, 먹고사는 게 고민인 사람이었다. 그러다 어느날 모든 질병을 고친다는 도사를 만나 그로부터 몇 가지 비방을 익혀, 남의 병을 고쳐주고 근근히 입에 풀칠을 하며 살아간다. '찬'은 그의 호이고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여 '라오찬'이라 불러주었다.

 

라오찬이 천하를 돌아다니며 겪은 일들이 때로는 분노를 자아내며, 때로는 긴장감을 조성하며, 때로는 감탄을 터뜨리게 하며 쉼 없이 이어진다. 여러 차례 그려지는 관리들의 부패상을 보며,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나 외국이나, 다 거기서 거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욕을 했다는 이유로 사사로이 백성들에게 누명을 씌워 잡아다 죽이는 위센이라는 관리를 보며, 도미니카공화국의 독재자 트루히요가 떠올랐다.(나는 몇 달 전에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을 통해 이 독재자의 가공할 만한 행각을 알게 되었다) "입 조심하십쇼. 이곳에서야 말씀하셔도 괜찮지만, 성내에 가시면 그런 말씀 마십쇼.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없는 곳에서는 나랏님 욕도 한다는데, 위센이란 자 뒤에서는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 목숨을 잃는다.(트루히요 손아귀의 도미니카공화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라오찬은 억울함을 당한 사람들을 만나면 나서서 그 누명을 벗겨주기도 하였는데, 이때는 한 편의 추리소설이 되어 흥미로움을 더해준다. 한 집안에서 가족 13명이 함께 죽임을 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용의자도 잡혔고, 증거물로 독극물이 든 월병도 확보되었다. 하지만 용의자는 극구 혐의를 부인하고, 증거물도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이 사건을 라오찬이 어떻게 풀어가는지, 도대체 그 일가족은 어떤 방법으로 죽은 건지 그 과정이 자못 흥미진진하다.

 

뜻밖에 추리소설의 즐거움까지 안겨준 이 책과의 만남은 상당히 즐거웠다. 책꽂이에 소중하게 꽂아두고 두고두고 읽어볼 만하다. 다만 더 만나볼 저자의 다른 책이 없음이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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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말랑한 힘 - 제3의 시 시인세계 시인선 12
함민복 지음 / 문학세계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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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에 <미안한 마음>이라는 산문집을 통해 함민복 시인을 알게 되었다. <미안한 마음>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산문집 중 한 권이 되었는데, 정작 그 책을 쓴 시인의 시집은 읽어보지 못하고 있었다. 산문집의 느낌이 무척 좋아서, 산문집에서 진하게 풍겨오는 바다 냄새가 좋아서, 바닷가에 터 잡고 사는 그의 이야기가 좋아서, 그가 쓴 시집도 얼른 만나보고 싶었는데, 이제야 그 만남을 이루었다. 여러 시집 중에서 말랑말랑하게 다가오는 제목이 마음에 들어 먼저 만나본 시집 <말랑말랑한 힘>.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발을 잡아준다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가는 길을 잡아준다

 

말랑말랑한 힘

말랑말랑한 힘

 

('뻘' 전문)

 

내가 기대했던 대로, 이 시집에서도 바다를 만날 수 있었다. 제목의 '말랑말랑한 힘'부터 해서 말이다. 시를 읽고 있으면 콧속 가득 퍼지는 갯내가 좋아 나도 모르게 책에 코를 대고 킁킁거려봤다. 뻘이 가져다 주는 이 '말랑말랑한 힘'이 좋아, '푸르고 짠' 그 길이 좋아, '빈 소라 껍질 매단 줄'로 주꾸미 낚는 풍경이 좋아, 나는 시집을 읽다가 내 기억속의 바닷가를 찾아가 하염없이 노닐었다. 그 바다의 풍경이 있기에 이렇게 바다에 관한 시가 더 좋은지도 모르겠다. 시집 뒷편에 실린 산문은 뜻하지 않게 만난 크나큰 선물. 아, 행복하여라!

 

이 시집에는 바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잊고 사는 자연의 모습도 가득가득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시로 맛보는 사계절은 어느 계절 하나 싫지 않고 다 좋다.(현실 속의 나는 원래 여름만 좋아한다.) '아무 꽃침이라도 맞고' 싶어지는 봄, '새소리가 아름답게 들리는' 여름, '국화 향기에 발걸음 멈'추는 가을, 임 그리는 마음이 눈 위에 피어나는 겨울. 한 권의 시집으로 사계절을 넘나들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함민복은 우리 시대의 축복이다'라는 박형준 시인의 말에 깊이 고개를 끄덕끄덕.

 

빨리 시인의 다른 시집들도 만나보고 싶어 마음이 근질근질하다. 얼마 전에 "나는 이 책이 좋다!"라고 외친 책이 있었는데,(<나는 여기가 좋다>, 한창훈) 함민복 시인의 글을 만난 지금도 그와 같은 마음이다. 바다가 그리울 때면, 한창훈 작가의 소설과 함민복 시인의 시를 찾게 될 것 같다. 바다 냄새 물씬 풍기는 이들의 글이 나는 좋다!

