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게 나이먹고 결혼하고 애 낳고 살다보면 젊었을 때 이상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된다고들 합니다. 그것이 어쩔수 없는 세상의 이치라고 말이지요. 사실 이 말. 그렇게 쉽게 흘려들을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이 아무리 '생각함'을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특징으로 한다고 해도(호모싸피엔스 Homo Sapiens라는 분류학상의 명칭도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뜻이죠.) 어쩔수 없이 의식주의 해결이 없이는 생존할 수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본성이 기실은 삶의 근본적인 보수성을 형성하게 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삶의 조건들이 한 때는 열정적으로 꿈과 이상을 뒤쫒던 사람들조차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보수화되는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존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을 하는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을 누가 탓할 수 있을까요? 그들에게 "너는 왜 그렇게 너만 잘먹고 잘살라고 하냐?"라고 탓 한다면 예수가 간음한 죄로 돌에 맞아 죽을 위기에 처한 한 여인을 위해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복음 8,7)"라고 말했을 때  아무도 돌을 던지지 못했던 것처럼 어느 누가 자신있게 나서서 먼저  생존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위해 보수를 선택한 사람들에게 돌을 던질수 있을까요?

얼마전 한국의 대표적 지성인인 김우창씨도 한 기고문이서 이러한 삶의 보수성과 관련한 한 글을 발표한 적이 있었습니다.

"모든 좋은 정치는 삶의 근본적 보수성을 존중하는 정치이다. 삶의 근본은 생명의 보존이다. 물론 생명의 보존은 적절한 현실적 조건을 확보함으로써 가능해진다."(로쟈님 서재글 참조 http://blog.aladin.co.kr/mramor/2061123 )

그런데 이러한 삶의 보수성이 사회의 발전과 안정을 가능하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친 생존경쟁으로 서로서로를  내몰게 됩니다. 의식주의 해결은 이기적 욕망을 부채질하게 되고 타인과의 협동을 통해 같이 잘 살려고하기 보다는 경쟁을 통해 상대방을 도태시키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종종 생각하기도 하죠. 그리고 이런 풍토는 사회구조적으로 시스템화되어서 토마스 홉스가 <리바이어던>이라는 책에서 묘사한 것처럼 "만인이 만인에 대해 투쟁" 하게 되는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 이르게 되면 삶의 안위와 생존을 위해 동기화된 보수성이 결과적으로 자신의 삶의 안정을 뒤흔드는 역설적인 상태에 빠지게 되고 말죠. 그 때 우리에게 필요로 한 것이 바로 협동과 이타주의입니다. 흔히들 이기주의에 반대되는 이타주의나 협동심은 자신을 희생하고 공동체의 목표를 우선시하는 자기희생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협동과 이타주의도 이기적인 삶의 보수과 마찬가지로  그 생존의 필요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협동과 이타주의가 없이는  인간도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하물며 인간뿐만이 아니라 생존의 본성으로만 살아가는 동물에게서 조차도 이러한 협동의 원리가 작용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원숭이의 생태를 연구하던 동물학자들이 공동체의 협력에 방해가 되거나 도움이 되지않는 개체를 집단적으로 따돌림하거나 배제하는 현상을 연구하다가 원숭이들의 그러한 집단 행동이 결국은 그 집단전체의 생존을 위한 행위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인간의 행동과 심리를 진화론적 입장에서 설명하는 진화심리학에 의해서 이러한 협동 혹은 협력의 원리는 비교적 잘 설명이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진화 심리학에 의하면 소위 '무임승차자'는 집단에서 배제되게 되는데 그 원리를 이런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기나긴 진화의 과정을 거쳐서 서서히 집단의 크기를 키운 인간들은 포식동물이나 다른 집단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중요시하게 생각했던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배신의 위험"이라는 것입니다. 동맹이나 협력은 "네가 나를 도우면 나도 너를 돕겠다."라는 약속 혹은 믿음에 기반합니다. 이런 믿음이 공동체 내에서의 상호이타주의를 가능하게 합니다. 그런데 집단내의 모든 구성원들이 이런 상호이타주의를 실천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부의 사람들은 집단의 이타주의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만을 충족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두고 우리는 무임승차자라고 부르죠. 그래서 풍족한 생활을 하게 된 그 개인은 자손을 번성시키게 되고 그러면 "유전자 풀"내에 이러한 무임승차의 유전자가 많아지게 됩니다. 이는 대부분의 집단구성원이 무임승차자가 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결국 이러한 무임승차자가 다수인 집단은 집단에 대해 외부적 위협을 가하는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처할수 없게 됩니다. 이 집단은 결국 더이상 생존을 지속할 수가 없게 되고 해체되고 말죠. 이러한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인간은 사회생활을 통해서 무임승차자들을  배제하는 장치를 개발하게 됩니다. 미국의 정치학자인 로버트 악셀로드(Robert Axelrod)는  이에 대처하는 하나의 전략에 대해 설명한 바 있습니다. 팃포탯(tit - for- tat)이라고 부르는 이 전략에 의하면(자세한 내용은 이곳을 참조  http://en.wikipedia.org/wiki/The_Evolution_of_Cooperation)   무임승차자문제를 해결하려면 보상과 처벌이 도입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무임승차자는 처벌받고 협력자는 보상받는 원리. 한 집단에에서 이러한 팃포탯원리가 작동하게 되면 무임승차자들도 자신들이 더이상 유리할수 없음을 깨닫게 되고 그럼으로써 무임승자자문제를 해결하게 됩니다. 다만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3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1. 어떤 종의 생물들이 똑같은 종의 생물들을 반복적으로 만난다. 2. 그 생물들은 상대방을 이전에 만난 적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며, 다른 동물 종과 구별할 수 있다. 3. 이전에 만났던 상대방이 자신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기억할 수 있다. (<진화심리학>. 김영사 71쪽) 이러한 조건들은 물론 오랜 시간동안 집단과 공동체를 발전시켜온 인간에게는 당연히 적용되게 됩니다.

