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호킹이 이 책에서 대답을 시도하려는 질문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왜 무가 아니라 무엇인가 있는가?

왜 우리가 있을까?

왜 다른 법칙들이 아니라 이 특정한 법칙들이 있을까?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 대표적으로 그는 강한 인본원리strong anthropic principle를 주장합니다. 인본원리란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가시적인 물리법칙들을 도출할 수있다"는 원리인데 지금의 우주가 지금처럼 보이는 이유를 우리가 지금 여기에 존재하기때문이라고 보는 원리입니다. 그 중에서도 강한 인본원리는 단순히 환경적 요소뿐만 아니라 물리적 법칙자체까지도 인본원리에 의해서 해석하는 관점이지요. 이에 의하면 예를들어 상대성원리나 양자역학도 인간존재가 있음으로해서 성립하는 법칙이 됩니다.

때문에 이러한 호킹의 인본주의적 관점에서는 모든 것의 절대적이며 최초의 원인으로서의 신이란 존재하지 않고 다수의 우주로 구성된 다중우주multiuniverse에서 하필이면 우리가 살고있는 이 우주에 우리가 존재하게 된 원인에 바로 인간의 선택 혹은 관찰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강한 인본원리를 주장할 수있게 하는 배경에는  파인만의 양자이론이나 M이론같은 물리학도 근거로 작용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모형의존적 실재론model dependent realism"이라고 스스로 표현한 하나의 철학적 입장이 개입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철학은 이제 죽었다"(9쪽)라고 선포하지만 이 "모형의존적 실재론"을 통해서 그는 다시 철학을 도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이야기한 "모형의존적 실재론"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과학을 할 때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모형을 만든다. 모형 의존적 실재론은 과학적 모형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일상세계를 해석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창조하는 의식적, 무의식적 정신적 모형들에도 적용된다. 우리의 감각과 생각과 추론을 통해서 창조된 우리의 세계 지각에서 관찰자 - 우리-를 떼어낼 길은 없다. 우리의 지각은 - 따라서 우리의 이론이 토대로 삼는 관찰도 - 직접적이지 않고 오히려 일종의 렌즈에 의해서, 인간 뇌의 해석구조에 의해서 형성된다." (<위대한 설계>. 스티븐 호킹. 58쪽)

 
   

 

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시말해 그의 모형의존적 실재론은 대상 그 자체에의해서라기보다는 그것을 관찰하는 "인간의 뇌"에 더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실재론?이라는 것이지요. 그는 이 모형의존적 실재론은 실재론realism과 반실재론사이의 논쟁을 을 "우회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모형이 실재에 부합하느냐는 질문은 무의미하고 , 오직 모형이 관찰에 부합하느냐는 질문만 유의미하"(57쪽)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앞서서 본 것처럼 결국 여기서 그가 말한 "관찰"은 위에서 본 것과 같은 "뇌의 해석구조"에 의지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사실 여기서 다시 이야기되어야 할 지점은 도대체 이 인간 "뇌의 해석구조"란 무엇인가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그는 이  인간 "뇌의 해석구조"란  무엇인가 (가령 인간 뇌는 컴퓨터처럼 조직되어있는 만능튜링기계universal turing machine과 같은 것인가 아닌가 하는 등의 논의) 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이론"과 "관찰"을 가능하게 하는 '뇌의 해석구조"에 의해서 "모형의존적 실재론"이 가능함을 이야기하고 있을 따름이지요. 그런데 사실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이는 엄밀하게 이야기해서 "실재론과 반실재론을 우회"한다기보다는 인간 뇌의 구조에 기반한 "관찰"을 중시하는 반실재론에 불과하게 됩니다. 플라톤적 실재론이나 수학적 실재론에 의하면  실재론은 인간의 "뇌"나 (뇌의 영향을 받는) "관찰"과는 무관하게 '실재'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있다고 보는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호킹은 모형의존적 실재론을 인간뇌의 해석구조에 등치시키는데 이를 통해서 사실  그가 강조하려는 관점은 결국 대상에 대한  "관찰"의 중요성을 말하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그가 관찰을 중요시하는 이유는 앞서서 이야기한 강한 인본원리를 주장하기 위함이고 또 그 배경이 되는 양자이론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므로 말이지요.  물리학에서는 물론 "관찰"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론"도 중요하지요.  이론과 관찰을 엄밀히 구분할 수는 없겠지만 이론적 바탕을 먼저 세운 뒤 관찰을 통해 이를 검증하는 방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런데 물리학에서 어떤 모형을 이론적으로 구축할 때 주로 사용하는 도구가 바로 수학입니다. 그렇다면 이 수학도 "인간 뇌의 해석구조"에 의존하는 것일까요?  

호킹과 같은 영국의 저명한 수학자인 로저 펜로즈는 수학을 인간의 뇌로 구성할 수있는 주관적 상관물혹은 창작물이라기보다는  수학적 연구를 진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발견의 대상이라고 봅니다. 예를들어 카오스이론에서의 만델브로집합http://navercast.naver.com/science/math/3955과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데 만델브로집합에서 발견되는 "자기유사성"은 인간에 의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수학자체의 내포적 원리에 의해서 스스로 만들어지는 현상이지요. 

    


이러한 발견은 뇌의 해석구조가 창조했다기 보다는 수학자체의 원리에 의해서 사후적으로 "관찰"될 수있을 뿐이지요. 이런 관점에서 펜로즈는 수학적 실재론을 주장하게 되는데 궁극적으로 이 수학적 실재론은 플라톤주의적 실재론과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에 의하면 수학은 인간의 주관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특수적 보편으로 존재하는 형상eidos로 보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물리학은 이러한 수학이 없이는 자신의 "이론"을 구성할수가 없습니다. 미적분 없는, 복소수 없는 고전역학이나 상대성이론 혹은 양자역학은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어떻게보면 물리학은 호킹이 이야기하듯이 모형의존적 (뇌의 해석구조 의존적)이라기 보다는 수학 의존적 실재론mathematics dependent realism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관찰"이라는 것 역시 수학적 도구 없이는 불가능한데 관찰 할 수있게 주어지는 data도 결국은 다시 수학으로 해석해야만 하는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호킹이 이처럼 모형의존적 실재론을 뇌의 해석구조와 동일시하고 이것을 다시 강한 인본원리로 연결시키면서 무신론적 결론을 도입하게 되는 이론적 배경에는 양자이론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이론에 의하면 우리는 양자의 운동으로부터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확정적으로 알수 없는데 특정한 위치나 운동량을 알려면 결국 "관찰"이 개입될 수밖에 없고 결국 이 관찰에 의해서 양자의 운동이 결정되는 듯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죠. 양자이론의 이런 불확정적이면서 확률론적인 성격을 그는 확대 해석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법칙 자체도 우리의 관찰에 의해 결정되는 강한 인본원리에 의해서 재구성된 우주일 따름이다라는 결론으로 비약하게 된 것입니니다. 

그러나 양자이론의 이런 불확정적 성격이 반드시 관찰자의 결정적 역할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해석은 이른바 "코펜하겐 해석" http://navercast.naver.com/science/physics/1293 이라고 불리우는 입장과 유사한데 양자이론에는 이런 해석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요. 이는 단지 양자이론을 해석할 수 있는 다양한 입장 중 하나일 뿐입니다. 양자이론이 가정하는 소위 파인만적 "역사합"이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러한 양자이론에 근거한 다중 우주들 가운데에 인간이 생존가능한 물리법칙과 자연환경을 가진 지금의 우주에 우연히 존재하게 된 것 뿐이라고 볼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호킹이 이야기한 것처럼 일종의 강한 인본원리에 의한 "역행적 우주해석"  을 통해 지금의 우주를 인간이 선택한 것이라고 본다기 보다는요. 

결과적으로  제 결론은 이렇습니다.  호킹이 제시한 강한 인본원리에 의한 우주해석은 양자이론이나 M이론이 제공가능한 여러가지 우주론해석 중의 하나에 불과할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 것인가는 각자의 시각과 입장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제가보기엔 호킹이 이 책에서 제시한 원리들은 도킨스가 말한 것처럼 신에 의한 "지적설계론"를 비판하는 "결정적 한방"이라기보다는오히려 허술한 그의 모형 의존적 실재론에서 확인할 수있는 것과 같이 철학의 죽음을 너무 일찍 선포한  결과 도출된 일종의  '헛스윙'에 불과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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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크리스트 2011-01-09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학자체의 내포적 원리라는 것도 인간 뇌의 해석구조와 무관할 수가 없을 것 같은데요. 그리고 정신적 모형은 틀일 뿐이지 관찰결과가 나와있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에, 만델브로가 발견의 대상이라는 얘기는 호킹의 글을 반박하기에는 핀트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유용한 리뷰 잘 읽었습니다.

yoonta 2011-01-13 01:03   좋아요 0 | URL
그 "인간뇌의 해석구조"라는게 도대체 무엇인가를 먼저 이야기해야겠죠. 인간뇌의 해석구조가 인간의 (해석적)주관성을 기초로하는 구조인가 아니면 인간뇌의 내부에 존재하는 실재의 구조인가하는 문제같은 이야기들 말입니다.

