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의 거짓말
제수알도 부팔리노 지음, 이승수 옮김 / 이레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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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이야기는 감방에서 진행된다.
 

사람들이 '불멸의 신'이라 부르는 사람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사령관은 사형수 네 명에게 '솔깃한' 제안을 한다. 그 제안의 내용은 이렇다.

다음날 아침까지, 준비 된 종이에 누구든 한 명이라도 '불멸의 신'의 이름을 적기만 하면 네 명 모두 살려준다, 이름을 적은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염려할 것 없다, 하지만 누구도 이름을 밝히지 않을 경우에는 아침에 바로 사형이 집행된다.

'죽음과 치욕 사이에서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두 종류의 치욕, 즉 치욕을 안고 사느냐와 치욕을 안고 죽느냐'(38)하는 선택을 던져준 것이다.

사령관이 떠난 뒤, 죄수가 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위안실'로 보내진 네 명은 마지막 순간 눈안에 품을 행복을 이야기하기로 하고 한 명씩 돌아가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자신의 목이 둥근 구멍으로 들어가고 차가운 칼날이 내려와 목을 베이게 될 순간, 하고 많은 지난 세월들 중 어떤 모습을 눈앞에 떠올릴지'(60~61)에 대해서.

그리하여 나르시스의 사랑 이야기, 인가푸의 동생을 기리는 이야기, 아제실라오의 단검에 피를 묻힌 이야기, 살림베니의 진실과 거짓을 오가는 이야기 들이 그들의 마지막 밤을 장식한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시나브로 날은 밝아오고, 그들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지 쳐다보는 마음은 초조하기만 하다.

과연 그들은 치욕을 안고 죽을 것인가, 치욕을 안고 살 것인가.

 

그리고 나라면, 내가 생의 마지막 밤에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려야 한다면 과연 어떤 추억을 끄집어낼 것인가 하는 생각에 가만히 잠겨보기도 했다.

 

한 번 잡으니 손에서 놓기 쉽지 않은 책, 멋진 책이었다. ★★★★★

 

 

"사랑은 부싯돌이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불꽃이 아니라, 영혼의 자연스런 연소입니다. 날름거리던 영혼의 불꽃이 확 타올라 자신 밖에 있는 존재를 찾아서 불을 붙이는 것이죠. 사랑은 잡히지 않는 모호한 감정이고, 서로 모순된 성격이 들어 있어서 이름은 하나지만 증상과 결과가 아주 다양한 병과 비슷합니다. 사랑이 저를 어떤 지경으로 이끌어 갔는지 지금 여러분 모두가 보실 수 있습니다. 저를 파멸로 이끌었죠. 하지만 전 사랑을 저주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이 어떻게 이해될지 모르지만, 사랑 때문에 행복했으니까요."('강에서 구출된 나르시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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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쏘시개
아멜리 노통브 지음, 함유선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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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말로만 듣던 아멜리 노통브의 책을 드디어 만나봤다. 서너 권 사둔 책 중에서 일단 제일 흥미로워 보이고, 제일 얇은(!) 이 책으로 골라서.

아멜리 노통브의 책도 처음이지만, 희곡도 처음이다. 이렇게 얇은 책도 오랜만. (앨범으로 치자면 싱글 앨범을 듣는 기분이었다.)

 

이 책의 제목은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불쏘시개'로 쓰이는 것이 바로 '책'이니까, '불쏘시개=책'.

책을 불쏘시개로 쓰다니! 상상만 해도 무서운 제목이고 이야기다.

시집간 동생이 집에 다니러 오면 내 방 책장을 휘휘 둘러보다가(뭐 빼갈 거 없나 하고!) 짓궂은 질문을 던지곤 한다.

"언니, 만약에 집에 불이 났는데, 책을 한 권 밖에 못 가지고 나가게 되면, 무슨 책 가지고 나갈 거야?"

그러면 나는, "그걸 말이라고 해! 당연히 김연수 작가 책이지!!"라고 외친다,라고 하면 너무 빤한 대답이 될 거고,

내 대답은 이렇다.