이처럼 진화심리학자 혹은 생물학자들은 상호이타주의와 협력의 원리를 생물학biology의 차원으로까지 끌어 올림으로써 반박하기 힘든 과학적 사실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유명한 아나키스트 운동가인 크로포트킨도 <상호부조론>이라는 책을 써서 공동체가 생존하려면 경쟁의 원리뿐만이 아니라 상호부조 즉 협동이 필연적으로 도입되어야  함을 이미 이야기한적 있긴 하지만 말이죠.

이는 결국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삶의 보수성 그리고 정치적 보수성도 공동체 내에서 한 개인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불가피한 선택이지만 자칫 이러한 삶의 조건과 무관한 유토피아적인 이상으로만 보이는 상호이타주의와 협동도 그에 못지 않게 삶의 조건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수와 진보는 어느정도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어떻게 보면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상호이타적인 이상을 추구하는 진보없이 보수도 존재할수 없고 삶의 기본적 조건을 충족함이 없이 꿈과 이상만을 추구하는 진보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노무현 정권을 통해서 진보적 정치를 실현할 것이라는 가느다란 희망을 품고 지지했던 한 정치세력이 믿음을 저버리고 보수화됨으로써 이러한 신뢰을  저버리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사회의 양극화는  심화되고 계급간 계층간의  불신은 더욱 팽배해지고 말았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등을 돌리고  정치적 무관심에 빠지거나 아니면 "나만 잘 살면 그만 아닌가"하는 각자의 삶의 보수성에 충실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이명박정권을 탄생시킨 셈이지요. 그러나 그러한 보수성이 결국은 이번 미국소수입파동처럼  자신의 생존에 위협을 줄 수도 있는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되고 말았습니다.  뭐든 지나치면 일을 그르친다고 일순간의 안위를 추구하는  지나친 보수도 문제고  또 삶의 조건을 망각하고 이상만을 추구하는 지나친 진보도 우리에겐 이롭지 못합니다. 이 양자를 슬기롭게 통합해 낼 수있는 지혜가 그 어느때 보다도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다시한번 생각해 보네요.

