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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화와 단청강의는 파워포인트로 준비해서 올려드리지 못함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3주 강의 분량인데 아쉽군요.

필요하신분은 시디로 구워드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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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11-08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이름을 바꾼 줄 모르고 알라딘 버그라고 생각했었어요. ^^

조선인 2004-11-08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책 보내실 때 시디를 같이 보내주셔도 될까요? 너무 염치가 없나? ㅎㅎㅎ
 

고려시대의 공예


금속공예

생활용품 -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에서 나타나는 풍부함이 고려시대에 이르면 더욱 양적으로 팽창되고 器形에서도 다채로움을 보여주기 시작함. 은입사기법의 성행. 완, 접시, 합, 병, 항아리, 잔, 반(盤), 세(洗), 주전자, 바리, 향로, 수저, 고려경 등

불교공예 - 불교금속공예 역시 이전 시대에 비하여 다양한 종류와 함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옴. 범종, 반자(금고), 향로(향완), 요령, 정병, 금동탑, 청동용두보당, 동호 등  

도자기

고려시대에는 삼국시대의 토기를 바탕으로 남북국시대의 발달된 토기를 거쳐 도자기로 발달되는 기반이 확립됨 - 순청자, 상감청자, 철회청자, 진사청자, 화금청자, 철채청자, 퇴화문청자, 연리문청자 등의 다양한 기법과 문양, 기형, 종류 등 각종의 아름다운 청자가 제작됨.

(고려비색청자는 중국인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어 칭송을 받았는데 송나라 태평노인의 <수중금(袖中錦)>에는,"건주의 차, 촉 지방의 비단, 정요(定窯)백자, 절강의 차, 고려비색(高麗翡色) 모두 천하의 제일인데, 다른 곳에서는 따라 하고자 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이다"라 하여, 천하의 명품들 가운데 고려청자를 포함시키고 있다.)

 

목칠공예



고려경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사용된 청동거울 이외에 고려시대부터 성행되던 청동거울을 이름하야 ‘고려경’이라 부른다. 그만큼 고려경은 다양한 종류와 다량의 유물이 전해진다. 고려경은 그 계통과 제작과정이 다소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우선 고려경은 그 출토지나 출토상태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따라서 반출유물에 의한 연대 추정도 매우 곤란한 실정이다. 대체로 고려경은 고려 이전에 전래했다가 고려의 고분에서 출토했다고 해석되는 당경(唐鏡)이 있고, 그 밖에 한경(漢鏡), 수경(隋鏡), 송 ․ 원경(宋 ․ 元鏡), 요 ․ 금경(遼 ․ 金鏡) 등 중국의 각 시대에 걸친 동경과 그것들을 모방한 방제경(倣製鏡)이나 재주경(再鑄鏡)도 나타난다. 즉 고려경은 중국에서 제작되어 한반도에 유입 사용된 것과, 고려시대에 중국 것의 도안이나 의장을 본떠 고려에서 주성한 방제경(倣製鏡), 수입품을 그대로 거푸집 틀에 떠내서 다시 주물을 부어 만든 재주경(再鑄鏡) 등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방제경은 원경(原鏡)의 문양을 그대로 모방하기도 하고, 일부 또는 2개의 무늬를 결합하거나 일부 도안의 변화를 통하여 제작하였다. 재주경은 떼어낸 틀에서 몇 차례 거듭하기도 하고 처음 부어낸 것에서 2차로 다시 부어내는 방법을 통하여 동일문양의 청동거울을 다량으로 주성하였다. 그런데 재차 틀을 떠서 주성한 재주경의 경우 문양이 무디어지고 거울의 크기나 무게가 조금씩 적어지기도 하며, 때로는 무늬가 거의 소멸되다시피 하는 사례도 발견되고 있다.

고려경에서 나타나는 주요 문양의 종류는 화조문계(花鳥紋系) · 서수문계(瑞獸紋系) · 용어문계(龍魚紋系) · 인물고사화상문계(人物故事書像紋系) · 봉황앵무문계(鳳凰鸚鵡紋系) · 보화당초문계(寶華唐草紋系) · 문자소문계(文字素紋系) 등이다. 또 그 형태는 대체로 둥근 모양 · 꽃 모양 · 직사각형 모양과 그밖에 특이한 형태가 나타나며 꽃 모양과 마름모 모양은 다시 그 가장자리가 다섯 · 여섯 · 여덟 등으로 변화되기도 한다.

고려경은 북쪽으로는 요(遼) · 금(金)의 땅에서부터 남쪽으로는 쓰시마[對馬島] · 일본 본토에서도 발달되어 넓은 유통범위를 말해 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는 것을 뜻하며 이에 따라 공예의장이 떨어지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대체로 전형적인 고려경의 조형적 특징은 두껍고 무늬가 크게 도드라지는 양상을 보여준다.


향로


향로는 향을 사르는 공양용구로서 향불 연기를 쏘이게 함으로 훈로(薰爐)라고도 부른다. 향을 사용하는 방법에는 도향(塗香)과 소향(燒香) 두 가지가 있다. 전자는 향을 가루로 만들어 깨끗한 물과 혼합한 다음 몸에 바르거나 뿌려 향내가 나게 하는 방법이며, 후자는 향을 피워 연기를 쏘임으로서 향내가 몸에 베이게 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향을 사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담을 그릇이 필요한 법, 바로 이런 용도로 사용되는 모든 그릇이 곧 향로인 것이다.

불교에서 불․보살께 올리는 공양으로는 소향(燒香)․헌화(獻花)․등화(燈火)의 세 가지가 중요한 의식이다. 따라서 이것들을 담아 공양하는 향로․화병․촛대는 부처님의 공양용구로서 없어서는 안될 것들인데, 특히 향로 하나에 화병 둘, 촛대 둘을 합한 다섯 가지를 일컬어 불단에 반드시 갖추어야할 다섯 가지, 즉 오구족(五具足)으로 섬기고 있다. 오늘날에는 여기에다 다(茶)․과(菓)․미(米)의 3종을 추가하여 모두 여섯 가지를 부처님께 올리지만 그 중에서도 시공에 그윽한 법연을 의미하는 분향공양이 단연 으뜸이다. 

