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디샤의 여섯 번째 선물 - 지혜와 용기를 키워주는 터키 환상 동화 마음이 자라는 나무 7
아흐멧 위밋 지음, 이난아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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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번 빌려 왔었던 책이라고 한다.

장정일씨가 그렇게 말했었다.

"내가 읽지 않은 책은 없는 책이다"

내가 읽지 않았기 때문인지 다시금 대출. 그래 이번엔 읽어주마.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파디샤는 자신이 행한 선행을 떠벌이는 것을 좋아한다. 그의 주변에는 늘 아첨꾼들이 들끓었다. 아첨의 말에 익숙해진 파디샤는 이제 목족 없는 선이 아니라 칭찬 받기 위한 행위로서의 선행에 익숙해 져 있다.  이것을 경계한 총리대신의 권유로 파디샤는 총리대신과 여행을 떠난다.

파디샤와 총리대신이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장님인데 그는 자신의 목을 내 놓고 목을 가격하는 사람에게 황금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그 이유를 알고 저 하는 파디샤에게 장님은 이웃에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의 사연을 알아다 주면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 해 주겠노라 한다. 자신이 궁금한 점을 알아다 주면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 해 주겠다는 제안에 파디샤 일행은 여행을 계속한다.

황금 달걀을 팔 결정적인 순간에 그 황금 달걀을 부수어 가루로 만드는 보석상인,

못 만드는 게 없고 빼어난 솜씨를 가졌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인가 일을 전혀 할 수 없게 된 대장장이,

무언가 홀린 듯 반쯤 넋이 나가버린 뮤에진,

모자를 팔다 갑자기 무언가에 홀린 듯 무덤으로 달려가 실신해 있는 모자장수를 만나고  모자 상수는 장님의 사연이 궁금하다고 자신에게 이야기 해 주는 조건으로 자신의 이야길 한다.

 질투에 눈이 멀어 내린 성급한 행동이 부인과 자식을 죽이고 자신을 파멸 시켰다며 회한에 도 있다는 모자장수.

사랑을 얻기 위하여 무한이 인내해야 하는데 마지막 한순간의 욕정을  참지 못하여 모든 것을 잃었다는 뮤에진.

빼어난 솜씨를 가졌지만 다른 사람하고 나눌지 몰라 새로운 기회를 잃은 대장장이.

재물이 있을 때 모여든 사람들이 자신과 영욕을 함께 할 줄 알았지만 막상 자신이 재산을 다 잃자 모두가 등을 돌려버렸다는 보석상인.

무리한 욕심을 부리다가 두 눈마저 잃게 된 장님의 사연을 통하여 우리들이 무엇을 경계하고 살아야 하는지 잘 보여주는 터키의 동화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방식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형식으로 각각의 사연을 듣다가 보면 다섯가지 우리가 경계 할 것을 알게 되고 파디샤 자신은 자신의 주변에 어떤 삶들이 있어 야 되어 파디샤의 여섯 번째 선물 이야기는 완성이 된다.

재미는 있지만 과연 아이들이 여섯 번째의 선물을 찾아낼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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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풍경 1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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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모범생이었던 '소키치'는 3학년을 올라가자마자 등교거부를 하고 있다. 소키치는 학교를 다니는 것은 인생의 낭비라고 생각을 한다.  소키치의 이런 자신의 생각을 주변의 누군가와 나누지를 않은채 등교 거부를 시작한다. 행동 이전에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이야기 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 해 본다.

물론 자신의 분명한 생각을 주변의 어른들에게 이야기 했더라면 어떤 논리를 들이대면서도 소키치의 등교 거부를 막으려고 했겠고 그결과 등교 거부를 하지도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어른의 입장에서 봐서 그런가?)

아무튼

부모님이 안 계신 상황에서 소키치 보호자 역할까지 해야 하는 누나는 어느 날부터인지는 소키치의 등교 거부가 당황스럽다. 동생의 돌출 행동에 대한 분명한 이유라도 알면 덜 답답할 텐데 ...... 누나의 답답함이 그대로 전해진다. 소키치의 등교 거부에 대해서 소키치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나  책을 읽는 독자나 궁금하기는 마찬가지다.