 

1. 프랑스철학자인 퀑탱 메이야수의 <유한성 이후>라는 책입니다.  

 



개인적으로 실재론에 관심이 많은 차에 바디우의 수학을 기초로한 실재론을 전개하는 이 메이야수 책을 읽고 바디우를 읽을때와 같은 일종의 계시성을 느끼게 되는군요.  메이야수는 바디우와 동일하게 수학을 사변적 실재를 논증하는 유일한 토대임을 논증합니다. 특히 그는 칸트와 칸트 이후의 철학을 인식주관과 실재 사이의 관계 속에서 세계 혹은 경험세계를 기초지으려는 상관주의철학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그 비판의 방식은 고전 형이상학이나 데카르트적인 독단적 철학의 방식이라기보다는 "선조성"(메이야수가 개발한 개념으로서 우주의 기원이나 지구의 기원처럼 상관적인식의 경험적 주체인 인간 이전의 실재 혹은 대상이 가진 과학적/수학적 성질을 의미)이 던지는 의미들을 논증해야 함을 이야기합니다. 독단주의 철학은 상관주의적 관계 이전의 실재를 신비화하고 실체화 혹은 총체화할 뿐 그것에 대해서 존재론적 설명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는 마치 인간의 유한한 경험의 한계 내부에 세계를 고정시키고 그 밖의 외부를 "유폐적 외부"로서 인식 불가능하거나 혹은 그러므로 비존재하는 무엇으로 간주하는  상관주의철학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독단주의철학과 칸트 이후의 상관주의 철학은  인간의 인식가능성 내부의 세계와 인식 외부의 실재간에 뛰어넘을수 없는 간극을 설정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이원화에 대한 비판은 종교를 과학과 분리시킨 근대이후의 서양의 세속적 합리주의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있습니다. 종교의 영역 다시말해 인간의 경험적 인식의 세계 너머에 있는 인식불가능의 범주를 다루는 영역과 세속의 영역, 즉 과학적 실험과 관측이 가능하고 경험적 인식으로 설명가능한 세계 혹은 이와 관련된 지식이나 인식간의 분리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메이야수는 이러한 분리를 극복하려 합니다. 그는 ‘절대자’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철학적 사유 자체가 헤겔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아무것도 전제하지 않는 무전제에서 시작하는데 이 무전제는 다름아닌 사유불가능의 실재와 다름 없습니다. 그러나 사유 혹은 철학적 이성은 아무것도 전제하지 않은 실재의 공간에서 시작해야만 하는데 그것이 철학의 고유한 성질을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메이야수가 생각하는 절대자는 헤겔적인 ‘총체화’되는 실재가 아닙니다. 바디우가 <존재와 사건>에서 “하나로 셈 되어지는” 대상으로 분류한 것과는 다른 탈총체화의 경로를 걷는 절대자인 것이지요.

개연적 추론이 유의미해지기 위해서는 전체를 인식가능한 확률적이고 개연적인 “하나로 셈하기” 과정이 불가피하지만 그 결과 얻어지는 세계는 일의적 세계가 아닙니다. 대상의 인식가능성은 개연적 추론이 도달하는 필연성에 의해서 획득되는 동시에 탈총체화되는 우연성이라는 성격을 동시에 가지기 때문이지요. 메이야수는 이러한 실재의 특성을 바디우가 그랬던 것처럼 칸토르(칸토어)의 집합론을 통해서 논증합니다.

그 결과 메이야수가 도달한 결론은 일종의 세계의 “우연성의 필연성”입니다. 합법칙적으로 인식 불가능한 대상(우연성으로서의 대상)을 개연적 추론이라는 필연성을 통해서 논증하기. 그러나 그로부터 얻어지는 총체성은 탈총체화된 절대자입니다. 이러한 절대자를 사유하는 철학은 앞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독단주의나 상관주의 철학이 철학 혹은 과학과 종교를 분리함으로써 야기한 종교의 신비화와 상대주의 혹은 상관주의 철학의 무비판성 그리고 과학의 도구적 합리성에 대한 비판이 될 수있는 기초가 됩니다.


2. 다음으로 흥미롭게 읽고 있는 책은 테리 이글턴의 <신을 옹호하다>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만들어진 신>이라는 저작을 써서 종교를 비판해온 도킨스와 <신은 위대하지 않다> 혹은 테레사수녀를 비판한 <자비를 팔다>라는 책을 썼던 히친스를 “디치킨스”라는 합성어를 사용해서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는 도킨스의 종교비판을 종교와 과학처럼 근본적으로 상이한 대상을 혼동한 일종의 “범주의 오류”에 빠진 책이라고 비난합니다.

“세상 곧 우주가 필연적인 게 아니기에 우리는 세상을 지배하는 규칙을 선험적인 원칙으로부터 추론해낼 수 없다. 그 대신, 세상이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정확히 관찰해야 한다. 그것이 과학의 역할이다.” (<신을 옹호하다>.테리 이글턴. 20쪽)      

부연하자면 이글턴은 (기독교의) 신은 세상을 과학이 추론할 수있는 합리적인 필연이나 세속적인 필요나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성경에 의하자면 신은 “동기 없는 행위, 무상의 행위”라는 “아찔한 우연성”을 통해서 세계를 창조하였을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도킨스와 같은 무신론적 과학자의 시각을 통해본 종교는 합목적적이고 합리적인 필연성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에 다만 기각되어야만 하는 신념체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디치킨스류의 비판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앞서도 이야기했다시피 이는 종교와 과학의 근본적 차이를 망각한 비판일 뿐이므로 아무리 과학이라는 현미경을 통해서 종교를 들여다 보려고 해도 종교가 가진 근본적 토대를 비판할 수는 없다는 것이 이글턴의 논점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러한 이글턴의 관점은 앞서서 제가 소개한 메이야수의 철학에서 보자면 데카르트적 독단주의나 혹은 상관주의적 철학의 입장을 반복하는것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종교와 과학간에 넘을 수없는 차이를 설정하고 후자의 논증의 방식으로 전자를 비판하면 안된다고 하는 방식이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저로서는 이러한 이글턴의 포지션은 도킨스류의 종교비판에 대한 탁월한 반비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바디우나 메이야수처럼 철학과 수학 혹은 과학의 가능성과 공통된 지반이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획득되는 존재론적 토대를 확인하는 방식만이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대한 올바른 비판이 될 수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몇가지 참조해야 될 구절들이 있습니다. 특히 최근에 미국과 한국등에서 문제가 되는 기독교근본주의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글턴은 맑스가 종교는 “영혼없는 상황의 영혼”이라고 했을때 전제했던 종교가 세속적 “실리만을 추구하는 물질주의자들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종교, 즉 영적인 것을 현실에서 분리하여 감상적으로만 이해하는 유형의 종교”(같은 책 59쪽)였음을 이야기합니다. 세속적인 실리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종교를 통해서 영혼의 위안이나 안식을 구하려는 역설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요. 최근의 뉴에이지 스타일의 종교가 유행인 것도 (혹은 서양에서의 불교유행도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이러한 종류의 것으로 생각가능하지요. 
 

반면 이슬람 근본주의나 기독교근본주의는 “단순히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처를 찾는” 방식이 아니라 대중적 운동이나 테러와 같은 저항을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기본적으로 “반정치적”이라는 것이 이글턴의 분석입니다. 이와같은 종교를 통한 반정치가 가능한 배경에 그는 문화주의culturalism의 과잉을 지적합니다. 문화가 지나치게 비대해진 이유는 “기존정치에 대한 환멸의 산물”을 예로 듭니다. “요컨대 기독교 근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이슬람 급진주의도 정치를 종교로 대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정치는 우리를 해방시키지 못했지만 종교라면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라는 것이지요. 궁핍한 경제적 조건에 내몰려 정치적 무관심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는 대중들이 흔히 이러한 근본주의적인 종교적 맹신에 빠지게 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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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크리스트 2010-08-20 0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메이야수의 책은 언제 한번 읽어보고 싶던 책이라 뭐 읽어봐야 더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겠지만,
"이는 마치 인간의 유한한 경험의 한계 내부에 세계를 고정시키고 그 밖의 외부를 "유폐적 외부"로서 인식 불가능하거나 혹은 그러므로 비존재하는 무엇으로 간주하는 상관주의철학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독단주의철학과 칸트 이후의 상관주의 철학은 인간의 인식가능성 내부의 세계와 인식 외부의 실재(이거 오타 맞죠? 인식외부의 '실재'라니...)간에 뛰어넘을수 없는 간극을 설정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게 됩니다"
칸트의 철학이 순수이성의 사용의 한계를 설정하였던 것이 물론 그 의도가 '절대자'를 인식불가능한 외부로 대피시켜드린 것일 수는 있어도, 그게 간극을 설정했다고 보는 것은 억지스럽습니다. 칸트 자신이 서문에서인가 말했듯이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는 일이 없도록 이성 사용의 한계를 긋고자 한 시도이니까요.
제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메이아수는 우연성이야 말로 절대자이다라는 식의 해석 같은데, 우연성의 필연성이든 그냥 우연성이든 그건 절대자의 의미를 그냥 해체하는, 뭐 굳이 절대자라는 말을 쓸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네요. 비유하자면 칸트는 신을 안보이는 곳으로 피신시켰다면, 메이아수는 신을 죽여놓고는 신자들을 데려와서는 '아무거나' 붙잡고서 이게 당신들의 신이지 않소? 우리는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소 라고 말하는 꼴 같네요.

yoonta 2010-08-20 14:43   좋아요 0 | URL
1."인식외부의 실재"라는 표현은 메이야수의 '선조성'개념에 따른다고 보심 되겠습니다.

