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박지현 옮김 / 살림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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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추리 소설은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범인을 쫒는 형식으로 구성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소설 서두에서 후시미가 대학 동창 니이야마를 욕실에서 살해하는 장면이 그대로 묘사되고 있다. 처음부터 살인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자를 알리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작품을 어떻게 끌고 가려는지 걱정도 되었다.

후시미를 비롯한 여섯 명은 대학 경음악부 서클 동창생이다. 펜션을 가지고 있던 안도의 형님이 요양을 떠나고 안도가 형님이 없는 동안 펜션의 관리를 맡게 되자 안도는 경음악부 서클 부원 중에 평소 술을 좋아하고 자주 어울렸던 사람들(자칭 알콜중독분과회 회원들)을 모아 동창회를 펜션에서 열기로 한다. 고급 주택에 위치한 펜션에는 동창생 알콜중독분과회 사람들과 이미 안면이 있는 회원 레이코의 동생 유카가 포함이 되어 있다. 서로가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들 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의 일상적인 수다. 그리고 가볍게 펜션 청소를 했었고 저녁을 먹기까지 각자 배정 받은 방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후시미가 니이야마를 살해하는 장면.

저녁을 먹기로 한 시간에 다른 사람은 다 모였지만 니이야마는 제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나타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니이야마가 제시간에 나타나지 않은 사실을 두고 사람들은 이런 저런 가벼운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중에는 살인을 한 후시미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니이야마의 상태를 알지 못하니 뭔 소리를 하든지 상관이 없지만 동창을 죽이고 대화의 자리에 편안하게 앉아있는 후시미를 보는 것은 놀라움이었다.

니이야마의 죽음을 알지 못하는 동창들은 나타나지 않는 그를 두고 수면 부족 상태에서 약을 먹고 잠이 들어 약속 된 시간에 나타나지 못한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니이야마의 수면 시간이 길어지고 깨워도 일어나지 않자 동창들은 걱정 반 수다 반 이야기를 풀고 있었다. 니이야마의 잠이 지나치다는 생각에 니이야마를 깨우기로 한 동창생들. 여기서부터 유카와 후시미의 두뇌 전쟁은 시작 된다.

작가가 소설의 첫머리에서 이미 후시미에 의한 니이야마의 살인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누가 범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럼 작가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후시미는 왜 동창인 니이야마를 죽였는지 살인의 동기가 궁금해졌다.

어쩌면 니이야마가 자신의 의지로 밖으로 나오고 싶어도 나올 수 없는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한 동창들은 니이야마의 상태를 확인하여야만 했다. 니이야마의 상태를 확인하기 제일 좋은 방법은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인데 열쇠는 잠긴 문 안에 있고 보조 열쇠를 사용하기까지는 복잡한 단계를 거치고 오랜 시간이 걸린다. 문손잡이를 돌려 밀어보면서 열쇠가 있어도 무용지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안에서 도어 스토퍼까지 끼워둔 상태에서 문은 열리지 않는다.

후시미가 다른 사람들과 태연히 앉아서 방으로 진입하는 방법을 논의 하는 것을 보면서 데 이 남자는 도망칠 길 없는 이 자리에서 살인을 저질렀으며 살인현장에서 이렇게 악착같이 다른 사람들이 니이야마 방에 들어가는 것을 가급적 늦추려하는지 궁금해졌다. 유카와 후시미의 팽팽한 두뇌 대결을 보는 재미도 물론 있지만 후시미가 보여주는 행동들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보는 궁금증이 이 작품을 보는 관전 포인트라는 생각이 든다.