예로부터 향은 악취를 제거하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특히 열대우림의 습한 기후조건 속에서 살아가야만 했던 인도사람들은 몸에서 나는 여러 가지 냄새, 즉 구취나 체취 등을 제거하기 위하여 향을 사용하였으며, 나아가 대중이 모이는 곳에서 나는 갖가지 악취를 없애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불교경전 『대지도론大智度論』권93, 석정(釋淨)불국토품82에 “천축(天竺)은 나라가 뜨거워서 냄새가 많은 까닭으로 몸에 향을 바르고서 제불(諸佛)과 사문들을 공양하라”는 내용이 있다. 이것은 당시 인도의 기후와 관련된 상기의 내용을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이밖에도 전통적으로 악취를 제거하고 부정(不淨)을 없애기 위하여 향을 피우는 풍습은 지구촌의 여러 곳에서 행하여졌다. 고대의 유대인들이 신전에서 향로를 사용하였고, 솔로몬왕(Solomon/?~BC 912?)이 향로를 만들었다는 전설은 구약성서에도 기록되고 있는바, 카톨릭교회에서는 오늘날에도 이러한 전통의 향연이 시연된다. 

이와 같이 온갖 불결한 냄새를 없애주는 향의 기능성이 확대되어 마음의 때를 깨끗이 씻어준다는 사유로 발현되었고, 마침내 불교에서는 청정무구를 희구하는 마음으로 부처님께 향을 사르는 의식으로 피어나게 된 것이다.  


향로의 발달사


향로는 쓰임에 따라 손에 들고 다니는 병향로(柄香盧)와 단상에 안치되는 거향로(居香盧), 벽이나 천장에 매다는 현향로(懸香盧) 등으로 구분된다. 또한 재료에 따라 토제, 도제, 금속제로 구분되며, 그 형태에 따라 박산형(博山形), 정형(鼎形), 삼족형(三足形), 화사형(火舍形), 고배형(高杯形), 완형(埦形) 등으로 구분된다.  

일찍이 도교․유교의 발달과 함께 제사와 제천의식이 성행하였던 중국에서는 전국시대에서부터 진․한대에 걸쳐 청동제․도제의 박산향로가 사용되었다. 또한 남북조시대로 내려오면서 도학(道學)의 행도(行道)에 쓰이는 자루 달린 병향로(柄香爐)가 유행하였다. 수 ․ 당대에는 고동기의 형태를 모방한 방형향로와 솥 모양의 정형향로, 다리가 셋 달린 삼족형향로, 화로 위에 지붕모양을 조형한 화사형향로 등이 다양하게 제작되어 송 ․ 원 ․ 명 ․ 청대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에 불교의 유입과 더불어 분향의식이 행하여졌는데, 『삼국유사』제3권, 아도기라(阿道基羅)편에는 다음과 같이 향과 관련된 일화가 기록되고 있다.     


“제19대 눌지왕 때 사문 묵호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에 이르자 그 마을 사람 모례(혹은 모록)가 집안에다 굴을 파 숨겨주었다. 그 때 양나라가 사신을 통해 의복과 향물을 보내왔는데, 군신들이 그 향의 이름과 쓰임을 몰라 사람들에게 향을 주어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용도를 묻게 하였다. 묵호자가 그걸 보고서 말하기를 <이는 향이라 부르며, 태우면 향기가 아름답게 풍기어 그것이 신성에게 정성을 알리는데, 신성은 삼보(三寶)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만약 이것을 태워 발원하면 반드시 응험이 있게 됩니다.>하였다. 이 때 왕녀가 병으로 위독하여 묵호자를 불러 향을 사르고 기도하게 하니 왕녀의 병이 곧 씻은듯이 나았다. 왕이 기뻐하여 예물을 후히 내렸는데, 얼마 후 그가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三國遺事』「券第3」 阿道基羅 [一作我道. 又阿頭.]

新羅本記第四云. 第十九訥祗王時. 沙門墨胡子. 自高麗至一善郡. 郡人毛禮.[或作毛祿.] 於家中作堀室安置. 時梁遺使賜衣著香物.[高得相詠史詩云. 梁遺使僧曰元表. 宣送溟檀及經像.] 君臣不知其香名與其所用. 遣人齎香遍問國中. 墨胡子見之曰. 此之謂香也. 焚之則香氣芬馥. 所以達誠於神聖. 神聖未有過於三寶. 若燒此發願. 則必靈應.[訥祗在晉宋之世.而云梁遣使. 恐誤.] 時王女病革. 使召墨胡子焚香表誓. 王女之病尋愈. 王喜, 厚加賚貺. 俄而不知所歸.


이와 같이 기사의 내용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까지 전해지는 6세기 이전의 향로는 단 한 점도 없다. 다만 고구려 고분벽화가운데 연대를 알 수 있는 안악3호분(357년)의 향로그림과, 5세기 초반으로 추정되는 장천리1호분 예불도의 향로그림, 쌍영총 인물행렬도의 향로그림 등을 통하여 고구려 향로의 양태를 가늠할 수 있을 따름이다.

1994년 부여 능산리 고분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는 향로조형의 진수를 보여주는 걸작이다.  일찍이 봉래산을 상징하는 박산향로가 크게 유행되었던 중국 한나라의 유물들은 도저히 비견될 수 없는 조형미를 보여준다. 기원전 2천여 년 전부터 다양한 청동기를 만들어 낸 청동기의 나라 중국조차도 이토록 환상적이고 빼어난 자태를 풍미하는 향로를 제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백제의 금동용봉대향로는 일찍이 인류가 만들어낸 청동제품 가운데 조형적으로 가장 뛰어난 예술적 신기의 발로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신라시대에도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 가운데 공양상과 성덕대왕신종 비천상이 들고 있든 병향로 등을 통하여 당시 소향 공양의식이 크게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각종의 동물과 꽃, 칠보, 길상문 등을 소재로 조형한 청자향로가 다수 제작되었다. 한껏 멋을 부린 듯 느껴지는 청아함 속에서도 흐트러짐이 없는 비색의 단아한 기품은 보는 이의 넋을 빼앗기에 부족함이 없다. 오늘에 전하는 유물가운데 청자사자유개향로(국보 제60호/국립박물관), 청자기린유개향로(국보 제65호/간송미술관) 청자칠보투각향로(국보 제95호/국립박물관), 청자귀룡형삼족향로(보물 제1072호/호암미술관) 등이 유명하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주발 모양의 노신(爐身)과 통형(筒形) 받침대가 연결된 이른바 고배형 향로가 크게 유행하였는데, 이를 다른 말로 향완(香埦)이라고도 부른다. 청동주조로 제작된 이 향로에는 은상감기법을 이용하여 온갖 문양을 장식하고 있다. 법연에 회자됨을 희구하는 정성으로 백색 은실을 검푸른 청동 표면에 한 올 한 올 정성껏 수놓아 완성된 청동은입사향완의 정제된 조형미는 선조 장인들의 예술혼을 잘 보여주는 또 하나의 걸작이다.


