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싶다 ♣ -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

 어느 누구의 가슴 앞에서라도

 바람 같은 웃음을 띄울 수 있는

향기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헤어짐을 주는 사람보다는 손 내밀면 닿을 수 있는 곳에서

 늘 들꽃 같은 향기로 다가오는 그런 편안한 이름이 되고 싶다.

제일 먼저 봄 소식을 편지로 띄워 주고

제일 먼저 첫눈이 내린다고 문득 전화해서 반가운 사람

은은한 침묵의 사랑으로 서성이며

나도 몰래 내 마음을 가져 가는 사람

 아무리 멀어도 갑자기 보고 싶었다며 달려오는 사람

 나도 누군가의 가슴에서 그렇게 지워지지 않는 하나의 이름이고 싶다.

- 김 기남의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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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강과 더불어 조별 발표를 시키는 날이었다. 한 학생의 간다라 불상연구가 신선한 충격이었다. 에니메이션을 곁들인 발표였는데....너무 재미있게 지루하지 않게 보았다. 대학원들 못지 않은 발표실력에 내심 놀라기도 했지만 평소에 그 학생은 그만큼 잘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고려불화 중 수월관음에 대한 연구도 괜찮았다. 너무 지루한 면이 있었지만 좋은 내용이었다.


이번학기에 못다뤄준 내용이 도자사에 대해서이다. 다행히 두 학생이 청자와 백자를 발표해서 아쉽지 않게 한학기를 마무리 지을 수 있어서 좋았다.


종강이라고 음료수를 하나씩 나눠마시고 저녁식사를 함께하자는 학생들 성화에 잠깐 짬을 내었으나 바삐 움직이느라고 좀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해 주지 못해 미안했다.


이렇게 한학기가 갔다. 다음주엔 시험치루고 그다음시간부터는 내시간을 갖을 수 있다. 내년1월 15일 돈황을 다녀오는 계획말고는 아직 다른 답사계획이 없지만 ....올 방학도 바쁘기는 만만치 않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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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2004-12-05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부도 열심히 했지.......이렇게~~

조선인 2004-12-06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게 님이 좋아하는 반가사유상이군요. 저도에요. *^^*

수련 2004-12-07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너무 좋아해서 제사진과 함께 놓았는데...어울리나요?


조선인 2004-12-07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울립니다. 비록 사진은 못 찍지만 올해 국립박물관에서 반가사유상 사진행사가 열렸을 때 못갔던 게 얼마나 한이 되던지.

수련 2004-12-10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잘아시겠지만~~이 불상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보 제78호)과 함께 국내에서는 가장 큰 금동반가사유상으로 높이가 93.5㎝이고 1920년대에 경주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하나 근거가 없답니다. 머리에 3면이 둥근 산 모양의 관(冠)을 쓰고 있어서 ‘삼산반가사유상(三山半跏思惟像)’으로도 불린다고 합니다. 언제 또다시 기회가 오겠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은 문을 닫았으니 새롭게 개관하는 용산국립박물관에서 다시볼 수 있을겁니다.
 

통일부에서 받는 프로젝트가 근 2개월 만에 끝났다. 홀가분한 마음보다는 무거움이 앞선다. 주제는 남북한 예술 어떻게 변하였나? 인데....여러가지 일과 함께 병해을 해야하니 글이 참 어렵게 마무리 됐다.



퇴고를 하루 앞두고 사진정리와 오탈자 정리 등을 다 마치니 지금시간이다. 인생은 너무나 힘겨운 연속인가보다 이일이 끝나면 내앞에 또 어떤일이 놓여질까? 원고쓰는일이 제일 싫다. 누군가 보여주어야 하고 격식을 맞추어야 하니.....이번자료는 통일부에서 국민을 상대로 홍보자료로 쓰인다고 한다.



북한을 처음 방문했을때는 늦은오후 였다. 평양순한공항 활주로는 우리나라 어느 시골 조그만 비행장 같았다. 때는 가을인지라 활주로 주변의 논밭에는 가을곡식이 무르익어가고 몇마리의 두루미가 공항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안내원의 인도에 따라 고려호텔에 여장을 풀고...일주일간의 북한지역의 문화재를 돌아보았다.