소키치는 등교 거부를 하는 동안 이웃들을 도와 고기잡이배를 타거나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등교 거부 = 문제아 취급을 받을 것인데 일본 사회의 전체적 분위기는 그런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 것 같다. 

소키치를 잘 아는 사람이나 책을 읽는 독자는 소키치의 행동반경을 속속들이 들여다보아 소키치가 비록 학교에는 가지 않지만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지만 어느 부분만을 보고 판단하는 사람이라면 소키치가 술집이나 드나드는 나쁜 학생으로 속단 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히 있다.(학교의 교감 선생님처럼) 소키치가 등교 거부를 하는 동안 소키치를 대하는 주변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있는 그대로의 소키치를 인정하는 점이 일본 사회와 한국 사회의 다른 점인가 생각해 보다가도 이것은 작가 하이타니 겐지로가 사람들과 주변을 바라보는 시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훌륭한 어부였던 아버지. 아버지는 훌륭한 어부였고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어부 생활을 접고 전력회사의 기초조사 작업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 점차 고기를 잡는 것만 가지고는 먹고 사는 것이 어려워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바다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 훌륭한 어부였고 일에 자부심이 있었던 아버지가 어업이 사양 산업이라고 그렇게 쉽게 어업을 포기 한다는 것은 소키치의 입장에서 납득이 안 되었다. 소키지는 아버지의 행적을 ?으면서 소키치는 아버지를 간절하게 부른다. 쉽게 드러나지 않는 아버지. 아버지 당신의 듯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러니 죽은 자가 속 시원하게 말을 할 수는 없는 법, 결국 소키치는 아버지가 남긴 작은 단서들을 모아 퍼즐을 맞추기 시작한다. 퍼즐 맞추기가 진행됨에 따라 소키치는 개발의 논리가 살고 있는 환경에 어떻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는지 알게 된다.사람은 환경에 기대에 살수 밖에 없다. 그 환경을 개발의 논리를 앞세워 변화시킨다는 것은 인간의 삶도 변화 시킬 것이다. 당장 드러나는 편리함은 곧 많은 개발을 불러온다. 개발을 하면 할수록 환경은 열악해진다. 불편을 해소하기위한 더 많은 환경의 변화. 그것은 고스란히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드디어 소키치는 전력회사의 송전탑 건설의 기초 작업을 하던 아버지.

"환경은 곧 생명이다. 생명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아버지를 궤적을 따라가면서 소키치는 훌쩍 자란다.

"그렇게 게으름을 피우면 농사꾼 밖에 될수 없다"는 교사의 말에 학생은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하니 소키치가 등교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소키치를 거론하자 소키치는 학교 밖에 있으면서도 학교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

"게으름을 피우면 농사꾼 밖에 될 수 없다고 이야기는 게으르기 때문에 농사꾼이 되었다는 식의 이야기가 된다며 그것은 농부에 대한 모독"이라는 말을 한다. 날카롭다. 아이들은 요구한다. "그렇게 게을러서 어떻게 훌륭한 농사꾼이 될 수 있느냐"고 채찍 하라고.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어른인 내가 부끄럽다. 우리의 아이들은 우리에게 원한다. 잘못한 게 있으면 그 잘못한 것에 대하여만 이야기를 하라고, 에둘러 본질을 흐리지 말고 정확하고 분명하게 이야기 하라고. 아이들의 이런 요구를 어른들은 미처 수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아이들이 자라나듯 어른들의 사고와 행동양식도 바뀌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은 언제 어디서나 풀처럼 나무처럼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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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케의 여정
소냐 나자리오 지음, 하정임 옮김, 돈 바트레티 사진 / 다른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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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케의 여정>은 중앙아메리카의 온두라스에서 생활고를 극복하고자 아이들을 두고 떠나야만 했던 부모와 고국에 남겨진 아이들에 관한 보고서다. 작가 소냐 나자리오는 2003년 이 책의 기본이 되었던 기획 시리즈로 퓰리처상을 받았다고 한다.