정병


정병이란 부처님 앞에 깨끗한 물을 넣어 올리는 공양구이다. 범어로는 ‘쿤디카(Kuwdika)’라 하는데 이를 ‘군지(軍持)’․‘군치가(君雉迦)’라 한역하였으며, 물을 담기 때문에 수병으로도 불린다. ≪법화경≫에는 스님들이 반드시 지녀야할 18가지 지물을 소개하고 있는데 삼의, 버들가지, 세숫대야, 병, 밥그릇, 깔개, 지팡이, 향로, 물주머니, 수건, 칼, 거울, 족집게, 의자, 경전, 율, 불․보살상 등이다. 여기에서 병이 곧 정병의 기원으로 추정되며, 훗날 청정수를 담아 불전에 올린다 하여 정병으로 부르게 되었다.


정병이 본격적으로 불교에서 영혼을 정화시키기 위한 관욕(灌浴) 의식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부터이다. 이와 관련하여 ≪선화봉사고려도경≫기명2, 정병편에는“정병의 형상은 긴 목과 넓은 배의 곁에 부리가 하나 있고 중간은 두 마디로 되어있으며, 테가 있다. 뚜껑과 목 중간에는 턱이 있고, 그 턱 위에 다시 목이 있는데, 귀인, 국관, 사찰, 민사에서 두루 저수용으로 쓴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내용은 고려시대에 정병이 사찰뿐만 아니라 왕실과 민간에 이르기까지 널리 애용되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특히 관세음보살이 정병을 손에 들거나 지니고 있는 고려불화가 오늘날에 상당 수 전해진다. 이러한 관세음보살의 정병에는 감로수가 담겨 있어 감로병이라고도 하는데, 바로 이 물은 중생의 고통과 갈증을 제거해주고 무주고혼을 떠도는 중생의 영혼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다. 정병은 이 외에도 대세지보살의 화관에 새겨지며, 미륵보살, 제석천, 범천 등의 지물로서도 나타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융성과 함께 많은 정병이 제작되었는바, 만든 재료에 따라 토제, 도제, 청동제 유물이 오늘에 전해진다. 또한 정병의 형상은 목이 길고 주둥이가 나팔형으로 뻗어진 병 모양과 긴 목에 뚜껑이 높게 솟아 닫혀 있고 몸체 상부에 짧은 주구가 달려 있는 모양의 두 형태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후자의 조형이 우리나라 청동제 정병의 정교함을 잘 보여준다. 특히 은상감기법으로 장식된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정병(국보 제92호/국립박물관)은 정병 조형의 진수를 보여주는 걸작이다. 동체에는 늪가에 서 있는 두 그루의 수양버들과 갈대밭을 배경으로 한 3인의 인물, 유유자적하게 흘러가는 3척의 편주, 무리지어 나는 물새와 헤엄치는 오리들을 모두 청동바탕에 모두 은실로 하나하나 새겨졌다. 이러한 풍경표현은 근경에 그치지 않고 먼 육지와 하늘을 나는 오리와 기러기무리를 원경과 중경으로 구분하여 표현하였는바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 하다. 또한 동체의 어깨와 하부에는 여의두문이 상감되었고, 주구(注口)에는 당초문이 장식되었다. 주구의 뚜껑에는 투조로 음각문을 넣은 은판을 씌웠으며, 굽 역시 은으로 돌려서 검푸르게 녹이 쓴 바탕과 어울려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금고


금고(金鼓)는 글자 그대로 쇠북을 가리키는 것으로 다른 말로 ‘금구(禁口)’․‘반자(飯子/半子)’ 등으로도 불린다. 범종 ․ 법고 ․ 목어 ․ 운판 등의 불전사물이 아침, 저녁의 예불 시나 중요한 법회의식 때 사용되는 반면에 금고는 공양시간이나 대중의 집회를 알릴 때에 주로 사용되는 신호도구이다. 금고는 법당 내 ․ 외부에 간단한 현가(懸架)를 설치하고 매달거나, 간혹 처마 끝에 매달아놓고 나무망치모양의 당목으로 쳐서 소리를 낸다. 그 소리는 범종만큼 장중하지는 못하지만 제법 크고 울림이 있는 맑은 소리로서 법당의 예불 시에 법음구로도 이용된다.

중국 위나라 때에 완성된 불경 『현우경(賢愚經)』권10에는 금고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사위국(舍衛國)에는 십팔억의 사람이 살고 있는데, 그곳에서는 북을 쳐서 대중을 모으는 것이 국법으로 정해졌다. 동고(銅鼓)를 치면 팔억이 모이고 은고(銀鼓)를 치면 십사억이 모이며, 금고(金鼓)를 치면 모든 사람이 모인다.”라는 내용이다. 이러한 기록은 원래 금고가 의식법구로 사용된 범종과는 달리 대중을 모으는데 주로 사용된 것임을 시사해준다.       

금고는 둥글고 납작한 외형으로 마치 징과 같은 생김새가 특징이다. 평면원형으로 전면은 막히고 배면은 터진 상태로 막힌 쪽을 쳐서 소리를 낸다. 옆면 상부에는 매달 수 있도록 2~3개의 고리가 부착되어있다. 반자의 전면에는 대체로 동심원 융기선을 2~3조 돌리고 중심에는 평연화문이나 당초문을 장식한다. 또한 전면의 주연부에도 당초문을 장식한 경우가 있으며, 옆면에는 기년(紀年), 시납사원, 발원문, 중량, 제작자와 시납자 등의 명문을 새기거나 도드라지게 주조한다.

