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도서관에서 김상일씨의 <역과 탈현대의 논리>라는 책을 읽고 있다가 흥미로운 구절을 발견해서 몇자 적어 봅니다. 이 책의 저자인 김상일씨는 동양철학을 서양철학과 수학과의 관련 속에서 해명하는 작업을 오랬동안 천착해 왔습니다. 특히 러셀의 역설이나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들 속에 존재하는 논리적으로 해소불가능한 역설paradox의 문제를 易과 같은 동양의 사유속에서 해명하려고 시도하여왔고 그 결과물들을 <화이트헤드와 동양철학>, <원효의 판비량론 비교 연구>,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로 풀어본 원효의 판비량론>, <한의학과 러셀 역설 해의>, <초공간과 한국문화>, <알랭 바디우와 철학의 새로운 시작> 등의 저술들로 소개해온 분입니다.

 김상일씨에 의하면 성서Bible 특히 창세기는 지금까지 윤리적 혹은 도덕적으로만 이해되어져 왔을 뿐이고 '논리적'으로 이해되어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만약 창세기가 논리적으로 이해되어져 왔다면 "기독교의 역사와 신학은 지금과 많이 다를 것"이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창세기의 한 구절을 옮겨와 봅니다.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이 동산 모든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밤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라" (창세기 3장 1~5절)
 
   

기독교에서 보는 인류의 역사는 뱀과 여자와의 이 대화에 의해서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창세기에서 이 구절은 결정적인 대목이 아니라 할수 없을 겁니다. 통상적으로 이 구절은 악으로 대변되는 뱀이 여자에게 선을 상징하는 "하나님Lord"의 명령을 거스를 것을 유혹하는 선과 악의 윤리적 대립구도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김상일씨는 이 대목을 윤리적, 가치론적 구도로만 볼 것이 아니라 논리적Logical으로 바라볼 것을 제안합니다.
 
위 대목에서 주의해서 보아야 하는 부분은 뱀이 여자에게 "이 동산 모든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는 구절입니다. 굵은 글씨로 강조했듯이 중요한 것은 이 "모든"이라는 부분입니다. 뱀과 여자가 이해하는 이 "모든"에는 당연히 동산의 한 가운데에 있는 나무와 그  열매 즉, 선악과도 포함됩니다. 뱀의 논리 그리고 그 논리에 포섭된 여자의 논리로 보았을 때 동산 중앙의 나무 역시 "모든 나무every tree"에 해당하므로 그것을 먹는 일은 비록 신의 명령을 거스르는 행위이긴 하나 비논리적인 행위라 할 수 없습니다.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을수 있다고 했지만 동산 중앙의 나무 열매만 먹지 말라고하는 하나님의 명령에는 논리적 일관성이 결여되었다고 볼 수있는 것이지요. 뱀은 이런 논리적 허점을 노리고 여자를 유혹했던 것이지요. 이 논리를 E형 논리라고 합니다. E형 논리에서는 전체도 부분에 '포함'됩니다. 수학의 집합론에서 어떤 집합의 모든 부분집합에 전체집합이 포함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수학에서는 이와같은 어떤 집합의 모든 부분집합을 '멱집합'이라고 정의하기도 하죠.  

반면 하나님이 상징하는 논리는 A형 논리입니다. A형 논리는 부분은 전체에 속하지만 전체가 부분에 속하지는 않는 논리입니다. 즉, 수학에서의 멱집합이 통용되지 않는 논리이죠. 동산 중앙의 나무는 "모든 나무"에 속하지 않은 일자one입니다. 동산 중앙의 나무는 그자체로서 하나의 완전한 전체성을 이루는 그러면서 모든 것의 지식knowledge of everything을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이러한 일자적 전체성으로서의 나무는 모든 (다른 부분집합으로서의) 나무들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나무"임에도 불구하고. "신의 피조물은 신에 포함되나 피조물은 신에 포함되지 않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이러한 A형 논리의 사례를 찾아보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유대교나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같은 (물론 수행을 통한 깨닮음을 통해 신과의 합일을 이룰수 있다고 본 그노시스적 기독교 전통을 제외하고) 유일신적 전통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신과 인간은 창조주와 피조물간의 관계이고 위계적으로 동등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고 뱀과 여자가 따르는 E형 논리를 따르게 되면 신이 인간이 되고 인간도 신이 될 수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것은 신이 곧 인간이 되고 인간이 곧 신이되는 이단heresy이 되므로 유일신으로서의 유대교나 기독교전통에서는 배척될 수밖에 없는 논리가 됩니다. 이와는 반대로 동양의 종교 그리고 사상은 E형 논리를 따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교의 경우 대표적으로 E형 논리를 따르는 종교인데 사람도 수행을 통하여 깨닮음을 얻으면 모두 부처가 될 수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지요. 신과 인간의 동일성 혹은 인간이라는 소우주와 외부의 대우주 간의 동일성. 서양에서도 일부의 비교적esoteric 전통에서는 이런 신과 인간의 동일성 테제가 존재하긴 합니다만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일 뿐 주류라보 볼수는 없지요.

그런데 이런 A형 논리는 기독교와같은 종교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학과같은 서양철학에서도 발견 됩니다. "A형 논리학의 출발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범주론>에 의하면 첫번째 "선행 범주"와 두번째인 <범주론>의 범주는  세번째의 후속 범주와 관련이 없습니다 이러한 범주들 간의 분리와 상호관계를 규정한 이유는 결국 "하나와 여럿의 관계에서 생기는 역설"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소위 "러셀의 역설"로 잘 알려진 역설을 해결하기 위한 러셀의 "유형이론"도 이러한 A형 논리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러셀은 1901년 소위 거짓말쟁이의 역설을 통해서 일반에게 알려진 러셀의 역설을 집합론set theory에서 발견합니다. 러셀의 역설은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발견됩니다.


   
  "지금 자기 자신을 요소로서 포함하지 않는 집합의 전체를 X로 한다. 그런데 X자신은 X에 포함되는 것일까, 포함되지 않는 것일까? 가령 X가 X에 포함된다고 하면 자기 자신을 요소로서 포함하는 것으로 되기 때문에 X의 정의로부터 X에는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되어 모순이다. 또 가령 X가 X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하면 X의 정의로부터 X는 X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다시 모순이 생긴다. 이와 같이 어느 쪽으로 해도 모순이 생기게 된다." (<괴델 불완전성 정리>, 요시나가 요시마사, 75쪽)   
   


이처럼 어느 쪽으로 해명하려고 해도 해소되지 않은 역설적인 상황을 러셀은 소박한 집합론 (naive set theory)에서 발견했던 것입니다. 일화에 의하면 러셀이 이러한 역설을 집합론 내부에서 발견하고 프레게에게 알려주었는데 프레게는 크게 낙담하여 수년간 연구해서 막 발표하려던 자신의 논문을 폐기처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러셀은 이러한 역설을 해소하기 위해 앞에서 이야기한 A형 논리를 다시금 도입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유형이론"입니다.

