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말랑한 힘 - 제3의 시 시인세계 시인선 12
함민복 지음 / 문학세계사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몇 해 전에 <미안한 마음>이라는 산문집을 통해 함민복 시인을 알게 되었다. <미안한 마음>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산문집 중 한 권이 되었는데, 정작 그 책을 쓴 시인의 시집은 읽어보지 못하고 있었다. 산문집의 느낌이 무척 좋아서, 산문집에서 진하게 풍겨오는 바다 냄새가 좋아서, 바닷가에 터 잡고 사는 그의 이야기가 좋아서, 그가 쓴 시집도 얼른 만나보고 싶었는데, 이제야 그 만남을 이루었다. 여러 시집 중에서 말랑말랑하게 다가오는 제목이 마음에 들어 먼저 만나본 시집 <말랑말랑한 힘>.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발을 잡아준다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가는 길을 잡아준다

 

말랑말랑한 힘

말랑말랑한 힘

 

('뻘' 전문)

 

내가 기대했던 대로, 이 시집에서도 바다를 만날 수 있었다. 제목의 '말랑말랑한 힘'부터 해서 말이다. 시를 읽고 있으면 콧속 가득 퍼지는 갯내가 좋아 나도 모르게 책에 코를 대고 킁킁거려봤다. 뻘이 가져다 주는 이 '말랑말랑한 힘'이 좋아, '푸르고 짠' 그 길이 좋아, '빈 소라 껍질 매단 줄'로 주꾸미 낚는 풍경이 좋아, 나는 시집을 읽다가 내 기억속의 바닷가를 찾아가 하염없이 노닐었다. 그 바다의 풍경이 있기에 이렇게 바다에 관한 시가 더 좋은지도 모르겠다. 시집 뒷편에 실린 산문은 뜻하지 않게 만난 크나큰 선물. 아, 행복하여라!

 

이 시집에는 바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잊고 사는 자연의 모습도 가득가득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시로 맛보는 사계절은 어느 계절 하나 싫지 않고 다 좋다.(현실 속의 나는 원래 여름만 좋아한다.) '아무 꽃침이라도 맞고' 싶어지는 봄, '새소리가 아름답게 들리는' 여름, '국화 향기에 발걸음 멈'추는 가을, 임 그리는 마음이 눈 위에 피어나는 겨울. 한 권의 시집으로 사계절을 넘나들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함민복은 우리 시대의 축복이다'라는 박형준 시인의 말에 깊이 고개를 끄덕끄덕.

 

빨리 시인의 다른 시집들도 만나보고 싶어 마음이 근질근질하다. 얼마 전에 "나는 이 책이 좋다!"라고 외친 책이 있었는데,(<나는 여기가 좋다>, 한창훈) 함민복 시인의 글을 만난 지금도 그와 같은 마음이다. 바다가 그리울 때면, 한창훈 작가의 소설과 함민복 시인의 시를 찾게 될 것 같다. 바다 냄새 물씬 풍기는 이들의 글이 나는 좋다!

 


푸르고 짠 길

 

 

이 길은 푸르고 짜다

길 속에서 먹을 것을 잡아올린다

이 길엔 깊이가 있어

길에 빠져 죽기도 한다

길 위에서 밥을 몇 번 해 먹으면

두려움이 가시기도 하는

 

길과 같이 흔들리며 낚시를 한다

온 힘을 다해 살아온 지혜를 다 짜

배와 줄다리기하던 망둥이가 뽑힌다

얽히고설켰던 길의 가닥 중

망둥이 길 하나가 튿어져 나온다

 

길의 배를 따고

물에 길을 넣고 불로 길을 끓인다

길의 살점을 발라 먹는다

먹는 것은 길의 살점뿐인데

살점들은 먹지 못하는 길의 뼈에 붙었으니

 

길을 먹은 힘으로 길을 또 가야 하는

길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길 위에서 길은 더 흔들린다

이 길은 늘 푸르고 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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