2. 메이야수에 따르면 칸트의 비판철학은 "약한 상관주의"에 해당합니다. 때문에 이 또한 메이야수의 관점에 따르면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저의 글에서는 이부분은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으니 자세한 설명은 책을 직접보시는게 좋을거 같아요. 저의 이해가 메이야수의 이야기를 자칫 왜곡할 수도 있으니까요.

3. 절대자란 표현을 고수하는 것은 '실재'에 대한 그의 실재론적 포지션 때문이겠지요. 메이야수가 절대자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역시 책을 보시는게 좋을듯 합니다.
 

두가지 칼럼을 읽었습니다.

하나는 장정일씨의 <장정일의 책 속의 이슈: 주체의 해석학>
이란 칼럼입니다. 미셸 푸코의 후기 저작인 <주체의 해석학>을 다룬 칼럼이지요.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26336.html


이 컬럼에서 그는 푸코가 고대 그리스에서는 근대적 주체인 데카르트적 주체,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 의해서 성립되는 '자기인식'의 주체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배려'로서의 주체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서 '자기배려'란  말그대로 자신에게 몰두하는 행위들 예컨대 "연애,우정, 가정경제,건강법에서부터 용기있게 말하기, 스승의 말 경청하기, 분노와 슬픔 다스리기,타인의 시선과 사소한 호기심에서 벗어나야 할 이유 등등"과 같은 구체적 삶의 기술이나 지혜를 통해서 점진적으로 자기 자신을 수련하고 변화시켜 나가는 "자기수양과정"을 의미합니다.

이를 실천과 인식간의 이분법으로 생각해 보자면 자기배려는 전자에 자기인식은 후자에 해당할 수 있겠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 자기인식(인식)이 자기배려(실천)에 종속되는 덕목으로 존재했었는데 기독교신학이 득세하면서 육체보다는 정신을 중요시하는 풍토에 의해 이러한 "자기배려"와 같은 덕(의 중요성)은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거나 망각되어져 왔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그리스 문화를 신학적으로 전유하면서 육체보다는 정신을 우선하고, 주체의 자기배려를 신에 대한 헌신에 맞서는 일로 죄악시"하게 되었다는 관점이지요. 이러한 푸코의 기독교해석은 니체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결과적으로 푸코나 니체에게서 기독교적인 신(종교)의 죽음이나  그것의 극복이야말로 진정한 "자기배려"의 과정이었던
셈이지요.

그런데 또 하나의 해석이 있습니다. 로쟈님의 블로그에서 읽은 중대대학원신문에 실린 지젝관련 칼럼입니다.
 

http://blog.aladin.co.kr/mramor/3836735


이 컬럼은 지젝의 기독교해석을 다룹니다. 그는 지젝을 현대의 냉소적인 자유주의적 세계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서 기독교와 같은 보편종교가 가진 전복적 힘을 도입할 것을 주장합니다.

오늘날 후기자본주의세계는 지젝에 의하면 하나의 도착perversion의 일종입니다. 가령 현대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타자 즉, 자신에게 법적 위계적 질서를 강요하는 타자의 명령을 거부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냉소도 여기에 해당하지요. 사람들은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는 문제가 많은 질서임을 알고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에 일정한 거리두기를 합니다. 그것이 "냉소"입니다. 더이상 자본주의는 오늘날 현대인에게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을 하고"있지요.

"냉소적 이성은 더 이상 순진하지 않다. 그것은 계몽된 허의의식의 역설이다. 우리는 그것이 거짓임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이데올로기적인 보편성 뒤에 숨겨져 있는 어떤 특정 이익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포기하진 않는다."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62쪽)



지젝이 보기엔 서구식 자유주의나 "사민주의"도 이러한 냉소주의의 함정에 빠진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본주의라는 보편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지만(자기인식) 그것과 실천적으로 단절하려는 삶의 기술(자기배려)를 연마하려는 노력은 부재합니다. 근대적인 계몽과 이성에 의해서 도달한 냉소적 현실 인식은 단지  자기인식이나 앎에만 머물고 있을 따름이고 그것을 실천적으로 공구하려는 삶의 노력은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냉소주의가 만들어낸 일종의 "쾌락"은  결과적으로 "향락Jouissence이었기에 가능한 이데올로기입니다. 향락 즉, "즐겨라"라는 초자아의 명령은 역설적으로 스스로부터의 금기를 만들어 냅니다.  그것들이 예컨대 "웰빙강박, 카페인없는 커피, 다이어트와 채식"과 같은 것들이지요. 보다 잘 즐기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지켜야 할 금기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모든 것을 즐기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라도 "쾌락의 과잉"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므로 말이지요. 

이처럼  냉소주의에 의해 균열된 인식과 실천의 간극이 불러오는 효과는 "인위적으로 법을 세우려는 시도"가 되고 사도-마조히즘적 "도착"이 될수밖에 없습니다.  기성의 제도 기독교도 일종의 도착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미국의 공화당으로 대표되는 기독교근본주의자들이 민주주의의 사도임을 자처하면서 별인 일이 이라크전쟁이라는 사실은 이러한 도착이 얼마나 폭력적 일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역사적으로보면 중동과 유럽지역에서의 종교갈등의 역사자체도 이러한 도착의 역사라고 할만 합니다. 도착은 스스로가(혹은 신이) 세운 원칙(혹은 쾌락)만이 맞고 다른 신(혹은 타인의 쾌락)은 틀렸다라는 배타성 혹은 이기주의에 다름아니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변형된 사도-마조히즘이라고 할까요? 

이러한 도착에 대한 해법으로 지젝은 "죽은 신"을 이야기합니다. 이는 지젝에 의하면 제도기독교가 은폐해 온 기독교내부의 숨은 전통이라고 할수있습니다.  욥에서 그리스도로, 다시말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계시"가 기독교 내부에는 존재하는데 바로 여기에 현대인의 도착적 곤궁을 벋어날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구약의 백미라고 할만한 욥기의 주인공인 욥은 평생동안 계속된 고초를 겪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고난과 비극을 그자체로 긍정하고 무화시킴으로써 삶의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
 그 값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 사는 땅에서 찾을 수 없구나
 깊은 물이 이르기를 내 속에 있지 아니하다 하며 바다가 이르기를 나와 함께 있지 아니하다 하느니라
 정금으로도 바꿀 수 없고 은을 달아도 그 값을 당치 못하리니
 오빌의 금이나 귀한 수마노나 남보석으로도 그 값을 당치 못하겠고
 황금이나 유리라도 비교할 수없고 정금 장식으로도 바꿀 수 없으며 
 산호나 수정으로도 말할 수 없나니 지혜의 값은 홍보석보다 귀하구나
 구스의 황옥으로도 비교할 수 없고 순금으로도 그 값을 측량하지 못하리니
 그런즉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
 모든 생물의 눈에 숨겨졌고 공중의 새에게 가리워졌으며
 멸망과 사망도 이르기를 우리가 귀로 그 소문은 들었다 하느니라
 하나님이 그 길을 깨달으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
 이는 그가 땅 끝까지 감찰하시며 온 천하를 두루 보시며
 바람의 경중을 정하시며 물을 되어 그 분량을 정하시며
 비를 위하여 명령하시고 우레의 번개를 위하여 길을 정하셨음이라
 그때에 지혜를 보시고 선포하시며 굳게 세우시며 궁구하셨고
 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 하셨느니라"
(욥기 28장 12절~28절)

 고난과 고통은 (신의) 지혜를 깨닫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는 긍정을 통해서 욥은 결과적으로 "신의 자기분열"을 야기하게 됩니다. 신의 무능(현실의 고통과 고난)을 신의 전능(삶의 지혜와 깨달음)함으로 전유하기. 유대교의 역사는 사실 이러한 신의 무능함과 전능함의 "시차적 간극"사이에서 지속되어진 역사였던 셈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유대교의 신은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면서 그 신이 "죽은 신"이었음을 당당히 선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아버지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마가복음 15장 34절)라고. 그 자신이 인간이면서 신이었던 예수에 의해서 전능한 신의 무력함이 드러난 순간이지요. 이로서 기독교적 신은 그리스도에 의해 자기분열을 완성합니다. 그 결과 전능함으로써 존재하는 초월적 신은 "죽은 신"이 되고 남은 것은 이러한 고난과 고초를 무의미으로 환원함으로써 삶의 지혜를 완성하는 "자기배려"의 기술이 남게 됩니다. 