러셀의 해법을 설명하기 전에 이해를 돕기 위해 소위 거짓말쟁이 역설을 다시한번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옛날 한 크레타인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이다"  그렇다면 이말은 과연 거짓말일까요? 진실일까요? 이 문장이 참이라면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이므로 이 말을 한 크레타인의 말도 거짓이 됩니다. 반대로 이 말이 거짓이라면 크레타인이 이 말을 한 것이므로 그것 역시 참이라고 할수있는 것이지요. 러셀의 역설도 이와같은 역설을 수학적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러셀은 이 역설내에 감춰진 비밀을 "자기언급적"인데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만약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이다"라는 말을 크레타인이 하지 않았다면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 '모든'에 들어가는 크레타인이 이 말을 해서 역설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언급적 순환고리를 깨는 일. 그것이 러셀의 해법이었던 셈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자기언급적 고리의 순환을 끊는 방식으로 역설을 해소하게 되면 계속해서 또다른 상위의 "계" 혹은 "급"을 도입하지 않을수 없게 되고 결국에 가서는 또다시 역설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난관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러셀의 해법은 완전한 해법이 될 수 없는 임시방책에 지나지 않았죠. 그런데 이러한 러셀의 역설이 몰고온 수학의 난제를 결정적으로 해소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괴델입니다. 수학사와 괴델과 관련된 이야기는 이번 주제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만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죠.

다시 창세기로 돌아와 봅시다. 결국 창조주인 하나님이 제시한 논리, 즉 에덴동산 가운데의 나무는 다른 모든 나무와는 다른 상위의 나무로 취급하는 A형논리는 러셀과 같은 위계적 해법에 비유할 수있습니다. 반면 뱀과 여자처럼 동산가운데의 나무도 다른 모든 나무와 같은 나무이므로 먹어도 된다고 보는 E형 논리는 A형 논리에서 보았을 때에는 '자기언급적' 역설을 야기하는 비논리가 되는 것이지요.그래서 창세기에서 그리고 나아가 서양의 지적 전통 내에서는 이러한 뱀과 여자의 E형 논리는 논리적으로 해결 불가능한 역설만을 야기하는 악으로서 규정되고 이단으로 배척받아왔다고 볼수있는 것이죠. 결국 이처럼 서양의 종교(기독교)와 사유의 배경에는 A형 논리의 흔적이 짙게 깔려있다고  저자인 김상일씨는 봅니다. 그런데 이처럼 역설을 해소할 수 없는  A형 논리의 한계를 감지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던 시도들이 서양에서도 존재했죠. 플라톤 철학에서도 그 맹아가 존재하였고 근대철학에서는 라이프니츠에서부터 비롯하여 오늘날의 데리다와 들뢰즈 그리고 바디우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A형 논리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계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수학계에서는 칸토어가 대각선논법을 이용해 실수의 무한집합이 유리수의 무한집합보다 더 크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A형논리의 내부의 균열을 감지하였고 결정적으로는 수학의 무모순성이 불가능한 목표임을 보인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통해 A형 논리를 통한 역설의 해소가 불가능임을 '증명'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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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싫어 2010-02-01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난 이런 성서들을 보면 이해가 안 돼 도대체 한 마디도 말이 말 같지 않은 것도 그렇지만
해설하는 사람은 또 자기 식대로 횡설수설,,, 심지어 왼갖 철학자들의 말을 인용하여
자기 자신도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말들로 신자들을 햇갈리게하는 재주는 기가 막혀 ㅎㅎ
하기야 신을 내 세우는 종교는 어쩔 수 없이 '무조건 따지지 말고 믿기만 하란 말이
이래서 나온건가 봐요

yoonta 2010-02-02 15:36   좋아요 0 | URL
"신자"신가요?

윤지 2010-02-02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신자라고 거짓말을 할까요?
지금은 21세기예요 성서도 시대에 마춰 다시 써야합니다
어차피 그 성서가 만들어진 것이 밝혀진 이상
이상한 말장난으로 횡설수설하지 말고
불교와같이 과학과 철학적인 마인드로
신자들에게 접근해야만 기독교가 살아 남습니다
미국과 유럽이 왜 기독교 인구가 줄고있는지 아십니까?
지금 서양의 젊은 사람은 아무도 성서를 신뢰하고있지 않아요
가슴아픕니다

I.M.Curious 2015-01-09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성서는 이제 명언을 제공하는 어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만 서양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키워드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아직까지는요.
 

루소는 <인간불평등의 기원론>이라는 저작을 통해서 인간들 사이의 불평등의 기원을 '허영'에 있다고 말한바 있습니다. 공동체를 형성하기 이전의 고립된 개인들은 모두 자유롭고 평등한 상태로 존재하지만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인간은 타자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구 혹은 욕망을 가지게 되는데 그 결과 허영vanity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 허영이 동기가 되어서 물질적 부를 추구하게 되거나 타자보다 우월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게 되면서 결국은 인간들 사이의 불평등을 야기하게 된다는 논리지요.



이러한 의미로 루저녀의 사례를 생각해 본다면 "저는 180이하의 남자는 루저라고 생각한다"라는 발언 역시 자신의 연애의 대상인 남성을 180이상과 이하로 분류함을 통해 스스로가 180이상의 멋진 남성에게만 어울리는 우월한 여성임을 은연중 과시하고 싶어하는 "허영"이라고 볼수도 있는 것 은 아닐까요? 물론 이러한 이도경씨의 발언이 대다수 여성의 욕망을 대변한다고 볼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이러한 신체적 혹은 외모적 차별이나 구별을 통해서 자신도 결국 그러한 신체적 혹은 경제적으로 우월한 남성에 어울리는 우월한 여성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강조하고 과시하고 싶어 하는 여성들은 우리들 주변에 상당수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180이하남성은 루저다와 유사한 표현을 과감하면서도 솔직하게 할수있었던 당시의 미수다의 패널들의 발언들을 보면 루저녀의그런 발언이나 생각이 단순히 이도경씨의 개인적 생각에만 국한된 우연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단순한 해프닝이나 방송사고정도로 그칠수있었던(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되는 것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그 문제의 발언은 사회적 파장이 생각보다 컸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의 발언이 나온 경로가 어디인지 진실게임이 벌어지게 되었고 급기야는 미수다제작진이 일부 교체되고 법적 소송으로까지 번지는 사태로 확대되고 말았습니다. 한국남성들은 그 발언이 드러내는 차별과 비하의 의미를 생각보다 예민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지요. 제가보기에는 루저녀의 그 표현은 물론 문제가 많은 발언이었고 표현이긴 합니다만 과거의 다른 사례에서도 보듯이 이러한 특정 개인의 표현을 두고 집단적으로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루저녀의 표현이 어떠한 것이었던지 간에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표현과 사상의 자유의 영역에 든다고 말할 수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사실 지금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는 바로 이 '자유'라는 화두입니다. 루저녀의 사례에서 본 것처럼 과연 그녀의 발언을 '표현과 사상의 자유'라는 근대적 자유의 의미로 긍정할 수있다면 이때 자유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과 민주주의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점도요.



