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가지 칼럼을 읽었습니다.

하나는 장정일씨의 <장정일의 책 속의 이슈: 주체의 해석학>
이란 칼럼입니다. 미셸 푸코의 후기 저작인 <주체의 해석학>을 다룬 칼럼이지요.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26336.html


이 컬럼에서 그는 푸코가 고대 그리스에서는 근대적 주체인 데카르트적 주체,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 의해서 성립되는 '자기인식'의 주체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배려'로서의 주체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서 '자기배려'란  말그대로 자신에게 몰두하는 행위들 예컨대 "연애,우정, 가정경제,건강법에서부터 용기있게 말하기, 스승의 말 경청하기, 분노와 슬픔 다스리기,타인의 시선과 사소한 호기심에서 벗어나야 할 이유 등등"과 같은 구체적 삶의 기술이나 지혜를 통해서 점진적으로 자기 자신을 수련하고 변화시켜 나가는 "자기수양과정"을 의미합니다.

이를 실천과 인식간의 이분법으로 생각해 보자면 자기배려는 전자에 자기인식은 후자에 해당할 수 있겠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 자기인식(인식)이 자기배려(실천)에 종속되는 덕목으로 존재했었는데 기독교신학이 득세하면서 육체보다는 정신을 중요시하는 풍토에 의해 이러한 "자기배려"와 같은 덕(의 중요성)은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거나 망각되어져 왔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그리스 문화를 신학적으로 전유하면서 육체보다는 정신을 우선하고, 주체의 자기배려를 신에 대한 헌신에 맞서는 일로 죄악시"하게 되었다는 관점이지요. 이러한 푸코의 기독교해석은 니체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결과적으로 푸코나 니체에게서 기독교적인 신(종교)의 죽음이나  그것의 극복이야말로 진정한 "자기배려"의 과정이었던
셈이지요.

그런데 또 하나의 해석이 있습니다. 로쟈님의 블로그에서 읽은 중대대학원신문에 실린 지젝관련 칼럼입니다.
 

http://blog.aladin.co.kr/mramor/3836735


이 컬럼은 지젝의 기독교해석을 다룹니다. 그는 지젝을 현대의 냉소적인 자유주의적 세계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서 기독교와 같은 보편종교가 가진 전복적 힘을 도입할 것을 주장합니다.

오늘날 후기자본주의세계는 지젝에 의하면 하나의 도착perversion의 일종입니다. 가령 현대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타자 즉, 자신에게 법적 위계적 질서를 강요하는 타자의 명령을 거부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냉소도 여기에 해당하지요. 사람들은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는 문제가 많은 질서임을 알고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에 일정한 거리두기를 합니다. 그것이 "냉소"입니다. 더이상 자본주의는 오늘날 현대인에게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을 하고"있지요.

"냉소적 이성은 더 이상 순진하지 않다. 그것은 계몽된 허의의식의 역설이다. 우리는 그것이 거짓임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이데올로기적인 보편성 뒤에 숨겨져 있는 어떤 특정 이익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포기하진 않는다."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62쪽)



지젝이 보기엔 서구식 자유주의나 "사민주의"도 이러한 냉소주의의 함정에 빠진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본주의라는 보편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지만(자기인식) 그것과 실천적으로 단절하려는 삶의 기술(자기배려)를 연마하려는 노력은 부재합니다. 근대적인 계몽과 이성에 의해서 도달한 냉소적 현실 인식은 단지  자기인식이나 앎에만 머물고 있을 따름이고 그것을 실천적으로 공구하려는 삶의 노력은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냉소주의가 만들어낸 일종의 "쾌락"은  결과적으로 "향락Jouissence이었기에 가능한 이데올로기입니다. 향락 즉, "즐겨라"라는 초자아의 명령은 역설적으로 스스로부터의 금기를 만들어 냅니다.  그것들이 예컨대 "웰빙강박, 카페인없는 커피, 다이어트와 채식"과 같은 것들이지요. 보다 잘 즐기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지켜야 할 금기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모든 것을 즐기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라도 "쾌락의 과잉"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므로 말이지요. 

이처럼  냉소주의에 의해 균열된 인식과 실천의 간극이 불러오는 효과는 "인위적으로 법을 세우려는 시도"가 되고 사도-마조히즘적 "도착"이 될수밖에 없습니다.  기성의 제도 기독교도 일종의 도착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미국의 공화당으로 대표되는 기독교근본주의자들이 민주주의의 사도임을 자처하면서 별인 일이 이라크전쟁이라는 사실은 이러한 도착이 얼마나 폭력적 일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역사적으로보면 중동과 유럽지역에서의 종교갈등의 역사자체도 이러한 도착의 역사라고 할만 합니다. 도착은 스스로가(혹은 신이) 세운 원칙(혹은 쾌락)만이 맞고 다른 신(혹은 타인의 쾌락)은 틀렸다라는 배타성 혹은 이기주의에 다름아니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변형된 사도-마조히즘이라고 할까요? 