금고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실한 정설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 서한시대부터 이미 금고가 사용되었던 것이 유물을 통하여 확인된다. 그 형태가 사찰의 금고와는 약간 다르지만 양자간에 유사성이 풍부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금고 역시 범종과 마찬가지로 불교가 중국에 유입되면서 불교사찰의 의식법구로 전용된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금고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중앙박물관의 함통6년(865년) 시공사(時供寺)명 금고이다. 또한 고려시대로 내려오면서 그 수가 점차 증가되고 조선시대에는 더욱 많은 금고가 주조되어 전국 유명사찰에 전해지고 있다.  



청자(靑磁) - 전중앙국립박물관장 정양모


철분이 조금 섞인 백토(白土)로 만든 형태 위에 철분이 1∼3% 정도 들어 있는 장석질(長石質) 유약(釉藥)을 입혀 1,250∼1,300℃ 정도에서 환원염으로 구워낸 자기의 일종. 이 때 유약의 색은 초록이 섞인 푸른색으로 비취색(翡翠色)과 흡사하고 투명에 가까우며 태토(胎土)의 색은 흐린 회색이기 때문에 청자의 색은 회색이 바탕이 된 녹청색이 되며 고려사람들은 이를 비색(翡色)이라 하였다.


청자의 태토와 유약은 청자를 만든 나라와 지방, 그것을 만든 시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고 굽는 방법도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여기에 따라서도 태토와 유약의 색이 조금씩 다르다. 우리나라 청자도 신라 · 고려 시대에는 앞에 설명한 것과 같으나 조선 시대에는 태토가 백색인 백태(白胎)청자도 있다. 중국의 경우에는 월주요청자(越州窯靑磁), 북송(北宋)의 여관요청자(汝官窯靑磁), 남송(南宋)의 관요청자(官窯靑磁), 용천요청자(龍泉窯靑磁)와 북방청자라 불리는 요주청자(耀州靑磁), 임여요청자(臨汝窯靑磁)가 모두 조금씩 다르며, 같은 용천요청자와 남송 관요청자 중에서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 청자와 흡사한 중국 청자는 월주요와 여관요청자인데 월주청자는 유약의 투명도가 약하고 갈색을 약간 머금은 올리브그린(olive green)색을 띠며 여관요청자도 유약의 투명도가 낮다. 남송 관요청자는 유약과 태토가 우리 청자와 비슷한 것도 있으나 태토가 흑색이며 청자색은 아주 흐리고 유약이 두껍고 불투명한 것이 있다. 용천청자는 유약이 두껍고 불투명하며 청자색이 아주 진한데 태토가 백색인 백태청자도 있다. 요주 · 임여요 청자계통은 유약이 갈색을 머금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주로 태토와 유약 속에 섞여 있는 철분의 함유량과 환원염이냐 산화염이냐에 따라 나타난다.


최성기 우리나라 청자는 환원 번조로 고운 비취빛의 아름다운 비색 청자이지만 불길이 잘못되어(산화염) 황색이나 갈색을 머금고 있는 것이 있으며, 같은 그릇인데 어느 부위는 비취색이고 다른 부위는 갈색을 머금은 예도 상당량에 달한다.


중국 만당(晩唐) · 오대(五代)의 월주청자와 북송 여관요청자, 남송 관요청자 · 용천요청자도 어떠한 일정한 시기 중에서 제한된 수량만이 명품이고, 모두가 비색(翡色)의 아름다움을 지닌 청자는 아니다. 그 시대가 지향하는 가장 이상적인 아름다운 청자는 최고의 정점에 도달한 일정한 시기와 특정한 지역에서만 가능할 수 있다.


[청자의 발생]


⑴ 회유토기(灰釉土器)와 중국 청자의 발생


청자는 토기에서 발전한 것이다. 토기가 발전하여 고화도환원번조(高火度還元燔造)의 석기(庠器) 단계에 이르면 가마에서 자연히 생겨나는 재티가 고온의 토기 표면에 내려앉아 태토에 들어 있는 규사질(硅砂質)과 합하여져 녹아 붙어 자연유가 되는데 이런 경우 재티를 많이 날게 하여 인위적으로 자연유를 입히기도 한다. 이러한 자연유의 성분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것을 잿물 또는 회유(灰釉)라 한다. 이 잿물을 토기 표면에 바르고 고온으로 구워내면 회유토기 (灰釉土器, 또는 灰釉庠器)가 되고 이 회유토기가 청자 발생의 시초이다.


중국 회유토기의 시원은 은대(殷代)이며,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부터 연유(鉛釉)가 발달하였지만 동양에서 유약의 기본은 회유였다. 이 회유는 한대(漢代)에 들어오면서 전 시대보다 유약 표면이 매끄럽게 되는데, 이러한 단계를 시원적 또는 초기적 청자라고 할 수 있다. 육조시대(六朝時代)에는 태토도 점차 양질이 되고 유약도 장석유(長石釉)에 가깝게 발전하여 질적으로 청자에 한 발 다가서게 되고 당대(唐代)에 이르러 청자가 세련되기 시작하여 만당 · 오대에는 질적으로 완벽한 청자가 되었다.


화남(華南)과 화북(華北)지방에서 다 같이 청자를 만들었지만, 화북지방의 것은 조질(粗質)이었으며, 오대까지 중국청자를 대표하는 것은 양쯔강 남쪽 하류에서 널리 생산되던 청자 중에서도 저장성(浙江省) 동북쪽 상린호반(上林湖畔) 일대를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던 가마에서 만들어낸 월주청자였다. 이 밖의 중국 청자는 이른바 북방 청자라고도 불리는 요주요 계통의 청자와 북송 여관요청자(河南省 寶豊縣 淸凉寺), 남송 용천청자 · 관요청자 등이다. 이 중에서도 중국 도자사상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은 11세기 말∼12세기 초 북송대에 만들어진 여관요청자이며, 남송대의 관요와 용천요의 명품도 높이 평가된다.


⑵ 시유토기(施釉土器)와 우리나라 청자의 발생


우리나라는 삼국 시대에 고화도로 환원 번조한 토기를 만들었다. 삼국 토기 중에서도 신라 · 가야토기는 질적으로 가장 우수한 것이어서 1,200℃ 이상이나 올라가는 고화도 환원 번조로 표면색은 회청흑색이고 무쇠같이 단단한 것이었다. 삼국 시대의 토기를 거쳐 통일 신라 시대에 이르러 토기에서 자기로 이행되는 기반이 확립되었다. 통일 신라 시대 토기는 부장용(副葬用)보다는 주로 실생활용으로 안정된 것이었다. 이때는 삼국 시대부터 시작된 토기 표면에 유약을 입힌 연유계(鉛釉系)인 녹유토기(錄釉土器)와 갈유토기(褐釉土器)가 발달하여 세련되고, 8세기경부터는 회유토기가 발달하여 시유토기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고 있어서, 토기에서 자기로 이행되는 기반이 확립되었다.