"다 이루었다"(마태복음 19장 28절)

이 순간이야말로 고난과 고통으로의 그리스도적 희생의 삶이 스스로의 의지와 계획에 의해서 비롯된  자기승리의 과정이었음을 선언하는 순간입니다. 유대교의 욥과 기독교의 그리스도는 이처럼 "죽은 신"을 통해서 다시 부활하는 "부정의 부정"으로서의 자기긍정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지젝은 이러한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이야 말로 현대의 도착적 현실과 이데올로기를 극복할 수있는 계기라고 말합니다. "큰 타자의 상징적 허구에 매달리"거나 이데올로기적 도착에 빠지기보다는 현실의 고통과 고난(실재)와 직접 대면하는 용기, 주체의 냉소와 자기분열(자기배려와 인식간의 분열)을 극복 하는 전복적 실천을 강조하였던 것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기독교가 말하려던 (전복적) 핵심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실천이야말로  대타자의 상징적 질서를 극복하기 위한 진정한 자기분열의 완성이라는 점을 지젝은 "죽은 신"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P.S.   그런데 지젝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이라는 책에서는 푸코와 라캉의 유사성보다는 하버마스와의 유사성에 더 주목합니다. 

"이러한 푸코의 주체개념이 얼마나 엘리트적,휴머니즘적 전통에 부합하고 있는지를 간파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것을 가장 그럴싸하게 실현한 것은 내적인 열정들을 통제하고 자신의 삶 자체를 일종의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르네상스의 '전인주의적' 이상이 될 것이다. 푸코의 주체개념은 오히려 고전적인 것이다. 적대적인 힘을 조화시키는 자기-매개의 힘으로서의 주체, 자기 이미지를 복구함으로써 '쾌락의 사용'을 통제하는 방편으로서의 주체, 결국 하버마스와 푸코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20~21쪽) 

그는 푸코의 "자기배려"를 단지 "적대적인 힘을 조화시키는 주체"로, 욕망을 통제하고 조절하는 하버마스적인 합리적이고 계몽적인 이성으로서의 주체로 바라봅니다. 이것은 다분히 푸코의 "자기배려"라는 개념이 가지는 실천과 인식간의 자기분열적 간극을 배제하는 관점인 것으로 보입니다. "자기배려"라는 개념이 내적으로 가지는 모순과 갈등들을 단지 계몽적 이성 혹은 냉소적 이성으로서의 '인식'주체로만 보려고 한 혐의가 있어 보이는 대목인것 같습니다.  

 그러나 위에서처럼 "자기배려"라는 개념을 실천과 인식간의 분열과 간극을 내포하는 (헤겔적)자기분열의 과정으로 본다면  이것은 완전히 푸코에 대한 오독으로 볼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푸코의 "자기배려"개념은 하버마스적인 합리적 이성으로서의주체보다는 라캉의 정신분석이 야기하는 본질주의에 더 가까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재와 대면함으로써만 얻어지는 라캉적인 실재의 윤리라는 것이 기실은 푸코의 "자기배려"와 같은 것이 아닐까라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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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크리스트 2010-08-20 0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Is-ought problem(http://en.wikipedia.org/wiki/Is%E2%80%93ought_problem)이 떠오르네요. 인식과 실천의 간극이 바로 이 문제일 것입니다.
최근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었는데, 덕 또는 탁월함이나 훌륭함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데, 그게 위에 푸코가 고대 그리스에서 봤다는 '자기배려'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거기서 느낀 건 그러한 자기배려라 일컫어지는 것은 흔히 말해지는 좋은 것들을 추구하는 것인데, 사실 그건 자기에게 좋다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혹은 그리스 도시국가인 폴리스에게) 좋은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배려'는 육체에 대한 배려라고 보기는 힘들 것입니다. 오히려 니체가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등에서 말한 약자의 도덕에 가깝다고 봐야겠지요. 니체는 주로 고귀함, 강함 등의 강자의 도덕에 더 신경을 썼으니까요.
지젝의 냉소적 이성에 대한 비판은 정당해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이것
"그들은 자본주의라는 보편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지만(자기인식) 그것과 실천적으로 단절하려는 삶의 기술(자기배려)를 연마하려는 노력은 부재합니다"
은 자본주의가 거짓이면 무엇인가(자기배려)를 해야 한다는 것인데, 제 생각엔 냉소적 이성이 자본주의를 거짓으로 판단할 것 같지도 않을 뿐더러, 그것의 참,거짓 여부가 어떤 것을 해야함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무엇을 해야 함은 "어떠어떠하게 해야 하는 것이 옳은 (또는 좋은) 일이다"라는 생각이 미리 있을 경우에 도출될 것이고, 그것은 각자가 가진 도덕가치에 따라 달라질 것이고, 냉소적 이성은 "자기배려"라던지 어떤 특정한 도덕가치를 서로 공유하지 않을 것이고 (아니 오히려 그런 가치가 없다는 표현이 더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냉소적 이성이 노력하지 않고 태만하다는 지젝의 지적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또 무슨 냉소적 이성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서의 욥 처럼 현실을 고통과 고난속에서 인식한다고 생각되지도 않네요.
한마디로 냉소적 이성은 자기분열을 인식하지도 고민하지도 않습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그건 아직 덜 식은 탓이겠지요? ^^;
끝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푸코가 말한 '자기배려'로 생각되는 탁월함 또는 훌륭함에 대해서 얘기를 하지만 마지막에 그중 가장 탁월한 것은 철학함이다라고 말하면서, 굳이 말하자면 '자기인식'이 으뜸가는 탁월함이다라고 끝을 마치지요.

yoonta 2010-08-20 15:03   좋아요 0 | URL
'냉소적' 이성이라는 말 자체가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은 안다"에서 시작하는 것이니 "자본주의는 거짓"이거나 무언가 나쁜 점이 있다라는 것은 아는 인식상태라고 해야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냉소적"일수가 없으니까요. 뭔가 알아야 냉소적이라도 할수있으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그냥 무지의 상태일 뿐이겠지요.

이처럼 알고도 행하지 않는 상태를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라는 책에서부터 지속적으로 비판해 옵니다. 이러한 냉소적 이성은 결국 이데올로기의 환상성을 통해 대리만족을 구하게 되므로 말아지요. 지젝의 문제점은 냉소적 이성이라는 개념자체에 있다기보다는 본문에서 제가 지적한 것처럼 푸코의 자기배려 개념을 하버마스의 아류쯤으로 보았다는데 있는거 같다는 이야기였어요.

님 댓글을 보니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다시 읽고 픈 충동이 생기는군요. 허접한 블로그에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티크리스트 2010-08-23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자본주의가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거를 아는 것이 자본주의에 대한 냉소를 유발했다는 얘기인데, 제 얘기는 그런 인식으로부터는 아무런 "해야 한다"라는 실천이 나올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려면 자본주의보다 더 나은 대안도 가지고 있어야 하겠지만, 설령 그런 대안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천해야 하는 지는 의문입니다. 어떤 인식도 실천을 도출해 내지는 않으며, 오히려 인식과 실천의 간극이라고 할 게 아니라, 인식으로부터 실천을 도출하는 오류라고 부르는게 적절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저는 지젝이 현대의 냉철한 이성을 냉소적 이성으로 오해했다고 생각됩니다. 냉철한 이성은 인식에서 실천을 도출할 만큼 어리석지도, 이로 인해 고민하지도 않으며, 이걸로 도착해 빠지거나, 죽은 신의 도움으로 자기긍정을 이뤄낼 필요도 없습니다.

지젝의 푸코에 대한 평가는 라캉의 실재와의 대면이란 개념도 낯설고 "자기배려"에 대한 제 생각이 부정적이라서 별로 할 말은 없네요.

yoonta님은 지젝과 푸코 등의 생각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지고 계신지가 더 궁금하네요. 어차피 우리는 지젝도 푸코도 아니니까요. ^^;

답변 반갑습니다.

yoonta 2010-08-24 18:06   좋아요 0 | URL
(과학적)지식과 가치판단의 분리는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데카르트이후의 근대과학의 성립과도 긴밀한 연관이 있습니다. 이전에는 지식과 가치판단 혹은 신념이나 신비적 요소등이 변별되지 않고 결합되어있었다면 근대과학이 발전한 이후에는 이러한 지식에 베버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일종의 탈주술화 혹은 탈신비화가 이루어지지요. 예를들어 연금술과 같은 비의적 지식에서 근대화학이나 약학으로 변화한 것처럼 말이지요.

