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과 기억:반복과 차이의 운동』(김재희, 살림)을 읽다가 제논의 역설과 관련한 베르그손의 언급이 있어서 이와 관련하여 떠오른 생각들을 한 번 정리해 본다.
제논의 역설에 의하면 활 시위를 떠난 화살은 과녁에 도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과녁을 향하는 화살은 과녁까지의 거리의 절반을 지나야 하고 또 그 위치의 반이 되는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그것의 반에 도달해야 하고 이런 식으로 무한히 반복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이 무한히 반복되는 결과 화살은 결코 목표물에 도달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제논의 역설이다.
한편, 베르그손은 이러한 제논의 역설에 대해 평가하면서 그것이 “과학적 시간의 본질을 논증”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가 보기에 이러한 역설이 가능한 이유는 과학이 “운동 그 자체를 운동체가 지나간 공간으로 환원”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당시의 과학이 대상이 되는 운동과정 전체를 완전히 주어진 것으로 가정하였고 또 그것을 다시 공간적으로 분할함에 의해 ‘시간’을 유도해 내었다는 점을 베르그손은 지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간으로 환원된” 시간은 실재의 시간이 가진 ‘예측불가능성’을 보지 못한다고 베르그손은 비판한다. 이 때의 시간은 모든 과정을 한꺼번에 펼쳐 놓고 부분으로 무한히 분할 가능한 공간으로 시간을 대체하는 공간화된 시간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모든 운동의 과정이 분할가능한 만큼 예측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런 결정론적 구조의 운동에서는 화살은 활시위를 떠나면 반드시 목표물에 도달하게 된다. 아니 목표물에 도달하는 것을 전제로 운동이라는 것이 성립한다. 그럼으로써 운동의 결과는 항상 예측가능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베르그손은 이러한 운동 그리고 공간으로 환원된 시간은 실재의 시간과는 무관한 것으로 간주한다. 시간의 가장 중요한 본성은 ‘예측불가능성’과 ‘연속성’이다. 때문에 그는 “시간은 발명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베르그손의 철학개념으로 표현하자면, ‘지속’은 “한마디로 과학적 시간과 달리 불가분한 질적 변화의 연속으로서 예측 불가능한 미래로 열려 있는 창조적이고 발명적인 실재 시간”인 것이다.
이처럼 제논의 역설은 기존 과학에서의 공간화된 시간이 가진 모순점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과학적 시간의 본성을 논증”하는 것으로 베르그손은 평가하였다. 나아가 그는 엘레아 학파가 제논의 역설을 통해 보여준 것처럼 과학의 한계를 철학 혹은 형이상학으로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보게 된다. ‘창조적인 예측불가능성’을 가진 실재적 ‘지속’에 대한 인식은 과학만으로는 파악 할 수 없고 오직 형이상학이라는 우회로를 통해야만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베르그손의 과학에 대한 비판은 고전역학의 결정론적인 공간과 시간 개념에 대한 비판으로서는 유효하지만 20세기 이후에 등장한 양자역학이나 최신의 물리학의 경향에까지 유효하다고 볼 수는 없다. 특히 양자역학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가 이론화한 것처럼 “불확정성”을 자신의 가장 주요한 특징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사실 시간은 공간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는 하지만 공간 그 자체는 아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에서 보여준 4차원개념도 비록 공간이 가진 3차원에 시간차원을 결합하여 탄생한 것이긴 하지만 시간을 공간화한 것이라기보다는 공간의 3차원 +시간차원인 것이지 공간 자체가 4차원으로 확장된 것은 아니다. (최근 ‘여분의 공간차원’과 관련된 물리학 예컨대 초끈이론등과 같은 물리학은 이와는 달리 공간 자체를 여분의 차원이 숨어있는 3차원 이상의 공간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을 기존의 공간차원과 결합시켜 생각하면서 베르그손이 파악한 시간차원의 예측불가능성을 간과하게 된다는 점이다. 사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도 뉴턴의 고전역학적 시공간 개념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성이론은 고전역학을 보다 일반적인 차원으로 확장시킨 것이지 그것에 대한 폐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베르그손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비판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조. http://www.ottobw.dds.nl/filosofie/consciousness.htm )
그런데 이러한 과학에 대한 그의 비판은 양자역학에 이르게 되면 양상이 완전히 달라진다. 양자역학은 고전역학의 이러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운동의 결정론적 시각을 문제삼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그 이유는 양자역학이 본질적으로 기존의 물리학과는 달리 예측불가능성을 전제로 한 확률론에 기반하는 물리학이기 때문이다. 통계 혹은 확률론이 물리학에 본격적으로 도입될 수 있었던 계기는 루드비히 볼츠만(Ludwig Boltzman)에 의해서였다. 그는 기체의 열역학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클라우지우스(Rudolf Clausius)가 발견한 열역학 제 2법칙 즉, 엔트로피법칙(열은 항상 뜨거운 곳에서 차가운 곳으로 흐르고 고립된 계의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하고 열평형상태에서 최대에 이른다는 법칙.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조 http://en.wikipedia.org/wiki/Entropy )을 새롭게 해석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역학에서 통계학과 확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에 의하면 엔트로피 법칙은 다음 식으로 표현된다.