이러한 도착에 대한 해법으로 지젝은 "죽은 신"을 이야기합니다. 이는 지젝에 의하면 제도기독교가 은폐해 온 기독교내부의 숨은 전통이라고 할수있습니다.  욥에서 그리스도로, 다시말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계시"가 기독교 내부에는 존재하는데 바로 여기에 현대인의 도착적 곤궁을 벋어날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구약의 백미라고 할만한 욥기의 주인공인 욥은 평생동안 계속된 고초를 겪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고난과 비극을 그자체로 긍정하고 무화시킴으로써 삶의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
 그 값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 사는 땅에서 찾을 수 없구나
 깊은 물이 이르기를 내 속에 있지 아니하다 하며 바다가 이르기를 나와 함께 있지 아니하다 하느니라
 정금으로도 바꿀 수 없고 은을 달아도 그 값을 당치 못하리니
 오빌의 금이나 귀한 수마노나 남보석으로도 그 값을 당치 못하겠고
 황금이나 유리라도 비교할 수없고 정금 장식으로도 바꿀 수 없으며 
 산호나 수정으로도 말할 수 없나니 지혜의 값은 홍보석보다 귀하구나
 구스의 황옥으로도 비교할 수 없고 순금으로도 그 값을 측량하지 못하리니
 그런즉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
 모든 생물의 눈에 숨겨졌고 공중의 새에게 가리워졌으며
 멸망과 사망도 이르기를 우리가 귀로 그 소문은 들었다 하느니라
 하나님이 그 길을 깨달으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
 이는 그가 땅 끝까지 감찰하시며 온 천하를 두루 보시며
 바람의 경중을 정하시며 물을 되어 그 분량을 정하시며
 비를 위하여 명령하시고 우레의 번개를 위하여 길을 정하셨음이라
 그때에 지혜를 보시고 선포하시며 굳게 세우시며 궁구하셨고
 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 하셨느니라"
(욥기 28장 12절~28절)

 고난과 고통은 (신의) 지혜를 깨닫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는 긍정을 통해서 욥은 결과적으로 "신의 자기분열"을 야기하게 됩니다. 신의 무능(현실의 고통과 고난)을 신의 전능(삶의 지혜와 깨달음)함으로 전유하기. 유대교의 역사는 사실 이러한 신의 무능함과 전능함의 "시차적 간극"사이에서 지속되어진 역사였던 셈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유대교의 신은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면서 그 신이 "죽은 신"이었음을 당당히 선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아버지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마가복음 15장 34절)라고. 그 자신이 인간이면서 신이었던 예수에 의해서 전능한 신의 무력함이 드러난 순간이지요. 이로서 기독교적 신은 그리스도에 의해 자기분열을 완성합니다. 그 결과 전능함으로써 존재하는 초월적 신은 "죽은 신"이 되고 남은 것은 이러한 고난과 고초를 무의미으로 환원함으로써 삶의 지혜를 완성하는 "자기배려"의 기술이 남게 됩니다. 

"다 이루었다"(마태복음 19장 28절)

이 순간이야말로 고난과 고통으로의 그리스도적 희생의 삶이 스스로의 의지와 계획에 의해서 비롯된  자기승리의 과정이었음을 선언하는 순간입니다. 유대교의 욥과 기독교의 그리스도는 이처럼 "죽은 신"을 통해서 다시 부활하는 "부정의 부정"으로서의 자기긍정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지젝은 이러한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이야 말로 현대의 도착적 현실과 이데올로기를 극복할 수있는 계기라고 말합니다. "큰 타자의 상징적 허구에 매달리"거나 이데올로기적 도착에 빠지기보다는 현실의 고통과 고난(실재)와 직접 대면하는 용기, 주체의 냉소와 자기분열(자기배려와 인식간의 분열)을 극복 하는 전복적 실천을 강조하였던 것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기독교가 말하려던 (전복적) 핵심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실천이야말로  대타자의 상징적 질서를 극복하기 위한 진정한 자기분열의 완성이라는 점을 지젝은 "죽은 신"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P.S.   그런데 지젝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이라는 책에서는 푸코와 라캉의 유사성보다는 하버마스와의 유사성에 더 주목합니다. 