후시미가 니이야마를 죽이게 된 배경에는 장기기증카드를 발급 받은 자는 언제라도 자신이 도너가 될 수도 있고 장기 수요자는 그들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있으므로 도너가 될 자가 자기 몸을 좀도 소중히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은 이해한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후시미가 니이야마를 죽여도 좋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누구도 어떤 이유로도 다른 사람의 생명을 물리적인 힘으로 걷어 갈 권리는 없는데 후시미가 무슨 권리로 니이야마를 죽인단 말인가, 책장을 덮으면서 유카의 추리력에 다시 혀를 내두르게 된다. 제시간에 나타나지 않는 동창을 두고 그들이 벌이는 토론도 볼만했다. 살인 사건을 다루면서도 자극적인 장면 하나 없이 작품을 끝까지 끌고 가는 작가의 필력이 놀랍고 행복한 책 읽기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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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스
타리에이 베소스 지음, 정윤희 옮김 / 살림Friends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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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스는 서른일곱 살 남자다. 몸은 성인이지만 지적 장애로 인하여 그의 내면은 어린아이다. 그런 그를 돌보아야하는 것은 마흔 살의 누나 헤게다.

누나 헤게는 마티스에게 끊임없이 일자리를 찾으라고 종용을 한다. 마티스의 상태를 알고 있는 헤게가 마티스를 밖으로 내몰고 마티스를 무엇인가 하라고 자꾸 압박하는 것은 마티스에게 돈을 벌길 바란다는 것보다 인간으로서 놀고만 살수는 없으니까 자신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보라는 말일 것이다.

누나에게 내몰려 밖으로 나와 일자리를 찾아보지만 그에게 일자리를 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설혹 일자리를 주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마티스에게 주어진 일을 보통의 사람들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결과에 주인도 마티스도 실망을 한다. 마티스에게 ‘한 번의 도전은 한 번의 실패’를 의미한다. 장애를 가지고 있으므로 실패에 무심할 수 있으면 차라리 좋으련만 불행히도 마티스는 자신이 남들보다 뒤쳐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남들과 똑같이 하고 싶은데 안 된다는 것, 결과를 보고 사람들은 자신에게 손가락질을 한다는 것을 마티스는 안다. 그래서 기가 죽고 누나에게도 면목이 없다. 

어떤 일에 대한 시도가 실패로 끝나는 일이 거듭되자 마티스는 무언가 시도하는 게 겁이 난다. 틀릴까봐, 제대로 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면서 누나에 대한 미안하다. 마티스의 심정이 어떻든 헤게는 그 나름대로 입장에 의거 마티스가 세상에 나가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티스는 익숙한 사람, 익숙한 세상을 향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시도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고정관념이 무서워 자신에 대하여 자신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만 찾고 세상을 향하여 나가는 게 겁이 나 죽을 것만 같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운 마티스는 상대적으로 주변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민감하게 반응을 한다. 그리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 하나하나에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는데 그 의미부여가 평범한 사람들의 사고 같지 않고 철저하게 자기중심적 사고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불필요한 일에 대한 집착처럼 보인다. 멧도요새에 대한 일이나 벼락 맞은 포플러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그 증거다.