주로 사찰과 왕릉, 평양성 주변의 전통건축물을 답사하였다. 북한방문의 첫느낌은 이웃마을에 마실온 기분이었는데....지금은 먼 그대가 되어 모니터앞에서 글자로만 떠돈다.



북한은 우리가 타도해야할 대상도 아니요, 더군다나 경쟁의 대상은 아니다. 잃어버린 또다른 나를 찾는 만남이었고 나에게 있는 가장소중한 숭고한 그 무엇을 아낌없이 주고 싶은 그런 애인같은 '우리'였다.



나에게 있는 절반을 나누어 주고도 주었다고 말하기가 부끄러운 마음이 들게 하는곳이 바로 북한이다. 그들의 순수한 눈망울에서 나는 또다른 뭔가 가슴속 깊은 울림을 느꼈다. 어느탈북자 여교수가 나에게 한 말이 있었다. 그는 북한에서 대학교수였고 그녀의 학문을 인정해서 한국의 모의과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교수였다. 한시간 동안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 받을 수 있었는데....한국에 와서 가장 큰 상처는 순수한 마음이 다치는 거라 했다.  그 녀는 어느날  역량있는 한 남자에게서 언제 식사나 같이하죠...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년이 넘게 기다렸는데 차를 마시자는 말은 커녕 아는채도 안하더라는 얘기였다.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그녀는 동료에게 그 마음의 아픔을 상담했는데....한국사람들의 평소 인사가 언제 시간나면 밥이라도 같이하지....라는 습관적인 인사라는 말에 그녀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는 얘기였다. 그얘기를 하면서도 그녀는 눈물이 글썽였다.



나는 그녀앞에서 몸둘바를 몰랐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순간 내 자신이 싫어졌다. 나도 가끔은 사람들에게 시간나면 식사나 같이하죠..라는 말을 해왔기 때문이다. 마음에도 없는 이러한 인삿말이 때로는 한 사회의 문화를 같이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상처를 주는구나 라는 생각에....그때부터 마음에 있는말만 하자라는 신조를 갖게 되기도 했다. 



남북의 문화의 차이는 이렇게 다르다.  남북의 예술도 너무나 많은 차이가 있다. 북한의 예술은 당과 최고지배자의 지배이념의 도구로 쓰이지만 남한은 자유로운 환경에서 예술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북한의 모든예술이 도구적 예술은 아니다.  물론 그들의 예술에는 추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주의 예술도 때로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기도 한다. 뚜렷한 목적이 드러나 있는 기념비적예술말고는 거의 대부분은 티가 나지 않은다.



북한에서 미술작품 몇개를 샀었다.  남한의 김기창 화백 동생의 그림이었는데...그리 비싸지는 않았다.



글을 퇴고하려니.....북한에서 있었던 일들을 테마도 없이 주절거리게 된다. 



참새고기도 먹어보고....녹두빈대떡에....냉면......모두 맛있는 음식들이었다.



그런데 북한김치는 고추가루가 별로 없다. 그리고 모든 김치가 물김치처럼 물기가 많다.



또한 생선구이는 머리 가슴 배 꼬리 하나도 손질하지않고 그대로 구워나오거나 튀겨서 나온다.



단술...단물....단고기..//단이라는 말이 들어있는 식음료가 많다.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을 평양에서는 자주본다.



간혹 봇짐을 지고 왔다갔다 하는사람들은 시내 장에서 자판장사를 하는 사람들이다.



평양시민은 배급은 30퍼센트에 의존하고 거의 자급자족해야하기때문에 일부 사유재산도



소유할 수 있고 장사도 가능하다. 북한의 음식은 보약이라는 개념이다.



모든 건강식품에는 불로장수라는 말이 꼭 들어가고



호텔에는 노래방도 있고 서점도 있다.



카메라 현상소도 있고 .....



북한사람은 너무 친절하다.



내가 책한권을 부탁했더니 그책을 사려고 하루종일 시내서점을 뒤지고 다녔다고 했다.



과연 우리는 그럴수 있을까? 자기서점에 없으면 없다고 마는것이 상식아닌가?



더군다나 서점의 주인은 주로 종업원인데....공무원...



너무 친절하고 순수한 그들의 눈망울에서 순수한 영혼을 읽을 수 있었다.