앞서서 루소가 생각한 인간 불평등의 기원을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만 그렇다면 루소는 이러한 사회적 불평등의 해소는 무엇으로 가능하다고 보았을까요? 바로 그것이 그 유명한 '일반의지'라는 개념입니다. 일반의지는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의 의지의 단순한 총합이라기 보다는 공동체 전체가 추구하는 공적이면서도 일반적인 공공선을 추구하는 의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공공선을 위한 일반의지는 개개인의 자유보다 우위에 있으면서 그것을 통제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결국 공동체의 구성원은 개개인의 다양한 욕망을 추구하는 자유를 내세우기 전에 먼저 이 공공선의 추구로서의 일반의지가 무엇인가를 항상 점검하고 확인해야할 의무를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한에서만 개개인의 자유는 공동체 내에서 보장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루소의 일반의지 개념은 마키아벨리의 ‘공화적 자유’라는 개념과 연결되는데 즉, 시민으로서의 자유는 각각의 시민들이 공동체 혹은 공화국의 법과 질서를 준수했을 때에만 가능하게 된다는 것과 연관되게 됩니다. 이러한 일반의지 혹은 공화적 자유 개념은 법과 도덕의 강제나 간섭이 없을 때에만 가능하다고 보는 홉스적인 ‘소극적 자유’개념과 대조를 이룹니다. 홉스의 경우에서 자유는 개개인이 타인의 간섭이 없는 상태에 있는 일종의 원자적 고립상태를 가정한다고 볼수있기 때문이지요. 결국 홉스는 루소나 마키아벨리와는 다르게 공동체 이전의 개인의 자유를 절대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의 ‘만인 대 만인의 투쟁’개념이나 ‘절대국가주권론’도 결국은 개개인의 사적 자유가 무한함을 가정함으로써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개개인의 사적 자유를 공동체적인 집합적 자유보다 강조했던 예컨대 홉스나 제레미 벤담같은 자유주의자들은 결국 이러한 개개인의 무절제한 욕망과 자유를 개념적으로 수용하다보니 거꾸로 그것을 통제하기 위한 주권적 통치 혹은 통제를 강조하기에 이릅니다. 벤담의 소위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과 같은 공리주의적 시각도 외견상 개개인의 "쾌락의 추구"가 결국은 공공의 행복으로 이어질 것이다라는 낙관론이라고 생각되기 쉽지만 홉스의 절대주권론에서처럼 판옵티콘과 같은 보이지않는 교도관을 통해 수인을 통제하는 감옥을 설계했던 사례를 비춰보았을 때 그 역시 결국 자유의 무한한 추구를 허용하는 원자적 개인을 통제하기 위한 인위적이며 강압적인 제도나 도구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개개인의 사적 자유와 공동체의 공공선이나 공화적 자유를 조화시킬 수있을까요? 루소는 앞서 본것처럼 개개인의 사적자유를 일반의지에 복속시킴으로서 해소하고 마키아벨리는 공화국의 법과 질서를 통해 그것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다원화되고 공화제적인 법과 의회적 민주주의가 이미 제도화된 상황에서는 루소나 마키아벨 리가 살았던 시대처럼 공화정과 군주정이 경합하던 시기에 공화적 질서와 제도를 강조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제시된 일반의지나 공화적 자유개념만으로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다소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게 사실입니다.



다시 루저녀 사례로 돌아와 봅시다. 앞에서 저는 루저녀의 발언은 그자체로 표현의 자유로서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발언은 사회의 불평등을 용인하고 조장한다는 면에서 평등이나 공공선에 반하는 측면이 있다는 사실도 지적하였습니다. 이러한 역설을 이해하는 것, 저는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처한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샹탈 무페의 경합적 다원주의agnostic pluralism 혹은 급진 민주주의radical democracy론에 근거합니다.



무페에 의하면 오늘날 민주주의가 가능하기 위한 방법으로 우파와 좌파간의 대립이 특정 정파의 이해관계로 일방적으로 치환되거나 혹은 ‘제3의 길’과 같이 양자간의 중립과 화해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하는 입장을 거부합니다. 대신 그녀는 소위 자유민주주의가 가능하고 또 발전하기 위해서는 (루저녀의 주장과같은)우파적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보편적 인민주권을 주장하는 민주주의간의 갈등과 긴장관계를 해소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고 봅니다. (샹탈 무페에 대한 간략한 소개는 다음 기사를 참조하세요.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87575.html )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긴장이 상호 간에 전적으로 타자적으로 존재하는 두 원칙 사이의 것으로서 양자 간에 타협될 수 잇는 단순한 관계라고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만약 긴장이 그런 식으로 이해된다면 아주 단순한 이원주의가 제도화될 수잇다. 대신에 양자 간의 긴장은 비록 우연적인 계기를 통해서라도 두 원칙의 표출이 일단 나타나면 하나의 원칙의 표출이 다른 원칙의 정체성을 변화시킨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타협“의 관계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감염”의 관계를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표출과정으로부터 결과되는 집합적 정체성의 체제는 그것의 지형이 항상 각각의 내부적 구성요소에 외적인 것이 단순히 덧붙여진 것 이상으로 만들어진 복합체이다. 사회적 삶에서는 언제나 집단적 주체들의 인식과 행태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게슈탈트적”인 차원이 있다.” (<민주주의의 역설>, 샹탈 무페, 26쪽)