마티스와 헤게 나무로 불렸던 포플러 나무 중 한그루가 벼락에 맞자 마티스는 전전 긍긍한다. 혹시 벼락 맞은 나무가 마티스라고 불리는 나무가 아닐까 불안하다. 불안함에 근거로 없이 벼락 맞은 나무가 헤게의 나무로 치부하면서도 누나가 자기만 두고 죽지 않을까 겁도 난다. 마티스가 정규 호수의 정규 뱃사공으로 일을 나갔다가 자신의 첫 손님이자 마지막 손님인 벌목꾼을 데리고 집에 왔는데 그 벌목꾼이 자신의 집에 머물면서 누나는 늦은 나이지만 이성에 눈을 뜨게 된다. 누나의 변화에 불안을 느낀 마티스는 누나가 자신을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벌목꾼이 누나를 빼앗아 갈지도 모르겠다. 누나로부터 버림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마티스에게 누나와 벌목꾼이 가족으로서 함께 살아가고자 보여주는 작은 시도들이 먹힐 리가 없다. 벌목꾼이 자신에게 어떻게 대하든 그는 이미 누나를 자기로부터 빼앗아 갈 사람일뿐이다. 벌목꾼으로부터 누나를 되찾아 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마티스는 결국 헤게의 인생에서 자신이 빠져주는 것만이 자기가 할 일이라는 것을 알고 호수로 낡은 배를 몰고 나가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많이 아렸다. 또 독버섯 사건 이후의 그의 행동과 사고를 볼 때 조금만 더 노력하면 평범한 사람들과 아주 똑같지는 않지만 이전과는 다른 사람을 셋이 함께 영위할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마티스의 선택에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3인칭 시점으로 쓰여 진 이 작품은 사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가기보다는 섬세한 내면 묘사로 작품을 끌고 가고 있어 묘사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겐 일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내 머릿속에 마티스는 착하고 여리고 고뇌하는 모습이다. 마티스의 모습을 잘 그리고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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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 날아든다 푸른도서관 32
강정규 지음 / 푸른책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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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규씨의 작품을 도서관에서 몇 번 빌린 적은 있지만 강정규씨의 작품을 읽은 것은 처음이다. 그의 작품을 처음 읽어 본 독자로의 첫 느낌은 ‘낯섦’이었다. 고향이야기, 분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알겠는데 독자 대상이 무척이나 궁금하게 한 책이었다. 인터넷 서점에서 보니 작품은 청소년을 독자 대상으로 잡고 있었다. 청소년이라고 다 같은 독서의 폭과 깊이를 가진 것은 인정 할지라도 과연 이것이 청소년을 독자 대상으로 하는 작품일까 잠시 고민해 본다.  

<새가 날아든다.>는 3부로 구성이 되어 있고 총 7작품이 있다.  

‘구리반지’는 사회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분단으로 인하여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낡은 구리반지를 통하여 전하고 있다. 삼거리 ‘삼거리 국밥집’ 또한 열병으로 앓는 자식의 약을 구하러 왔다가 분단으로 인하여 고향집에 돌아가지 못해 자식과 생이별을 한 후 국밥집 식모살이를 거쳐 국밥집 주인이 되어 몸이 성치 못한 춘자씨를 양딸로 받아들이고 유기견을 거두면서 사는 양순씨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내가 몸이 성치 않은 춘자를 거두듯 누군가 자신의 몸이 성치 않는 자식을 거두어 주길 바라는’ 간절함이 배어 있는 작품이다. ‘다배 이야기’를 보면서는 늙고 병든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다니구치 지로의 <개를 기르다>를 잠시 떠올린다. 둘 다 늙고 병든 것에 대한 이야기를 있는데 두 작가가 풀어가는 방식과 전달하려는 것이 참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새가 날아든다’를 보면서는 모 TV 방송 프로그램 ‘세상에 이런 일이’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딸의 해산관을 위해 집 떠난 후에 홀로 남을 남편을 위해 여러 가지 것을 준비하면서 두 노인이 주고받는 대화는 한 폭의 그림 같다. 빨래 줄에 널어놓은 조끼에 딱새가 알을 낳고 부화하기까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눈이 순수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손주, 꿩알, 딱새가 새끼 까는 일을 통하여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자연스럽지 않다. ‘낮달’은 순덕이네가 이사를 오면서 이야기가 전개 된다. 이 작품에서는 화자는 병약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순덕이를 통하여 느껴지는 것은 강인함이다. 가진 것은 없어도 그는 마음은 따듯함으로 가득했고 자기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다. 화자보다 두세 살 많고 사춘기에 화자보다 일찍 접어든 순덕과 화자의 의사 놀이, 순덕이가 보이는 성에 대한 관심이 우습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순수함에 미소 짓게 한다. 그러나 전쟁은 사람들의 인생을 비틀어놓는다. 고모나 순덕이의 죽음은 피어보지도 못한 꽃이고 아픔일 뿐이다.

‘뿔떼와 금테’라는 작품은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알 수 없었고 ‘소통’은 작가가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는 분명하지만 사람들을 윽박지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작가가 사용하고 있는 어휘도 조금은 어렵다는 느낌이 드는 작품이었다.

