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호킹이 이 책에서 대답을 시도하려는 질문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왜 무가 아니라 무엇인가 있는가?
왜 우리가 있을까?
왜 다른 법칙들이 아니라 이 특정한 법칙들이 있을까?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 대표적으로 그는 강한 인본원리strong anthropic principle를 주장합니다. 인본원리란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가시적인 물리법칙들을 도출할 수있다"는 원리인데 지금의 우주가 지금처럼 보이는 이유를 우리가 지금 여기에 존재하기때문이라고 보는 원리입니다. 그 중에서도 강한 인본원리는 단순히 환경적 요소뿐만 아니라 물리적 법칙자체까지도 인본원리에 의해서 해석하는 관점이지요. 이에 의하면 예를들어 상대성원리나 양자역학도 인간존재가 있음으로해서 성립하는 법칙이 됩니다.
때문에 이러한 호킹의 인본주의적 관점에서는 모든 것의 절대적이며 최초의 원인으로서의 신이란 존재하지 않고 다수의 우주로 구성된 다중우주multiuniverse에서 하필이면 우리가 살고있는 이 우주에 우리가 존재하게 된 원인에 바로 인간의 선택 혹은 관찰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강한 인본원리를 주장할 수있게 하는 배경에는 파인만의 양자이론이나 M이론같은 물리학도 근거로 작용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모형의존적 실재론model dependent realism"이라고 스스로 표현한 하나의 철학적 입장이 개입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철학은 이제 죽었다"(9쪽)라고 선포하지만 이 "모형의존적 실재론"을 통해서 그는 다시 철학을 도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이야기한 "모형의존적 실재론"이란 무엇일까요?
|
|
|
|
"우리는 과학을 할 때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모형을 만든다. 모형 의존적 실재론은 과학적 모형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일상세계를 해석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창조하는 의식적, 무의식적 정신적 모형들에도 적용된다. 우리의 감각과 생각과 추론을 통해서 창조된 우리의 세계 지각에서 관찰자 - 우리-를 떼어낼 길은 없다. 우리의 지각은 - 따라서 우리의 이론이 토대로 삼는 관찰도 - 직접적이지 않고 오히려 일종의 렌즈에 의해서, 인간 뇌의 해석구조에 의해서 형성된다." (<위대한 설계>. 스티븐 호킹. 58쪽)
|
|
|
|
|
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시말해 그의 모형의존적 실재론은 대상 그 자체에의해서라기보다는 그것을 관찰하는 "인간의 뇌"에 더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실재론?이라는 것이지요. 그는 이 모형의존적 실재론은 실재론realism과 반실재론사이의 논쟁을 을 "우회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모형이 실재에 부합하느냐는 질문은 무의미하고 , 오직 모형이 관찰에 부합하느냐는 질문만 유의미하"(57쪽)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앞서서 본 것처럼 결국 여기서 그가 말한 "관찰"은 위에서 본 것과 같은 "뇌의 해석구조"에 의지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사실 여기서 다시 이야기되어야 할 지점은 도대체 이 인간 "뇌의 해석구조"란 무엇인가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그는 이 인간 "뇌의 해석구조"란 무엇인가 (가령 인간 뇌는 컴퓨터처럼 조직되어있는 만능튜링기계universal turing machine과 같은 것인가 아닌가 하는 등의 논의) 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이론"과 "관찰"을 가능하게 하는 '뇌의 해석구조"에 의해서 "모형의존적 실재론"이 가능함을 이야기하고 있을 따름이지요. 그런데 사실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이는 엄밀하게 이야기해서 "실재론과 반실재론을 우회"한다기보다는 인간 뇌의 구조에 기반한 "관찰"을 중시하는 반실재론에 불과하게 됩니다. 플라톤적 실재론이나 수학적 실재론에 의하면 실재론은 인간의 "뇌"나 (뇌의 영향을 받는) "관찰"과는 무관하게 '실재'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있다고 보는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호킹은 모형의존적 실재론을 인간뇌의 해석구조에 등치시키는데 이를 통해서 사실 그가 강조하려는 관점은 결국 대상에 대한 "관찰"의 중요성을 말하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그가 관찰을 중요시하는 이유는 앞서서 이야기한 강한 인본원리를 주장하기 위함이고 또 그 배경이 되는 양자이론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므로 말이지요. 물리학에서는 물론 "관찰"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론"도 중요하지요. 이론과 관찰을 엄밀히 구분할 수는 없겠지만 이론적 바탕을 먼저 세운 뒤 관찰을 통해 이를 검증하는 방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런데 물리학에서 어떤 모형을 이론적으로 구축할 때 주로 사용하는 도구가 바로 수학입니다. 그렇다면 이 수학도 "인간 뇌의 해석구조"에 의존하는 것일까요?