그럼 청계천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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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8-05-28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계셨나요? ^^ 이제 집에 돌아왔습니다. 끝까지 그곳에 남아있지 못했습니다. 딱 밀리오레서 경찰과 대치중이었는데.

qualia 2008-05-28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적인 글이네요.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면서 보수와 진보, 현실과 이상, 나 개인과 나를 둘러싼 시대 환경, 사색과 실천 따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좋은 글 정말 감사합니다.

yoonta 2008-05-28 0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네 다녀왔습니다. 일때문에 오래는 못있었구요. 롯데백화점 앞까지만 따라갔다가 들어왔네요. 2mb가 정신차릴때까지(그런 때가 올런지는 모르겠지만) 자주 출동해야 할듯하네요..^^

qualia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읽어보니 급하게 쓰느라고 글이 엉망이네요. 비문도 많고..-_-

진화 커뮤니티 2009-04-30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래서 풍족한 생활을 하게 된 그 개인은 자손을 번성시키게 되고 그러면 "유전자 풀"내에 이러한 무임승차의 유전자가 많아지게 됩니다. 이는 대부분의 집단구성원이 무임승차자가 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결국 이러한 무임승차자가 다수인 집단은 집단에 대해 외부적 위협을 가하는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처할수 없게 됩니다. 이 집단은 결국 더이상 생존을 지속할 수가 없게 되고 해체되고 말죠. >

여기서 '배신자 낙인을 기억할 수 있는 집단'에서 왜 어떻게 해당 무임승차자가 자손을 번성할 수 있게 되는지.. 대응할수 없을정도로 세력이 커지거나 집단이 와해되고 종이 소멸할때까지 유전자를 길이길이 남길수 있게되는 환경이 이해가 잘 안가요. 집단 정신이 진화한다는것을 전제로 하고있는것입니ㅣ까?

공동체를 이루는 무리 집단에서 무임승차자를 기억하고 찾아내어 그자를 배척하기 위한 일환의 '행동들이 가해진다' 즉, 배신자는 기억했다가 그의 다음 위기 상황에서 그를 도와주지 않음으로해서 그의 번식의 기회를 감소시키는 보복을 낳고,(또는 반대로 돕기도 한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종의 보전의 안정성을 높인다라고 알고있습니다. 유전자 선택이 아닌 집단선택 옹호입장이신지.. 개체의 적응도에서 사회적 요인을 생각하신 때문인지..?

보수성: 삶의 조건과 본능적 욕망충족을 위한 이기적 경쟁상태
진보성: 공동체의 발전을 위한 이상적 상호 협동관계
두 세력의 적절한 상호 보완관계가 집단의 안정성을 유지하며 오래도록 지속한다.
라고 요약되는데, 두 입장의 대립적 삶의 태도가 아니라 삶 (진화) 자체가 보수와 진보를 동시에 갖으며 발전해 나가는게 아닐지. 협력해야 유전자를 보전하기위한 나의 이기심이 채워지니까요. 이런걸 아니면 사회적인 진화라고 해야하나요?

yoonta 2009-05-04 02:12   좋아요 0 | URL
진화심리학에 대해서는 저도 입문서 약간 읽은 것 밖에 없어서 만족할만한 답변을 드리기는 힘드네요. 제가 위에서 논거로 든 팃포탯TFT 전략을 만든 해밀턴과 악셀로드는 기본적으로 유전자선택이론과 게임이론을 통해 이를 설명합니다. 그것이 도킨스와같은 유전자 선택인지 아니면 집단선택인지 혹은 다수준선택이론인지는 아직도 논쟁중이라고 봐야겠지요.때문에 문외한인 저로서는 뭐라 말씀드리기 곤란하네요. 링크시킨 위키백과를 참조하시거나 아니면 <다윈의 식탁>이라는 책을 참조하시면 도움이 될 것 같네요. 이미 읽어보신것 같긴 하지만^^

마지막 님말씀대로 두 대립적 입장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주체 내부에서 갈등하는 간극이라고 생각하는게 더 적절할듯 하네요..^^

돈키호테 2009-09-20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생적(書生的)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yoonta 2009-09-21 15:33   좋아요 0 | URL
이 양자사이의 간극이 현실에서의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겠지요.

그런 점에서 헤겔의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라는 말은 옳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