작품 전제를 관통하는 것은 고향과 전쟁이다. 작가의 말에서 보면 작품 속의 ‘고향은 단순히 잃어버린 것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회복 되어야 할 우리네 인간의 본향을 의미’한다고 한다. 적가가 전쟁을 이야기하고 가족을 이야기하는 것은 겪어 본 자, 잃어 본 자의 절규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전쟁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굴절되는지 잘 알고 가족을 잃어 본 자가 가지는 슬픔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작가는 더 가족의 소중함에 집착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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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랑 나랑 함께 살아요! 그림책 보물창고 48
낸시 코펠트 지음, 신형건 옮김, 트리샤 투사 그림 / 보물창고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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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이 이혼했다. 나는 양쪽 집을 오가며 산다. 엄마가 있을 땐 아빠가 없고, 아빠가 있을 땐 엄마가 없다. 둘이 다 필요할 때도 많은데 일은 그렇게 되어 버렸다. 다행히 나에게는 프레드(강아지)가 있다. 내가 어디에 있든, 내가 무엇을 하든 프레드는 항상 내 곁에 있다. 나는 프레드와 함께 걷고,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논다. 내가 행복하면 프레드도 행복하다. 프레드는 내 친구다. 그러나 엄마 아빠에게 나와 함께 있는 프레드는 그냥 프레드일 뿐이다. 프레드로 인하여 오는 불편함에 엄마, 아빠는 ‘더 이상은 못 참아!’, ‘더 이상 함께 살 수 없어!’하고 말을 한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에 대한 아이의 반응

“(프레드로 인하여 곤란하게 해 드려서)죄송해요. 하지만 프레드는 엄마나 아빠랑 함께 살지 않아도 돼요. 프레드는 나랑 살 거니까요!“

띠용~~~~~  

 

엄마, 아빠는 본인들이 헤어지기로 했으니까 헤어진 것이지만 나는 프레드와 헤어질 생각이 없어요. 내가 엄마 아빠가 따로 사는 것에 뭐라고 하지 않았듯이 나와 프레드 사이의 일은 전적으로 우리 둘의 문제예요. 아빠는 프레드와 함께 살고 싶지 않으면 함께 살지 않아도 됩니다. 나는 내 친구 프레드와 기쁠 때도, 슬플 때도 함께 했습니다. 나는 프레드와 헤어질 생각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곳이 어디든 내가 가는 곳이면 프레드도 갑니다.  

 

아이는 여전히 엄마, 아빠 집을 오갑니다. 아이가 있는 곳엔 프레드가 있습니다. 프레드는 여전합니다. 그러나 엄마, 아빠가 프레드로 인하여 겪었던 불편함은 많이 줄었습니다. 엄마, 아빠, 그리고 내가 프레드를 좀 더 이해하고 배려 해준 덕분이죠.  


어느 땐 난 엄마랑 살아요. 어느 땐 난 아빠랑 살아요. 프레드랑 나랑 함께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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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조선을 그리다 푸른도서관 31
박지숙 지음 / 푸른책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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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펼쳐 처음 읽는데 어딘가 서 읽은 기억이 난다. 어디지?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김홍도, 무동을 그리다.>에서 읽었구나. 그땐 동화집 속의 중편 형태로 봤던 것 같은데 이제 단행본으로 나오면서 ‘제목이 약간 바뀌었네!’ 생각하면서 작품의 앞뒤를 살펴보니 김홍도의 그림과 삶을 연작형태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김홍도, 무동을 그리다>의 내용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그 작품을 읽었을 때의 상황(그때 큰아이가 일본어 자격검정 시험을 볼 때 아이를 기다리며 겨울의 어느 날 추운 운동장에서 걸으며 책을 읽었었다.) 과 작품이 썩 괜찮은 느낌만은 기억을 하고 있다.