자기에 대한 지식은 삼국시대부터 중국 육조청자(六朝靑磁)의 유입이 상당량에 달하고 있고(일부 백자 · 흑유자의 유입도 있음.), 8세기부터 성당(盛唐)의 도자기가 들어왔으며, 특히 9세기경부터는 월주지방의 만당도자기(주로 청자와 일부 다른 지방 백자)와 그 기술이 해로(海路)를 통하여 활발하게 우리나라 서해안과 일부 남해안에 많이 유입되어 초기 청자인 이른바 일훈문굽계청자(日暈文─系靑磁 : 햇무리굽청자)와 소량이지만 백자도 만들기에 이르렀으며 뒤이어 녹청자(綠靑磁)도 만들었다.


중국 저장성 월주청자의 영향으로 생산하기 시작한 이 청자는 9세기 후반 경부터 비롯되어 10세기까지 계속되었다고 생각되며, 일훈문굽계 청자요지는 주로 경주지방과는 멀리 떨어지고 중국과 가까운 우리나라 서해안과 남해안 일대에 분포되어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곳만 하여도 8, 9개소에 이르고 있으며, 그중에서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와 계율리 일대에 집중적으로 많이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첫째, 통일신라 말기가 되면 수도인 경주의 왕권이 약화되고 지방호족들의 세력은 확장되기 때문이다. 둘째, 그 대표적 호족세력인 장보고(張保皐) 등에 의한 중국과의 해상무역을 통하여 서남 해안 지역이 중국 도자문화의 영향을 가장 일찍 받게 되었다. 또한 풍부한 이 지역 물산과 함께 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 등으로 이 지방의 사회 · 문화 · 경제적 요건이 경주 등 타 지역보다 앞섰다. 따라서 새로운 도자기 문화에 대한 이해와 수용태세가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9세기 전반 동북아 해상 무역의 왕자였던 장보고 등의 해상 활동에 의하여 중국 청자(백자 · 흑유자도 포함)가 수입되고 청자 번조 기술이 도입 전파됨으로써 이 일대는 이미 토기를 사용하는 생활 문화권에서 벗어나 자기를 사용하는 문화권으로 진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 서남 해안의 가마에서는 석기에서 청자로 이행되는 초기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환원 번조가 잘되고 갑발(匣鉢 : 도자기를 구울 때 재티 등이 자기 표면에 내려앉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도자기를 넣는 개비)을 사용한 본격적인 청자를 번조하기 시작하였고, 일부 백자와 흑유자도 번조하였다.


그 뒤 강진과 부안은 중앙인 개경과 연결되어 관요로 이어져서 이곳 가마가 집중적으로 운영되어 발전하게 되고, 중국 남북방요의 영향을 체계적으로 정리, 이용함으로써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⑶ 초기 청자와 녹청자


햇무리굽청자는 양질이었기 때문에 생산비가 높아서 그 소비계층도 지방호족 등 부유한 계층이나 상류계층이었을 것이다. 9세기 무렵 햇무리굽 양질 청자의 수요가 늘어나자 서남해안 일대에는 수많은 가마가 생겼다. 이제까지 발견된 가마만 보아도 북쪽으로부터 황해도 송화군 운유면 주촌리와 봉천군 원산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용인시 이동면 서리, 전라북도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고창군 아산면 용계리, 강진군 대구면 일대와 칠량면,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등 널리 분포되어 있다. 이들 가마는 규모가 방대하고 모두 갑발을 사용하여 값이 비싼 양질의 청자를 생산하려고 노력한 가마들이다.


청자문화가 이같이 급속히 퍼져나가게 되자 자연히 질이 떨어지는 조질의 값싼 청자가 역시 서남해안 일대에서 생산되어 일반 백성들의 수요에 충당하게 되었다. 이 조질청자는 태토에 모래 등 잡물이 섞이고 번조한 뒤에도 기공(氣孔)이 많은 등 치밀하지 못하고, 유약도 회유와 흡사하여 그 색이 녹갈색을 머금고 있으며 유면(釉面)도 고르지 못하다.


이러한 청자를 녹청자라고 하는데, 이 녹청자요지는 인천광역시 서구 경서동, 충청남도 서산시 성연면 오사리, 보령시 천북면 사호리, 전라남도 함평군 손불면 양재리, 영광군 염산면 오동리, 해남군 산이면 일대 등지에 있으며, 해남군 산이면에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만도 50개가 넘어 이 시기 청자문화의 급속한 발달을 엿볼 수 있다.


녹청자의 발생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현재로서는 햇무리굽청자가 발달 보급되는 시점에서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보다 앞서 신라 회유토기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도 있으나 아직까지는 더 확실한 자료가 없다.


[고려청자의 발달 및 쇠퇴]


⑴ 시대구분과 각 시대 개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미 통일 신라 말기에 청자를 만들고 일부 백자와 흑유자도 만들기 시작하였으나, 고려에 와서 청자는 더욱 많이 만들어지고 발전, 세련되어 고려청자의 이름이 높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시기를 구분하여 고려청자를 살펴보고자 한다.


전기 : 고려 초기에 강진의 햇무리굽청자가마는 점차 확산되었으나 다른 지방의 햇무리굽청자가마는 점차 없어지거나 지방의 조질청자가마가 되고 녹청자가마도 생겨나게 된다. 강진가마에서는 청자의 질과 형태와 문양이 안정되고, 중국의 제반 양식과 번조수법이 고려적으로 변모해 나가 16대 예종연간까지는 그 질과 양식에서 중국적인 것을 거의 청산한 단계에 이른다. 그러므로 고려초에서 16대 예종(1122)까지를 전기로 한다.


