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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비너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젠 이름 자체가 브랜드가 되어버린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 한때 미친듯이 그의 작품을 탐독해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탐독의 순서는 역시 먼저 읽은
독자들의 평. 그렇게 호평을 받는 작품들을 먼저 섭렵한 탓이었을까 뒤에 읽은 작품일수록 기대치는 높은데 그에 대한 만족감은 반비례했었습니다.
때문에 제겐 기복이 심한 작가로 각인되어 버린 그. 그래도 신간 소식이 들리면 어쩔 수 없이 자연스레 귀가 쫑긋 합니다. 어쨌든 명불허전
히가시노 게이고니까요. 1년에 반드시 2~3권은 국내에 출간이 되는 그의 작품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오래된 초기작들이 이제서야
번역이 되던 상황이라 정작 비교적 (일본내에서의) 최근작을 읽은 건 상당히 오래된 일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게이고의 초기작보다 최근작이
더 취향에 맞습니다.
동물병원 원장 대리 하쿠로는 어느날 아버지가 다른 동생 아키토의 아내라는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가에데
가족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시애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는 동생 부부는 아키토의 아버지 야스하루가 임종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으로
귀국하는데, 귀국 이후에 아키토가 실종되고 맙니다. 급한 볼 일이 있어 며칠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메모를 남기긴 했지만 그의 행방불명이
걱정스러워진 가에데는 아키토의 형인 하쿠로에게 연락을 취하여 이렇게 결성된(?) 아주버님&제수씨 콤비는 아키토의 행방을 뒤쫓으며,
하쿠로의 엄마가 재혼했던, 그러니까 아키토의 본가인 야가미가에 얽힌 내밀한 가정사도 추적하고, 그러다 보니 16년 전 조금 의아한 죽음을 맞이한
하쿠로 엄마의 죽음에 관련된 미스터리도 풀게되는 그런 스토리입니다.
이야기 속에 담긴 미스터리는 상당히 고전적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야가미가의 대 저택에서 만난 여러 수상쩍은 인물들. 야가미가의
어마어마한 재산과 이 재산 대부분을 물려 받게 될 아키토의 행방불명. 분명히 이 사건의 중심엔 야가미가의 누군가가 관여했을 것이므로 하쿠로와
가에데가 그들을 차례로 탐색해 가는 과정은 고전적 미스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설정입니다. 하지만 이런 형식의 미스터리는 뭔가 뻔하고
단조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작가는 여기에 다채로운 다른 미스터리를 준비합니다. 하쿠로와 아키토 모친인 데이코의 16년 전 의문사.
그리고 그저 뇌종양으로 임종한 줄만 알았던 하쿠로의 친부 가즈키요의 죽음과 그가 남긴 그림 '관서의 망'. 재산과, 실종과, 의문사와, 그림.
각자 흩어져있던 사건들은 결국 하나로 귀결되고, 그렇게 맞이하게 되는 반전의 결말까지 독자는 쉴 새 없이 책에 빠져듭니다. 역시 게이고 그는
명실공히 가독성의 제왕답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과 출신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그의 지식은 여러 작품에서도 빛을 발하곤 했었지요. 각종 수학적 과학적
공과적 지식들을 이용한 미스터리들이 꽤 많이 존재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갈릴레오 시리즈가 있고요. 이 작품에서도 그런 작가의 이과적
지식들은 꽃을 피웁니다. 프랙털 도형, 소수의 비밀, 울람 나선, 뇌과학 등등. 솔직히 저는 문과 출신이어서 그런지 작가의 이과적 지식들이 마구
분출하는 몇몇 작품들은 읽는데 조금 어려움을 느끼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작품에서는 그런 지식들이 지나치게 상세하고
전문적으로 펼쳐지진 않아서 적당히 읽기 재밌을 정도였습니다. 오히려 몇몇 이론들엔 지대한 관심이 생겨 책을 읽으며 무한 검색을 했을 정도로
흥미롭기까지 했습니다. 역시 이런 점은 어쩔 수 없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강점이랄 수밖에 없겠네요.
제가 수많은 게이고 작품을 읽어오면서 조금 아쉽다고 느꼈던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책을 읽어나가며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잔재미.
그러니까 캐릭터가 매우 매력적이라든가(그나마 가가형사를 가장 좋아합니다.) 문장 자체가 유쾌하다든가 하는 것들. 그런 것들이 게이고 작품에선
찾아보기 힘들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 위험한 비너스에서는 그런 잔재미가 곳곳에서 보입니다. 우선 캐릭터들이 상당히 개성 강하고 매력적입니다.