엔리케의 엄마 라우데스는 이혼 후 싱글맘으로 아이들 둘을 키우며 중남미의 온두라스에서살고 있었다. 여자 혼자 아이들 둘을 키우는 삶이 그리 녹녹치 않음은 익히 알고 있다. 그중에서도 사회적으로 안정이 되어 있지도 않고 사회 보장 제도가 발달 하지 않은 나라에서의 삶은 더 고달프다. 누구도 아이들을 책임지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가능한 한 아이들과 더불어 그들만의 삶을 꾸려 보려고 하지만 더 이상 어쩔 수 없을 때 말 그대로 우리는 최후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아이들 만이래도 배곯음을 면케 해 줄 방법을 찾거나 직접적으로 아이들을 누군가에게 맡기도 직접 돈을 벌어 올 수밖에 없는 상황.

아이들만을 끼고 앉아 아이들이 굶주림을 지켜보면서 가난을 대물림하면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아 갈 것인가, 아이들을 누군가에게 맞기고 맘 모질게 먹고 아이들을 떠나 아이들이 먹고 교육을 시키기 위한 돈을 벌어 올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에서 라우데케는 모질게 마음을 먹고 얼마간이래도 희망이 있는 쪽을 선택 했다. 결국, 라우데케는 희망을 안고 불법이주민의 긴 대열에 올랐다. 라우데케와 같은 고민을 가진 사람이 라우테케 한 사람이 아니듯 불법 이주민의 길을 택한 게 라우데케 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라우데케의 이주가 특별한 선택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라우데케도 처음 온두라스를 떠날 때만해도 길어야 2~3년이면 아이들을 키울 수 있는 어느 정도의 경제적인 기반을 잡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럼 온두라스로 돌아오든 미국으로 아이들을 부르든 함께 모여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라우테케가 알지 못한 것이 있었다. 안정 되지 못한 자신의 신분(불법이주민이란 딱지)은 미국 고용시장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없었고 이민국 사람들에게 걸리면 언제 고향으로 컴백 당할지도 모르는 불안한 나날의 연속이다. 그래도 그들은 악착 같이 일을 했다. 그래서 얼마간 두고 온 자녀들과 가족들에게 다만 얼마만이라도 송금을 하길 원했다. 아이들이 필요하다는 물건들을 사 보내면서 '이 돈과 이 물건들이 있으면 그들은 다만 얼마만이래도 생활이 나아지겠지' 하는 위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정말 열심히 일을 했다.

한편 고국에 남은 아이들,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부모의 부재가 힘에 겨웠다. 부모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했고 약속을 했던 시간들이 단축 되는 것은 고사하고 연장 되는 일이 허다했다. 멀리서 보내오는 돈과 물건들이 엄마와 아빠를 대신 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리움을 점차 쌓아갔고 그 그리움의 봇물이 더 이상 감당이 안 될 때 그들은 그리움의 실체를 찾아 떠나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움의 실체를 찾아 떠난 다는 것은 목숨을 건 도박과 다름이 없었다.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들의 부모가 그곳에 얼마나 고생을 하면서 갔는지. 중개인 없이 아이들이 부모를 찾아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부모들은 아이 단독으로 부모를 찾아오길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엔리케도 미국에 있는 엄마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고향의 일가친척들에게 '나 떠나요. 엄마를 찾아가요' 통고를 하고 그냥 떠났다.

엔리케가 온두라스를 떠니 미국의 엄마를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은 총 122일이며 그가 간 거리는 3222Km다. 당연히 불법이주민의 신분을 가지고 출발했고 도착을 했을 때도 처음의 신분을 유지했다.