이처럼 그녀는 소위 중도적으로 이해된 자유민주주의나 ‘제3의 길’이 빠질 수 있는 함정 즉, 자유와 불평등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는 우파적 입장과 공동체적 평등을 주장하는 좌파 간의 (나이브한) 조화가 가능하다고 보는 중도론을 경계합니다. 이러한 중도론은 결국 민주주의의 퇴행을 야기하고 우파에게 민주주의의 성과물을 헌납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이지요. 소위 신자유주의라고 불리우는 냉전 시대 이후의 극우적 경향에 대해서 제3의 길이라는 중도노선을 표방했던 영국의 블레어정부가 어떠한 행태를 보였는지를 조금만 돌이켜 보면 그 중도적 노선이 가진 무력함이나 불모성을 알수있다는 입장입니다. 한국의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샹탈 무페는 이러한 그의 경합적 다원주의를 논증하기 위해 비트겐슈타인이나 데리다와 같은 해체적 철학을 도입합니다. 특히 데리다의 ‘구성적 타자’개념이 중요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개념에 의하면 타자는 “우리”와 통약불가능incommensurable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그러한 통약불가능성이 가진 간극과 긴장이 결국 우리와 동시에 타자를 ‘구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긴장과 역설을 야기하는 “ “그들”은 구체적 “우리”의 구성적 반대가 아니라 여하한 “우리”라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상징”이라는 것이 데리다의 구성적 타자의 개념이지요. 무페는 정치의 장에서도 이러한 화해불가능한 역설이 존재함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때문에 우리는 180이하의 남성은 루저다라는 루저녀의 표현을 표현의 자유로서 승인해야할 이유가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러한 불평등적인 우파적 표현의 자유도 다원적 민주주의라는 공간 내부에서 가능하다는 승인을 통해 우리가 이야기하고픈 180이하의 남성도 여성과 교제할 권리가 있다라는 평등주의적 민주주의을 역설적으로 대립시킬 수 있게 되고 또 그러한 이러한 발언들과 그에 대한 비판사이에 형성되는 '구성적 긴장관계'를 분명히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가지 주의해야 할것은 루저녀에 대한 반발로 "160이하의 여성도 루저다" 혹은“C컵이하의 여성은 루저다”라는 식으로 이항대립적 주장을 하면 곤란하겠지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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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가면무도회‘를 통해 'myself'는 이제 ‘myselves'가 된다. 미디어 철학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자신을 한 가지 가능성에만 묶어놓는 정체성(identity)에서 해방되어 자아를 복수화(multiply)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인터넷의 능력이다. 가상적 아이디의 정체를 까는 것, 그것을 법률로 강제하는 인터넷 실명제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사이버 공간의 특수성을 법적으로 무시하겠다는 얘기인데, 과연 그것이 디지털의 시대정신에 얼마나 적합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인터넷은 가면무도회다. 그런데 가면무도회를 하는데 꼭 가면을 벗겨야만 하는가?


이번 프레시안에 올라온 미네르바관련 진중권씨의 글의 일부입니다.
(전문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112153717&section=02 )
여기에서 그는 주체성subjectivity 혹은 정체성identity의 복수화multiply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것을 '자아를 복수화 하는 가능성'으로서 미네르바라는 온라인 정체성이 가진 '복수적 정체성'의 의미를 짚고 있네요.

여기서 그가 제기하는 정체성/주체성의 복수화 가능성은 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주제중 하나입니다. 지금부터 소위 "인터넷 가면무도회"를 가능케 하는 배경의 의미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온라인 정체성의 복수성. 그것은 단지 미네르바라고 불리우는 한 개인이 온라인에서만 활동했던 사람이어서 '가능'했던 것일까요? 제가 보기에는 원래부터 한 개체의 주체성 혹은 정체성이라는 것 자체가 단수가 아닌 원래부터 복수의 정체성을 가진 (잠재적) 현실태였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원래부터 "미네르바" 혹은 "박모씨"는 복수였다는 것이지요. 비록 그것이 개체로서는 단수로 판명된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현실태로서의 개체는 복수의 정체성을 가진 '잠재적 실재'일까요? 

아리스토텔레스(혹은 플라톤)는 dynamis이라는 개념을 그의 철학에서 중요하게 다룹니다. dynamis는 기존에 잠재태나  잠세태 혹은 가능태등등으로 번역되어 온 개념이라고 합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현실태와 쌍을 이루면서 "가능태-현실태"라는 개념으로 플라톤의 초월적 이데아론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형상(이데아)이 현실태(actus)로서 등장함으로써, 질료는 가능태(potentia)라는 뜻을 갖게 된다. 이런 것들은 형이상학의 새로운 싹들이다. <형이상학> 7권과 8권에서 질료-형상문제를 광범위하게 다룬 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9권에서 가능태-현실태문제를 다룬다. 현실태가 규정을 하는 능동적인 원리인데 비해서 가능태는 작용을 미치고 실현을 할 수 있는 것. 간단히 말하자면 가능적인 것이다."(서양철학사 1권. 힐쉬베르거 254쪽)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 철학이 가지는 형상(이데아)의 편재성 혹은 보편성을 비판하기 위해 이를  사용하고 있는데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는 질료-형상 이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중 가능태는 질료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모든 현실태가 왜 이데아가 아니며 단지 현실태가 되기 위한 한 가능성으로서 즉, 가능태로서 존재하는지를 이야기합니다. 나무라는 재료(질료)가 있다고 해서 모든 나무가 책상(형상)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가능태는 현실태의 사후에 존재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가능태라는 질료로부터 우리는 현실의 책상을 유추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책상이 먼저 존재하고 그 결과를 역으로 추론한 뒤에 그 질료를 확인받게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가능태는 표면적인 선차성은 무의미해지고 현실태의 부수적인 결과로서만 존재하게 되죠. 이는 플라톤 철학을 비판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으려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고유하면서도 중요한 특성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현실태 도식을 베르그손은 <시론>이나 <물질과 기억>등을 통해서 비판합니다. 여기에서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를 대체하는 것으로 내세우는 것이 바로 잠재성潛在性 혹은 잠재태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현실태의 인과론을 거부하고 대신 잠재태-현실태로서의 '실재'를 이야기했던 것이죠.