중기 : 17대 인종 때부터 고려자기가 고려적으로 아름답게 세련되어 독창적 기형과 독특한 비색청자를 완성하고, 18대 의종 때에는 상감기법과 문양구성이 가장 뛰어났으며, 청자 · 청자상감(靑磁象嵌) · 철채(鐵彩) · 동화(銅畵) · 동채(銅彩, 또는 辰彩) · 연리문(練理文) · 철채상감 · 화금자기(畵金磁器) 등 다종다양한 청자가 만들어졌고 청자기와도 만들었다. 인종대에 이미 귀족간의 알력이 심화되어 의종 때 무신의 난이 일어났는데, 무신이 집권한 시대의 고려자기는 질과 양식이 퇴보하였지만 고려자기의 모습에 커다란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몽고군이 침입하면서부터 급격히 퇴보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1123년(인종 1)부터 몽고가 대군으로 침입하기 직전인 1230년(고종 17)까지를 중기로 한다.


후기 : 몽고 침입 이후에 원종대와 충렬왕 초까지 소수의 상품(上品)을 제외하고는 고려자기가 많이 퇴보하였으나 중기의 모습은 아직 남아 있고 충렬왕대부터 화금과 진사설채가 다시 나타나며 새로운 기형과 문양이 생기고 청자의 질이 좋아지는 등 일시적 성황을 보이다가 다시 퇴보하는 고려말까지를 후기로 한다.


⑵ 전기(발전기)


9, 10세기는 청자가 발생하고 백자도 일부 만들어 그 질이 자질(磁質)로서 완성되는 시기이다. 이때의 청자와 백자는 현대에서 말하는 완전한 자기는 아니며 완전한 자기로 발전하는 과정이다. 이 때 청자 · 백자 이외에 흑유자도 일부 특수한 지역 (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에서 약간 만들었으며, 점차 고려 도자기가 다양화되는 시기였다. 청자에는 청자의 기면(器面)을 파내어 상대적으로 파내지 않은 면이 두드러지게 보이는 대담하고 크게 나타낸 이형연판무늬가 등장하고, 오목새김문양(거친 국당초문 등)과 철화문(鐵畵文) 및 퇴화문(堆花文)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11세기 말∼12세기 초에는 중국의 산시성(陜西省) 요주요, 광저우(廣州) 서촌요 · 정요 · 자주요 · 수무요 등과도 교류가 있어 음각(오목새김) · 양각(돋을새김) · 양인각(압출양각)문과 철화문 · 퇴화문이 발전하는 등, 청자의 종류도 다양해지고 기형 · 문양 · 번조수법 등이 고려적으로 세련되어 갔다. 강진의 가마는 점차 확대되어 대구면의 용운리 · 계율리 일부, 사당리와 칠량면 삼흥리 일대에서 사당리 전면과 수동리 일대로 확산된다. 그리고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과 진서면 일대에도 청자가마가 생기고, 그 뒤 가마도 관요 형태의 대규모의 청자요로 발전하였다.


⑶ 중기(성기)


① 청자의 세련 : 12세기 전반기는 고려청자 중에서도 순청자가 가장 세련되는 시기였다. 청자의 색은 처음부터 환원번조로 시작되었으며, 이미 11세기에는 완벽한 환원번조로 독특한 청자색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12세기 전반기는 그 절정기로서 이 때 청자의 모습은 17대 인종왕릉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청자과형화병(靑磁瓜形花甁) 등 일괄유물로 대표된다.


1123년(인종 1) 북송 휘종의 사행의 일원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이 ≪고려도경 高麗圖經≫에서 “근년 이래 제작이 공교(工巧)하며 색택(色澤)이 더욱 아름답다.”라고 한 것이나, 북송말경으로 생각되는 태평노인(太平老人)의 기록인 ≪수중금 袖中錦≫에 “고려청자의 비색이 천하제일”이라고 지적한 바와 같이 반실투성(半失透性)의 빙렬(氷裂)이 거의 없는 우수한 비색 유약을 완성하였다(1차비색 완성).


비색 유약의 완성과 더불어 기형 · 문양 · 번조수법 등에 남아 있던 중국의 영향이 거의 사라지고 자연에서 소재를 얻은 독창적인 형태와 문양이 고려적으로 변형, 발전되며 독특한 세련을 보인다. 이와 같은 청자의 세련은 12세기 중엽까지는 또 다른 의미의 진전을 보여 유약은 반실투성에서 조금씩 더 밝아지고(2차비색 완성), 새롭게 구상된 음각 · 양각 · 투각문양 등이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러한 발전은 ≪고려사≫ 세가 의종 11년(1157)조에 보이는 청자와(靑磁瓦)의 기록과,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당전마을에 산재한 청자와편(靑磁瓦片)을 반출하는 요지에서 증명이 된다. 이 당전마을의 청자와편을 반출하는 요지에서 출토되는 파편의 유약은 인종릉에서 출토되는 일괄유물인 1차비색 완성기(12세기 전반)의 것보다 유색이 조금 더 밝아졌으며 기형과 문양이 고려적으로 좀더 완숙한 상태를 보여 주고 있다.


또 획기적인 시문방법으로 고려자기에 상감기법으로 문양을 나타내는 새로운 기법이 등장하였다. 상감 완성과 때를 맞추어 상감을 여러 가지로 응용한 것, 또는 상감기법 외의 다른 여러 방법으로 문양을 나타내는 기법(철채상감 · 철채백퇴화 · 철유 · 철유상감 · 철유백퇴화문 등)이 싹텄을 뿐 아니라 이러한 여러 가지 기법이 완숙한 상태에 도달하였다.


1159년(의종 13)에 죽은 문공유(文公裕)의 지석(誌石)과 함께 출토된 청자상감보상당초문완(靑磁象嵌寶相唐草文燔)은 유약이 맑고 투명하며, 상감의 기법과 문양의 포치(布置) 등이 매우 발달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문공유묘 출토 대접을 만든 시기는 유약 · 기형 · 문양과 문양의 포치 · 번조수법 등이 가장 아름답고, 고려자기의 기준이 되는 그릇들을 만든 때였다. 청자유약은 기포가 적고 비색이 밝아져서 문양이 잘 보이게 되고 빙렬이 있는 것이 많아진다. 기형은 선이 더욱 유려해지면서도 유연하여 그 시대양식을 확실하게 지니게 된다.