122일 동안 3222Km를 가면서 엔리케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도둑들에 의하여 가진 물건을 도둑맞았고, 갱들에 의하여 죽을 만큼 두들겨 맞았고, 경찰을 비롯하여 이민국 직원들에게 돈을 갈취당하기도 하고 ?기기도 했다. 말과 글로는 점잖게 물건을 잃고, 맞고, ?기고, 도망치고 했다고 단순하게 표현이 되지만 현장에서 그들에게 닥친 위험은 죽음과 같은 위험 그 자체였다. 엘리케는 일곱 번을 경찰이나 이민국에 잡혀서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해야만 했다. 그 말은 엘리케의 고통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시로 전해져오는 죽음과 같은 긴장이 122일이나 지속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엔리케는 엄마와 헤어진 지 12년 만에 엄마 라우데케를 만날 수 있었다. 이제 엄마를 만났으니 모든 게 잘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했다. 라우데케는 열심히 노력을 했지만 사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엔리케는 엄마를 만났지만 반가움도 잠깐, 엄마와 떨어져 있던 시간동안 느꼈던 그리움은 자신을 버렸다는 분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원망으로 변질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엄마를 만나 폭발하게 되었다. 분노하는 아들을 두고 라우데케가 갖게 되는 마음은 억울함이다. 최선을 다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원망과 아들의 분노, 아들의 엇나감이었다. 자신을 지켜 온 희망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린다.

이것은 엔리케와 리우데케만의 문제가 아니다. 돈을 벌겠다고 불법이주민의 길에 오른 부모와 아이들이 겪는 거의 공통적인 문제다.

부모와 자식 간에 헤어진 기간이 길면 길수록 서로 간에 친밀감을 찾기는 어려워진다. 엔리케와 라우데케의 갈들이 그렇듯 끊임없는 싸움 끝에 엄마들이 알게 된 것은 아이들의 사랑을 돈과 맞바꾸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사랑을 배우지 못했다. 아이들은 분노로 가득 찼고 엄마와 함께 하면서도 외로워했고, 끊임없이 엄마의 사랑을 의심하며 엄마로부터 또다시 버림 받을까 두려워한다. 아이들을 버리고 왔다는 죄책감에 어른들은 강하게 자신들이 그들의 엄마이고 아빠임을 주장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질서의 흔들림. '최선의 선택'의 대가는 아주 혹독하다.

이 이야기가 비단 엔리케와 라우데카의 이야기에만 국한 되는 문제는 아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최선의 선택이라 지위하면서 행해지는 일이다.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일들, 누군가 겪게 될 가족 간의 문제들이다. 어떤 선택을 하든 인간이 감당 할 몫은 크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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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거리는 여인
미시마 유키오 지음, 송태욱 옮김 / 서커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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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라는 작가를 처음으로 만난다.

미시마 유키오는 1925년 유복한 집 고위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1970년대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고 할복자살을 했다한다.

<비틀거리는 여인>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라. 일탈한 여인의 냄새가 팍 풍기지 않는가?

그랬다. 이 이야기는 결혼 3년차 주부 세스코의 일탈에 대한 이야기다.

세스코의 남편은 매일처럼 늦게 들어 와 코를 골며 잠만 자고 아침 일찍 출근한다. 딱히 뭐가 문제인지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세스코는 뭔가 자신의 삶이 개운치가 않다.

친구들과의 이야기에도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아이와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뭐가 문제인지 정말 모르겠다.

결혼하기 전, 세스코는 딱 한번 키스를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을 대상으로 세스코는 상상연애를 시작한다.

'꿈에서 일어나는 일에 죄를 물을 수는 없듯 상상만의 일에 죄를 물을 수 없다'는 논리를 피면서.

그러다가 우연히 첫 키스대상이며 상상 연애의 대상인 쓰치야를 만나게 된다.

세스코가 생각한 연애는 도덕적인 연애. 다시 말하여 몸만 허락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몸만 허락하지 않으면 된다.'는 발상에 잠시 멈칫했다. 정말 그런가?

우리가 결혼을 할 때, 혼인 서약을 한다.  서약 속에는 영원히 사랑하겠느냐는 질문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랑을 하겠다." 는 약속을 하고 혼인이 원만하게 이루어졌음을 주례가 사람들에게 공표함으로써 결혼식은 끝이 난다. (물론 행정적인 절차는 당연히 할 것을 전제로 깔고).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모든 행위가 다 사랑인데 세스코식의 사랑은 내가 생각하는 사랑과 다른가 하는 생각을 한다.

