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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케의 여정
소냐 나자리오 지음, 하정임 옮김, 돈 바트레티 사진 / 다른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엔리케의 여정>은 중앙아메리카의 온두라스에서 생활고를 극복하고자 아이들을 두고 떠나야만 했던 부모와 고국에 남겨진 아이들에 관한 보고서다. 작가 소냐 나자리오는 2003년 이 책의 기본이 되었던 기획 시리즈로 퓰리처상을 받았다고 한다.
엔리케의 엄마 라우데스는 이혼 후 싱글맘으로 아이들 둘을 키우며 중남미의 온두라스에서살고 있었다. 여자 혼자 아이들 둘을 키우는 삶이 그리 녹녹치 않음은 익히 알고 있다. 그중에서도 사회적으로 안정이 되어 있지도 않고 사회 보장 제도가 발달 하지 않은 나라에서의 삶은 더 고달프다. 누구도 아이들을 책임지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가능한 한 아이들과 더불어 그들만의 삶을 꾸려 보려고 하지만 더 이상 어쩔 수 없을 때 말 그대로 우리는 최후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아이들 만이래도 배곯음을 면케 해 줄 방법을 찾거나 직접적으로 아이들을 누군가에게 맡기도 직접 돈을 벌어 올 수밖에 없는 상황.
아이들만을 끼고 앉아 아이들이 굶주림을 지켜보면서 가난을 대물림하면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아 갈 것인가, 아이들을 누군가에게 맞기고 맘 모질게 먹고 아이들을 떠나 아이들이 먹고 교육을 시키기 위한 돈을 벌어 올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에서 라우데케는 모질게 마음을 먹고 얼마간이래도 희망이 있는 쪽을 선택 했다. 결국, 라우데케는 희망을 안고 불법이주민의 긴 대열에 올랐다. 라우데케와 같은 고민을 가진 사람이 라우테케 한 사람이 아니듯 불법 이주민의 길을 택한 게 라우데케 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라우데케의 이주가 특별한 선택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라우데케도 처음 온두라스를 떠날 때만해도 길어야 2~3년이면 아이들을 키울 수 있는 어느 정도의 경제적인 기반을 잡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럼 온두라스로 돌아오든 미국으로 아이들을 부르든 함께 모여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라우테케가 알지 못한 것이 있었다. 안정 되지 못한 자신의 신분(불법이주민이란 딱지)은 미국 고용시장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없었고 이민국 사람들에게 걸리면 언제 고향으로 컴백 당할지도 모르는 불안한 나날의 연속이다. 그래도 그들은 악착 같이 일을 했다. 그래서 얼마간 두고 온 자녀들과 가족들에게 다만 얼마만이라도 송금을 하길 원했다. 아이들이 필요하다는 물건들을 사 보내면서 '이 돈과 이 물건들이 있으면 그들은 다만 얼마만이래도 생활이 나아지겠지' 하는 위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정말 열심히 일을 했다.
한편 고국에 남은 아이들,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부모의 부재가 힘에 겨웠다. 부모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했고 약속을 했던 시간들이 단축 되는 것은 고사하고 연장 되는 일이 허다했다. 멀리서 보내오는 돈과 물건들이 엄마와 아빠를 대신 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리움을 점차 쌓아갔고 그 그리움의 봇물이 더 이상 감당이 안 될 때 그들은 그리움의 실체를 찾아 떠나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움의 실체를 찾아 떠난 다는 것은 목숨을 건 도박과 다름이 없었다.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들의 부모가 그곳에 얼마나 고생을 하면서 갔는지. 중개인 없이 아이들이 부모를 찾아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부모들은 아이 단독으로 부모를 찾아오길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엔리케도 미국에 있는 엄마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고향의 일가친척들에게 '나 떠나요. 엄마를 찾아가요' 통고를 하고 그냥 떠났다.
엔리케가 온두라스를 떠니 미국의 엄마를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은 총 122일이며 그가 간 거리는 3222Km다. 당연히 불법이주민의 신분을 가지고 출발했고 도착을 했을 때도 처음의 신분을 유지했다.
122일 동안 3222Km를 가면서 엔리케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도둑들에 의하여 가진 물건을 도둑맞았고, 갱들에 의하여 죽을 만큼 두들겨 맞았고, 경찰을 비롯하여 이민국 직원들에게 돈을 갈취당하기도 하고 ?기기도 했다. 말과 글로는 점잖게 물건을 잃고, 맞고, ?기고, 도망치고 했다고 단순하게 표현이 되지만 현장에서 그들에게 닥친 위험은 죽음과 같은 위험 그 자체였다. 엘리케는 일곱 번을 경찰이나 이민국에 잡혀서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해야만 했다. 그 말은 엘리케의 고통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시로 전해져오는 죽음과 같은 긴장이 122일이나 지속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엔리케는 엄마와 헤어진 지 12년 만에 엄마 라우데케를 만날 수 있었다. 이제 엄마를 만났으니 모든 게 잘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했다. 라우데케는 열심히 노력을 했지만 사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엔리케는 엄마를 만났지만 반가움도 잠깐, 엄마와 떨어져 있던 시간동안 느꼈던 그리움은 자신을 버렸다는 분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원망으로 변질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엄마를 만나 폭발하게 되었다. 분노하는 아들을 두고 라우데케가 갖게 되는 마음은 억울함이다. 최선을 다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원망과 아들의 분노, 아들의 엇나감이었다. 자신을 지켜 온 희망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린다.
이것은 엔리케와 리우데케만의 문제가 아니다. 돈을 벌겠다고 불법이주민의 길에 오른 부모와 아이들이 겪는 거의 공통적인 문제다.
부모와 자식 간에 헤어진 기간이 길면 길수록 서로 간에 친밀감을 찾기는 어려워진다. 엔리케와 라우데케의 갈들이 그렇듯 끊임없는 싸움 끝에 엄마들이 알게 된 것은 아이들의 사랑을 돈과 맞바꾸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사랑을 배우지 못했다. 아이들은 분노로 가득 찼고 엄마와 함께 하면서도 외로워했고, 끊임없이 엄마의 사랑을 의심하며 엄마로부터 또다시 버림 받을까 두려워한다. 아이들을 버리고 왔다는 죄책감에 어른들은 강하게 자신들이 그들의 엄마이고 아빠임을 주장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질서의 흔들림. '최선의 선택'의 대가는 아주 혹독하다.
이 이야기가 비단 엔리케와 라우데카의 이야기에만 국한 되는 문제는 아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최선의 선택이라 지위하면서 행해지는 일이다.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일들, 누군가 겪게 될 가족 간의 문제들이다. 어떤 선택을 하든 인간이 감당 할 몫은 크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