" '잠재성'의 본성은 무엇인가? 이미 <시론>에서 나아가 <물질과 기억>에서 베르그송의 철학이 가능성의 범주를 거부하는 바로 그때에 잠재성이라는 생각에 그만큼의 중요성을 부여햇었다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그것은 "잠재성"이 적어도 두 가지 관점에서 "가능성"과 구별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떤 관점으로 보면 가능성은 실재의 반대이며, 실재에 대립된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보면 잠재성은 현실성에 대립된다. 우리는 이 용어법을 신중하게 취해야만 한다. 가능성은 (비록 현실성을 가질 수는 있지만) 실재성을 갖고 있지 않다. 역으로 잠재성은 현실적이지는 않지만 그러한 것(잠재성)으로서 실재성을 소유하고 있다....
왜 베르그송은 잠재성의 개념을 선호하면서 가능성의 개념을 거부하는가? 정확히 다음의 이유 때문이다. 앞서 말한 성격들 때문에 가능성은 거짓된 개념이며 거짓 문제의 원천이다. 실재는 가능성을 닮았다고 상정된다. 이 말은 이미 만들어져 있고, 미리 형성되어 있고, 그 자신보다 앞서 존재하고 그리고 연이은 제한들의 질서에 따라 실존하게 되는 실재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겐 모든 것이 주어져 있으며, 실재의 전부는 이미지 속에 가능성이라는 사이비-현실성 속에 주어져 있다. 이렇게 해서 요술이 분명해 진다. 만약 실재가 가능성을 닮았다고 얘기된다면, 실은 실재가 --- 그것의 허구적 이미지를 "역투사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것은 언제나 가능성이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 그 고유한 수단을 가지고 생겨나기를 우리가 기다렸기 때문 아닐까? 사실 가능성을 닮은 것은 실재가 아니며, 실재를 닮은 것이 바로 가능성이다. 그런데 우리는 일단 만들어진 실재로부터 가능성을 추상해냈기 때문에, 이 가능성은 실재로부터 자의적으로 추출해낸 쓸데없는 부본 같은 것인 셈이다."(베르그송주의. 질 들뢰즈. 134~137쪽. 강조는 인용자)

 이처럼 가능태는 현실태를 설명하기 위한 추상에 지나지 않는것이다라는게 베르그손과 들뢰즈의 지적입니다. 이를 대신해 잠재성(태)를 도입합니다. 잠재태는 가능태와는 달리 현실태의 추상이 아니라 실재實在와 직접적 관련이 있는 무엇입니다. "현실적이지는 않지만 실재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잠재태를 현실태와 동일한 지위로 끌어올리고 있는 셈이지요. 잠재태는 가능태처럼 현실태를 '실현'시키기 위한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태는 여기서 보다 다층적이고 유동적인 복수multiple적인 것으로서의 실재(혹은 잠재태적 실재)의 한 측면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베르그송 그리고 들뢰즈가 이러한 잠재태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은 세계의 변화가 가지는 불확정성 혹은 유동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였다고 볼수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현실태는 잠재적인 복수로서의 실재의 가능성을 인간의 현실적 경험적 감각 속으로만 축소시킨 것으로 비판받게 되는 것이죠. 들뢰즈는 특히 이런 베르그송의 잠재태와 관련된 특히 그의 이미지론과 관련된 논의를 재현representation과 관련된 미학의 비판으로 연결시킵니다. 예술의 본성은 대상을 모사 재현하는 것이 아닌 대상 자체가 이미 시뮬라크르이므로 예술은 이러한 현실속에서 또다른 시뮬라크르를 제작/창조하는 행위와 관련된다고 본 것이지요.

여기서 저는 이러한 가능태-현실태 혹은 잠재태-현실태 개념이 양자역학에서 관찰되는 '파동함수의 붕괴'와 관련된 양자의 실체와 관련된 논란과 관련이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양자의 세계에서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의 지배를 받습니다. 불확정성 원리에 의하면 양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동시에 '관측'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양자의 운동(예컨대 스핀spin)을 관측 하려고 하면 그것의 위치를 알수 없게 되고 반대로 위치를 알게 되면 운동량을 알수없게 되는 역설에 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점이 발생하는 원인을 몇몇 물리학자들은 슈뢰딩거에 의해 고안된 파동함수wave function를 이용해 "파동함수의 붕괴"라는 방법으로 설명을 시도합니다. '불확정성'이 생기게 되는 것이 우리가 특정한 양자를 관측할 때 관측하기 전에 그 양자에게 고유한 것으로 '예상'되는 파동함수가 관측 이후에는 항상 특정한 형태로 '붕괴'되어서 나타나게 되고 우리가 얻게 되는 정보는 오직 이러한 파동함수의 붕괴 이후의 양자이기 때문에 파동함수가 붕괴되기 이전의 상태는 예측불가능하게 되고 관측전 이전의 원래의 양자의 상태 즉, 여러 다양한 가능성( 아니 잠재성)으로서 존재하는 양자의 상태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수 없게 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베르그송/들뢰즈가 제시하는 잠재태/현실태의 논리가 '반복'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파동함수붕괴 이전의 즉 고정된 측정값(혹은 현실태)로서 존재하기 이전의 양자의 상태는 바로 '잠재태'를 지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현실태로서 존재하는 측정값이라는 것이 단지 다양한 양자적 운동 혹은 세계의 가능한 형태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나아가서 이러한 불확정적인 양자적 운동의 가능성은 "다중우주 해석many worlds interpretation"이라는 우주해석의 한 가설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관측하여 어떤 특정한 값을 얻었다면 그것은 무한히 많은 우주 중 하나의 우주에서 일어난 사건이고 다른 값이 얻어지는 사건은 지금도 다른 우주에서 진행되고 있다. 물론 다른 우주에도 당신과 나를 비롯한 모든 살마들이 똑같이 살고 있다....시공간은 단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능한 사건들이 나름대로 진행되고 있는 무수히 많은 시공간이 동시에 존재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은 그저 가능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우주에선가 반드시 일어나고 있으며 따라서 관측을 하더라도 파동함수는 붕괴되지 않는다"(우주의 구조. 298~299쪽. 강조는 인용자)

다시말해 이 우주론에 의하면 (양자적) 가능성은 우주 어디에선가는 현실화되었으며 그러한 우주는 우리가 살고있는 우주와 나란히 다중적으로 존해하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서의 "가능성"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가능태-현실태로서의 가능성이 아니라 베르그송이나 들뢰즈가 이야기하는 잠재태-현실태로서의 잠재성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진중권의 미네르바관련글을 인용하다가 다소 엉뚱한 길을 돌아온 셈입니다만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와 봅시다. 진중권은 온라인 상에서의 정체성은 다수일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특정 주체혹은 개체의 정체성이 가지는 복수성은 온라인 상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기보다 원래부터 그것(그것들)이 다양한 잠재태의 일부에 지나지 않음을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따라서 미네르바(들) 혹은 우리가 온라인에서 행한 "인터넷 가면무도회"는 온라인만이 가지는 고유한 특성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있는 현실 자체가 바로 원래부터 "가면 무도회"라는 것이지요. 

