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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의 책
김희선 지음 / 현대문학 / 2017년 6월
평점 :
군산에 가면 '잡탕'이라는 독특한 음식이 있습니다. 라면, 만두, 떡, 순대, 튀김 등등을 다 때려넣고 MSG 잔뜩 넣어서 끓인 굉장히
자극적인데 이게 또 중독성이 강해 자꾸 생각나는 음식. 무한의 책은 음식으로치면 바로 이 잡탕 같은 책입니다. 온갖 장르란 장르는 다 섭렵하고
있거든요. 미스터리, 스릴러, 호러, SF, 오컬트, 판타지, 순문학까지. 그런데 신기하게도 산만하게 느껴지기 보단 재밌습니다. 은근 중독성이
있어서 자꾸 자꾸 페이지를 넘기게 되거든요. 게다가 소설의 형식은 또 어찌나 독특한지요. 일단 글자체만도 5종류가 넘는데다가 글의 구성은
소설이었다가 일기였다가 블로그포스트였다가 각주였다가 편지였다가 위키피디아였다가 노래 가사였다가 희곡이었다가... 거기에 시간 또한 뒤죽박죽.
과거였다가 현재였다가 미래였다가, 현재가 알고보니 미래였다가, 미래가 알고보니 과거였다가... 이런 이런, 정신이 하나도 없다고요? 네, 이
책은 매우 정신없는 작품 맞습니다. 그래서 제목 또한 무한의 책입지요. 하지만 그 정신없음 속에서도 묘한 몰입감이 형성되어 끝까지 완주하도록
하는 힘 또한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용인 에버랜드에서 요상한 복장을 한 아이가 발견되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아이는 경찰서로 넘겨지고 아이의 행적을 찾아보려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배경이 갑자기 미국으로 바뀝니다. 이 이야기의 실질적인 주인공이자 화자인 스티브가 등장하여 다시 이야기가 전개되지요.
스티브(한국 이름 박성철)는 엘름가 1408번지 한국인 가족 몰살 사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장남이었습니다. 하지만 스티브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작품 속에서 그렇게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이야기는 스티브와 스티브의 현재
주변 인물들이 중심으로 전개되거든요. 그리고 갑자기 신이 강림합니다. 여러분은 신이나 천사하면 어떤 이미지가 그려지는지요? 당연히 우리 인간과
닮은 꼴의 외양이 그려지실 겁니다. 하지만 이 작품 속 신은 파충류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공룡의 모습을. 그들은
2015년 12월 21일 지구 각지에서 비처럼 눈처럼 내려옵니다. 신은 우리 주변 곳곳에 산재되어 있음이 이렇게 엉뚱하게 증명되지요.
게다가 신이 티라노 사우루스였다니! 천사는 익룡이었다니! 다섯 살 난 조카가 손에서 놓지 않는 공룡 장난감이 알고보니 신의 닮음꼴이었었다니요!
처음엔 작가의 능청스러운 상상력에 피식댔었지만, 또 생각해보니 신이 파충류의 모습을 한 게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신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 거라는 건 어쨌거나 인간들의 오만이 만들어낸 이미지일 뿐일테니까요. 아무튼 신들은 그렇게 강림하여 인간들과 스마트폰
어플 '계시'로 소통을 합니다. 특히 우리의 주인공 스티브와는 문자 메시지로 무한 소통을 하지요. 신들은 갑자기 왜 강림을 한 것일까요? 그들이
스티브를 찾은 이유는? 용인에서 발견된 아이의 정체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이야기는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서술자의 의식의 흐름대로 전개가 되는지라 이야기가 옆길로 자주 새버리기도
하고요. 온갖 잡다한 글의 형식이란 형식은 전부 등장을 하니, 아니 이게 무슨 소설이야? 라는 생각이 들 법도 합니다. 속된 말로 작가가 혹시
'약 빨고' 쓴 소설이 아닐까 싶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한 작은 퍼즐 조각들이었습니다. 하등의 쓸모가
없는 군더더기처럼 보이던 조각 이야기들이 사실은 하나의 큰 그림을 위한 중요한 조각이었던 거지요. 그렇게 큰 그림이 완성되는 마지막 퍼즐 조각이
맞춰졌을 땐 저는 살짝 눈물이 돌기까지 했습니다. 이 요상하고 또 요상한 이야기의 끝에 감동이 있으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않았는데, 마지막에
노인과 소년이 손을 잡고 멀어져 가는 그 뒷모습은 꽤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가끔 이런 책을 만나면 참 난감합니다. 읽을 땐 신나게 읽었는데 이 무한한 이야기에 대한 감상평을 단 몇 줄로 적어낸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거든요. 때문에 이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겠네요. 부디 직접 한 번 읽어 보시길 권한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