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랑스철학자인 퀑탱 메이야수의 <유한성 이후>라는 책입니다.  

 



개인적으로 실재론에 관심이 많은 차에 바디우의 수학을 기초로한 실재론을 전개하는 이 메이야수 책을 읽고 바디우를 읽을때와 같은 일종의 계시성을 느끼게 되는군요.  메이야수는 바디우와 동일하게 수학을 사변적 실재를 논증하는 유일한 토대임을 논증합니다. 특히 그는 칸트와 칸트 이후의 철학을 인식주관과 실재 사이의 관계 속에서 세계 혹은 경험세계를 기초지으려는 상관주의철학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그 비판의 방식은 고전 형이상학이나 데카르트적인 독단적 철학의 방식이라기보다는 "선조성"(메이야수가 개발한 개념으로서 우주의 기원이나 지구의 기원처럼 상관적인식의 경험적 주체인 인간 이전의 실재 혹은 대상이 가진 과학적/수학적 성질을 의미)이 던지는 의미들을 논증해야 함을 이야기합니다. 독단주의 철학은 상관주의적 관계 이전의 실재를 신비화하고 실체화 혹은 총체화할 뿐 그것에 대해서 존재론적 설명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는 마치 인간의 유한한 경험의 한계 내부에 세계를 고정시키고 그 밖의 외부를 "유폐적 외부"로서 인식 불가능하거나 혹은 그러므로 비존재하는 무엇으로 간주하는  상관주의철학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독단주의철학과 칸트 이후의 상관주의 철학은  인간의 인식가능성 내부의 세계와 인식 외부의 실재간에 뛰어넘을수 없는 간극을 설정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이원화에 대한 비판은 종교를 과학과 분리시킨 근대이후의 서양의 세속적 합리주의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있습니다. 종교의 영역 다시말해 인간의 경험적 인식의 세계 너머에 있는 인식불가능의 범주를 다루는 영역과 세속의 영역, 즉 과학적 실험과 관측이 가능하고 경험적 인식으로 설명가능한 세계 혹은 이와 관련된 지식이나 인식간의 분리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메이야수는 이러한 분리를 극복하려 합니다. 그는 ‘절대자’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철학적 사유 자체가 헤겔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아무것도 전제하지 않는 무전제에서 시작하는데 이 무전제는 다름아닌 사유불가능의 실재와 다름 없습니다. 그러나 사유 혹은 철학적 이성은 아무것도 전제하지 않은 실재의 공간에서 시작해야만 하는데 그것이 철학의 고유한 성질을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메이야수가 생각하는 절대자는 헤겔적인 ‘총체화’되는 실재가 아닙니다. 바디우가 <존재와 사건>에서 “하나로 셈 되어지는” 대상으로 분류한 것과는 다른 탈총체화의 경로를 걷는 절대자인 것이지요.

개연적 추론이 유의미해지기 위해서는 전체를 인식가능한 확률적이고 개연적인 “하나로 셈하기” 과정이 불가피하지만 그 결과 얻어지는 세계는 일의적 세계가 아닙니다. 대상의 인식가능성은 개연적 추론이 도달하는 필연성에 의해서 획득되는 동시에 탈총체화되는 우연성이라는 성격을 동시에 가지기 때문이지요. 메이야수는 이러한 실재의 특성을 바디우가 그랬던 것처럼 칸토르(칸토어)의 집합론을 통해서 논증합니다.

그 결과 메이야수가 도달한 결론은 일종의 세계의 “우연성의 필연성”입니다. 합법칙적으로 인식 불가능한 대상(우연성으로서의 대상)을 개연적 추론이라는 필연성을 통해서 논증하기. 그러나 그로부터 얻어지는 총체성은 탈총체화된 절대자입니다. 이러한 절대자를 사유하는 철학은 앞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독단주의나 상관주의 철학이 철학 혹은 과학과 종교를 분리함으로써 야기한 종교의 신비화와 상대주의 혹은 상관주의 철학의 무비판성 그리고 과학의 도구적 합리성에 대한 비판이 될 수있는 기초가 됩니다.


2. 다음으로 흥미롭게 읽고 있는 책은 테리 이글턴의 <신을 옹호하다>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만들어진 신>이라는 저작을 써서 종교를 비판해온 도킨스와 <신은 위대하지 않다> 혹은 테레사수녀를 비판한 <자비를 팔다>라는 책을 썼던 히친스를 “디치킨스”라는 합성어를 사용해서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는 도킨스의 종교비판을 종교와 과학처럼 근본적으로 상이한 대상을 혼동한 일종의 “범주의 오류”에 빠진 책이라고 비난합니다.

