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쏘시개
아멜리 노통브 지음, 함유선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말로만 듣던 아멜리 노통브의 책을 드디어 만나봤다. 서너 권 사둔 책 중에서 일단 제일 흥미로워 보이고, 제일 얇은(!) 이 책으로 골라서.

아멜리 노통브의 책도 처음이지만, 희곡도 처음이다. 이렇게 얇은 책도 오랜만. (앨범으로 치자면 싱글 앨범을 듣는 기분이었다.)

 

이 책의 제목은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불쏘시개'로 쓰이는 것이 바로 '책'이니까, '불쏘시개=책'.

책을 불쏘시개로 쓰다니! 상상만 해도 무서운 제목이고 이야기다.

시집간 동생이 집에 다니러 오면 내 방 책장을 휘휘 둘러보다가(뭐 빼갈 거 없나 하고!) 짓궂은 질문을 던지곤 한다.

"언니, 만약에 집에 불이 났는데, 책을 한 권 밖에 못 가지고 나가게 되면, 무슨 책 가지고 나갈 거야?"

그러면 나는, "그걸 말이라고 해! 당연히 김연수 작가 책이지!!"라고 외친다,라고 하면 너무 빤한 대답이 될 거고,

내 대답은 이렇다.

"염려 마, 내 팔자에 불 사고 없대."(정말로 작년에 내 관상을 봐주신 분이 그랬다. 차 사고, 불 사고, 물 사고 하나도 없다고. 오예!)

아무튼, 겉으로는 태연한 척 사주팔자 운운하지만, 그런 질문 들을 때마다 정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다.

부, 불이 난다면, 이 책들, 내가 사랑하는 이 책들 어떡하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원통하게 화재가 일어나서 책을 화염에 빼앗긴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책으로 불을 피운다. 때는 한창 전쟁 중이고, 겨울이며, 난로가 굶은 지 오래 되었고, 남자보다 추위를 더 타게 되어 있는 여자가 졸도할 것 같은 추위를 참지 못하고 책을 불태우면 얼마나 따듯할까 생각하게 되므로. 하지만 책을 태우는 것은, 어떤 책을 태울까 결정하는 것은 결코 쉽지만은 않다.

 

<무인도에 간다면 어떤 책을 가져갈 것입니까?> 난 항상 이런 질문이 좀 어리석다고 생각하네. 말도 안 되기 때문이지. 그러나 그 질문을 거꾸로 한다면, 아주 중요한 질문이 되네. 이를테면 어떤 책이 없애기에 아주 손쉬울까?(26)

 

이 과정을 거쳐서 서가의 책들은 하나하나 난로의 밥이 되어 사라진다. 그리고 전쟁과 추위에 지친 그들에게 잠깐이나마 온기를 마련해 준다.(책 한 권에 2분 쯤 탈까?) 과문한 나는 이 책에 나오는 책들이 실제 있는 책인지, 그렇다면 그 책들이 얼마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책인지 알 수가 없어 그들이 책 한 권 한 권을 놓고 고민하는 모습은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지켜봤다. 하지만 그 대상을 내 책장 속의 책으로 바꾸어 생각하니 이야기가 달라졌다. 어쩐지 마지막 2분의 온기를 위해서 마지막 한 권까지 난로 속으로 던져 넣는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 마지막 책이 바로 내가 아껴 마지않는 김연수 작가 책이 될테니!)

 

'어떤 책이 없애기에 아주 손쉬울까'를 고민하는 그들을 지켜보면서 책에 대한 내 마음을 한 번 정리해 볼 수 있었다. 내 결론은, 문학적으로 또는 역사적으로, 심지어는 금전적으로 어떤 가치가 있느냐에 상관없이, 그저 내 마음에 가장 기쁨을 준 책,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해 준 책이 내겐 최고 좋은, 없애기에 손쉬운 순위에서 꼴찌로 밀리는, 무인도에 가져갈 책이 될 거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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