위에서 제가 이야기한 자기배려나 실천과의 연관이라고 하는 부분은 따라서 이러한 형태의 지식과 (신념에 따른) 행위/실천간의 근대적 분리이전의 상태를 말하려는 것이겠지요. 푸코가 복원하려고 한 '주체성'도 바로 이러한 자기배려의 정신이 아닐까라는 이야기가 그래서 가능한 것이라고 봅니다.

지젝은 최근 그의 책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라는 책에서 "어떤 행위의 확실성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신념의 문제다. 참된 행위는 그에 관해 완벽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어떤 투명한 상황 속의 전략적 개입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참된 행위가 지식의 틈새를 메우는 것이다"(298쪽)라고 말한 바있습니다. 소위 "냉철한 이성" 혹은 "냉소적 이성"만으로는 투명하고 완전한 지식을 획득할 수 없고 따라서 이러한 지식내부의 간극과 틈을 메울 방법으로의 "신념"과 실천을 강조하는 대목이라고 할수있겠습니다. 저는 이런 입장에 전반적으로 동의하는데요. 왜냐하면 지식의 확실성이란 투명한 객관성으로 주어진다라기보다는 신념과 실천이라고 하는 일종의 도약이 결합되었을때에만 가능한 개연성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지젝이나 푸코에 대해서는 저도 아직 공부하는 입장이라 뭐라 분명하게 말씀드릴수는 없겠네요. 이들에 대한 저의 이해 혹은 거리두기는 앞으로 올리게 될 게시글을 통해서 조금씩 보여드릴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안티크리스트 2010-08-25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신념과 실천이라고 하는 일종의 도약이 결합되었을때에만 가능한 개연성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네. 저걸 뒤집어 말해보면 지식 그 자체로는 어떤 것도 도출되지 않는다는 거죠.
그리고 오히려 신념이 있다면 실천을 하는 데 있어서 지식은 문제되지 않죠. 광신도들이 그 예라고 볼 수 있죠. 그리고 심하게 말하자면 지젝이 언급한 '참된 행위'란 것도 광신도의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지식으로부터는 아무것도 도출되지 않으니, 결국 그들도 신념에 따라 그걸 '참된 행위'라고 생각할 뿐이니까요.

무엇이 그것을 '참된 행위'라 생각하게 했는지, 그러한 신념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는 살펴볼 문제입니다. 무엇을 '선' 또는 '좋은 것'으로 여기는지는 윤리적 문제겠지요. 그리고 대개는 거기에는 어떤 목적(예: 공공의 이익)이나 가치판단(예: 이타적 행위는 좋은 것이다)이 들어가겠고, 이는 어떤 것도 지식은 아닙니다. 뭐 예외적으로 칸트 같은 경우는 실천이성비판에서 도덕법칙이 순수이성의 요청이라고 했지만요.

앞으로의 게시물도 기대하겠습니다. ^^;

yoonta 2010-08-26 02:21   좋아요 0 | URL
지젝이 이야기하는 "참된 행위"는 맹목에 기반된다라기보다는 합리적 이성에 기반한다라고 봐야합니다. 라캉식으로 이야기하자면 그의 실재계는 상징계의 외부에 존재한다기보다는 상징계의 내부(의 틈새)에 있는 것이므로 말이지요.

수학의 예를 들자면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수학의 무모순성을 증명하려는 형식주의를 극단으로 밀어붙인 끝에 도출된 수학의 한계지점이었던 사실을 들수있겠네요.


참된 행위는 이처럼 합리적 이성의 지속적 추구의 한계지점에서 획득되는 헤겔의 절대정신 혹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라캉의 (상징계 내부의)실재계같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님이 예로드신 칸트의 경우(도덕법칙은 순수이성의 요청)도 마찬가지라고 할수있겠네요.

안티크리스트 2010-08-29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합리적 이성에 기반한 행위란 엄밀히 말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행위도 이성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죠. 행위는 항상 어떤 믿음에 기반합니다. 합리적 이성의 한계지점에서도 어떠한 행위도 도출되지 않습니다. 행위는 항상 선택에 문제고, 어떤 행위도 합리적 이성의 비호를 받을 자격을 갖추지 않습니다.

칸트는 인간이 감정에 의해서만 의지가 따라가는게 아니라, 이성의 의해서도 의지가 정해질 수 있어야 하므로, 감정에 기반하지 않은 이성에 기반한 도덕법칙을 제안했지만, 이성으로부터 특정한 도덕법칙 혹은 어떠한 참된행위가 나와야 될 어떤 제한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성은 자신이 설정한 어떤 행위도 참된 행위라 말할 수 있으며, 자신의 행위를 긍정하고 정당화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참된 행위'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yoonta님이 합리적 이성에 기반해서 어떠한 행위가 "참된 행위"가 되는지 한번 도출하는 예시를 보고싶네요. 지젝이 했던 예라도 상관없구요.
다만 여기서 합리적 이성이 대중의 윤리감정이나 상식에 기반하면 곤란하겠네요.

yoonta 2010-08-29 02:21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내용과 관련해서는 저의 이 페이퍼
http://blog.aladin.co.kr/yoonta/category/16878918?CommunityType=MyPaper&page=4

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글 내용에서 원주율에서 9가 100번 연속으로 나오는 부분이 존재하는가하는 부분을 승인하는가아닌가 하는문제가 바로 참된 행위가 칸트적 의미에서의 "선험적 종합판단'인가와 연관된다라고 보는데요. 이는 실재론적 입장에 섰을때의 포지션의 연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라캉이 이야기하는 고유명사의 의미나 (공백으로서의)주체의 의미도 결국 이와 같다라고 봅니다. "생각할수 없는 것을 생각"하기. 이게 바로 지젝이 이야기 하고픈 "참된 행위"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안티크리스트 2010-08-29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원주율에서 9의 연속을 확정할 수 없다는 것이 왜 참된 행위가 칸트적의미의 '선험적 종합판단'인가 아닌가와 연관되는지 이해가 안되네요. 원주율은 계산된 값이고, 십진법은 임의적이기 때문에 9는 100번이 아니라 무한대에 가깝게도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그냥 반대로 원주율을 2진법으로 바꾸면 1이 연속으로 나오는 정도를 쉽게 관찰할 수 있겠죠. 진법을 늘리면 관찰 빈도가 줄어들 뿐이겠죠. 그리고 칸트가 참된 행위가 '선험적 종합판단'으로 도출된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을 순수이성비판의 밑에서 논했을 텐데, 칸트는 도덕법칙이 순수이성의 요청이라면서 이를 선험적 종합판단의 결과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생각할 수 없는 것 생각"하기가 참된 행위인가요? 생각을 행위의 일종으로 보는 거라면, 지금까지 얘기했던 인식과 실천의 간극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인식(생각)이 곧 실천인데 무슨 간극이 존재한다는 것인지요?
아니면 "생각할 수 없는 것 생각"을 한 결과 어떤 "참된 행위"를 해야 겠다는 것이 도출된다는 것인지? 그렇다면 그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생각이란게 어떻게 도출되는지 하며, 또 그걸 왜 행동에 옮겨야 한다는 게 도출되는지 궁금하네요.

라캉의 고유명사의 의미와 주체의 의미도 그게 하나의 해석이 아닌 합리적 이성의 필연적인 인식인지와, 또 그러부터 어떠한 실천이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지요?

yoonta 2010-08-29 19:40   좋아요 0 | URL
원주율은 계산된 값이 아니라 계산된 것으로 추정된 값이죠. 무리수처럼 원주율은 소수점이하가 무한히 계속되기 때문에 정확히 그 수를 알수없는 값입니다. 그런데 이 '알수없는 것'을 '아는 것'으로 가정하기로 '약속'한 것이 원주율이라는 점입니다. 십진법이냐 2진법이냐는 이야기는 제가 하고픈 이야기와는 상관없는 내용이고요. 핵심은 원주율의 '실재성'을 어떻게 보느냐에 있다는 것입니다.