"이러한 푸코의 주체개념이 얼마나 엘리트적,휴머니즘적 전통에 부합하고 있는지를 간파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것을 가장 그럴싸하게 실현한 것은 내적인 열정들을 통제하고 자신의 삶 자체를 일종의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르네상스의 '전인주의적' 이상이 될 것이다. 푸코의 주체개념은 오히려 고전적인 것이다. 적대적인 힘을 조화시키는 자기-매개의 힘으로서의 주체, 자기 이미지를 복구함으로써 '쾌락의 사용'을 통제하는 방편으로서의 주체, 결국 하버마스와 푸코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20~21쪽) 

그는 푸코의 "자기배려"를 단지 "적대적인 힘을 조화시키는 주체"로, 욕망을 통제하고 조절하는 하버마스적인 합리적이고 계몽적인 이성으로서의 주체로 바라봅니다. 이것은 다분히 푸코의 "자기배려"라는 개념이 가지는 실천과 인식간의 자기분열적 간극을 배제하는 관점인 것으로 보입니다. "자기배려"라는 개념이 내적으로 가지는 모순과 갈등들을 단지 계몽적 이성 혹은 냉소적 이성으로서의 '인식'주체로만 보려고 한 혐의가 있어 보이는 대목인것 같습니다.  

 그러나 위에서처럼 "자기배려"라는 개념을 실천과 인식간의 분열과 간극을 내포하는 (헤겔적)자기분열의 과정으로 본다면  이것은 완전히 푸코에 대한 오독으로 볼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푸코의 "자기배려"개념은 하버마스적인 합리적 이성으로서의주체보다는 라캉의 정신분석이 야기하는 본질주의에 더 가까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재와 대면함으로써만 얻어지는 라캉적인 실재의 윤리라는 것이 기실은 푸코의 "자기배려"와 같은 것이 아닐까라는 것이지요.

  

 

      


댓글(17)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안티크리스트 2010-08-20 0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Is-ought problem(http://en.wikipedia.org/wiki/Is%E2%80%93ought_problem)이 떠오르네요. 인식과 실천의 간극이 바로 이 문제일 것입니다.
최근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었는데, 덕 또는 탁월함이나 훌륭함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데, 그게 위에 푸코가 고대 그리스에서 봤다는 '자기배려'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거기서 느낀 건 그러한 자기배려라 일컫어지는 것은 흔히 말해지는 좋은 것들을 추구하는 것인데, 사실 그건 자기에게 좋다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혹은 그리스 도시국가인 폴리스에게) 좋은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배려'는 육체에 대한 배려라고 보기는 힘들 것입니다. 오히려 니체가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등에서 말한 약자의 도덕에 가깝다고 봐야겠지요. 니체는 주로 고귀함, 강함 등의 강자의 도덕에 더 신경을 썼으니까요.
지젝의 냉소적 이성에 대한 비판은 정당해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이것
"그들은 자본주의라는 보편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지만(자기인식) 그것과 실천적으로 단절하려는 삶의 기술(자기배려)를 연마하려는 노력은 부재합니다"
은 자본주의가 거짓이면 무엇인가(자기배려)를 해야 한다는 것인데, 제 생각엔 냉소적 이성이 자본주의를 거짓으로 판단할 것 같지도 않을 뿐더러, 그것의 참,거짓 여부가 어떤 것을 해야함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무엇을 해야 함은 "어떠어떠하게 해야 하는 것이 옳은 (또는 좋은) 일이다"라는 생각이 미리 있을 경우에 도출될 것이고, 그것은 각자가 가진 도덕가치에 따라 달라질 것이고, 냉소적 이성은 "자기배려"라던지 어떤 특정한 도덕가치를 서로 공유하지 않을 것이고 (아니 오히려 그런 가치가 없다는 표현이 더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냉소적 이성이 노력하지 않고 태만하다는 지젝의 지적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또 무슨 냉소적 이성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서의 욥 처럼 현실을 고통과 고난속에서 인식한다고 생각되지도 않네요.
한마디로 냉소적 이성은 자기분열을 인식하지도 고민하지도 않습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그건 아직 덜 식은 탓이겠지요? ^^;
끝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푸코가 말한 '자기배려'로 생각되는 탁월함 또는 훌륭함에 대해서 얘기를 하지만 마지막에 그중 가장 탁월한 것은 철학함이다라고 말하면서, 굳이 말하자면 '자기인식'이 으뜸가는 탁월함이다라고 끝을 마치지요.

yoonta 2010-08-20 15:03   좋아요 0 | URL
'냉소적' 이성이라는 말 자체가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은 안다"에서 시작하는 것이니 "자본주의는 거짓"이거나 무언가 나쁜 점이 있다라는 것은 아는 인식상태라고 해야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냉소적"일수가 없으니까요. 뭔가 알아야 냉소적이라도 할수있으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그냥 무지의 상태일 뿐이겠지요.

이처럼 알고도 행하지 않는 상태를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라는 책에서부터 지속적으로 비판해 옵니다. 이러한 냉소적 이성은 결국 이데올로기의 환상성을 통해 대리만족을 구하게 되므로 말아지요. 지젝의 문제점은 냉소적 이성이라는 개념자체에 있다기보다는 본문에서 제가 지적한 것처럼 푸코의 자기배려 개념을 하버마스의 아류쯤으로 보았다는데 있는거 같다는 이야기였어요.