"염려 마, 내 팔자에 불 사고 없대."(정말로 작년에 내 관상을 봐주신 분이 그랬다. 차 사고, 불 사고, 물 사고 하나도 없다고. 오예!)

아무튼, 겉으로는 태연한 척 사주팔자 운운하지만, 그런 질문 들을 때마다 정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다.

부, 불이 난다면, 이 책들, 내가 사랑하는 이 책들 어떡하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원통하게 화재가 일어나서 책을 화염에 빼앗긴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책으로 불을 피운다. 때는 한창 전쟁 중이고, 겨울이며, 난로가 굶은 지 오래 되었고, 남자보다 추위를 더 타게 되어 있는 여자가 졸도할 것 같은 추위를 참지 못하고 책을 불태우면 얼마나 따듯할까 생각하게 되므로. 하지만 책을 태우는 것은, 어떤 책을 태울까 결정하는 것은 결코 쉽지만은 않다.

 

<무인도에 간다면 어떤 책을 가져갈 것입니까?> 난 항상 이런 질문이 좀 어리석다고 생각하네. 말도 안 되기 때문이지. 그러나 그 질문을 거꾸로 한다면, 아주 중요한 질문이 되네. 이를테면 어떤 책이 없애기에 아주 손쉬울까?(26)

 

이 과정을 거쳐서 서가의 책들은 하나하나 난로의 밥이 되어 사라진다. 그리고 전쟁과 추위에 지친 그들에게 잠깐이나마 온기를 마련해 준다.(책 한 권에 2분 쯤 탈까?) 과문한 나는 이 책에 나오는 책들이 실제 있는 책인지, 그렇다면 그 책들이 얼마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책인지 알 수가 없어 그들이 책 한 권 한 권을 놓고 고민하는 모습은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지켜봤다. 하지만 그 대상을 내 책장 속의 책으로 바꾸어 생각하니 이야기가 달라졌다. 어쩐지 마지막 2분의 온기를 위해서 마지막 한 권까지 난로 속으로 던져 넣는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 마지막 책이 바로 내가 아껴 마지않는 김연수 작가 책이 될테니!)

 

'어떤 책이 없애기에 아주 손쉬울까'를 고민하는 그들을 지켜보면서 책에 대한 내 마음을 한 번 정리해 볼 수 있었다. 내 결론은, 문학적으로 또는 역사적으로, 심지어는 금전적으로 어떤 가치가 있느냐에 상관없이, 그저 내 마음에 가장 기쁨을 준 책,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해 준 책이 내겐 최고 좋은, 없애기에 손쉬운 순위에서 꼴찌로 밀리는, 무인도에 가져갈 책이 될 거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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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다 우울한 밤에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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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다 우울한 밤'을 보내던 사춘기 시절을 생각나게 해주는 제목이었다.

지금이야 머리에 꽃 하나 꽂으면 딱 어울릴 정도로 "인생은 즐거워~!" 주문을 외며 살고 있지만, 그때는 그랬다. 모든 게 다 우울하고, 그 너머의 삶이 있기는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삶'이라는 말이 어쩐지 목을 옥죄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왜 사춘기라는 게 있을까?"

마시타는 그때 그런 말도 덧붙였다.

"그거, 그냥 하는 말일 거야."

그때 나는, 나 자신을 지나치게 드러내버렸다는 겸연쩍음 때문에 그 화제를 일부러 가볍게 무시하려 했다.

"아니, 분명히 있어. ……어째서 인간은 이 시기에 혼란에 빠지지 않으면 안 될까……, 뭔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성욕의 충동이 강해져서 혼란스럽다, 그렇게들 말하지? 하지만 그 밖에도 뭔가……."(83~84)

 

'그 밖에도 뭔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들이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던 그 사춘기 시절이 이 책과 함께 다시 떠올랐다(제목에서 받은 느낌이 맞았던가 보다). 실재인지 환상인지 모를 영상이 자꾸 머릿속에 떠올라 혼란스러운 남자, 오래 전에 일기장 한 권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친구, 열여덟에서 몇 달을 지난 나이에 살인을 저질러 사형을 선고받은 소년, 사형을 집행하던 순간의 끔찍한 기억을 안고 사는 교도관 등의 이야기가 순서없이 얽혀 나온다.