문양은 사실적 문양을 약간 도식화(圖式化)하고 양식화(樣式化)하였지만, 자연의 향기를 지녔으며, 그 시대양식을 분명하게 확립하고 있고, 부위마다 적합한 문양을 개발하였다. 대접의 경우 각 문양의 포치 · 구성은 먼저 주문양(主文樣)과 종속문양(從屬文樣)이 있어 그릇의 넓은 중앙 · 중심부위에 주문양을 배치하고 구연부(口緣部)나 안쪽바닥 굽언저리 등 주문양 상하에 종속문양을 배치한다. 주문양은 사실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공예의장의 성격으로 양식화되지만, 회화적이고 여백을 많이 살려 자연이 지니는 맛을 잃지 않는다.


종속문양은 동일 패턴이 반복되는 공예의장이지만, 주문양에 비하여 매우 좁은 공간에 시문되어 주문양의 상하여백을 마무리해 주고 안정감을 주는 구실을 하여, 전반적인 문양은 회화성을 갖춘 공예의장이나 그릇과 일체가 되어 상호 보완하는 입장에 있다. 이 시대는 문화적으로 매우 세련된 시기여서 비색 · 기형 · 문양뿐 아니라 그릇의 굽다리를 어떻게 깎느냐, 또 구울 때 굽다리에 어떻게 하여 눈 자국이 작게 남느냐 하는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예의 검토, 실험되고 있다.


따라서 굽다리는 대체로 작게 하고, 매병류 등의 큰 그릇은 안다리굽이 많고, 보통 병류나 주전자 등의 그릇은 굽이 조그마하고 낮으며 큰 것은 내화토(耐火土) 모래비짐눈으로 번조하고, 일반 그릇(작은 것)은 규사(硅砂)눈을 받쳐 구워 굽이 작고 예쁘며 규사눈 자국이 작고 희게 보여 그릇의 바닥까지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제작하고 있음을 본다.


자기 자체를 정교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물론 청자(백자도 같음)의 비색을 더욱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이미 9세기부터 사용하던 갑(匣·匣鉢 : 개비)을 발전시켜 갑발의 내화도를 훨씬 높여 갑이 일그러지는 것 등을 방지하고 갑도 만드는 등 크게 발전하였다.


② 상감문양의 발생과 발달 : 12세기 전반 상감 발생기의 청자요지(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당전마을의 청자기와를 반출하는 요지)에서의 상감문양은 기명(器皿)의 일부에만 사실적인 문양으로 나타나며, 상감이 시문된 위치는 11세기 후반경이나 12세기초경의 기명에 음 · 양각으로 시문하던 자리의 일부 또는 전면에 나타난다. 이 경우 내외면 중 일면시문으로 문양도 음 · 양각문과 흡사하다.


이러한 초기 상감상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12세기 중엽인 상감 최성기에 이른다. 처음의 상감문양은 기명의 내측이나, 외측의 일부에 나타나다가 점차 전면에 나타나며 좀더 발전되면 내외면에까지 시문이 확대된다. 문양은 상감 발생 초기의 사실적인 문양에서 도식화되기 시작한다. 그릇의 면을 분할하여 구도를 잡아 주문과 종속문을 구분, 시문하여 상감되는 부위에 따라 새롭게 고안된 여러 가지 문양이 적절히 포치되어, 하나의 일정하고 통일된 구성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


문공유의 묘에서 출토된 청자상감보상당초문완은 바로 상감 최성기의 작품으로, 이러한 완숙한 경지까지 도달하려면 상감 발생기로부터 상당한 시일이 경과하였을 것이며, 따라서 상감의 발생시기는 12세기 전반인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상감 발생기는 상감이 여러 가마에서 고안되어 일반화되는 처음 시기를 말하는 것이며, 특수한 지역 또는 특정한 기형에 예외적 또는 우발적으로 상감이 시문된 예는 12세기 초는 물론이고 11세기 또는 10세기에도 가능할 수 있다.


실제로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서리 백자 · 청자가마 발굴 때 10세기를 내려오지 않는 층위에서 서툴지만 특이한 상감을 한 파편이 발견되었고, 전라남도 함평군 손불면 양재리에서도 10세기경 청자가마에서 흑상감 파편이 발견되었다. 그 밖에 11세기로 추정되는 청자에 상감이 들어간 예는 여러 가지가 있다.


③ 기타 청자문양 : 상감기법과 문양이 가장 세련된 12세기 중엽에는 상감기법 이외에 10세기경부터 나타난 화청자·퇴화문청자와 그 밖에 철채 · 철채백퇴화 · 철채백상감 · 화금청자 · 청자동화〔銅畵=辰砂〕설채 · 연리문〔絞胎〕자기 등이 함께 화려한 꽃을 피우고 있다. 특히 산화동 안료로 환원번조상태에서 선홍의 발색을 성공시킨 진사설채는 중국보다도 2세기 이상 앞서 세계에서 가장 먼저 사용하였지만, 절대로 붉은색을 자기 표면에 남용하지 않았다.


⑷ 후기(쇠퇴기)


무신 집권 이후 점차 그 폐단이 쌓이더니, 13세기 초부터는 고려자기에도 변화를 보여 기형이 조금 둔해지고 굽도 조금씩 커지고 밝은 유약의 비색이 조금 어두워지면서 문양도 조금씩 퇴보해 가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몽고의 침입으로 가속화되어 원종대와 충렬왕 초에 매우 타락한 청자로 전락된다. 이 때의 상황을 알아볼 수 있는 자료는 1269년(원종 10)부터 1287년(충렬왕 13) 사이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 간기(干記 : 己巳·庚午·壬申·癸酉·甲戊·壬午·丁亥)가 들어 있는 청자상감 그릇들이다.


이들 청자기명들은 암녹색이 비낀 흐린 유약과 뿌연 빛, 둔해진 곡선의 그릇으로 문양도 12세기 이래의 상감문양이 계속되고, 일부 새로운 당초계 문양도 나타나고 있지만 퇴화된 상태로 거칠고 생략되었으며, 굽도 둔하고 모래받침이 조금씩 나타난다. ≪고려사≫ 세가 충렬왕조와 ≪고려사≫ 열전 조인규전에는 고려에서 원나라 세조에게 화금청자(畵金靑磁)를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화금청자는 12세기 전반부터 극소수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는데, 양식적으로 보아 충렬왕 때에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는 것(청자상감화금원숭이토끼당초문편호 · 청자상감화금당초모란문대접)을 통하여 상감청자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충렬왕 즉위 중반 이후에 일시적인 안정으로 청자의 유약이 약간 불투명하지만 비색유약이 그전보다 아름다워졌고, 문양도 그 이전부터 시문하던 문양과 새로운 문양이 등장한다. 그전부터 사용하던 문양은 원형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상태였으며, 새로운 문양은 사실적으로 안정되었다.