님 댓글을 보니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다시 읽고 픈 충동이 생기는군요. 허접한 블로그에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티크리스트 2010-08-23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자본주의가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거를 아는 것이 자본주의에 대한 냉소를 유발했다는 얘기인데, 제 얘기는 그런 인식으로부터는 아무런 "해야 한다"라는 실천이 나올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려면 자본주의보다 더 나은 대안도 가지고 있어야 하겠지만, 설령 그런 대안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천해야 하는 지는 의문입니다. 어떤 인식도 실천을 도출해 내지는 않으며, 오히려 인식과 실천의 간극이라고 할 게 아니라, 인식으로부터 실천을 도출하는 오류라고 부르는게 적절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저는 지젝이 현대의 냉철한 이성을 냉소적 이성으로 오해했다고 생각됩니다. 냉철한 이성은 인식에서 실천을 도출할 만큼 어리석지도, 이로 인해 고민하지도 않으며, 이걸로 도착해 빠지거나, 죽은 신의 도움으로 자기긍정을 이뤄낼 필요도 없습니다.

지젝의 푸코에 대한 평가는 라캉의 실재와의 대면이란 개념도 낯설고 "자기배려"에 대한 제 생각이 부정적이라서 별로 할 말은 없네요.

yoonta님은 지젝과 푸코 등의 생각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지고 계신지가 더 궁금하네요. 어차피 우리는 지젝도 푸코도 아니니까요. ^^;

답변 반갑습니다.

yoonta 2010-08-24 18:06   좋아요 0 | URL
(과학적)지식과 가치판단의 분리는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데카르트이후의 근대과학의 성립과도 긴밀한 연관이 있습니다. 이전에는 지식과 가치판단 혹은 신념이나 신비적 요소등이 변별되지 않고 결합되어있었다면 근대과학이 발전한 이후에는 이러한 지식에 베버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일종의 탈주술화 혹은 탈신비화가 이루어지지요. 예를들어 연금술과 같은 비의적 지식에서 근대화학이나 약학으로 변화한 것처럼 말이지요.

위에서 제가 이야기한 자기배려나 실천과의 연관이라고 하는 부분은 따라서 이러한 형태의 지식과 (신념에 따른) 행위/실천간의 근대적 분리이전의 상태를 말하려는 것이겠지요. 푸코가 복원하려고 한 '주체성'도 바로 이러한 자기배려의 정신이 아닐까라는 이야기가 그래서 가능한 것이라고 봅니다.

지젝은 최근 그의 책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라는 책에서 "어떤 행위의 확실성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신념의 문제다. 참된 행위는 그에 관해 완벽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어떤 투명한 상황 속의 전략적 개입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참된 행위가 지식의 틈새를 메우는 것이다"(298쪽)라고 말한 바있습니다. 소위 "냉철한 이성" 혹은 "냉소적 이성"만으로는 투명하고 완전한 지식을 획득할 수 없고 따라서 이러한 지식내부의 간극과 틈을 메울 방법으로의 "신념"과 실천을 강조하는 대목이라고 할수있겠습니다. 저는 이런 입장에 전반적으로 동의하는데요. 왜냐하면 지식의 확실성이란 투명한 객관성으로 주어진다라기보다는 신념과 실천이라고 하는 일종의 도약이 결합되었을때에만 가능한 개연성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지젝이나 푸코에 대해서는 저도 아직 공부하는 입장이라 뭐라 분명하게 말씀드릴수는 없겠네요. 이들에 대한 저의 이해 혹은 거리두기는 앞으로 올리게 될 게시글을 통해서 조금씩 보여드릴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안티크리스트 2010-08-25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신념과 실천이라고 하는 일종의 도약이 결합되었을때에만 가능한 개연성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네. 저걸 뒤집어 말해보면 지식 그 자체로는 어떤 것도 도출되지 않는다는 거죠.
그리고 오히려 신념이 있다면 실천을 하는 데 있어서 지식은 문제되지 않죠. 광신도들이 그 예라고 볼 수 있죠. 그리고 심하게 말하자면 지젝이 언급한 '참된 행위'란 것도 광신도의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지식으로부터는 아무것도 도출되지 않으니, 결국 그들도 신념에 따라 그걸 '참된 행위'라고 생각할 뿐이니까요.

무엇이 그것을 '참된 행위'라 생각하게 했는지, 그러한 신념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는 살펴볼 문제입니다. 무엇을 '선' 또는 '좋은 것'으로 여기는지는 윤리적 문제겠지요. 그리고 대개는 거기에는 어떤 목적(예: 공공의 이익)이나 가치판단(예: 이타적 행위는 좋은 것이다)이 들어가겠고, 이는 어떤 것도 지식은 아닙니다. 뭐 예외적으로 칸트 같은 경우는 실천이성비판에서 도덕법칙이 순수이성의 요청이라고 했지만요.