<김홍도 조선을 그리다>는 총 다섯 작품 연작 형태로 하나의 작품집을 꾸미고 있다.

‘김홍도 무동을 그리다.’에서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도 받고 있으며 자기 그림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데 김홍도에게 ‘헌 그림이나 그리고 있다, 껍데기다.’라는 광대 아이의 놀림을 받고 광대 주베에 함부로 입놀림을 한다고 책하면서도 그 아이가 왜 그런 말을 할까 곱씹어 생각하는 김홍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천지개벽 서당에서’는 조선이라는 시대가 품고 있는 신분이라는 것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천지개벽 서당은 뜻있는 사람들의 호응을 얻어 드물게 평민에게도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곳이었다. 양반과 평민이 한자리에서 공부를 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경계는 존재했었다. 중인 신분인 홍도는 양반과 평민사이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어정쩡한 신분적 위치였고 잠시 머물다 갈 곳 정도로 여겼기에 생활태도 또한 어정쩡했다. 그러나 과거 노비였지만 속량되어 평민이 된 차돌이의 행동을 보면서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게 된다. 적당히 주변의 눈치나 보던 김홍도가 자기 판단으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고 책임을 질줄 아는 모습으로 거듭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도깨비 놀음’에서는 경현당 수작도를 그리게 되었을 때 이야기다. 함께 그림을 그릴 사람을 도화서에서 추천을 했는데 김홍도는 그들이 맘에 들지 않았다. 화원들의 단점을 들어가면서 부족한 실력을 가진 사람들과는 함께 그림을 그릴 수 없다며 내쳤다. 차라리 혼자 모든 것을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을 믿지 못했기에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줄 몰랐다. 때문에 혼자 바빴다. 내쳐진 동료들은 욱하는 마음에 홍도를 해코지 하려했다. 그러나 김홍도에게 그림을 구걸하다 거절과 업신여김을 당하던 노파는 필사적으로 홍도를 감싸며 보호하려했다. 노파에게 홍도는 큰일을 할 사람이었고, 자신의 손녀를 구할 수 있는 능력자였다. 때문에 그가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노파의 행동을 보면서 자기가 정말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가치 있는 인간일까 고민하게 된다. 

‘느티나무가 있는 풍경’은 연풍현감으로 홍도가 가게 되었을 때의 이야기다. 오랜 가뭄으로 인하여 살림살이가 곤궁해져 일상적인 삶조차 영위하지 못하는 백성들을 빤히 보면서도 그들을 도울 수 없는 무기력한 자신을 내려다보아야만 하는 아픈 현실 앞에서 목민관으로서의 심정을 잘 드러내고 있고 다른 사람의 곤란함을 이용하여 제 뱃속을 채우려는 양반들의 이기적인 술수를 뻔히 보면서도 어찌 할 수 없는 현실에 애만 끓이는 인간적인 고뇌를 볼 수 있다.  

 

‘아버지와 함께하는 길’은 김홍도가 늙어 병마와 싸우면서도 아들의 월사금 마련을 하기위하여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아들의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세 번이나 어진을 그렸고 천재화가라고 불렸던 화가가 모아 논 돈 한 푼 없이 늘그막에 병마와 싸우면서 아들의 월사금을 위하여 그림을 그려야한다는 현실이 슬펐다. 자신의 재능을 권력이나 부를 모으는데 쓰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의 예술관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책을 덮으면서 작가가 구현하고 싶었던 김홍도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 김홍도’였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남들이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하면 우쭐하고 자신의 재능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모습도 작품에서는 분명 보인다. 그는 분명 그림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이지만 단점도 많은 인간이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흐르는 것은 김홍도는 자기반성을 게을리 하지 않는 인간이다. 스스로를 돌보고 같은 실수를 두 번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받은 달란트의 결과물이 누군가의 창고에서 누군가의 재산을 늘리는 수단이 아닌 모두에게 위안이 될 그런 것이 되길 바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김홍도의 그림을 통하여 그의 마음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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