아무튼, 그렇게 세스코는 쓰치야를 만났다. 처음엔 그냥 차 마시고 이야기하고..... 그렇게 세스코가 생각했던 대로 진행이 되는 것에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그 만족은 오래 가지를 못했다. 자기의 감정의 변화를 예측하지 못한 시도했던 연애는 결국 처음 의도했던 '도덕적인 연애' 의 룰을 벗어났다. 쓰치야를 향한 자기 감정을 주체 못하던 세스코는 세쓰코 대신 남편과 관계를 가졌고 임신을 했다. 남편을 사랑하지 않은 채 남편과 관계에서 얻은 아이는 축복일 수가 없었다. 남편에게 미안했다.( 남편이 세스코를 사랑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 연애를 하고 있는 쓰치야에게도 미안한 일이다.

갈등, 갈등......

결국, 세스코는 임신중절을 택한다. 그리고 쓰치야와의 관계는 계속된다. 관계의 지속은 결국 남녀간의 육체적 결함으로 이어지고 잦은 결합은 또 다른 생명의 잉태로 이어진다. 새로은 생명의 잉태를 두고 세스코는 다시 임신중절의 선택을 한다.

두 번의 임신중절, 세스코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 동안 어머니의 관심에서 방기 되었던 아들도 떠오른다. 너무나 도덕적인 아버지도 떠오른다. 결국 세스코는 휘청대는 걸음으로 집안으로 돌아와 자신의 침대에 몸을 뉘인다.

<비틀대는 여인>을 읽으면서 일탈을 꿈꾸는 것과 일탈을 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보았다. 무엇을 꿈꿀 때는 계획대로 될 것 같지만 어떤 일이 실행되면 그것은 이미 브레에크 장치 고장 난 바퀴같이 구를 만큼 구른 다음에야 멈춘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돌아온 세스코가 이젠 자신의 집에 머물고 있는 파랑새를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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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문 뒤의 야콥
페터 헤르틀링 지음, 김의숙 그림, 한경희 옮김 / 낭기열라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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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열 살 무렵부터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세 명의 가족을 잃었다. 내가 열 살엔 할머니, 열다섯 살엔 아버지를, 열여덟 살엔 할아버지가 돌아 가셨다. 열다섯에 맞이했던 아버지의 죽음은 내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다시는 더 이상 아버지를 볼 수 없다는 사실, 다시는 아버지와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 어버이 날이 끔찍하게 싫었고 친구들이 자기들의 아버지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자리를 피하곤 했었다. 주변의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아버지 없는 날 놀리거나 하는 것은 분명 아닐지라도 난 주변사람들을 피하게 되었다. 자기 가족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내 눈치를 보는게 싫었다. 사람들을 만나 내가 입는 상처가 싫어 사람들 만나는 것이 겁이났다. 내 안에 그런 기억들이 있기에 난 야콥의 이야기에 공감이 갔고 안타까움이 훨씬 더 컸던 책이다.


아버지를 잃은 야콥에게 학교 친구들이 주변 사람들이 보냈던 시선을 잊을 수 없다.
“ 어린 것이 안 되었구나.”
“ 불쌍해라, 가엾어라.”


불쌍하거나 가엾은 것이 아니라 슬픈 것 뿐 것뿐이라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섣부른 동정을 보내고 있었다. “ 아버지 없는 가여운 아이” “ 아버지도 없는 불쌍한 아이!”  야콥은 그 시선들이 부담스러웠다.
‘ 내가 정말 가엾고 불쌍한 아이인가?  난, 너희들이 동정 할 만큼 그렇게 불쌍하지도 가엾지도 않아! 쥐뿔도 모르면서.......  난 불쌍하게 아니라 슬픈 것뿐이라고.’
야콥은 절규를 하지만 아무도 야콥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지 못한다.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은 엄마에게도 슬픔이었고 충격이었다.
 
‘남편과 함께 했던 시간, 남편과 함께 했던 추억. 다시는 함께 무엇을 할 수 없구나. 더 이상은 만져 볼 수도 안아 볼 수도 없구나.
이제 모든 것을 혼자 판단하고, 혼자 결정하고 야콥도 혼자 키워야 하는 구나.‘


엄마는 자신에게 주문을 건다.
‘파란 색으로 대문을 칠하면 기분이 좀 나아질 거야.’ 엄마는 대문을 파랗게 칠했고, 자기 안에 이는 슬픔을 각종 취미 생활의 바쁨으로 위장했다.
더 큰소리로 웃고 더 큰소리로 떠들지만 그 웃음은 웃음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어설픔 웃음과 바쁨이 슬픔을 털어내려는 절절한 몸짓처럼 느껴져 가슴이 아팠다.


