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철학자인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오늘날의 현실은 시뮬라시옹과 같다라고 말합니다. 플라톤의 철학 개념인 시뮬라크르로부터 나온 보드리야르의 이 시뮬라시옹 개념에 의하면 오늘날의 현실은 진짜와 가까의 구분이 불가능하고 양자의 경계가 허물어진 일종의 이미지 혹은 가상만 존재할 뿐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허구인지 판별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시뮬라시옹(이는 시뮬라크르의 운동을 뜻한다.) 이라는 개념에 의하면 세상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사건들에 대해서 원본적인 진실을 판별하는 것은 어렵고 우리가 대하는 것들은 “실재의 폐허”밖에는 없다는 것이지요.
게다가 자본주의처럼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다시 말해 돈을 주고 매매할 수있는 대상으로 만드는 곳에서는 실체가 없는 이미지마저 상품화됩니다. 과거에 대한 추억도 상품화되며 상품이 아닌 상품의 이미지 또한 상품화됩니다. 베블렌이 일찍이 간파한 과시적 소비현상도 이러한 허상으로서의 이미지를 상품화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소비의 사회”라는 책에서 그는 이러한 시뮬라시옹으로 가득 찬 자본주의 상품시장의 백태를 고발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보드리야르의 이러한 시뮬라시옹은 일종의 환원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현실의 모든 것을 시뮬라시옹으로 환원시킵니다. 이로서 사실로서의 세계는 사라지거나 무의미해지고 오직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이미지만이 남게 되지요. 이 지점에서 시뮬라크르를 이야기하는 들뢰즈와 보드리야르는 차이점을 보입니다. 들뢰즈의 시뮬라크르 개념은 이정우씨에 의하면 “세계에서 발생하는 차이”이지만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은 단지 인간의 상상에 의해서 가공되고 만들어진 “인공적 차이”일 뿐입니다. 들뢰즈의 시뮬라크르 역시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하는 차이라는 점에서 시뮬라시옹과 유사성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계의 실재성에 기반한 개념이지요. 반면 보드리야르의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관에 환원된 이미지일 뿐입니다. 여기에서 실재는 존재하지 않고 말그대로 “폐허”가 되어버리지요.
이번 청와대와 노무현간의 자료유출논란을 보고 이 시뮬라시옹과 시뮬라크르의 차이가 적용될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오늘날처럼 문서나 자료라는 것이 컴퓨터 파일처럼 무한히 복제가 가능해서 무엇이 원본인지 무의미해 지는 세상은 바로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으로서의 세상을 연상케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이번 사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러한 원본이 모호해진 현실을 이용하는 것은 노무현전 대통령 측이 아니라 오히려 이명박 측이더군요. 만약 원본이 무엇인지 분명하고 그것과 사본과의 차이가 분명하다면 이런 논란은 불필요합니다. 원본의 행방이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 논란거리 자체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청와대측이 목표로하는 것은 원본의 행방 그 자체라기 보다는 지금처럼 원본과 사본의 구분이 불확실한 현실을 이용해서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비판적 여론을 환기시키려는 일종의 여론조작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처럼 임의적으로 조작가능한 시뮬라시옹적 현실을 더욱 극대화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유리함을 조장하려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그들이 노리는 것은 진실 혹은 사실이 아니라 궁극적 사실이 무엇인가라는 것을 찾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논란의 효과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원본없는 사본이나 복제품만이 아니면 그 효과를 이용한 앤디 워홀의 실크 스크린 작품같은 유사복제품의 시뮬라크르/시뮬라시옹만이 넘쳐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고 하더라도 들뢰즈가 이야기한 것과 같이 현실은 이러한 표면적인 임의성 너머에 존재하는 실재 그리고 그것의 잠재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들뢰즈가 강조하려는 시뮬라크르도 이처럼 실재성에 기반한 잠재성으로서의 개념이지 보드리야르처럼 실재가 사망한 바탕위에 끊임없는 인공적 차이만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노무현과 청와대의 이번 논란도 이처럼 원본과 사본을 구분하기 힘든 시뮬라시옹적 배경의 뒤에 누군가는 분명 진실을 이야기하는 측이 있을 것입니다. 그게 누구인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더라도 말이지요.
때문에 우리는 아직 이러한 가능한 진실 혹은 진리에 대한 믿음을 저버릴 수는 없게 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뮬라시옹적인 이미지의 재생산이라기보다는 어쩌면 보다 고전적이면서도 형이상학적인 가치라고 할 수 있는 실재성에 기반한 사건들과 진리를 밝혀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져 나오는 갖가지 상품들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또 그것들의 조작이 만연한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는 우리로 하여금 표면적으로 보이는 현상과 사건의 배후에 있는 진실이 무엇인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해서 우리에게 더욱 필요로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시뮬라시옹의 재생산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차이가 생겨나는 과정과 원인을 추적해 내고 그럼으로써 차이의 순환과 반복이 어떠한 구조와 시스템 속에서 이루어지는지 밝혀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니체의 영원회귀 개념이나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 그리고 들뢰즈의 초월적 경험론도 모두 이러한 작업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이 난무하는 오늘날의 현실은 고전적인 플라톤적 이데아론이나 데카르트적 이원론만으로는 극복하기 힘듭니다. 과학의 영역에서 조차도 뉴튼의 고전역학이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에 자신의 패러다임적 위치를 양보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이처럼 오늘날이 현실은 과거보다 한층 복잡해지고 진실이 무엇인지 더욱 모호해 졌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더욱 정교하고 섬세한 작업들입니다. 복잡하고 모호한 현실은 그에 걸맞는 연구를 필요로 하는 것이지 단순히 그것에 투항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런 점에서 이러한 복잡한 현실에 대한 분별력을 키우기 위한 노력들이 어느때보다도 절실히 요구됩니다. 더욱이 오늘날처럼 수구보수세력이 정계와 재계를 장악하고 자신의 허구적 이데올로기를 관철하려는 모습이 더욱 뚜렷해지는 시점에서는 말이지요. 이데올로기의 배후에는 실재로는 아무것도 없다고 지젝은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 배경에는 우리가 찾아내야만 할 어떠한 진실 혹은 실재가 있다고 봅니다. 비록 그것이 단지 잠재성으로만 머물고 가시적인 현실성으로 전화되지 못하더라도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