 

사실상 사형폐지국인 우리나라에서도 얼마전에 희대의 살인마 강호순으로 인해 사형에 대한 논란이 뜨거웠던 적이 있는데, 이 책에 나오는 사형 제도에 관한 교도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도 사형에 대해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어렵다. 인간의 존엄이니, 유족의 심정이니, 이 책에서 여러 각도로 사형을 들여다보려 하고 있지만, 도대체 어느 저울로 그것들의 가치를 잴 수 있는 건지.(사형 집행 장면은, 솔직히 가슴이 아팠다. 지하철에서 그만 눈물이 뚝뚝 떨어져 더 이상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게 다 우울한 밤'을 이겨내지 못한 마시타가 남긴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마음도 편치는 않았다. 마시타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온갖 소소한 고민거리들에 치여 죽을 것만 같았던 그때를 떠올리며, 또 그때의 나처럼 힘들어하고 있을지도 모를 지금의 아이들을 떠올리며, 우리 모두는 다 이렇게 힘든 시기를 겪어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 해보았다.

 

사춘기에 대해, 그리고 사형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시간을 만들어 준 책이었다. 얇고 술술 읽히지만, 읽고 나서 머리를 묵직하게 만들어주는 책.

 

너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해. 이 세상에 얼마나 멋진 것들이 많은지.(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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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국어 측정기 나의 한국어 측정 1
김상규 외 지음 / GenBook(젠북)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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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친구를 만났다.

끊임없이 책 이야기만 하면서 밤도 샐 수 있는 친구이기에, 이날도 책에 관한 이야기를 신나게 하다가 얼마 전에 오타가 엄청 많은 책을 봤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내가 찾은 오타가 수십 개가 넘었다는 말을 하면서 이런저런 예를 들다가, "'떼를 쓰다'의 '떼'를 '때'로 썼더라"고 했더니, 친구가 그거 '때'가 맞는 거 아니냐고 했다. "아니야, '떼'야! ……'떼'일걸……아니다, '때'가 맞나?" 생각하면 할수록 이게 맞는 것도 같고 저게 맞는 것도 같고 헷갈려서 나중에 사전 찾아보지 뭐, 하고 끝냈다.('떼'가 맞다)

 

평소에 많이 쓰는 말이지만, 이렇게 불쑥불쑥 헷갈리는 말이 참 많다.

도대체 내가 맞춤법에 맞게 잘 쓰고 있는 건지, 이 단어를 알맞은 뜻으로 제대로 쓰고 있는 건지, 글을 쓰다가 헷갈려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럴 때는 늘 사전 검색을 하곤 하지만, 그래도 돌아서면 또 헷갈리기 일쑤다. 그러다가 종내는 나의 한국어 실력이 의심스러워지기도 하고 말이다. 내 한국어 실력을 알아보기 위해서 한국어능력평가를 한 번 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제목이 눈에 확 띄는 책이 있었다. <나의 한국어 측정기>! 오호라, 이 책으로 내 한국어 실력을 측정해보면 되겠구나, 하는 반가운 마음에 집어들었다.

 

이 책은 문제집 같다.

중고등학교 때 열심히 풀던 문제집. 한 꼭지마다 열 문제씩, 모두 600문제가 실려 있다. 사지선다 네 문제, 둘 중 고르기 세 문제, 주관식 세 문제로 구성되어 있는데, 문제는 그리 어렵지 않다.(그런데도 정작 백 점은 드물게 나왔다. 이런) 우리말을 깊이 있게 공부하려는 사람 보다는 그냥 편하게 친구끼리 가족끼리 재미로 풀어볼 만하다. 열 꼭지씩 묶어서 '몫'이라고 나누고 있는데, 한 몫이 끝날 때마다 우리가 자주 쓰는 낱말에 어떤 뜻이 담겨져 있는지 알려준다. 늘 쓰는 낱말이면서도 그 말의 어원까지는 몰랐던 터라 흥미롭게 읽었다.