" 미네르바"라는 가면은 우리가 현실화시킬수있는 우리안의 잠재성의 일부일 따름입니다. 그런데 이명박과 한나라당은 이러한 잠재성을 자신들의 권력에 강화하는 과정에서의 걸림돌로 간주하였고 제거 대상으로 호명한 결과가 지금의 미네르바 구속사건인 셈이지요. 작년 들불처럼 번졌던 '촛불'이 가진 '잠재적'위험성을 제거하기 위해 그 텃밭 역할을 하는 인터넷의 "가면무도회"를 통제하기 위함이 이번 미네르바구속을 통해 저들이 노리는 효과겠지요. 그러나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미네르바라는 정체성은 복수적인 잠재적 정체성입니다. 특히 그것은 온라인이라는 가상공간속에서 무한히 복제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도 다음 아고라에는 글쓴이가 미네르바일 것으로 추정되는 글들이 계속 올라오고 있더군요.(예를들어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505982&hisBbsId=best&pageIndex=1&sortKey=agreeCount&limitDate=-30&lastLimitDate ) 이쯤되면 문제는 지금 구속된 미네르바가 정말로 "그 미네르바"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때문에 지금 공권력에 의해 억압받고 있는 미네르바 혹은 그에 동조하는 우리로 대변되는 잠재성(들)은 탄압에 의해 일시적으로  검열당 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러한 통제는 단지 일시적인 효과만 있을 뿐이지요. 우리가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또다른 잠재적 우주는 지금도 어디선가 현실태로 존재할지도 모릅니다.  단지 그것은 지금 우리의 현실태의 시간과 아직 결합하지 않았을 따름이지요. 그러나 세계는 항상 변화합니다.  잠재태는 언제든 현실태로 변화하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특정한 정치적 주체의 관념으로는 억압하거나 통제 될 수 없는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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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철학자인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오늘날의 현실은 시뮬라시옹과 같다라고 말합니다. 플라톤의 철학 개념인 시뮬라크르로부터 나온 보드리야르의 이 시뮬라시옹 개념에 의하면 오늘날의 현실은 진짜와 가까의 구분이 불가능하고 양자의 경계가 허물어진 일종의 이미지 혹은 가상만 존재할 뿐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허구인지 판별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시뮬라시옹(이는 시뮬라크르의 운동을 뜻한다.) 이라는 개념에 의하면 세상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사건들에 대해서 원본적인 진실을 판별하는 것은 어렵고 우리가 대하는 것들은 “실재의 폐허”밖에는 없다는 것이지요.

 

게다가 자본주의처럼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다시 말해 돈을 주고 매매할 수있는 대상으로 만드는 곳에서는 실체가 없는 이미지마저 상품화됩니다. 과거에 대한 추억도 상품화되며 상품이 아닌 상품의 이미지 또한 상품화됩니다. 베블렌이 일찍이 간파한 과시적 소비현상도 이러한 허상으로서의 이미지를 상품화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소비의 사회”라는 책에서 그는 이러한 시뮬라시옹으로 가득 찬 자본주의 상품시장의 백태를 고발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보드리야르의 이러한 시뮬라시옹은 일종의 환원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현실의 모든 것을 시뮬라시옹으로 환원시킵니다. 이로서 사실로서의 세계는 사라지거나 무의미해지고 오직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이미지만이 남게 되지요. 이 지점에서 시뮬라크르를 이야기하는 들뢰즈와 보드리야르는 차이점을 보입니다. 들뢰즈의 시뮬라크르 개념은 이정우씨에 의하면 “세계에서 발생하는 차이”이지만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은 단지 인간의 상상에 의해서 가공되고 만들어진 “인공적 차이”일 뿐입니다. 들뢰즈의 시뮬라크르 역시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하는 차이라는 점에서 시뮬라시옹과 유사성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계의 실재성에 기반한 개념이지요. 반면 보드리야르의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관에 환원된 이미지일 뿐입니다. 여기에서 실재는 존재하지 않고 말그대로 “폐허”가 되어버리지요.

 

이번 청와대와 노무현간의 자료유출논란을 보고 이 시뮬라시옹과 시뮬라크르의 차이가 적용될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오늘날처럼 문서나 자료라는 것이 컴퓨터 파일처럼 무한히 복제가 가능해서 무엇이 원본인지 무의미해 지는 세상은 바로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으로서의 세상을 연상케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이번 사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러한 원본이 모호해진 현실을 이용하는 것은 노무현전 대통령 측이 아니라 오히려 이명박 측이더군요. 만약 원본이 무엇인지 분명하고 그것과 사본과의 차이가 분명하다면 이런 논란은 불필요합니다. 원본의 행방이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 논란거리 자체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청와대측이 목표로하는 것은 원본의 행방 그 자체라기 보다는 지금처럼 원본과 사본의 구분이 불확실한 현실을 이용해서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비판적 여론을 환기시키려는 일종의 여론조작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처럼 임의적으로 조작가능한 시뮬라시옹적 현실을 더욱 극대화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유리함을 조장하려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그들이 노리는 것은 진실 혹은 사실이 아니라 궁극적 사실이 무엇인가라는 것을 찾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논란의 효과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원본없는 사본이나 복제품만이 아니면 그 효과를 이용한 앤디 워홀의 실크 스크린 작품같은 유사복제품의 시뮬라크르/시뮬라시옹만이 넘쳐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고 하더라도 들뢰즈가 이야기한 것과 같이 현실은 이러한 표면적인 임의성 너머에 존재하는 실재 그리고 그것의 잠재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들뢰즈가 강조하려는 시뮬라크르도 이처럼 실재성에 기반한 잠재성으로서의 개념이지 보드리야르처럼 실재가 사망한 바탕위에 끊임없는 인공적 차이만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노무현과 청와대의 이번 논란도 이처럼 원본과 사본을 구분하기 힘든 시뮬라시옹적 배경의 뒤에 누군가는 분명 진실을 이야기하는 측이 있을 것입니다. 그게 누구인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더라도 말이지요.

 