엄마가 엄마만을 위한 굿을 하고 있는 동안 야콥도 야콥 나름대로의 굿을 하고 있었다. 섣부른 동정의 시선을 피하여 자기 안으로 피신을 하고 있었다. 파란 대문 안 자기 방에 틀어박힌다.



‘오롯이 나만을 이해 해 줄 누군가가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 나만을 이해 해 줄 누군가가 있었으면....’

누군가를 간절히 원했던 야콥은 자기만을 온전히 이해 해 줄 상상의 친구 슈닙젤을 만들어낸다. 슈닙젤과 함께 있는 야콥은 행복하다. 야콥은 무엇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냥 야콥이 원하는 것은 언제나 찬성을 하거나 야콥이 하고자 하는 일을 부추긴다. 이제 야콥은 섣부르게 자신을 동정하고 위로하는 친구는 없다. 야콥을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슈닙젤이 있을 뿐이다. 그런대로 야콥은 이 생활이 만족스럽다. 그러나 그것은 야곱만의 세계에서의 행복일 뿐, 더불어 사는 현실 세계에서 야콥의 생활이 그대로 인정 되어지고 받아질 수는 없다. 야콥이 원하는 일에만 반응하는 슈닙젤과는 만드는 세계와는 별개로 야콥을 이해하지 못했던 사회, 야콥 밖의 세계에서도 나름대로의 주문은 계속 되어지고 있었다. 자기 안의 세계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자기 밖의 세계에서 바라보여지는 야콥은 이상한 아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야콥이 가장 사랑하는 엄마마저도. 마치 머리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처럼 엄마는 야콥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야콥은 엄마를 가장 사랑하는데 엄마는 야콥을 이해하지 못한다.
친구가 없다고 생각하는 엄마, 숙제도 안 해오고 학교에서 친구들과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키고 아무렇지도 안은 채 행동하는 야콥을 야콥 밖의 세계에서는 ‘문제아’로 보고 있었다.
‘내가 문제아? 왜? 어째서? 뭐가 문제냐고! 나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어!’
엄마는, 선생님은, 어른들은 자기 안에 틀어 박혀 나오지 않고 점점 비틀어진 사고로 이상하게 행동하는 야콥이 불안하기만하다.
‘도와주고 싶다. 도와야한다.’
엄마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야콥은 엄마가 원하는 대로 해 보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야콥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는 야콥은 아버지를 잃은 야콥에게 보냈던 주변의 시선을 잊을 수 없다. ‘쥐뿔도 모르면서...... 자기들 멋대로 생각하고....... 값싼 동정이나 하는 주제들에...... 내가 뭘 어쨌는데.....’ 그러면서도 엄마가 만나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단 하나의 이유는 엄마를 슬프게 하지 않고 싶다는 것.  결국 엄마는 야콥을 청소년 보호청에 보내고자 한다.


‘엄마마저 나를...... 도망쳐야 한다. 청소년 보호청 사람들이 오기 전에 도망쳐야한다.’  숨어버린 야콥을 찾은 어른들은 상상 속에만 있는 줄 알았던 친구 베노를 데려 온다. 그리고 베노가 가져온 기타를 통하여 야콥은 파란 문 밖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엄마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야콥의 슬픔은 야콥의 슬픔이고 엄마의 슬픔은 엄마의 슬픔일 뿐이다. 비록 한 가지 사건일지라도 그 사건을 받아들이는 것은 각자 다르다. 어떤 감정이든 그 감정은 당사자의 것이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그의 감정을 그대로 인정해 주고  그 감정을 이해하려 노력 할 뿐이다. 내가 야콥을 만나면 야콥을 가만히 안아주고 야콥에게 내 어깨를 빌려줄 뿐 섣부른 동정을 하지는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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