졸려서...뭘 썻는지도 모르겠지마...마치겠다.


낮에보았던 대동강물을 다시보고싶은 마음에 밤시간에 대동강변을 걷고 싶었으나....생각을 바꾸었다.


밤시간이라서 치안도 걱정되고.....안내원이 꺼리기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마음을 바꾸어 가까이에 있는 다른 호텔 책방에 책을 사러가기로 했다. 라운지는 남산타워같은 분위기였고 책방은 있는데 판매원이 없다. 경비원이 오더니 필요한 책이 있으면 내일 호텔로 보내주겠다고 하고 덮었던 보자기 같은 천을 펼쳐보인다. 우리나라 같으면 언감생심  꿈도 못꿀일인데 나는 주인없는 책방에서 한시간동안 책을 고를수 있었다.


필요한 책을 적어두고 라운지에서 오랜즈쥬스(귤물)을 한잔시켜마시고 숙소로 돌아왔다. 물론 안내원의 안내를 받으면서 다녔다. 다른 일행들은 호텔의 노래방에 가서 안내원들과 노래부르고 놀았다고 했다.


휘파람 자동차 한대값이 우리나라 돈으로 오백만원이란다.


개인이 소지할 수도 있지만 북한사람들로서는 워낙 고가라 엄두를 못내고 외국의 친척들이 사주면 모를까...


내가 타고 다녔던 차는 일본제 도요다였다. 개인적으로 렌트한차이고 평소에는 일행들과 버스로 이동했다.


몇일간의 북한여행이 꿈결같았다.


휴게소에서 사먹었던 고구마. 밤. 작은사과 작은배...(정말 맛은 없었다) 개량하지 않은 과일이다.


좋지 않은 도로사정으로 애좀 먹었지만 그에 비해 호화찬란한 평양의 전철역은 호텔의 로비같았다.


졸려서 정말로 그만 써야겠다.........아듀!!!!자축!!!!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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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께끼 2004-12-04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퇴고를 축하드립니다. 특히 통일부의 홍보자료라서 조금은 정책적인 광고효과를 노려야 하기에 미루어 짐작컨데 일반 논문과는 달리 상당한 고심을 하셨을것 같습니다. 논문 한편의 완성이 뿌듯한 기대감을 가져오지만 한편으로는 완성에 따르는 허무감도 있을 것입니다. 나머지 시간을 푹 쉬는 시간으로 보내실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수련 2004-12-04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두서없이 쓴글을 읽어주셨군요. 제가 북한에 다녀와서 일기장형식으로 적어둔 것이 있습니다. 언제 정리해서 한번 올려볼까합니다.

통일부에 원고는 보냈습니다. 추가자료 필요할지도 모른다니 좀더 두고 봐야겠습니다.
 
 전출처 : 수수께끼 > 수련님의 백제역사재현단지 단청에 관한 小考

 수련님의 페이퍼에 말씀하신 백제역사재현단지의 백제 건축물(실은 이 건축물이라는 것도 백제의 건축 양식에 의한것이 아니라 일본에 남아있는 목조건축이 백제의 영향을 받아 조성된 것으로 판단하여 일본 건축물을 참고한 것이지만...)의 단청 자문작업을 맡으신 모양인데 글의 내용으로 보아서는 일차적으로 동궁의 단청에 대한 작업계획을 마무리 한 것으로 보입니다. 수련님도 말씀하셨지만, 바탕색을 온통 녹색으로 한다는 내용으로 보아서는 내록이나 양녹(이는 청동에 생기는 녹을 수습한 것으로 무척 독성이 강한 화학물이지만 목재의 장기보존을 위해 사용합니다)으로 바탕을 칠하고 그 위에 문양을 넣는 모양입니다.


  여기에서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를 제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은 백제의 문양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의 문양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 문양이 불상이건, 기와이건 또는 금속공예나 벽돌이건 백제의 문양을 찾기는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 수도 지극히 적을뿐만 아니라 일단의 조형물에 나타난 문양이 과연 백제의 단청에 사용되었는가에 관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는 문양이라면 미루어 짐작하여 한 시대의 양식과 조류로써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하겠으나 불행하게도 백제의 문양은 지극히 단편적으로만 알 수 있을 따름입니다.


