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는 <인간불평등의 기원론>이라는 저작을 통해서 인간들 사이의 불평등의 기원을 '허영'에 있다고 말한바 있습니다. 공동체를 형성하기 이전의 고립된 개인들은 모두 자유롭고 평등한 상태로 존재하지만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인간은 타자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구 혹은 욕망을 가지게 되는데 그 결과 허영vanity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 허영이 동기가 되어서 물질적 부를 추구하게 되거나 타자보다 우월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게 되면서 결국은 인간들 사이의 불평등을 야기하게 된다는 논리지요.



이러한 의미로 루저녀의 사례를 생각해 본다면 "저는 180이하의 남자는 루저라고 생각한다"라는 발언 역시 자신의 연애의 대상인 남성을 180이상과 이하로 분류함을 통해 스스로가 180이상의 멋진 남성에게만 어울리는 우월한 여성임을 은연중 과시하고 싶어하는 "허영"이라고 볼수도 있는 것 은 아닐까요? 물론 이러한 이도경씨의 발언이 대다수 여성의 욕망을 대변한다고 볼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이러한 신체적 혹은 외모적 차별이나 구별을 통해서 자신도 결국 그러한 신체적 혹은 경제적으로 우월한 남성에 어울리는 우월한 여성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강조하고 과시하고 싶어 하는 여성들은 우리들 주변에 상당수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180이하남성은 루저다와 유사한 표현을 과감하면서도 솔직하게 할수있었던 당시의 미수다의 패널들의 발언들을 보면 루저녀의그런 발언이나 생각이 단순히 이도경씨의 개인적 생각에만 국한된 우연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단순한 해프닝이나 방송사고정도로 그칠수있었던(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되는 것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그 문제의 발언은 사회적 파장이 생각보다 컸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의 발언이 나온 경로가 어디인지 진실게임이 벌어지게 되었고 급기야는 미수다제작진이 일부 교체되고 법적 소송으로까지 번지는 사태로 확대되고 말았습니다. 한국남성들은 그 발언이 드러내는 차별과 비하의 의미를 생각보다 예민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지요. 제가보기에는 루저녀의 그 표현은 물론 문제가 많은 발언이었고 표현이긴 합니다만 과거의 다른 사례에서도 보듯이 이러한 특정 개인의 표현을 두고 집단적으로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루저녀의 표현이 어떠한 것이었던지 간에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표현과 사상의 자유의 영역에 든다고 말할 수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사실 지금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는 바로 이 '자유'라는 화두입니다. 루저녀의 사례에서 본 것처럼 과연 그녀의 발언을 '표현과 사상의 자유'라는 근대적 자유의 의미로 긍정할 수있다면 이때 자유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과 민주주의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점도요.



앞서서 루소가 생각한 인간 불평등의 기원을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만 그렇다면 루소는 이러한 사회적 불평등의 해소는 무엇으로 가능하다고 보았을까요? 바로 그것이 그 유명한 '일반의지'라는 개념입니다. 일반의지는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의 의지의 단순한 총합이라기 보다는 공동체 전체가 추구하는 공적이면서도 일반적인 공공선을 추구하는 의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공공선을 위한 일반의지는 개개인의 자유보다 우위에 있으면서 그것을 통제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결국 공동체의 구성원은 개개인의 다양한 욕망을 추구하는 자유를 내세우기 전에 먼저 이 공공선의 추구로서의 일반의지가 무엇인가를 항상 점검하고 확인해야할 의무를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한에서만 개개인의 자유는 공동체 내에서 보장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루소의 일반의지 개념은 마키아벨리의 ‘공화적 자유’라는 개념과 연결되는데 즉, 시민으로서의 자유는 각각의 시민들이 공동체 혹은 공화국의 법과 질서를 준수했을 때에만 가능하게 된다는 것과 연관되게 됩니다. 이러한 일반의지 혹은 공화적 자유 개념은 법과 도덕의 강제나 간섭이 없을 때에만 가능하다고 보는 홉스적인 ‘소극적 자유’개념과 대조를 이룹니다. 홉스의 경우에서 자유는 개개인이 타인의 간섭이 없는 상태에 있는 일종의 원자적 고립상태를 가정한다고 볼수있기 때문이지요. 결국 홉스는 루소나 마키아벨리와는 다르게 공동체 이전의 개인의 자유를 절대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의 ‘만인 대 만인의 투쟁’개념이나 ‘절대국가주권론’도 결국은 개개인의 사적 자유가 무한함을 가정함으로써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개개인의 사적 자유를 공동체적인 집합적 자유보다 강조했던 예컨대 홉스나 제레미 벤담같은 자유주의자들은 결국 이러한 개개인의 무절제한 욕망과 자유를 개념적으로 수용하다보니 거꾸로 그것을 통제하기 위한 주권적 통치 혹은 통제를 강조하기에 이릅니다. 벤담의 소위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과 같은 공리주의적 시각도 외견상 개개인의 "쾌락의 추구"가 결국은 공공의 행복으로 이어질 것이다라는 낙관론이라고 생각되기 쉽지만 홉스의 절대주권론에서처럼 판옵티콘과 같은 보이지않는 교도관을 통해 수인을 통제하는 감옥을 설계했던 사례를 비춰보았을 때 그 역시 결국 자유의 무한한 추구를 허용하는 원자적 개인을 통제하기 위한 인위적이며 강압적인 제도나 도구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개개인의 사적 자유와 공동체의 공공선이나 공화적 자유를 조화시킬 수있을까요? 루소는 앞서 본것처럼 개개인의 사적자유를 일반의지에 복속시킴으로서 해소하고 마키아벨리는 공화국의 법과 질서를 통해 그것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다원화되고 공화제적인 법과 의회적 민주주의가 이미 제도화된 상황에서는 루소나 마키아벨 리가 살았던 시대처럼 공화정과 군주정이 경합하던 시기에 공화적 질서와 제도를 강조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제시된 일반의지나 공화적 자유개념만으로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다소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게 사실입니다.