순수이성비판을 기초로 한 칸트 윤리학을 정초하기의 핵심에는 저는 이 칸트의 선험적종합판단에 기초한 <순수이성비판>이 있다고 보는 것인데요. 이러한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간의 연관성은 가라타니고진의 <트랜스크리틱>에서 잘 설명하고 있는것으로 봅니다. 자세한 설명는 고진의 책을 참조하시는게 낫겠네요. 한가지 예를 들면 고진에 의하면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은 <순수이성비판>에서의 "초월"이라는 관점과 같습니다. 선험적 종합판단이 가능한 배경에도 초월이 있었던 것처럼 도덕이나 윤리가 가능한 것도 초월이라는 (형이상학적)괄호넣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보는 방식이지요. (트랜스크리틱 199~200쪽을 참조하세요)

제가 '실천'이나 '행위'를 이야기했을 때 이것을 '이론'이나 '법칙' 혹은 '이성'과는 다른 무엇이라고 본다면 그 다른 것으로 '신념'이나 혹은 '윤리'를 전제로한 행위라고 생각한 것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순수하게 이론에만 기반한 "이론적 실천"이라는 것도 '이론상' 가능하겠지만 행위나 실천의 특성이라는 것에는 어쩔수없이 '우연성'이 개입하기 마련이지요. 때문에 말하자면 "참된 행위"란 이러한 우연성을 긍정하면서도 동시에 이러한 우연성의 (사후적)필연성을 행위의 근거로 삼는 방식이라고 해야할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라캉의 고유명사나 기표의 의미를 생각해 볼수있다는 것인데요. 새로운 고유명사나 기표는 기존의 상징계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기표입니다. 즉 기존의 상징계 내부에서는 "생각해 낼수 없는" 무엇인 셈이지요. 그러나 새로운 고유명사 혹은 기표를 만들어내는 언표"행위"를 함에 의해 이러한 기존의 질서나 논리의 회로로서 생각해 낼수 없는 공백이 있음을 드러냅니다. 기표는 때문에 "생각할 수없는 것을 생각"하기입니다. 고유명의 언표작용은 따라서 상징계(기존의 질서)내부의 공백을 드러내는 '실천'이 됩니다.








안티크리스트 2010-08-29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원주율을 10진법으로 현재 표기하는데 0에서부터 9까지의 숫자는 당연히 나옵니다. 이를 20진법으로 표현해도 100진법으로 표현해도 그 진법 내부의 숫자는 다 나올겁니다. 그러므로 9가 100번 연속된 숫자를 진법으로 하는 그 진법으로 원주율을 표기했을 때, 그 진법의 모든 숫자가 나오지 않으리란 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원주율을 계산이야 끝나지 않았지만, 9가 100번 연속된 숫자가 나오느냐 안나오느냐의 문제는 나온다가 맞지 않냐는 거죠.
그리고 저는 원주율의 실재성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그것과 이론과 실천의 간극과의 연관도 모르겠습니다.

가라타니고진의 책을 참조하는 건 무리인거 같고, 키워드를 주시면 네이버에서 본문검색은 되더군요. (199쪽에 나오는 단어를 알려주시면 될듯)
순수이성비판은 시간과 공간이 우리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져있고, 공간으로부터 기하학의 명제들이 선험적으로 도출되므로 이런 걸 선험적 판단이라고 말한 것인데, 선험적 종합판단에는 어떠한 '초월'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선험적으로 주어진 시간과 공간으로부터도 일련의 기하학 명제들을 도출할 수 있을 뿐이지요. 경험에 상관없이요. 초월을 선험과 같은 의미로 쓰시는 거라면 선험적 관점이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네요.

"제가 '실천'이나 '행위'를 이야기했을 때 이것을 '이론'이나 '법칙' 혹은 '이성'과는 다른 무엇이라고 본다면 그 다른 것으로 '신념'이나 혹은 '윤리'를 전제로한 행위라고 생각한 것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네. 신념이나 윤리없이는 당연히 행위는 도출될 수 없죠. 그런데 그 신념과 윤리는 어떠한 이성에서도 필연적으로 도출되지 않는 거죠. 그러므로 판단과정이 길든 짧든 이성이 많이 개입되는 적게 개입되든, 그 기저의 신념 또는 윤리가 근거가 없다는 점에서 참된행위와 광신도의 행위는 차이점이 없는 것이며, 어떠한 것을 참된행위라 규정할 근거또한 없는 것입니다.
신념이나 윤리가 '우연성'이라 하시면서 그걸 다시 사후적 필연성이라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전혀 모르겠네요. 또 그 사후적 필연성이라는 게 이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된다는 의미라면 신념이나 윤리를 '전제'할 필요는 없겠죠.

새로운 고유명사나 기표를 만들어내는 게 기존의 언어로는 생각해 낼 수 없는 것을 생각한 거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의미를 부여할 어떤 상황이나 내용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 상황이나 내용이 기존 언어로 과연 그러한 새로운 고유명사나 기표 없이는 표현이 될 수 없었던 것인지가 설명되어야 겠지요. 단순히 새로운 걸 만든다고 생각할 수 없는 걸 생각한 건 아닙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존 언어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걸 말하는 '실천'을 현대의 냉소적 이성이 인식만 할 뿐 말하지(실천하지) 못해서 간극이 생겼던 건가요?
또 기존의 질서나 논리회로의 공백을 찾아내 이를 언표하는 일이 '참된 행위'라는 건 별다른 이성적 근거를 가진다고 보기 힘드네요.

yoonta 2010-08-29 23:57   좋아요 0 | URL
음.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는감이 있는데요.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님의 진법이야기는 제가 이야기하려는 "원주율의 실재성"과는 큰 관련이 없습니다. 이진법이건 십진법이건간에 "9가 100번 혹은 1000번 연속으로 나온다"라는 사건은 원리적으로 동일한 사건이니까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사건자체를 '실재로 존재하는것'으로 승인하는가의여부입니다. 님은 당연히 나오겠지라고 생각하십니다만 그렇게만 보면 그것은 일종의 '소박실재론'이지요. 문제는 9가 100번 연속으로 나오는지 안나오는지의 여부를 알수 없으므로 그러한 수는 실재하지(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관점이 있다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바로 메이야수가 비판하고자하는 '상관주의'이고 괴델이 비판하는 직관주의수학자들이 되겠지요. 이것이 왜 이론과 실천간의 문제와 연관되냐하면 여기에 일종의 '도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분석적 추론만으로는 자동적으로 유도되지 않는 믿음이 개입되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두번째 문단과 세번째 문단에 대한 답변은 고진의 <트랜스크리틱>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한두페이지 보는것은 큰 의미가 없고요. 칸트를 다루는 1부전체를 읽어보실것을 권해드립니다. 님이 의문을 갖는 부분에 대한 대부분의 답변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댓글로 하나하나 답변드리는것보다는 아무래도 그게 좋을것 같아요. 제가 지금처럼 계속 답변드리게 되는 원인이 바로 제 답변의 불충분때문인거 같아서요.

님은 (제가보기에)이성과 행위간에 뛰어넘을수 없는 간극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행위이든지 간에 행위는 이성과 필연적 연관은 없다라는 관점을 고수하시는것 같습니다. 제가보기에 이런 믿음은 라캉은 물론 칸트철학과도 좀 거리가 있어보이는데요. 저는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칸트철학 내부에 이러한 간극을 뛰어넘을수있는 방식을 마련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소위 합리와 경험을 "종합"했다라고하는 그 방식으로 말이지요. 기회가 되면 님이 의문을 품는 부분에 대해서 한번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려면 지금은 가물가물한 <트랜스크리틱>을 한번 더 훑어 보야야 되겠네요.^^;

안티크리스트 2010-08-30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원주율의 9가 100번 존재하는 문제에 대해 저는 존재한다는 입장을 취했지만, 그걸 이성으로부터의 필연적인 도출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개입될 필요도 '도약'이 있지도 않습니다.

별 뜻 없이 쓰신 것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성과 행위간에 필연적 연관이 없다는 처음에도 언급한 "Is - Ought Problem" 을 인지할 뿐이지, 어떤 "믿음"을 가지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저 간극을 필연적 연관으로 매우는 일은, 아직 어느 누구도 했다고 평가되지 않습니다.

고진의 책은 큰 흥미가 가질 않네요. 훑어보실 기회 되시면 새로운 답변 기대하겠습니다.

yoonta 2010-08-30 16:47   좋아요 0 | URL
뭔가 자꾸 서로 빗나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인데요.

원주율에 9가 100번 연속으로 나온다는 사실이 필연적 도출이라고 저는 이야기한 바 없습니다. '필연적이지 않기' 때문에 믿음이 도입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지요. 그게 메이야수가 이야기하는 우연성의 필연성이라면 그러한 의미에서의 필연성은 논리나 추론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신념이나 믿음에 의해서 가능한 관점이 아닌가하는 정도만 이야기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님은 필연적이지 않기 때문에 추론적으로 계산가능하다라고 말씀하시는건가요?(필연적이지 않기 때문에 믿음이나 도약이 개입될 필요가 없다라는 말은 좀 모순적인 표현으로 보이는군요. 필연적이지 않다는 말은 우연적이라는 이야기고 그렇다면 논리보다는 무작위적 행위에 더 가까운 것이니까요) 믿음이나 신념이 필요없으려면 이성으로부터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분석판단으로부터 추론가능한 무엇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9가 100번 혹은 1000번 연속으로 나오는가 아닌가와 같은 문제를 생각하려면 수학에서는 '무한'개념이 도입되어야 합니다. 소수점이하가 무한히 펼쳐진다라는 가정이 있어야 하기때문이지요. 그런데 무한은 계산불가능합니다. 이처럼 계산불가능한 요소를 수학에 도입해야 되느냐 마느냐를 놓고 수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있어왔죠. 그러다 결국 수학내적인 필요에 의해서 이것이 도입되었던 것인데 그것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미분이지요. 원주율과 같은 초월수도 마찬가지고요. 때문에 수학은 따지고보면 역설적인 체계입니다. 계산불가능성을 기초로 계산가능성을 탐색해야하는 학문이니까요.