 


푸르고 짠 길

 

 

이 길은 푸르고 짜다

길 속에서 먹을 것을 잡아올린다

이 길엔 깊이가 있어

길에 빠져 죽기도 한다

길 위에서 밥을 몇 번 해 먹으면

두려움이 가시기도 하는

 

길과 같이 흔들리며 낚시를 한다

온 힘을 다해 살아온 지혜를 다 짜

배와 줄다리기하던 망둥이가 뽑힌다

얽히고설켰던 길의 가닥 중

망둥이 길 하나가 튿어져 나온다

 

길의 배를 따고

물에 길을 넣고 불로 길을 끓인다

길의 살점을 발라 먹는다

먹는 것은 길의 살점뿐인데

살점들은 먹지 못하는 길의 뼈에 붙었으니

 

길을 먹은 힘으로 길을 또 가야 하는

길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길 위에서 길은 더 흔들린다

이 길은 늘 푸르고 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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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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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 김연수 / 2000 / 문학동네

 

처음 읽은 날 : 2007년 12월 31일

다시 읽은 날 : 2009년 03월 29일

 

 

열심히 무슨 일을 하든, 아무 일도 하지 않든

스무 살은 곧 지나간다.

스무 살의 하늘과 스무 살의 바람과 스무 살의 눈빛은

우리를 세월 속으로 밀어넣고 저희들끼리만

저만치 등뒤에 남게 되는 것이다.

남몰래 흘리는 눈물보다도 더 빨리

우리의 기억 속에서 마르는 스무 살이 지나가고 나면,

스물한 살이 오는 것이 아니라

스무 살 이후가 온다.

 

 

나를 세월 속으로 밀어넣은 스무 살과 작별한 지 올해로 꼭 십년 째이다.

나는 여기 있는데, 나의 '스무 살의 하늘과 스무 살의 바람과 스무 살의 눈빛은' 저만치 등뒤에 남아 내 기억 속에서 아스라하다.

 

스무 살.

다른 어떤 나이보다 사람을 들뜨게 하는, 설레게 하는, 행복하게 하는 그런 나이가 아닐까.

누구나의 기억 속에서든 풋풋함으로 간직되어 있을 스무 살,을 나도 떠올려 보았다. 아니, 떠올리려 애써 보았다.

 

1989년에 스무 살이 된 그는 장정일의 시에서 '내 이름은 스물 두 살 / 한 이십 년쯤 부질 없이 보냈네'라는 구절을 보았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영문과에 등록을 했고, 도서관에 처박혀 문학 평론책을 읽었고, 과외라기에는 뭔가 이상한 첫 번째 아르바이트를 했으며, 온갖 잡다한 아르바이트를 거쳐, 홀트 아동복지회에서 바자회를 도와주는 일로 스무 살의 아르바이트를 마무리 했다.

'그런 1989년을 이제 돌이켜 보자니 지금부터 육 년 전이라는 생각만 날 뿐, 별다른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한 것치고는 꽤 많은 기억들이 기록되어 있어 부러웠다.

나야 말로, 1999년을 돌이켜 보면서 지금부터 십 년 전이라는 생각만 날 뿐, 별다른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금 더 솔직하게는, '내가 언제 스무 살이었더라?' 언뜻 떠오르지 않아 잠시 생각해봐야 했다.

 

언젠가 다른 책의 리뷰에서도 나의 '스무 살'에 대해 쓴 적이 있는데, 그러니까 나는, 참 어정쩡하게 스무 살을 맞이했더랬다.


친구들은 다 스무 살이 되어 어느 나이도 흉내낼 수 없는 스무 살 특유의 빛을 발하는데, 나는 함께 빛을 내는 대신 "이제 언니라고 불러!"라는 협박(?)에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 있어야 했다. 다음 해에 내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친구들은 이미 스무 살이 가져다주는 신비로움 따위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나를 동갑내기 취급해주었다(이렇게 고마울 데가!). 이봐, 친구들! 나는 이제 스무 살을 맞이했다고!라고 외쳐봤자, "그럼 언니라고 불러."라고 할테니까, 나는 그냥 열아홉에서 스물 하나로 훌쩍 건너뛰어버렸다. 

이보다 더 어설플 순 없다!라는 말로도 뭔가 부족할, 내 기억 속에 아예 남아있지도 않은 내 '스무 살'이 억울해 나는 이 책에 더 깊이 빠져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스무 살을 통해 내 스무 살을 보상 받으려고. 

 

모두 아홉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 이 책에서 유독 '스무 살'만을 붙잡는 내게는 그런 슬픈 스무 살의 기억이 숨어 있었다.

내 생애 가장 어두웠던 때로 기억되는 그 즈음의 어딘가에서(그 때는 건강이 좋지 않았고, 학교 생활에 적응도 못 해 무척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스리슬쩍 흘려버린 스무 살을 주워올 순 없지만, 이 책을 읽으며 나의 잃어버렸던 스무 살을 떠올릴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그리고 나는 '스무 살 이후'를 살고 있는 지금이 더 좋다. 훨씬 더 좋다는 삼십 대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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