다시 루저녀 사례로 돌아와 봅시다. 앞에서 저는 루저녀의 발언은 그자체로 표현의 자유로서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발언은 사회의 불평등을 용인하고 조장한다는 면에서 평등이나 공공선에 반하는 측면이 있다는 사실도 지적하였습니다. 이러한 역설을 이해하는 것, 저는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처한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샹탈 무페의 경합적 다원주의agnostic pluralism 혹은 급진 민주주의radical democracy론에 근거합니다.



무페에 의하면 오늘날 민주주의가 가능하기 위한 방법으로 우파와 좌파간의 대립이 특정 정파의 이해관계로 일방적으로 치환되거나 혹은 ‘제3의 길’과 같이 양자간의 중립과 화해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하는 입장을 거부합니다. 대신 그녀는 소위 자유민주주의가 가능하고 또 발전하기 위해서는 (루저녀의 주장과같은)우파적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보편적 인민주권을 주장하는 민주주의간의 갈등과 긴장관계를 해소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고 봅니다. (샹탈 무페에 대한 간략한 소개는 다음 기사를 참조하세요.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87575.html )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긴장이 상호 간에 전적으로 타자적으로 존재하는 두 원칙 사이의 것으로서 양자 간에 타협될 수 잇는 단순한 관계라고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만약 긴장이 그런 식으로 이해된다면 아주 단순한 이원주의가 제도화될 수잇다. 대신에 양자 간의 긴장은 비록 우연적인 계기를 통해서라도 두 원칙의 표출이 일단 나타나면 하나의 원칙의 표출이 다른 원칙의 정체성을 변화시킨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타협“의 관계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감염”의 관계를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표출과정으로부터 결과되는 집합적 정체성의 체제는 그것의 지형이 항상 각각의 내부적 구성요소에 외적인 것이 단순히 덧붙여진 것 이상으로 만들어진 복합체이다. 사회적 삶에서는 언제나 집단적 주체들의 인식과 행태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게슈탈트적”인 차원이 있다.” (<민주주의의 역설>, 샹탈 무페, 26쪽)



이처럼 그녀는 소위 중도적으로 이해된 자유민주주의나 ‘제3의 길’이 빠질 수 있는 함정 즉, 자유와 불평등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는 우파적 입장과 공동체적 평등을 주장하는 좌파 간의 (나이브한) 조화가 가능하다고 보는 중도론을 경계합니다. 이러한 중도론은 결국 민주주의의 퇴행을 야기하고 우파에게 민주주의의 성과물을 헌납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이지요. 소위 신자유주의라고 불리우는 냉전 시대 이후의 극우적 경향에 대해서 제3의 길이라는 중도노선을 표방했던 영국의 블레어정부가 어떠한 행태를 보였는지를 조금만 돌이켜 보면 그 중도적 노선이 가진 무력함이나 불모성을 알수있다는 입장입니다. 한국의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샹탈 무페는 이러한 그의 경합적 다원주의를 논증하기 위해 비트겐슈타인이나 데리다와 같은 해체적 철학을 도입합니다. 특히 데리다의 ‘구성적 타자’개념이 중요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개념에 의하면 타자는 “우리”와 통약불가능incommensurable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그러한 통약불가능성이 가진 간극과 긴장이 결국 우리와 동시에 타자를 ‘구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긴장과 역설을 야기하는 “ “그들”은 구체적 “우리”의 구성적 반대가 아니라 여하한 “우리”라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상징”이라는 것이 데리다의 구성적 타자의 개념이지요. 무페는 정치의 장에서도 이러한 화해불가능한 역설이 존재함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때문에 우리는 180이하의 남성은 루저다라는 루저녀의 표현을 표현의 자유로서 승인해야할 이유가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러한 불평등적인 우파적 표현의 자유도 다원적 민주주의라는 공간 내부에서 가능하다는 승인을 통해 우리가 이야기하고픈 180이하의 남성도 여성과 교제할 권리가 있다라는 평등주의적 민주주의을 역설적으로 대립시킬 수 있게 되고 또 그러한 이러한 발언들과 그에 대한 비판사이에 형성되는 '구성적 긴장관계'를 분명히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가지 주의해야 할것은 루저녀에 대한 반발로 "160이하의 여성도 루저다" 혹은“C컵이하의 여성은 루저다”라는 식으로 이항대립적 주장을 하면 곤란하겠지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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