안티크리스트 2010-08-31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믿음이나 도약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는 저는 그것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제 답이 맞다고 어떤 믿음이나 도약을 발판삼아 주장하지 않죠.
마찬가지로 어떤 행위가 '참된 행위'라고 어떤 믿음이나 도약을 발판삼아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러한 참된 행위는 광신도의 행위와 다름없이 이성으로부터는 도출되지 않는 것이라고 할 뿐이죠.

yoonta님과 제 논의가 빗나가는 이유는 제가 볼때에는 역설적인 단어의 사용에 있는 것 같습니다. '우연성의 필연성'같은 단어 말이죠. 이걸 풀면 우연성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건데, 그러면 그건 우연적일 수 밖에 없다는 뜻이겠죠. 그런데 yoonta님은 "필연"이란 단어를 쓰면서 마치 그러한 연결이 필연적이라는 듯한 뉘앙스를 남겨놓습니다.

정리해보면 참된 행위 = 이성적 추론 + 우연적 요소(신념 또는 믿음)
그런데 저 우연적 요소는 임의의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참된행위와 광신도의 행위는 구별불가능하다. 우연적 요소는 말 그대로 우연이기 때문에 합리적 이성은 저러한 요소 때문에 참된 행위를 하기 위해 도약을 할 필요도 고민할 필요도 없다. 참된 행위란 임의적이기 때문에.

yoonta 2010-08-31 02:35   좋아요 0 | URL
글로만 이야기하려니 이런 일이 생기는듯 합니다.^^;;
제가 표현이 서툴다는 일차적 문제점도 있지만요.

"믿음이나 도약이 필요하지 않는다 고로 불확실성을 받아들인다.."
"답이 맞다고하더라도 믿음이나 도약을 주장하지 않는다(반드시 그렇게 연결될 필연성도 없다)"
"참된 행위는 광신도의 행위와 다름없이 이성과는 무관하다"

님의 포지션은 결국 이렇게 요약될수 있는 것이로군요.

님이 말씀하시는 제 글의 "뉘앙스"는 필연성 속의 우연성 혹은 그 반대간의 역설적 관계를 제가 계속 이야기하기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걸 "역설적 단어의 사용"이라고 보셨다면 정확히 보신 겁니다. 다만 님은 제가 그 표현을 사용하는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안하시는 것같아요.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라캉이론의 상징계내부의 실재계나 지젝의 (무작위로서가 아닌) "참된 행위" 혹은 메이야수의 "우연성의 필연성" 그리고 수학적 체계 내부의 무한의 패러독스 혹은 칸트의 선험적 종합판단등같은 사례들도 결국 다 이것을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인데 납득이 안되셨다면 결과적으로 제 설명이 부실했다거나 아니면 확고한 입장의 차이가 있다거나 해야겠네요.

여튼 님과의 논의는 이정도에서 마무리하는것이 좋겠습니다. 기회가 되면 관련된 글을 포스팅해보도록 하죠.

근데 안티크리스트님은 알라딘에 블로그가 없으신가봐요? 로그인하지 않은 아이디시네요..^^






안티크리스트 2010-08-31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로그 관리를 안해서 로그인을 안했었어요. ^^;

저도 이후에 관련 글을 포스팅해보겠습니다. 하긴 맥락이 쉽게 이해되는 거라면 저자들이 책을 힘들게 쓸 필요도 없겠죠 ^^;

토론 즐거웠습니다~
 

알라딘불매운동 관련 포스팅은 더이상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다른 알라디너분들의 관련글들을 좀 읽어보다가 나름대로 좀더 생각해 보고 싶은  지점들이 있어서 몇자 더 끄적여 봅니다. 

현재 알라딘 블로거 내부에서 불매운동을 보는 시선을 크게 두가지로 나눠 본다면 

1. 먼저 바람구두님처럼 불매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시거나 물매운동을 지지하면서 동참하시는 분들의 입장입니다. 이 분들이 불매운동을 주도적으로 추진하거나 혹은 참여하시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비정규직 노동문제에 대한 비판과 환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문제가 된 알라딘 노동자 한 분의 구명을 위한 운동이라기보다는 이와 같은 전반적인 노동환경에 대한 문제제기요 비판의 차원에서 자신들이 활동하는 알라딘이라는 장소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볼수있겠지요. 하지만 이분들이 전술적 목표로 고려하는 것은 물론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다양하다고 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알라딘 내부에서의 문제해결 수준에 국한된다고 봐야겠습니다. 알라딘이라고하는 테두리나 외연을 넘어선 운동의 확장까지를 염두에 둔다고 보긴 힘들겠죠. 때문에 얼마전 알라딘 대표가 게재했던 재발방지를 약속한다라고하는 사과문발표라는 선에서 불매운동을 종료하시는 분들도 계신걸로 압니다. 아직까지 불매운동을 계속 추진하시는 분들은 이보다 좀더 확실한 대책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어디까지나 그 실제적/현실적 목표는 알라딘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긴 힙듭니다. 아마도 그 최대치는 알라딘 전 직원의 정규직화 정도에서 그치겠지요. 실현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수렴한다고 보여지긴 하지만.  

 2. 한편 이러한 불매운동에 대해서 미온적 혹은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는 입장입니다. 대표적인 블로거가 로쟈님이라고 할수있겠네요. 로쟈님 같은 경우는 불매운동이 지향하는 목표자체가 불확실하다. 그리고 (알라딘)불매운동이라고 하는 소비자운동이 보다 근본적 수준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데에는 미흡한게 아닌가하는 입장이신 것으로 대략 보입니다. (틀릴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유보적 자세는 아마도 로쟈님이 지젝에 대한 레닌적인 전략적 보조를 같이 하는 데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는 바라님의 글도 보이는군요.  로쟈님은 사실 직접적으로는 지젝보다는 피터 싱어를 언급하긴 했지만. 

거칠지만 현재 알라딘 내부의 입장을 이렇게 크게 두가지로 일별했을 때 저의 입장이 무엇이냐고 묻는 다면 먼저번 페이퍼에서도 적었지만 1번도 아니요 2번도 아닙니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그 중간 쯤? 위치한다고 할까요? 불매운동은 지지하지만 동참한다고 하진 않겠다는 입장이므로 말이지요. 제가 왜 어떻게 보면 이런 어중간한 일종의 박쥐같은? 포지션을 취할 수밖에 없는지 몇자 적어보는게 이 페이퍼의 목적입니다. 

바라님의 글(http://blog.aladin.co.kr/vara/3318911)에도 나옵니다만 사실 지젝식의 전복적이면서 근본적인 혁명 혹은 개혁이라은 것이 현실적 실천목표로서 가능한 것인가하는 문제의식. 전 이러한 비판에 일단 공감합니다. 오늘날처럼 부르주아가 19세기나 20세기초처럼 노골적으로 계급착취를 하지 않고 얼마간의 떡고물을 던져주면서 그들의 체제를 연명해 나가는 소위 후기자본주의시대에는 1917년식의 러시아혁명과 같은 급진적 목표는 사실상 불가능한 목표가 아닌가하는 비판이지요. 지젝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른바 "상식의 한계" 내부에 머무르는 관점입니다. 소위 말하는 개량인 것이지요. 카우츠키나 베른슈타인에 의해서 창안된 독일사민당의 개량주의 노선이 역사적으로는 좌파내부에서 그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겠고  오늘날 유럽식 복지국가나 유럽사민당들의 노선도 여전히 이러한 노선을 따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국에서는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의 노선이라고 해도 틀리다고 할순 없겠지요. 이런 노선이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일단은 자본주의체재 내의 다수 대중들이 급격한 사회변화를 원하기보다는 자본주의라고하는 체제 내에서 다소간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하는 경향이 그 첫 번째 이유겠고(특히 유럽이나 일본, 미국같은 선진자본주의국가들에서 더 두드러지는 경향)  두 번째로는 이런 환경 때문에 정치를 수행하는 단체나 조직들이 현실적 목표로서 점진적 개량에 머무르려고 한다는 사실이 거든다고 봐야 할 겁니다. 이로서 자본주의는 그 주도자들의 용의주도함과 그 비판자들의 무능함이 결합되어 아직까지도 건재하고 있고 또 당분간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런데 사실상 이러한 개량이나 복지국가노선은 어디까지나 자본주의라고 하는 틀 내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정치적 전략이다라고 과거 레닌은 비판하였고 또 오늘날 지젝의 비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소위 "상식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자본주의도 근본적으로 극복가능해 진다는 이러한 비판도 또 마찬가지로 엄연히 사실이라고 봅니다. 개량이 바라보는 현실과 급진이 바라보는 현실이 이렇게 서로 다를 수있다는 것. 현실이라는 것이 단일하지 않고 복수의 현실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저는 전자도 상황에 따라서는 옳을수 있고 후자도 상황에 따라서는 옳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할 수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얼핏 불가능해 보이는 "근본적 변혁" 혹은 "혁명"을 유예하고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목표에 집중하여 동물적이고 야만적인 자본주의를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로 만드는 것이 급선무다? 아니면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역시 결국 자본주의에 불과하며 자본주의에 대한 개량에 머무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따라서 현실적이고 실현가능한 목표라는 상식의 한계를 돌파하여 자본주의를 근본에서 바꾸어야 한다? 