앞으로의 게시물도 기대하겠습니다. ^^;

yoonta 2010-08-26 02:21   좋아요 0 | URL
지젝이 이야기하는 "참된 행위"는 맹목에 기반된다라기보다는 합리적 이성에 기반한다라고 봐야합니다. 라캉식으로 이야기하자면 그의 실재계는 상징계의 외부에 존재한다기보다는 상징계의 내부(의 틈새)에 있는 것이므로 말이지요.

수학의 예를 들자면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수학의 무모순성을 증명하려는 형식주의를 극단으로 밀어붙인 끝에 도출된 수학의 한계지점이었던 사실을 들수있겠네요.


참된 행위는 이처럼 합리적 이성의 지속적 추구의 한계지점에서 획득되는 헤겔의 절대정신 혹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라캉의 (상징계 내부의)실재계같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님이 예로드신 칸트의 경우(도덕법칙은 순수이성의 요청)도 마찬가지라고 할수있겠네요.

안티크리스트 2010-08-29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합리적 이성에 기반한 행위란 엄밀히 말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행위도 이성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죠. 행위는 항상 어떤 믿음에 기반합니다. 합리적 이성의 한계지점에서도 어떠한 행위도 도출되지 않습니다. 행위는 항상 선택에 문제고, 어떤 행위도 합리적 이성의 비호를 받을 자격을 갖추지 않습니다.

칸트는 인간이 감정에 의해서만 의지가 따라가는게 아니라, 이성의 의해서도 의지가 정해질 수 있어야 하므로, 감정에 기반하지 않은 이성에 기반한 도덕법칙을 제안했지만, 이성으로부터 특정한 도덕법칙 혹은 어떠한 참된행위가 나와야 될 어떤 제한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성은 자신이 설정한 어떤 행위도 참된 행위라 말할 수 있으며, 자신의 행위를 긍정하고 정당화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참된 행위'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yoonta님이 합리적 이성에 기반해서 어떠한 행위가 "참된 행위"가 되는지 한번 도출하는 예시를 보고싶네요. 지젝이 했던 예라도 상관없구요.
다만 여기서 합리적 이성이 대중의 윤리감정이나 상식에 기반하면 곤란하겠네요.

yoonta 2010-08-29 02:21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내용과 관련해서는 저의 이 페이퍼
http://blog.aladin.co.kr/yoonta/category/16878918?CommunityType=MyPaper&page=4

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글 내용에서 원주율에서 9가 100번 연속으로 나오는 부분이 존재하는가하는 부분을 승인하는가아닌가 하는문제가 바로 참된 행위가 칸트적 의미에서의 "선험적 종합판단'인가와 연관된다라고 보는데요. 이는 실재론적 입장에 섰을때의 포지션의 연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라캉이 이야기하는 고유명사의 의미나 (공백으로서의)주체의 의미도 결국 이와 같다라고 봅니다. "생각할수 없는 것을 생각"하기. 이게 바로 지젝이 이야기 하고픈 "참된 행위"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안티크리스트 2010-08-29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원주율에서 9의 연속을 확정할 수 없다는 것이 왜 참된 행위가 칸트적의미의 '선험적 종합판단'인가 아닌가와 연관되는지 이해가 안되네요. 원주율은 계산된 값이고, 십진법은 임의적이기 때문에 9는 100번이 아니라 무한대에 가깝게도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그냥 반대로 원주율을 2진법으로 바꾸면 1이 연속으로 나오는 정도를 쉽게 관찰할 수 있겠죠. 진법을 늘리면 관찰 빈도가 줄어들 뿐이겠죠. 그리고 칸트가 참된 행위가 '선험적 종합판단'으로 도출된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을 순수이성비판의 밑에서 논했을 텐데, 칸트는 도덕법칙이 순수이성의 요청이라면서 이를 선험적 종합판단의 결과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생각할 수 없는 것 생각"하기가 참된 행위인가요? 생각을 행위의 일종으로 보는 거라면, 지금까지 얘기했던 인식과 실천의 간극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인식(생각)이 곧 실천인데 무슨 간극이 존재한다는 것인지요?
아니면 "생각할 수 없는 것 생각"을 한 결과 어떤 "참된 행위"를 해야 겠다는 것이 도출된다는 것인지? 그렇다면 그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생각이란게 어떻게 도출되는지 하며, 또 그걸 왜 행동에 옮겨야 한다는 게 도출되는지 궁금하네요.