S = k log W
여기에서 S는 엔트로피, k는 볼츠만 상수(k = (1.380622±0.000043)×10-23 J·K-1)이고 W(Wahrscheinlichkeit)는 원자들의 특정 배열이 나타나는 빈도 혹은 확률이다. 이 공식에 의해 그는 통계역학(statistical mechanics)의 창시자가 되었으나 이러한 그의 통계역학은 생전에 철저히 무시당하였고 결국 이로 인해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볼츠만의 통계역학의 중요성은 막스 플랑크(Max Planck)가 전자기복사에 대해서 연구하면서 뒤늦게 다시 조명받게 되었는데 결국 그는 물질이 양자(quantum)라고 불리우는 에너지단위로만 전자기복사를 흡수할수 있고 그 양자는 복사의 진동수에 비례함을 발견하여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물리학의 탄생을 알리게 된다.
그런데 이처럼 열역학과 양자역학에 의해 정교화된 엔트로피법칙에 의하면 시간의 비가역적 성격과 관련한 하나의 설명을 가능하게 한다. 쏜 화살이 과녁에 도달하는 이유는 시간이 원래부터 한 방향(과녁에 도착하는 방향)으로만 진행하도록 처음부터 규정되어 있어서라기보다는 과녁에 도착하는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 확률적으로 가장 근사치에 가깝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시간이 거꾸로 흘러서 과녁을 향해 날아가던 화살이 다시 활시위로 돌아오는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살이 과녁을 향하는 방향으로 진행하는 이유는 단지 그렇게 진행하는 것이 확률적으로 더 큰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서이지 원래부터 그렇게 진행되게끔 미리 결정되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거시세계에서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과 같은 사건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양자와 같은 미시세계에서는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과 같은 일은 기이한 현상이 실제로 관측된다. 대표적인 예가 “양자적 얽힘”현상이다. 아인슈타인이 포돌스키(Podolsky) 와 로젠(Rosen)과 함께 통해 양자역학의 허구성을 밝히기 위해 고안한 사고실험인 소위 EPR실험(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조 http://en.wikipedia.org/wiki/EPR_paradox )에 의해 예견된 이 양자적 얽힘(Quantum entanglement) 현상에 의하면 서로 연관된(correlated) 한 쌍의 양자를 서로 멀리 떨어뜨려 놓은 뒤(이론적으로는 무한히 먼 거리도 가능하다) 두 양자 중 한 쪽의 스핀을 ‘관측’하게 되면 관측된 양자의 파동함수가 붕괴되면서 우리에게 특정한 스핀(예컨대 업스핀 혹은 다운스핀)으로 관측된다. 그런데 이러한 한 쪽 양자의 운동에 대한 관측(정확히 이 “관측”이 양자적 얽힘 현상의 원인인지 아닌지는 아직 논란 중이라고 봐야 한다)이 반대편 양자에 (빛보다 빠른 속도로) 거의 동시에 전달되면서 관측된 양자의 스핀과 동일한 스핀이 반대쪽 양자에도 관측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순간적인 정보의 전달이 가능하려면 빛의 속도를 능가해야 하는데 특수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이러한 속도의 정보의 전달은 불가능하므로 양자역학은 잘못된 이론이라고 아인슈타인은 EPR실험을 통해 주장한 바 있다.