먼저 주인공인 하쿠로. 그는 여자의 풍만한 가슴만 보면 금방 사랑에 빠져버리는 금사빠입니다. 곳곳에서 여자들의 몸매 품평을 하는 그를 보면
눈살이 찌뿌려질만도 한데 왠지 귀엽습니다. 분명 변태스러운데 순수한 맛이 있달까요. 그래서 그런지 이남자 나름 여자 관계가 복잡합니다. 하긴
그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금사빠니까요;; 그리고 하쿠로의 마음을 사로잡은 두 여성이 있습니다. 먼저 동물 병원 간호사인 가게야마 모토미, 항상
상사인 하쿠로에게 팩트 폭력 돌직구를 날려대는 그녀는 항상 하쿠로가 이성을 잃을 땐 정신을 똑바로 차리게 하고, 위기에 봉착했을 때 지혜롭게 그
위기를 모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리고 하쿠로에겐 금단의 열매처럼 위험한 비너스(저는 이 책의 제목이 이 인물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에데. 승무원 출신이라는 그녀는 언제나 쾌활 발랄하고 가벼워 보이지만 한편으론 논리가 예리하고, 임기응변에도 능하고, 심지어 체력적으로도
강한, 상당히 미스터리한 인물입니다. 이런 그녀에게 점점 빠져드는 하쿠로, 하지만 그녀는 하쿠로의 제수씨. 이때문에 고뇌하는 하쿠로의 내적갈등은
비난도 응원도 할 수 없어 독자들에게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합니다. 게이고의 전작들에서 분명 막장 치정극이나 팜므파탈 악녀가 등장하는 로맨스(?)
스릴러는 꽤나 있었는데, 이렇게 소소하게 진행되는 로맨스 아닌 로맨스가 있었던가요? 하쿠로와 모토미와 가에데의 삼각 로맨스에 저는 뭔가 마음이
뿌듯해졌습니다. 게이고의 작품을 읽으면서 설렘을 느낄 줄이야! 아, 그렇다고 이 작품이 로맨스가 짙은 작품이겠거니 오해는 마세요. 그저 책을
읽어가며 잔재미를 찾아내는 즐거움을 크게 생각하는 제겐 이 작품이 주는 가장 큰 잔재미가 그것이었다는 뜻이니까요. 그런데 하쿠로와 모토미와
가에데... 이 작품 혹시 시리즈로 또 나오진 않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한 번 쓰고 버리기엔 이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너무 아깝습니다.
추리도 있고, 추적도 있고, 과학도 있고, 수학도 있고, 심지어 로맨스도 있는 이 작품은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묵직한 메시지들도 담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처음과 끝이 동물 병원에서의 하쿠로의 진찰 장면이며 또한 자주 하쿠로의 진찰 장면이 상세하게 묘사되곤 합니다. 그렇게
작가가 반려 동물에 대한 인간들의 책임 의식 같은 걸 전달하려 했던 것은 아닐지 느꼈습니다. 또 하쿠로가 수의학 전공을 결심하게 되는 계기가 된
사건은 동물 실험에 대한 문제 제기 또한 보여줍니다. 인간들에게 희생당하는 동물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순수한 동물들 덕에 흐뭇해지는 훈훈함을 또한
동시에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작가가 고양이를 키운다고 하던데 작가의 동물 사랑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작품 전반을 아우르는 주제와 관련된 과학의 영역에 대한 문제 제기. 끊임없이 인간의 한계에, 나아가 신의 영역에까지 도전하려는
과학의 영역. 과학의 발전이 인간의 삶의 질을 무한히 발전시킨 것은 분명하지만 이런 과학의 무한한 발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여러 분야에서
나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작품에서는 뇌의 일정 부분에 자극을 주어 후천적인 천재를 만들어 내는 연구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하지만 그
연구의 결과란 것은...... 이 세상에 천재들이 많아지면 이 세상은 과연 행복해질까요? 작가는 천재로 태어난 아키토가 아닌 범(凡)재로 태어난
하쿠로가 사건을 해결한 결말을 통해 이에 대한 답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역시 작가의 이런 생각에 깊이 공감하는 바입니다.
『 p.474
천재가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불행한 천재를 만들어내기보다 행복한 범재(凡才)가 좀 더 많아지도록 노력하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