라캉의 고유명사의 의미와 주체의 의미도 그게 하나의 해석이 아닌 합리적 이성의 필연적인 인식인지와, 또 그러부터 어떠한 실천이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지요?

yoonta 2010-08-29 19:40   좋아요 0 | URL
원주율은 계산된 값이 아니라 계산된 것으로 추정된 값이죠. 무리수처럼 원주율은 소수점이하가 무한히 계속되기 때문에 정확히 그 수를 알수없는 값입니다. 그런데 이 '알수없는 것'을 '아는 것'으로 가정하기로 '약속'한 것이 원주율이라는 점입니다. 십진법이냐 2진법이냐는 이야기는 제가 하고픈 이야기와는 상관없는 내용이고요. 핵심은 원주율의 '실재성'을 어떻게 보느냐에 있다는 것입니다.

순수이성비판을 기초로 한 칸트 윤리학을 정초하기의 핵심에는 저는 이 칸트의 선험적종합판단에 기초한 <순수이성비판>이 있다고 보는 것인데요. 이러한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간의 연관성은 가라타니고진의 <트랜스크리틱>에서 잘 설명하고 있는것으로 봅니다. 자세한 설명는 고진의 책을 참조하시는게 낫겠네요. 한가지 예를 들면 고진에 의하면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은 <순수이성비판>에서의 "초월"이라는 관점과 같습니다. 선험적 종합판단이 가능한 배경에도 초월이 있었던 것처럼 도덕이나 윤리가 가능한 것도 초월이라는 (형이상학적)괄호넣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보는 방식이지요. (트랜스크리틱 199~200쪽을 참조하세요)

제가 '실천'이나 '행위'를 이야기했을 때 이것을 '이론'이나 '법칙' 혹은 '이성'과는 다른 무엇이라고 본다면 그 다른 것으로 '신념'이나 혹은 '윤리'를 전제로한 행위라고 생각한 것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순수하게 이론에만 기반한 "이론적 실천"이라는 것도 '이론상' 가능하겠지만 행위나 실천의 특성이라는 것에는 어쩔수없이 '우연성'이 개입하기 마련이지요. 때문에 말하자면 "참된 행위"란 이러한 우연성을 긍정하면서도 동시에 이러한 우연성의 (사후적)필연성을 행위의 근거로 삼는 방식이라고 해야할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라캉의 고유명사나 기표의 의미를 생각해 볼수있다는 것인데요. 새로운 고유명사나 기표는 기존의 상징계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기표입니다. 즉 기존의 상징계 내부에서는 "생각해 낼수 없는" 무엇인 셈이지요. 그러나 새로운 고유명사 혹은 기표를 만들어내는 언표"행위"를 함에 의해 이러한 기존의 질서나 논리의 회로로서 생각해 낼수 없는 공백이 있음을 드러냅니다. 기표는 때문에 "생각할 수없는 것을 생각"하기입니다. 고유명의 언표작용은 따라서 상징계(기존의 질서)내부의 공백을 드러내는 '실천'이 됩니다.








안티크리스트 2010-08-29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원주율을 10진법으로 현재 표기하는데 0에서부터 9까지의 숫자는 당연히 나옵니다. 이를 20진법으로 표현해도 100진법으로 표현해도 그 진법 내부의 숫자는 다 나올겁니다. 그러므로 9가 100번 연속된 숫자를 진법으로 하는 그 진법으로 원주율을 표기했을 때, 그 진법의 모든 숫자가 나오지 않으리란 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원주율을 계산이야 끝나지 않았지만, 9가 100번 연속된 숫자가 나오느냐 안나오느냐의 문제는 나온다가 맞지 않냐는 거죠.
그리고 저는 원주율의 실재성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그것과 이론과 실천의 간극과의 연관도 모르겠습니다.

가라타니고진의 책을 참조하는 건 무리인거 같고, 키워드를 주시면 네이버에서 본문검색은 되더군요. (199쪽에 나오는 단어를 알려주시면 될듯)
순수이성비판은 시간과 공간이 우리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져있고, 공간으로부터 기하학의 명제들이 선험적으로 도출되므로 이런 걸 선험적 판단이라고 말한 것인데, 선험적 종합판단에는 어떠한 '초월'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선험적으로 주어진 시간과 공간으로부터도 일련의 기하학 명제들을 도출할 수 있을 뿐이지요. 경험에 상관없이요. 초월을 선험과 같은 의미로 쓰시는 거라면 선험적 관점이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네요.