   이런 일종의 선택의 갈림길 혹은 간극 같은 것들이 이번 알라딘불매운동과 관련된 여러 알라디너분들의 입장 내부에 상존한다고 하면 좀 지나친 억측일까요?  저로서는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없는 입장이 되어 버렸네요. (물론 현재의 알라딘불매운동에 대한 찬반을 이에 대입시키는 것 자체를 문제삼을수 있는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우선 2번처럼 불매운동을 근본적 층위에서 비판하면서 불매운동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관점은 결국 아무것도 실천적으로는 하지 않겠다는 방기가 될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소위 근본적 입장이 "운동하지 않음 위한 알리바이"가 된다는 비판을 모면하기 힘들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이 입장은 불매운동자체가 옮음이라는 전제에서 시작하는 포지션입니다. 만약 불매운동자체가 잘못된 운동의 방식이라면, 불매운동을 비판하고 또 불매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선언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실천이라고 한다면 다시말해 2번의 입장에서 1번을 비판한다면 이를 두고 "운동하지 않음의 알리바이"라고 하는 것은 (불매)운동에 동의하고 참여하는 자의 시각에서만 바라보는 비판이라고 할수도 있는 것이지요. 불매운동자체가 오류이다라고 하는 입장에서는 그것이 잘못되었다라고 적극 표현하는 행위가 스스로의 노선을 실천하는 또하나의 운동이 될 수있으므로 말이지요.  하지만 저로서는 이런 분명한 비판의 입장에 서 있다고 볼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알라딘불매운동이 비록 몇가지 분명한 한계들을 노정하고 있을 지언정 우리사회에서 비정규직 문제를 점진적으로나마 해결해 보고자한다라는 목표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보긴 힘들고 또 그를 위해 실현가능한 실천들을 하자라고하는 문제의식에도 기본적으로는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이라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라고하는 외연을 뛰어 넘었을 때에만 가능한 사안이 아닌가라는 비판의 입장 역시 동의하며 다만 그 구체적 실천방법에 대해서는 현 시점에서는 이론이나 원론수준에서 접근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고 결국 다시금 구체적 실현/실천방법으로서의 점진적 방식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반복되는 자기모순적 위치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군요.  

글을 쓰다보니 정리라기보다는 오히려 혼동만 가중되는 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다만 저의 어정쩡한 포지션도 결국은 불매운동을 계기로 우리사회에서 실천가능한 목표나 운동이란 어떤 것일까하는 고민이나 문제의식에서 비롯된다라는 점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굳이 이렇게 정리도 되지 못한 단상들을 끄적여 보는 나름의 이유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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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7 0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8 0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요즘 알라딘불매운동때문에 알라디너들 사이에서 말들이 많은가 봅니다. 저는 불매운동과 그 운동에 참여하시는 분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조적인 입장이라고 할수있겠네요. 로쟈님과 비슷한 포지션이라고 할까요?  지지는 하지만 동참하지는 않겠다라는 입장입니다. 바람구두님처럼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지만 책 몇 권을 이 곳에서 사지 않는다고 그것을 불매운동한다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고(왜냐하면 여기서 사지 않으면 어차피 다른 곳에서 사야하고  비정규직이 문제라면 단지 알라딘만 문제인 것은 아니요. 도서 출판계 전반이 문제이고 한국사회 전반이 문제가 될 수있지요.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시스템 자체가 문제인 것이고) 그래서 그분들의 활동에는 지지는 보내지만 내가 나서서 시간과 정열을 소비해 가면서 할 일은 아닌것 같다정도가 나의 생각이고 입장입니다. 

그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이 일이 다른 비정규직관련 사건들보다 상대적으로 지엽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혹자는 그 기준이 뭐냐고 말하실듯 하지만요) 비교우위라고 하긴 뭐하지만 예를들어 같은 불매운동인 뉴코아,이랜드불매운동의 사례의 경우는 훨씬 더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대량해고를 당하고 고통을 받은 케이스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곳 알라딘에서는 이랜드불매운동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불매운동에 동참하자"라는 바람구두님 같은 분들이 안계시더군요. "이곳 알라딘블로거들에게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기업이니까?" 나름 생각해본 원인으로는 결국 이것 밖에는 없더군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좀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알라딘에서는 책을 안사기로 했지만 이랜드에 가서 옷을 사입고 뉴코아에 가서 쇼핑을 한다? 어떻게 보면 이는 비정규직 한 명을 위한 투쟁에는 동참하면서 비정규직 수십,수백명을 위한 운동은 외면하는 결과가 되는 것 아닐까요? 윤리적 소비라는 것이 가능한 선을 엄격히 따르자면 사실 자본주의사회에서 생산한 모든 재화의 소비를 금해야 합니다. 단순히 식탁에 고등어를 올리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단 것이지요. 가장 좋은 방법은 스님들처럼 산속으로 들어가 속세와 연을 끊고 살거나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 도처에는 사실 비윤리적으로 생산된 자본주의의 생산품들이 도처에 널려있으므로 말이지요. 난 고등어를 먹지 않으니까 윤리적 소비를 하는 사람이야. 혹은 희말라야의 선물같은 공정무역을 통해서 공급된 커피를 먹으니까, 난 알라딘에서 책을 사지 않으니까 윤리적 소비를 하는 소비자요 독자야라고 생각해서는 좀 곤란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문제는 뭘까요? 사실 제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한국사회에서 비정규직관련해서  수많은 사건과 사례들이 속출하고 있을 겁니다. 알라딘의 해고사건 같은 것은 이슈화되어서 그렇지 그렇지 않은 수십, 수백건의 사례가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고 봐야겠지요. 그러나 이 각각의 케이스에 우리가 모두 힘을 보탤수는 없는 일입니다. 산속에 들어가서 자급자족하면서 살 수 없거나 불우이웃돕기 성금에 일억원을 내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그러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모두가 각자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자신이 할수있는 역량만큼 참여하고 실천하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어떤 일이 내가 참여하고 참여하지 말아야 하는 일인가를 판단해야 하는 일이 남습니다. 그 판단에서 저는 이번 알라딘 해고노동자건 관련 불매운동에 대해서는 심정적인 지지는 보내지만 책 몇권 안사는걸로 혹은 지지한다라는 의사표명 하는걸로 불매운동에 동참한다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울러 블로그활동을 접거나 옮길 의사도 없습니다. 애초에 이곳은 알라디너들과의 교류를 위해 만든 곳이지 알라딘의 돈벌이를 위해 만든 공간이 아니므로.

자본주의사회에서 소비자들의 불매운동이 기업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한국사회에서는 이 소비자불매운동이라는 운동의 방식이 효과적이지는 않은 것 같더군요.  저는 개인적으로는 불매운동에 참여하시는 알라디너분들을 응원합니다. 그리고 이번 운동으로 뭔가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시길 새해를 맞이하여 기원해 봅니다. 그러나 제가 힘을 보탤수 있는 부분/참여할 수 있는 선은 여기까지라고 해둬야 할 것 같습니다.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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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불매관련 yoonta님의 의견에 대한 저의 생각.
    from 푸하의 서재 2010-01-01 23:07 
    의견 잘 들었습니다. 저도 불매운동에 참여하진 못해왔어요. 그래도 한 가지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저는 yoonta님의 "비정규직이 문제라면 단지 알라딘만 문제인 것은 아니요. 도서 출판계 전반이 문제이고 한국사회 전반이 문제가 될 수있지요.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시스템 자체가 문제인 것이고)"이 말씀에 깊이 동의하고 있어요. 여기에서 나아가 "이 일이 다른 비정규직관련 사건들보다 상대적으로 지엽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라고도 언급하시고 다시 "알
 
 
펠릭스 2010-01-02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비판(평)의식이 부족하면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못하죠. 우리 사회가 안티의식(나와 다른 것들)의 표현에 많은 제약을 두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모델에 대한 제안이나 합의가 부족합니다. 다양함은 사회나 개인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저 자신도 좀 더 새로운 눈을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새해도 건승하시고 좋은 글 부탁합니다.

yoonta 2010-01-02 13:36   좋아요 0 | URL
제 글이 불매운동을 (적극적으로) 하시는 분들에 대한 건설적 비판/비평이 될수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닥 읽어볼만한 내용이 있는 글은 아니네요. 제 관심의 정도가 비례된 수준의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팰렉스님도 새해에 좋은일들만 생기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