  지금까지 나타난 백제의 유물에서 문양을 알 수 있는 것을 살펴보면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머리받침과 발 받침의 문양과 왕관에서의 문양...그리고 무덤을 이루고 있는 전돌의 문양(이 전돌은 중국 양나라에서 사용하던것과 똑 같은 문양으로 수입품인지의 여부도 검토가 되었으나 백제에서 모사하여 제작한 제품임이 밝혀졌습니다), 또한 백제 금동대향로에 나타난 문양이나 부여 외리에서 발굴된 연꽃 귀면무늬 전돌이나 산경치 귀면무늬 전돌,  백제의 미소라고 불리우는 서산 마애삼존불상의 광배에 담긴 문양과 그리고 저도 직접 가서 조사를 해 보았지만 일본 호류지(법륭사)에 있는 백제관음상(이 관음상에 백제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백제의 작품이라고 보는데는 다소 무리가 있는 불상입니다)의 광배의 화염문과 연화문... 비조사의 기와에 나타난 문양등입니다. 특히 비조사는 불 타 없어졌지만 비조사 경내에 보관하고 있는 비조사의 기와에 나타난 문양은 백제의 문양임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문양들이었습니다. 이런 문양에서 고구려나 신라의 문양과 비교를 하면 금방 알 수 있는것이 연꽃문양의 연잎이 6옆이 아닌 8옆으로 통일이 되어 사용되었다는 내용등 백제가 고구려나 신라와는 다른 문양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양들이 과연 백제시대의 건축물에 사용이 되었는지는 수련님의 말씀처럼 1500여년을 훌쩍 뛰어넘는 타임머신을 이용하기 전에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양은 당 시대의 보편적인 사용이 전제이기에 당시에 사용되었던 문양이라고 억지로 꿰맞추어 사용할수밖에 없습니다. 문양이야 그렇다치고 그럼 바탕색은 무엇으로 해야할지가 문제가 됩니다. 수련님의 글 내용으로 봐서는 말씀드린대로 내록과 양녹을 사용하는것 같은데 이런 바탕색 사용은 상당한 문젯점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단청 비용이 한 두푼도 아니고 몇 십억이 소요되는데 국적도 없는 단청이 된다면 이는 웃음거리 그 자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고삼국의 회화나 건축물은 고구려 고분벽화를 보면서 연구가 가능합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도교적 영향으로 사람이 죽어서도 이승에서의 영생불멸을 한다고 믿었기에 벽화의 구성이 사람이 살아있던 당시와 똑같이 꾸며져 있습니다. 집의 형태를 그대로 옮겼음은 물론이고 부엌과 푸주간등...그리고 수레와 사냥모습등등 생전에 망자가 했던 내용들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으며 인물조차도 생전 모습 그대로 정좌한 모습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일부 고구려 고분에는 입구가 건축물의 기둥 형태로 제작되기도 했으며 일부 고분에는 차마 제작을 할 형편이 아니었을 경우에는 그림으로 기둥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이런 고구려 고분 벽화는 회화뿐만 아니라 건축사적 입장에서도 상당히 중요하며 그 형태등을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것은 그 당시의 단청 모습은 단지 문양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건축물과 같이 요란한 단청은 없으며 황색, 또는 회색 바탕에 당초문등의 문양으로 단청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단청의 색상은 돌로 만들어진 기둥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 석회를 발랐기에 색상 표현을 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는 어불성설입니다. 고구려인들은 피부색까지도 표현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특히 사신도에서 보면 세부 색감 표현을 위해 상당히 노력을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망자에 대한 예우는 오히려 살아 있을때 보다 더욱 극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단지 이승을 떠났을 뿐이고 저승에서 또 다시 영생을 보낸다고 생각했으니 말입니다.