"제가 '실천'이나 '행위'를 이야기했을 때 이것을 '이론'이나 '법칙' 혹은 '이성'과는 다른 무엇이라고 본다면 그 다른 것으로 '신념'이나 혹은 '윤리'를 전제로한 행위라고 생각한 것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네. 신념이나 윤리없이는 당연히 행위는 도출될 수 없죠. 그런데 그 신념과 윤리는 어떠한 이성에서도 필연적으로 도출되지 않는 거죠. 그러므로 판단과정이 길든 짧든 이성이 많이 개입되는 적게 개입되든, 그 기저의 신념 또는 윤리가 근거가 없다는 점에서 참된행위와 광신도의 행위는 차이점이 없는 것이며, 어떠한 것을 참된행위라 규정할 근거또한 없는 것입니다.
신념이나 윤리가 '우연성'이라 하시면서 그걸 다시 사후적 필연성이라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전혀 모르겠네요. 또 그 사후적 필연성이라는 게 이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된다는 의미라면 신념이나 윤리를 '전제'할 필요는 없겠죠.

새로운 고유명사나 기표를 만들어내는 게 기존의 언어로는 생각해 낼 수 없는 것을 생각한 거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의미를 부여할 어떤 상황이나 내용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 상황이나 내용이 기존 언어로 과연 그러한 새로운 고유명사나 기표 없이는 표현이 될 수 없었던 것인지가 설명되어야 겠지요. 단순히 새로운 걸 만든다고 생각할 수 없는 걸 생각한 건 아닙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존 언어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걸 말하는 '실천'을 현대의 냉소적 이성이 인식만 할 뿐 말하지(실천하지) 못해서 간극이 생겼던 건가요?
또 기존의 질서나 논리회로의 공백을 찾아내 이를 언표하는 일이 '참된 행위'라는 건 별다른 이성적 근거를 가진다고 보기 힘드네요.

yoonta 2010-08-29 23:57   좋아요 0 | URL
음.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는감이 있는데요.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님의 진법이야기는 제가 이야기하려는 "원주율의 실재성"과는 큰 관련이 없습니다. 이진법이건 십진법이건간에 "9가 100번 혹은 1000번 연속으로 나온다"라는 사건은 원리적으로 동일한 사건이니까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사건자체를 '실재로 존재하는것'으로 승인하는가의여부입니다. 님은 당연히 나오겠지라고 생각하십니다만 그렇게만 보면 그것은 일종의 '소박실재론'이지요. 문제는 9가 100번 연속으로 나오는지 안나오는지의 여부를 알수 없으므로 그러한 수는 실재하지(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관점이 있다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바로 메이야수가 비판하고자하는 '상관주의'이고 괴델이 비판하는 직관주의수학자들이 되겠지요. 이것이 왜 이론과 실천간의 문제와 연관되냐하면 여기에 일종의 '도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분석적 추론만으로는 자동적으로 유도되지 않는 믿음이 개입되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두번째 문단과 세번째 문단에 대한 답변은 고진의 <트랜스크리틱>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한두페이지 보는것은 큰 의미가 없고요. 칸트를 다루는 1부전체를 읽어보실것을 권해드립니다. 님이 의문을 갖는 부분에 대한 대부분의 답변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댓글로 하나하나 답변드리는것보다는 아무래도 그게 좋을것 같아요. 제가 지금처럼 계속 답변드리게 되는 원인이 바로 제 답변의 불충분때문인거 같아서요.

님은 (제가보기에)이성과 행위간에 뛰어넘을수 없는 간극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행위이든지 간에 행위는 이성과 필연적 연관은 없다라는 관점을 고수하시는것 같습니다. 제가보기에 이런 믿음은 라캉은 물론 칸트철학과도 좀 거리가 있어보이는데요. 저는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칸트철학 내부에 이러한 간극을 뛰어넘을수있는 방식을 마련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소위 합리와 경험을 "종합"했다라고하는 그 방식으로 말이지요. 기회가 되면 님이 의문을 품는 부분에 대해서 한번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려면 지금은 가물가물한 <트랜스크리틱>을 한번 더 훑어 보야야 되겠네요.^^;

안티크리스트 2010-08-30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원주율의 9가 100번 존재하는 문제에 대해 저는 존재한다는 입장을 취했지만, 그걸 이성으로부터의 필연적인 도출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개입될 필요도 '도약'이 있지도 않습니다.

별 뜻 없이 쓰신 것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성과 행위간에 필연적 연관이 없다는 처음에도 언급한 "Is - Ought Problem" 을 인지할 뿐이지, 어떤 "믿음"을 가지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저 간극을 필연적 연관으로 매우는 일은, 아직 어느 누구도 했다고 평가되지 않습니다.

고진의 책은 큰 흥미가 가질 않네요. 훑어보실 기회 되시면 새로운 답변 기대하겠습니다.

yoonta 2010-08-30 16:47   좋아요 0 | URL
뭔가 자꾸 서로 빗나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인데요.