그런데 이런 믿기 힘든 현상이 실제로 양자세계에서는 가능함을 벨(John Stewart Bell)이 그의 유명한 벨부등식(Bell's inequality) 그리고 아스펙Aspect의 실험을 통해 보여주었던 것이다. 물론 벨부등식이 양자역학의 최종적 승리를 보증하고 상대성이론의 오류를 보여준 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특수상대성이론에서 빛의 속도는 “모든 속도의 한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관측자의 운동상태에 상관없이 모든 관측자들의 눈에 ‘동일한 속도로 보이는’ 기준의 역할”(브라이언 그린. 우주의 구조. 승산. 186쪽)을 한다는 것. 이로서 상대성이론과 아스펙의 실험은 공존가능하다는 것이 물리학자들의 해석이다.(EPR실험과 벨부등식과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우주의 구조』(브라이언 그린. 승산) 4장 혹은 http://en.wikipedia.org/wiki/Bell_inequality 를 참조)
이러한 “양자적 얽힘 현상”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양자적 세계에서의 공간은 거시세계에서는 찾아볼 수없는 비국소성(nonlocality)현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비국소성은 즉, 서로 멀리 떨어진 한 쌍의 두 양자가 빛의 속도를 초월하여 서로 즉각적으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은 두 양자 사이에 놓인 공간이 유클리드기하학이나 고전물리학에서 당연한 전제로 생각하는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공간의 국소적인 독립적 분할가능성에 위배되는 공간이 가능함을, 공간이 양자적으로 서로 긴밀히 결합되어(얽혀)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비국소성 현상은 앞에서 살펴본 베르그손의 제논의 역설과 관련된 과학 비판과 관련이 있다. 그가 제논의 역설을 통해 비판했던 공간으로 환원된 기존 과학의 시간개념 그리고 분할가능한 독립적 공간만으로는 이 비국소적 공간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오히려 시간과 공간은 베르그손이 이야기한 바와 같이 분할 될 수 없는 (질적) 연속체 혹은 전체로서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따라서 이러한 비국소적 공간에서의 시간은 그것이 환원되어질 수 있는 기초로서의 공간을 마련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가령, 뉴턴의 고전역학에서 시간은 다음 공식으로 유도될 수 있다.
t = s / v
(t는 시간, s는 이동거리, v는 속도)
이 공식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여기에서 시간(t)은 분할가능한 거리(s)와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알 수 있는)속도(v)가 주어짐으로써 유도해 낼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여기에서의 운동량(v)은 양자역학에서는 하이젠크의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에 따르게 되므로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알 수 없게 되어 더 이상 결정론적으로 유도되지 않는다. 결국 양자역학에서의 시간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유도되어야만 한다. 앞에서 언급한 엔트로피가 양자역학에서의 시간에 대한 대안적 설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시간도 이제는 더 이상 절대적 조건으로 주어지는 변수가 아니라 엔트로피에 의하면 확률론적으로 접근해야만 하는 어떤 것이 된다. 이러한 시간개념은 결국 베르그손이 이야기한 예측불가능성 그리고 이러한 예측불가능성에 의해 창조적이며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성격을 부여받은 시간 혹은 지속(duration)개념과 공명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베르그손의 철학은 양자역학이 태동하기 이전에 이미 그것을 예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다행히도? 과학은 고전역학에서 양자역학으로 발전함으로해서 베르그손이 주장했던 것처럼 철학(형이상학)의 도움없이도 베르그손의 철학을 수용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현재적 사건으로부터 과거와 미래의 운동을 한꺼번에 펼쳐놓고 예측가능한 것으로 보는 고전역학의 결정론적 시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음으로써 양자역학은 결정론적이며 공간환원적인 시간을 베르그손적인 예측불가능성의 시간으로 뒤바꿔 놓았던 것이다.
물론 아직 논란은 남아있다. 양자역학이 결정적으로 상대성이론을 극복했다고 볼 수는 없다. 아직까지 이 두 물리학은 미시세계와 거시세계에 각각 독립적으로 유효한 이론으로 존재한다.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두 이론의 불충분함을 양자를 통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통일장이론을 발견하려고 시도함으로써 해소하려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는데 최근의 초끈이론이랄지 양자중력이론 등은 이러한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의 통일을 시도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아직까지 무엇이 시간과 공간을 설명하는 ‘진리’인지 이야기할 수 없다. 두 이론을 통일하는 통일장이론조차도 그것이 완결된 이론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철학으로서도 베르그손이 이야기하는 예측불가능성으로서의 시간만으로는 플라톤적 세계로 대표되는 실재론을 결정적으로 반박했다고 볼 수는 없다.(이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인데 다른 기회에 자세히 이야기해 보기로 하자) 베르그손의 칸트와 플라톤에 대한 비판(예컨대 『사유와 운동』(이광래. 문예출판사) 234~235쪽을 볼 것)은 재론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뛰어난 선견지명으로 양자역학을 예견하였지만 수학에 대해서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예견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그손의 철학은 여러 측면에서 오늘날의 세계를 해명하는데 유효해 보인다. 양자역학과 같은 물리학이 펼쳐 보이는 불확실성으로서의 세계를 논증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들뢰즈가 밝힌 것과 같이 그의 다수성 개념은 오늘날의 사회정치적 현실을 설명하는 훌륭한 개념으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