 

지금 내 한국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한 사람은 한번 들춰볼 만하다. 하지만 대체로 쉬운 문제들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해서 내 한국어 실력이 뛰어나구나!라고 생각하는 건 금물일 듯. 요즘 이 외에도 우리말 관련 책들을 몇 권 더 챙겨두었는데 함께 봐야겠다. 멀고먼 우리말 공부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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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플린, 채플린
염승숙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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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마음 먹은 건 별점을 낮게 준 어떤 리뷰를 보고서였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를 낯선 우리말들이 잔뜩 나와 있어서 불편했다는, 그런 리뷰였는데, 거기에 예로 들어준 문장을 보며 나는 "오호~! 횡재라!!"를 외쳤다. 이 책, 꼭 만나봐야지! 하면서.

 

나는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헐겁게 매달린 눈밭의 엷은 막을 조심스레 헤쳤다. 그와 동시에 나의 시야는 믿을 수 없는 광경으로 뒤섞이고 얼크러졌다. 검실검실한 광경에 입이 딱 벌어졌다. 작은, 그러나 무수한 공룡들이 옹긋옹긋 모여앉아 눈을 뭉쳐 허겁지겁 입속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나는 얼먹은 표정으로 옴짝달싹 못한 채 하염없이 그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102~103쪽)

 

이 책에는 이런 문장들이 가득하다. 요즘 매일같이 사전을 들여다보며 예쁘고 독특한 부사어들에 관심이 많이 갔는데, 이 책에는 그런 부사어가 특히나 많이 쓰이고 있다. '검실검실(사람이나 물건, 빛 따위가 먼 곳에서 어렴풋이 자꾸 움직이는 모양)', '옹긋옹긋(키가 비슷한 사람이나 크기가 비슷한 사물들이 모여 솟아 있거나 볼가져 있는 모양)', '어빡자빡(여럿이 서로 고르지 아니하게 포개져 있거나 자빠져 있는 모양)', '생게망게(하는 행동이나 말이 갑작스럽고 터무니없는 모양)' 등과 같이 말이다. 사전을 통해서만 본 낱말들을 이 책에서 발견하거나, 낯설지만 재미있는 낱말들을 만났을 때의 행복감이 참 컸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옆에 준비해 둔 접착용 메모지에 부지런히 예쁜 우리말들을 옮겨 적느라 드바빴다. 그렇게 따로 적어 놓은 단어가 꽤 되어 신난다.

 

통통 튀어 다니는 것 같은 문장에 빠져서 아름다운 낱말들을 건져올리느라 이야기 자체에는 집중을 하지 못한 면도 없잖아 있다. 하지만 이야기들이 하나같이 독특하고 흥미로워서 낱말 풍선에 매달려 날아가는 내 마음을 거머당겨주었다. 온 몸에 숫자를 가지고 태어난 '수의 세계'나, 갑자기 지도에서,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린 1-173번지 이야기 '지도에 없는'이나, '여봇씨요' 하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면 채플린으로 변하고마는 '채플린, 채플린', 우산을 들고 하늘로 날아가 사라져 버리는 사람들이 나오는 '피에로 행진곡' 등 젊은 감성이 돋보이는 이야기들이 달근달근하다.

 

이제 사전을 뒤적여 이 책 속에서 건져올린 단어들의 뜻을 찾아 본 뒤, 이 책을 되읽어 봐야겠다. 글맛이 두 배가 되지 않을까? 언젠가 모 작가가 '소설 읽으며 사전 뒤져야 하느냐!'는 항의를 많이 받아서 이제는 글 쓸 때, 우리말 사용을 자제하려 한다고 말하는 걸 들었는데, 염승숙 작가의 글에서는 앞으로도 예쁜 우리말 행진이 이엄이엄 계속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앞으로 만나게 될 그녀의 글들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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