때문에 우리는 아직 이러한 가능한 진실 혹은 진리에 대한 믿음을 저버릴 수는 없게 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뮬라시옹적인 이미지의 재생산이라기보다는 어쩌면 보다 고전적이면서도 형이상학적인 가치라고 할 수 있는 실재성에 기반한 사건들과 진리를 밝혀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져 나오는 갖가지 상품들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또 그것들의 조작이 만연한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는 우리로 하여금 표면적으로 보이는 현상과 사건의 배후에 있는 진실이 무엇인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해서 우리에게 더욱 필요로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시뮬라시옹의 재생산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차이가 생겨나는 과정과 원인을 추적해 내고 그럼으로써 차이의 순환과 반복이 어떠한 구조와 시스템 속에서 이루어지는지 밝혀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니체의 영원회귀 개념이나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 그리고 들뢰즈의 초월적 경험론도 모두 이러한 작업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이 난무하는 오늘날의 현실은 고전적인 플라톤적 이데아론이나 데카르트적 이원론만으로는 극복하기 힘듭니다. 과학의 영역에서 조차도 뉴튼의 고전역학이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에 자신의 패러다임적 위치를 양보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이처럼 오늘날이 현실은 과거보다 한층 복잡해지고 진실이 무엇인지 더욱 모호해 졌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더욱 정교하고 섬세한 작업들입니다. 복잡하고 모호한 현실은 그에 걸맞는 연구를 필요로 하는 것이지 단순히 그것에 투항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런 점에서 이러한 복잡한 현실에 대한 분별력을 키우기 위한 노력들이 어느때보다도 절실히 요구됩니다. 더욱이 오늘날처럼 수구보수세력이 정계와 재계를 장악하고 자신의 허구적 이데올로기를 관철하려는 모습이 더욱 뚜렷해지는 시점에서는 말이지요. 이데올로기의 배후에는 실재로는 아무것도 없다고 지젝은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 배경에는 우리가 찾아내야만 할 어떠한 진실 혹은 실재가 있다고 봅니다. 비록 그것이 단지 잠재성으로만 머물고 가시적인 현실성으로 전화되지 못하더라도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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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게 나이먹고 결혼하고 애 낳고 살다보면 젊었을 때 이상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된다고들 합니다. 그것이 어쩔수 없는 세상의 이치라고 말이지요. 사실 이 말. 그렇게 쉽게 흘려들을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이 아무리 '생각함'을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특징으로 한다고 해도(호모싸피엔스 Homo Sapiens라는 분류학상의 명칭도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뜻이죠.) 어쩔수 없이 의식주의 해결이 없이는 생존할 수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본성이 기실은 삶의 근본적인 보수성을 형성하게 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삶의 조건들이 한 때는 열정적으로 꿈과 이상을 뒤쫒던 사람들조차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보수화되는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존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을 하는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을 누가 탓할 수 있을까요? 그들에게 "너는 왜 그렇게 너만 잘먹고 잘살라고 하냐?"라고 탓 한다면 예수가 간음한 죄로 돌에 맞아 죽을 위기에 처한 한 여인을 위해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복음 8,7)"라고 말했을 때  아무도 돌을 던지지 못했던 것처럼 어느 누가 자신있게 나서서 먼저  생존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위해 보수를 선택한 사람들에게 돌을 던질수 있을까요?

얼마전 한국의 대표적 지성인인 김우창씨도 한 기고문이서 이러한 삶의 보수성과 관련한 한 글을 발표한 적이 있었습니다.

"모든 좋은 정치는 삶의 근본적 보수성을 존중하는 정치이다. 삶의 근본은 생명의 보존이다. 물론 생명의 보존은 적절한 현실적 조건을 확보함으로써 가능해진다."(로쟈님 서재글 참조 http://blog.aladin.co.kr/mramor/2061123 )

그런데 이러한 삶의 보수성이 사회의 발전과 안정을 가능하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친 생존경쟁으로 서로서로를  내몰게 됩니다. 의식주의 해결은 이기적 욕망을 부채질하게 되고 타인과의 협동을 통해 같이 잘 살려고하기 보다는 경쟁을 통해 상대방을 도태시키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종종 생각하기도 하죠. 그리고 이런 풍토는 사회구조적으로 시스템화되어서 토마스 홉스가 <리바이어던>이라는 책에서 묘사한 것처럼 "만인이 만인에 대해 투쟁" 하게 되는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 이르게 되면 삶의 안위와 생존을 위해 동기화된 보수성이 결과적으로 자신의 삶의 안정을 뒤흔드는 역설적인 상태에 빠지게 되고 말죠. 그 때 우리에게 필요로 한 것이 바로 협동과 이타주의입니다. 흔히들 이기주의에 반대되는 이타주의나 협동심은 자신을 희생하고 공동체의 목표를 우선시하는 자기희생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협동과 이타주의도 이기적인 삶의 보수과 마찬가지로  그 생존의 필요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협동과 이타주의가 없이는  인간도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하물며 인간뿐만이 아니라 생존의 본성으로만 살아가는 동물에게서 조차도 이러한 협동의 원리가 작용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원숭이의 생태를 연구하던 동물학자들이 공동체의 협력에 방해가 되거나 도움이 되지않는 개체를 집단적으로 따돌림하거나 배제하는 현상을 연구하다가 원숭이들의 그러한 집단 행동이 결국은 그 집단전체의 생존을 위한 행위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인간의 행동과 심리를 진화론적 입장에서 설명하는 진화심리학에 의해서 이러한 협동 혹은 협력의 원리는 비교적 잘 설명이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진화 심리학에 의하면 소위 '무임승차자'는 집단에서 배제되게 되는데 그 원리를 이런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기나긴 진화의 과정을 거쳐서 서서히 집단의 크기를 키운 인간들은 포식동물이나 다른 집단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중요시하게 생각했던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배신의 위험"이라는 것입니다. 동맹이나 협력은 "네가 나를 도우면 나도 너를 돕겠다."라는 약속 혹은 믿음에 기반합니다. 이런 믿음이 공동체 내에서의 상호이타주의를 가능하게 합니다. 그런데 집단내의 모든 구성원들이 이런 상호이타주의를 실천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부의 사람들은 집단의 이타주의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만을 충족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두고 우리는 무임승차자라고 부르죠. 그래서 풍족한 생활을 하게 된 그 개인은 자손을 번성시키게 되고 그러면 "유전자 풀"내에 이러한 무임승차의 유전자가 많아지게 됩니다. 이는 대부분의 집단구성원이 무임승차자가 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결국 이러한 무임승차자가 다수인 집단은 집단에 대해 외부적 위협을 가하는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처할수 없게 됩니다. 이 집단은 결국 더이상 생존을 지속할 수가 없게 되고 해체되고 말죠. 이러한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인간은 사회생활을 통해서 무임승차자들을  배제하는 장치를 개발하게 됩니다. 미국의 정치학자인 로버트 악셀로드(Robert Axelrod)는  이에 대처하는 하나의 전략에 대해 설명한 바 있습니다. 팃포탯(tit - for- tat)이라고 부르는 이 전략에 의하면(자세한 내용은 이곳을 참조  http://en.wikipedia.org/wiki/The_Evolution_of_Cooperation)   무임승차자문제를 해결하려면 보상과 처벌이 도입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무임승차자는 처벌받고 협력자는 보상받는 원리. 한 집단에에서 이러한 팃포탯원리가 작동하게 되면 무임승차자들도 자신들이 더이상 유리할수 없음을 깨닫게 되고 그럼으로써 무임승자자문제를 해결하게 됩니다. 다만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3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1. 어떤 종의 생물들이 똑같은 종의 생물들을 반복적으로 만난다. 2. 그 생물들은 상대방을 이전에 만난 적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며, 다른 동물 종과 구별할 수 있다. 3. 이전에 만났던 상대방이 자신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기억할 수 있다. (<진화심리학>. 김영사 71쪽) 이러한 조건들은 물론 오랜 시간동안 집단과 공동체를 발전시켜온 인간에게는 당연히 적용되게 됩니다.