원주율에 9가 100번 연속으로 나온다는 사실이 필연적 도출이라고 저는 이야기한 바 없습니다. '필연적이지 않기' 때문에 믿음이 도입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지요. 그게 메이야수가 이야기하는 우연성의 필연성이라면 그러한 의미에서의 필연성은 논리나 추론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신념이나 믿음에 의해서 가능한 관점이 아닌가하는 정도만 이야기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님은 필연적이지 않기 때문에 추론적으로 계산가능하다라고 말씀하시는건가요?(필연적이지 않기 때문에 믿음이나 도약이 개입될 필요가 없다라는 말은 좀 모순적인 표현으로 보이는군요. 필연적이지 않다는 말은 우연적이라는 이야기고 그렇다면 논리보다는 무작위적 행위에 더 가까운 것이니까요) 믿음이나 신념이 필요없으려면 이성으로부터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분석판단으로부터 추론가능한 무엇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9가 100번 혹은 1000번 연속으로 나오는가 아닌가와 같은 문제를 생각하려면 수학에서는 '무한'개념이 도입되어야 합니다. 소수점이하가 무한히 펼쳐진다라는 가정이 있어야 하기때문이지요. 그런데 무한은 계산불가능합니다. 이처럼 계산불가능한 요소를 수학에 도입해야 되느냐 마느냐를 놓고 수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있어왔죠. 그러다 결국 수학내적인 필요에 의해서 이것이 도입되었던 것인데 그것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미분이지요. 원주율과 같은 초월수도 마찬가지고요. 때문에 수학은 따지고보면 역설적인 체계입니다. 계산불가능성을 기초로 계산가능성을 탐색해야하는 학문이니까요.


안티크리스트 2010-08-31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믿음이나 도약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는 저는 그것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제 답이 맞다고 어떤 믿음이나 도약을 발판삼아 주장하지 않죠.
마찬가지로 어떤 행위가 '참된 행위'라고 어떤 믿음이나 도약을 발판삼아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러한 참된 행위는 광신도의 행위와 다름없이 이성으로부터는 도출되지 않는 것이라고 할 뿐이죠.

yoonta님과 제 논의가 빗나가는 이유는 제가 볼때에는 역설적인 단어의 사용에 있는 것 같습니다. '우연성의 필연성'같은 단어 말이죠. 이걸 풀면 우연성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건데, 그러면 그건 우연적일 수 밖에 없다는 뜻이겠죠. 그런데 yoonta님은 "필연"이란 단어를 쓰면서 마치 그러한 연결이 필연적이라는 듯한 뉘앙스를 남겨놓습니다.

정리해보면 참된 행위 = 이성적 추론 + 우연적 요소(신념 또는 믿음)
그런데 저 우연적 요소는 임의의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참된행위와 광신도의 행위는 구별불가능하다. 우연적 요소는 말 그대로 우연이기 때문에 합리적 이성은 저러한 요소 때문에 참된 행위를 하기 위해 도약을 할 필요도 고민할 필요도 없다. 참된 행위란 임의적이기 때문에.

yoonta 2010-08-31 02:35   좋아요 0 | URL
글로만 이야기하려니 이런 일이 생기는듯 합니다.^^;;
제가 표현이 서툴다는 일차적 문제점도 있지만요.

"믿음이나 도약이 필요하지 않는다 고로 불확실성을 받아들인다.."
"답이 맞다고하더라도 믿음이나 도약을 주장하지 않는다(반드시 그렇게 연결될 필연성도 없다)"
"참된 행위는 광신도의 행위와 다름없이 이성과는 무관하다"

님의 포지션은 결국 이렇게 요약될수 있는 것이로군요.

님이 말씀하시는 제 글의 "뉘앙스"는 필연성 속의 우연성 혹은 그 반대간의 역설적 관계를 제가 계속 이야기하기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걸 "역설적 단어의 사용"이라고 보셨다면 정확히 보신 겁니다. 다만 님은 제가 그 표현을 사용하는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안하시는 것같아요.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라캉이론의 상징계내부의 실재계나 지젝의 (무작위로서가 아닌) "참된 행위" 혹은 메이야수의 "우연성의 필연성" 그리고 수학적 체계 내부의 무한의 패러독스 혹은 칸트의 선험적 종합판단등같은 사례들도 결국 다 이것을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인데 납득이 안되셨다면 결과적으로 제 설명이 부실했다거나 아니면 확고한 입장의 차이가 있다거나 해야겠네요.

여튼 님과의 논의는 이정도에서 마무리하는것이 좋겠습니다. 기회가 되면 관련된 글을 포스팅해보도록 하죠.

근데 안티크리스트님은 알라딘에 블로그가 없으신가봐요? 로그인하지 않은 아이디시네요..^^






안티크리스트 2010-08-31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로그 관리를 안해서 로그인을 안했었어요. ^^;

저도 이후에 관련 글을 포스팅해보겠습니다. 하긴 맥락이 쉽게 이해되는 거라면 저자들이 책을 힘들게 쓸 필요도 없겠죠 ^^;

토론 즐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