“세상 곧 우주가 필연적인 게 아니기에 우리는 세상을 지배하는 규칙을 선험적인 원칙으로부터 추론해낼 수 없다. 그 대신, 세상이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정확히 관찰해야 한다. 그것이 과학의 역할이다.” (<신을 옹호하다>.테리 이글턴. 20쪽)      

부연하자면 이글턴은 (기독교의) 신은 세상을 과학이 추론할 수있는 합리적인 필연이나 세속적인 필요나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성경에 의하자면 신은 “동기 없는 행위, 무상의 행위”라는 “아찔한 우연성”을 통해서 세계를 창조하였을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도킨스와 같은 무신론적 과학자의 시각을 통해본 종교는 합목적적이고 합리적인 필연성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에 다만 기각되어야만 하는 신념체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디치킨스류의 비판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앞서도 이야기했다시피 이는 종교와 과학의 근본적 차이를 망각한 비판일 뿐이므로 아무리 과학이라는 현미경을 통해서 종교를 들여다 보려고 해도 종교가 가진 근본적 토대를 비판할 수는 없다는 것이 이글턴의 논점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러한 이글턴의 관점은 앞서서 제가 소개한 메이야수의 철학에서 보자면 데카르트적 독단주의나 혹은 상관주의적 철학의 입장을 반복하는것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종교와 과학간에 넘을 수없는 차이를 설정하고 후자의 논증의 방식으로 전자를 비판하면 안된다고 하는 방식이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저로서는 이러한 이글턴의 포지션은 도킨스류의 종교비판에 대한 탁월한 반비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바디우나 메이야수처럼 철학과 수학 혹은 과학의 가능성과 공통된 지반이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획득되는 존재론적 토대를 확인하는 방식만이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대한 올바른 비판이 될 수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몇가지 참조해야 될 구절들이 있습니다. 특히 최근에 미국과 한국등에서 문제가 되는 기독교근본주의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글턴은 맑스가 종교는 “영혼없는 상황의 영혼”이라고 했을때 전제했던 종교가 세속적 “실리만을 추구하는 물질주의자들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종교, 즉 영적인 것을 현실에서 분리하여 감상적으로만 이해하는 유형의 종교”(같은 책 59쪽)였음을 이야기합니다. 세속적인 실리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종교를 통해서 영혼의 위안이나 안식을 구하려는 역설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요. 최근의 뉴에이지 스타일의 종교가 유행인 것도 (혹은 서양에서의 불교유행도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이러한 종류의 것으로 생각가능하지요. 
 

반면 이슬람 근본주의나 기독교근본주의는 “단순히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처를 찾는” 방식이 아니라 대중적 운동이나 테러와 같은 저항을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기본적으로 “반정치적”이라는 것이 이글턴의 분석입니다. 이와같은 종교를 통한 반정치가 가능한 배경에 그는 문화주의culturalism의 과잉을 지적합니다. 문화가 지나치게 비대해진 이유는 “기존정치에 대한 환멸의 산물”을 예로 듭니다. “요컨대 기독교 근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이슬람 급진주의도 정치를 종교로 대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정치는 우리를 해방시키지 못했지만 종교라면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라는 것이지요. 궁핍한 경제적 조건에 내몰려 정치적 무관심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는 대중들이 흔히 이러한 근본주의적인 종교적 맹신에 빠지게 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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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크리스트 2010-08-20 0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메이야수의 책은 언제 한번 읽어보고 싶던 책이라 뭐 읽어봐야 더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겠지만,
"이는 마치 인간의 유한한 경험의 한계 내부에 세계를 고정시키고 그 밖의 외부를 "유폐적 외부"로서 인식 불가능하거나 혹은 그러므로 비존재하는 무엇으로 간주하는 상관주의철학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독단주의철학과 칸트 이후의 상관주의 철학은 인간의 인식가능성 내부의 세계와 인식 외부의 실재(이거 오타 맞죠? 인식외부의 '실재'라니...)간에 뛰어넘을수 없는 간극을 설정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게 됩니다"
칸트의 철학이 순수이성의 사용의 한계를 설정하였던 것이 물론 그 의도가 '절대자'를 인식불가능한 외부로 대피시켜드린 것일 수는 있어도, 그게 간극을 설정했다고 보는 것은 억지스럽습니다. 칸트 자신이 서문에서인가 말했듯이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는 일이 없도록 이성 사용의 한계를 긋고자 한 시도이니까요.
제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메이아수는 우연성이야 말로 절대자이다라는 식의 해석 같은데, 우연성의 필연성이든 그냥 우연성이든 그건 절대자의 의미를 그냥 해체하는, 뭐 굳이 절대자라는 말을 쓸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네요. 비유하자면 칸트는 신을 안보이는 곳으로 피신시켰다면, 메이아수는 신을 죽여놓고는 신자들을 데려와서는 '아무거나' 붙잡고서 이게 당신들의 신이지 않소? 우리는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소 라고 말하는 꼴 같네요.

yoonta 2010-08-20 14:43   좋아요 0 | URL
1."인식외부의 실재"라는 표현은 메이야수의 '선조성'개념에 따른다고 보심 되겠습니다.

2. 메이야수에 따르면 칸트의 비판철학은 "약한 상관주의"에 해당합니다. 때문에 이 또한 메이야수의 관점에 따르면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저의 글에서는 이부분은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으니 자세한 설명은 책을 직접보시는게 좋을거 같아요. 저의 이해가 메이야수의 이야기를 자칫 왜곡할 수도 있으니까요.

3. 절대자란 표현을 고수하는 것은 '실재'에 대한 그의 실재론적 포지션 때문이겠지요. 메이야수가 절대자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역시 책을 보시는게 좋을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