  요즘 고궁 건축물이나 절간에 칠해지는 단청은 언제부터 시작이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다만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알 수 있듯이 상당히 오래전부터 단청작업이 있었던것만은 사실입니다. 단청에 대해서는 중국의 송나라때 집필된 "영조법식"이라는 책에 건축물의 구조와 더불어 어떤 그림이 들어가야 하는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알 수 있는 단청이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지금처럼 요란한 채색이 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하나의 규범으로 "영조법식"이 만들어 졌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조법식은 우리 나라의 경우 고려시대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려시대 이전의 상황을 어떻게 짐작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해답은 불행하게도 No입니다.  그리고 바탕색으로 사용되는 양녹이나 내록도 언제부터 사용되어졌는지 명확하게 알 방법이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나라에서는 단청에 대한 연구가 매우 미진합니다. 연구라고 해보았자 실은 최근의 몇 몇 연구가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는 회화는 하나의 기술로서 예술로 인정을 하고 있음에도 단청이라는 작업은 단순한 기능으로서 기능인의 채색작업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단청에 대해서도 소득수준의 향상과 더불어 하나의 예술분야로서 인식이 되기 시작했으며 점차 단청 연구 인구가 늘어갈 것으로 판단이되지만 단청이란 기껏해야 200년 정도가 수명인지라 특별한 보존대책이 강구되지 않은 건축물에서의 단청을 볼 수 있는 경우란 거의 없습니다.  한마디로 단청의 변천과정이나 문양등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청에 사용되는 문양도 어떤 통일된 문양이 없이 전국 각지에서 단청 작업자의 개인적 사고에 의하여 멋대로 행해져서 단청을 연구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고단한 작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제에 백제 역사단지 재현 건축물에 송대의 단청 양식도 아닌 그 후대의 단청양식으로 녹색 투성이의 단청을 한다면 과연 그 건물이 제대로 백제의 단청을 재현한 건축물로서 빛을 발할 수 있을까요? 물론, 당시에 내록이 안쓰였다고는 확실하게 말씀드리기 곤란하지만 한편으로는 당대에 내록이 쓰였다는 확답도 없기에 대충 그러려니 하면서 현재의 단청 바탕을 기본 바탕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북한은 평양의 동명왕릉을 정비하면서 왕릉앞에 대규모의 사당 건축을 하고 그 건축물(시멘트 건축물입니다만)에 고구려 고분 벽화를 참고로 하는 단청 작업을 하였는데, 이 작업도 북한에서는 상당히 고민을 많이 한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현대 단청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단청 형태를 보이고 있으나 이마저도 맞는지 틀리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이렇게 옛 단청이라고 복원한 경우가 있습니다. 부여의 정림사지에 세워진 기념관에 백제의 단청이라고 하여 단청이 되어 있지만 이 단청으로 인하여 상당한 논란이 일었습니다.  과연 아무도 가보지 않은 백제시대의 단청을 어떻게 천연덕스럽게 백제 단청의 재현이라고 했느냐는 문제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단청에 종사하시는 분들의 입장에서는 요즘의 단청이 눈에 익어 새롭게 재현한 단청에는 거부감이 생길수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중요한것은 고증에 입각한 단청이라 할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백제 단청에 수련님 말씀처럼 내록이나 양녹으로 푸르딩딩하게 바탕색이 칠해진다면 정말 가관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곳에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대규모의 건축물인데 건축물이 온통 푸르딩딩 하다면 과연 단청이 제 맛이 날까가 걱정입니다.  아마도 문양 작업이 선행되어 그나마 극히 일부만 남아있는 백제의 유물로 문양은 대강 만들어 졌을것으로 판단이 되는데 이렇게 어렵게 만든 문양을 엉뚱한 바탕색으로 망친다면 안타까운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뿐만아니라 백제역사재현단지에의 단청을 보고 각각의 기능만을 고집하는 단청인들이 어떤 말들을 할것인지는 불을보듯 뻔하다고하겠습니다. 한편으로는 백제의 문양도 백제 유물을 통해 나타난 문양을 그대로 사용해야지 현대적으로 재해석을 한다거나 또는 임의로 변경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금제 관식의 화염문 속에는 꽃이 들어있는데 이 꽃을 현대적 개념의 단청처럼 연꽃이나 연등초의 형태로 변형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변형은 백제의 단청 재현이 아니라 현대적 해석에 의한 현대단청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수련님이 밤잠을 못이루시겠다는 이야기에 충분히 공감을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백제 문양부터 재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상의 광배나 기타 백제의 유적에 나타난 모든 문양을 종합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백제 금제 관식에 나타난 화염문 속에 들어있는 꽃봉오리도 단순하게 연꽃으로 넘어가서는 안될일입니다. 