호킹과 같은 영국의 저명한 수학자인 로저 펜로즈는 수학을 인간의 뇌로 구성할 수있는 주관적 상관물혹은 창작물이라기보다는 수학적 연구를 진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발견의 대상이라고 봅니다. 예를들어 카오스이론에서의 만델브로집합http://navercast.naver.com/science/math/3955과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데 만델브로집합에서 발견되는 "자기유사성"은 인간에 의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수학자체의 내포적 원리에 의해서 스스로 만들어지는 현상이지요.
이러한 발견은 뇌의 해석구조가 창조했다기 보다는 수학자체의 원리에 의해서 사후적으로 "관찰"될 수있을 뿐이지요. 이런 관점에서 펜로즈는 수학적 실재론을 주장하게 되는데 궁극적으로 이 수학적 실재론은 플라톤주의적 실재론과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에 의하면 수학은 인간의 주관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특수적 보편으로 존재하는 형상eidos로 보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물리학은 이러한 수학이 없이는 자신의 "이론"을 구성할수가 없습니다. 미적분 없는, 복소수 없는 고전역학이나 상대성이론 혹은 양자역학은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어떻게보면 물리학은 호킹이 이야기하듯이 모형의존적 (뇌의 해석구조 의존적)이라기 보다는 수학 의존적 실재론mathematics dependent realism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관찰"이라는 것 역시 수학적 도구 없이는 불가능한데 관찰 할 수있게 주어지는 data도 결국은 다시 수학으로 해석해야만 하는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호킹이 이처럼 모형의존적 실재론을 뇌의 해석구조와 동일시하고 이것을 다시 강한 인본원리로 연결시키면서 무신론적 결론을 도입하게 되는 이론적 배경에는 양자이론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이론에 의하면 우리는 양자의 운동으로부터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확정적으로 알수 없는데 특정한 위치나 운동량을 알려면 결국 "관찰"이 개입될 수밖에 없고 결국 이 관찰에 의해서 양자의 운동이 결정되는 듯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죠. 양자이론의 이런 불확정적이면서 확률론적인 성격을 그는 확대 해석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법칙 자체도 우리의 관찰에 의해 결정되는 강한 인본원리에 의해서 재구성된 우주일 따름이다라는 결론으로 비약하게 된 것입니니다.
그러나 양자이론의 이런 불확정적 성격이 반드시 관찰자의 결정적 역할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해석은 이른바 "코펜하겐 해석" http://navercast.naver.com/science/physics/1293 이라고 불리우는 입장과 유사한데 양자이론에는 이런 해석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요. 이는 단지 양자이론을 해석할 수 있는 다양한 입장 중 하나일 뿐입니다. 양자이론이 가정하는 소위 파인만적 "역사합"이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러한 양자이론에 근거한 다중 우주들 가운데에 인간이 생존가능한 물리법칙과 자연환경을 가진 지금의 우주에 우연히 존재하게 된 것 뿐이라고 볼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호킹이 이야기한 것처럼 일종의 강한 인본원리에 의한 "역행적 우주해석" 을 통해 지금의 우주를 인간이 선택한 것이라고 본다기 보다는요.
결과적으로 제 결론은 이렇습니다. 호킹이 제시한 강한 인본원리에 의한 우주해석은 양자이론이나 M이론이 제공가능한 여러가지 우주론해석 중의 하나에 불과할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 것인가는 각자의 시각과 입장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제가보기엔 호킹이 이 책에서 제시한 원리들은 도킨스가 말한 것처럼 신에 의한 "지적설계론"를 비판하는 "결정적 한방"이라기보다는오히려 허술한 그의 모형 의존적 실재론에서 확인할 수있는 것과 같이 철학의 죽음을 너무 일찍 선포한 결과 도출된 일종의 '헛스윙'에 불과해 보인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