이처럼 진화심리학자 혹은 생물학자들은 상호이타주의와 협력의 원리를 생물학biology의 차원으로까지 끌어 올림으로써 반박하기 힘든 과학적 사실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유명한 아나키스트 운동가인 크로포트킨도 <상호부조론>이라는 책을 써서 공동체가 생존하려면 경쟁의 원리뿐만이 아니라 상호부조 즉 협동이 필연적으로 도입되어야  함을 이미 이야기한적 있긴 하지만 말이죠.

이는 결국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삶의 보수성 그리고 정치적 보수성도 공동체 내에서 한 개인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불가피한 선택이지만 자칫 이러한 삶의 조건과 무관한 유토피아적인 이상으로만 보이는 상호이타주의와 협동도 그에 못지 않게 삶의 조건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수와 진보는 어느정도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어떻게 보면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상호이타적인 이상을 추구하는 진보없이 보수도 존재할수 없고 삶의 기본적 조건을 충족함이 없이 꿈과 이상만을 추구하는 진보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노무현 정권을 통해서 진보적 정치를 실현할 것이라는 가느다란 희망을 품고 지지했던 한 정치세력이 믿음을 저버리고 보수화됨으로써 이러한 신뢰을  저버리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사회의 양극화는  심화되고 계급간 계층간의  불신은 더욱 팽배해지고 말았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등을 돌리고  정치적 무관심에 빠지거나 아니면 "나만 잘 살면 그만 아닌가"하는 각자의 삶의 보수성에 충실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이명박정권을 탄생시킨 셈이지요. 그러나 그러한 보수성이 결국은 이번 미국소수입파동처럼  자신의 생존에 위협을 줄 수도 있는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되고 말았습니다.  뭐든 지나치면 일을 그르친다고 일순간의 안위를 추구하는  지나친 보수도 문제고  또 삶의 조건을 망각하고 이상만을 추구하는 지나친 진보도 우리에겐 이롭지 못합니다. 이 양자를 슬기롭게 통합해 낼 수있는 지혜가 그 어느때 보다도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다시한번 생각해 보네요.

그럼 청계천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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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8-05-28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계셨나요? ^^ 이제 집에 돌아왔습니다. 끝까지 그곳에 남아있지 못했습니다. 딱 밀리오레서 경찰과 대치중이었는데.

qualia 2008-05-28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적인 글이네요.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면서 보수와 진보, 현실과 이상, 나 개인과 나를 둘러싼 시대 환경, 사색과 실천 따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좋은 글 정말 감사합니다.

yoonta 2008-05-28 0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네 다녀왔습니다. 일때문에 오래는 못있었구요. 롯데백화점 앞까지만 따라갔다가 들어왔네요. 2mb가 정신차릴때까지(그런 때가 올런지는 모르겠지만) 자주 출동해야 할듯하네요..^^

qualia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읽어보니 급하게 쓰느라고 글이 엉망이네요. 비문도 많고..-_-

진화 커뮤니티 2009-04-30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래서 풍족한 생활을 하게 된 그 개인은 자손을 번성시키게 되고 그러면 "유전자 풀"내에 이러한 무임승차의 유전자가 많아지게 됩니다. 이는 대부분의 집단구성원이 무임승차자가 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결국 이러한 무임승차자가 다수인 집단은 집단에 대해 외부적 위협을 가하는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처할수 없게 됩니다. 이 집단은 결국 더이상 생존을 지속할 수가 없게 되고 해체되고 말죠. >

여기서 '배신자 낙인을 기억할 수 있는 집단'에서 왜 어떻게 해당 무임승차자가 자손을 번성할 수 있게 되는지.. 대응할수 없을정도로 세력이 커지거나 집단이 와해되고 종이 소멸할때까지 유전자를 길이길이 남길수 있게되는 환경이 이해가 잘 안가요. 집단 정신이 진화한다는것을 전제로 하고있는것입니ㅣ까?

공동체를 이루는 무리 집단에서 무임승차자를 기억하고 찾아내어 그자를 배척하기 위한 일환의 '행동들이 가해진다' 즉, 배신자는 기억했다가 그의 다음 위기 상황에서 그를 도와주지 않음으로해서 그의 번식의 기회를 감소시키는 보복을 낳고,(또는 반대로 돕기도 한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종의 보전의 안정성을 높인다라고 알고있습니다. 유전자 선택이 아닌 집단선택 옹호입장이신지.. 개체의 적응도에서 사회적 요인을 생각하신 때문인지..?

보수성: 삶의 조건과 본능적 욕망충족을 위한 이기적 경쟁상태
진보성: 공동체의 발전을 위한 이상적 상호 협동관계
두 세력의 적절한 상호 보완관계가 집단의 안정성을 유지하며 오래도록 지속한다.
라고 요약되는데, 두 입장의 대립적 삶의 태도가 아니라 삶 (진화) 자체가 보수와 진보를 동시에 갖으며 발전해 나가는게 아닐지. 협력해야 유전자를 보전하기위한 나의 이기심이 채워지니까요. 이런걸 아니면 사회적인 진화라고 해야하나요?

yoonta 2009-05-04 02:12   좋아요 0 | URL
진화심리학에 대해서는 저도 입문서 약간 읽은 것 밖에 없어서 만족할만한 답변을 드리기는 힘드네요. 제가 위에서 논거로 든 팃포탯TFT 전략을 만든 해밀턴과 악셀로드는 기본적으로 유전자선택이론과 게임이론을 통해 이를 설명합니다. 그것이 도킨스와같은 유전자 선택인지 아니면 집단선택인지 혹은 다수준선택이론인지는 아직도 논쟁중이라고 봐야겠지요.때문에 문외한인 저로서는 뭐라 말씀드리기 곤란하네요. 링크시킨 위키백과를 참조하시거나 아니면 <다윈의 식탁>이라는 책을 참조하시면 도움이 될 것 같네요. 이미 읽어보신것 같긴 하지만^^

마지막 님말씀대로 두 대립적 입장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주체 내부에서 갈등하는 간극이라고 생각하는게 더 적절할듯 하네요..^^

펠릭스 2009-09-20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생적(書生的)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yoonta 2009-09-21 15:33   좋아요 0 | URL
이 양자사이의 간극이 현실에서의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겠지요.

그런 점에서 헤겔의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라는 말은 옳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