특히나 비조사에 있는 백제 와당은 상당한 문양 자료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기와는 건축물과는 땔래야 땔 수 없는 중요한 것이기에 백제 와당의 문양은 상당히 소중한 자료로 받아들여야 할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바탕색에 관한 문제로 백제 당시의 단청을 내록 일색으로 푸르딩딩하게 한다는 것은 후대 단청작업자들의 어리석은 발상이라는 것입니다. 백제의 색감은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 없는 지경이지만 동 시대의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나타나는 색채는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동 시대에 특별히 다른 채색안료가 있었다면 몰라도 고구려나 백제나 동일한 채색재료를 사용했다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일부에서는 무덤과 집은 다르다고 하여 서로간의 색상의 차이를 논할수도 있으나 분명히 인식해야 할것은 고구려 고분의 묘사는 고구려인의 실생활을 그대로 묘사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무덤이기에 그렇다고 운운하는 논리는 맞지 않는것입니다. 이러한 논리의 전개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제작 사유에 대한 명확한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기에 발생되는 오류라고 할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내용은 실은 상당한 전문적인 내용으로 일부 읽으시는 분들께서는 이해가 어려울수도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수련님의 짧은 단청에 관한 글을 보면서 고민하시는 내용이 제가 평시에 갖고 있는 생각이 필요할것 같아 말씀을 드리는바이며, 백제의 문화를 재현한다는 것은 최대한 그 당시의 모습과 근접해야 한다는 명제임을 생각할 때 관련되는 제반 자료의 종합적인 검토가 선행이 되어 충분한 논의 끝에 결정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 것입니다. 시행청에서도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공기에 쫒겨 급하게 진행할것이 아니라 충분한 검토를 거쳐 시행토록 하여 막대한 예산의 낭비는 물론이고 잘못 시공됨에 따른 갑론을박도 충분한 자료나 관련근거의 제시로 마무리를 해야 할것입니다. 백제에 관한 사료나 근거가 없다하여 대충 한다는것은 오히려 백제의 예술을 왜곡시키는 사례임을 관련자들은 명확하게 인식해야 할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작업은 단청업자의 요구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한다거나 섣부른 결론으로 시행을 하게 되면 엄청난 부작용이 뒤따른다는점을 반드시 명심을 해야 할거입니다. 특히나 이러한 작업에 관한 사항들은 역사에 남는 일로서 관련자는 모두 우리의 역사를 되새긴다는 명확한 사명감을 가져야 할것입니다. 그런 사명감이 결여되어 섣부른 결론에 이르러 전혀 엉뚱한 단청이 만들어 진다면 관련자들은 그 오명을 후대에 남길 수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최대한 백제의 단청에 근접한 작업을 할 수 있어야 할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단청 작업을 조속히 마무리 해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점입니다. 단청의 주 목적은 건축물의 장엄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목재의 보호라는 이유가 가장 우선하기에 몇 년 늦어졌다해서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것은 가장 사실에 입각한 고증작업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자료가 부족하면 몇 년이 걸리더라도 문양부터 차근차근 짚어가면서 제대로 된 단청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백제역사재현단지의 건축물부터 이론이 많으나 일단은 일본에 전래된 백제 양식을 역으로 되살려왔기에 별다른 시비 사항이 없다고 보겠으나 백제 단청은 일본에 있는 동사(東寺)를 비롯한 옛 백제계 양식의 속에 있는 단청들도 참고를 해야만 할것입니다.  제가 직접 가본 동사의 5중탑 내부에는 어느 시대인지는 모르지만 단청이 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에 대한 사진 촬영도 했었기에 앞으로 나오는 백제역사재현단지의 단청과 비교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백제 재현이 현대 단청과 짬뽕이 되어 나타난다면 구태어 백제의 단청이랍시고 비싼 예산을 들여서 단청 작업을 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그냥 현대식 단청으로 작업을 하면 될 일이지...백제의 단청이랍시고 시행한 작업이 전혀 엉뚱한 시대불명이요 국적불명의 단청이 되어버린다면 구태어 백제 단청을 찾는 작업을 할 필요가 없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렵게 많은 예산을 들여 시행하는 백제역사재현 사업이 잘 마무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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