주문양에 조그만 이파리가 많이 달린 새로운 당초문과 봉황문 · 용문양이 간혹 보이며 학의 몸에 봉황의 꼬리가 달린 기형이 나타나기도 하며, 종속문양이 여러 단으로 구성되기도 하며, 기형에도 양면을 두드려 편평하게 만든 항아리〔扁壺〕 등이 새롭게 등장한다. 이러한 변화는 충렬왕대부터 원나라를 통한 중동지방과 서방문화의 유입으로 일부 기형과 문양 · 번조수법 등에 조금씩의 변화를 보인 것 중 일부분이다. 그 밖에 번조 때에도 변화가 있어 상품은 환원번조하였으나 하품에는 산화번조가 있으며, 시대가 내려올수록 점차 환원이 보장되지 않아 청자의 색에 황색과 갈색을 머금게 되었다.


충렬왕 · 충선왕 이후 잠시의 안정이 다시 끊어지고 사회가 불안해져서 14세기 초를 조금 지나서부터는 주로 청자상감과 순청자기류만이 생산되었고, 14세기 중엽부터 질과 기형 · 문양 · 번조수법이 극도로 타락하고 퇴보된 상태에 이르렀다. 공민왕 때 상품 청자가 일시 그 질이 향상되었으나 다시 타락하며, 이러한 타락한 상태가 조선 왕조로 넘어와 분청사기의 모체가 된다.


⑸ 고려청자의 특색


우리나라 청자는 12세기 전반에 비색 순청자로서 유례가 없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나타냈고, 12세기 중엽 유약을 맑고 밝게 발전시켜 청자상감으로서 다시 한번 꽃을 피웠다. 고려자기 중에서는 청자가 특히 세련되고 많이 생산되었다. 토기에서 청자로의 발전이행은 인류문화 발전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으나, 고려 시대의 청자는 그 자연과 시대적 배경에 힘입어 더욱 많이 생산되고 가장 세련되었다.


중국 청자가 색이 진하고 유약이 불투명하며 예리하면서 장중한 데 비하여 고려청자는 은은하면서 맑고 명랑한 비색, 유려한 선의 흐름과 탄력이 있고 생동감 있는 형태, 조각도의 힘찬 선, 기물과 일체가 된 회화적이며 시적인 운치가 있는 상감문양 등에 특색이 있으며 또한 세계에서 최초로 자기에 붉은색을 내는 구리의 발색기법을 창안해냈으면서도 한두 점 악센트로만 강한 색 [銅彩發色] 을 쓰면서 모든 색을 담담하게 구사하는 등 언제나 자연과 같이 호흡하고 일체가 되고자 하는 것이 그 특색이다.


[조선청자]


고려 말의 타락한 청자는 조선조로 들어오면서 큰 줄기는 분청사기로 이행되고 다른 한 줄기는 조선청자로 그 맥락이 이어진다. 고려청자를 계승한 조선 초기 청자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고려 말 퇴락한 재래의 청자를 계승하였으나 그 질과 기형 · 문양 등이 조선조의 특질을 조금씩 나타내면서 발전하는 청자이고, 또 하나는 새로운 백자가마에서 새로 만들어내는 청자이다. 재래식 청자는 고려청자의 퇴락한 상태의 말기적 조질청자에서 약간 발전, 변형되어 질이 향상되고 기형에 생동감이 있으며 문양이 활달해져 초기 분청사기상감과 기형·문양이 거의 같다.


새로운 청자는 백자가마에서 같이 생산되며 백자태토에 청자유약을 입혔고, 기형도 고려청자 기형에서 발달한 것이 아니고 새로운 백자와 거의 같고 음각문양이 있는 것도 있다. 광주 중앙관요 중에 조선 전기의 초기가마는 광주군 퇴촌면 우산리와 도마리, 중부면 번천리·오전리, 초월면 무갑리 등에 있으며, 전기의 중엽가마는 퇴촌면 정지리와 관음리 등에 있고, 전기의 말엽가마는 광주읍 탄벌리, 도척면 상림리, 초월면 선동리 등에 있다.


조선 청자는 15세기 중엽까지는 두 가지 계통 모두 질이 양호하고 기형과 문양이 생동감 있고 활달하였으나 15세기 후반부터 고려청자를 계승한 청자는 자취를 감추고 새로운 조선조 청자만이 백자 가마에서 소량 생산되었으며 17세기 중엽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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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모>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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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2004-09-23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원 선생님은 월북작가라서 한국미술을 "민족미술" 이라 표현하셨을 겁니다. 물론 한국미술사가 민족미술사이니 무어라 표현해도 좋을듯 하군요.
저도 미술을 하면서 미술사를 해서 그런지 관심이 많답니다. 제가 하는 미술이 전통미술쪽이다보니 더욱 그런것 같습니다. 제가 올리는 글들이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통일신라미술


통일신라의 건국과 발전

삼국 중에서 가장 작았던 신라가 꾸준히 국력을 키운 끝에 당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660년에는 백제를 무너뜨리고 다시 8년 뒤인 668년에는 최대 강국이었던 고구려마저 멸망시킴으로써 드디어 숙원인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제29대왕인 태종무열왕(재위654~660)과 문무왕(재위661~680), 그리고 김유신 장군은 삼국통일대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그러나 신라인들의 강력한 정신력이 통일대업의 원동력이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이렇게 다시 태어난 신라를 삼국시대의 고신라와 구분하여 통일신라라고 부른다.

통일신라는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통일 초기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고토에서 각기 국권 회복을 위한 저항운동이 있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통일을 도운 당나라가 승리에 따른 지분을 차지하기 위하여 도호부를 설치하는 등 적지 않은 갈등과 어려움도 뒤따랐으나 차차 평정되었다. 대동강과 원산 이남의 땅을 확보하는 것으로 자족해야 했던 통일은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광대한 영토의 상당부분을 잃는 불완전한 것이었다.

그러나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엄청난 의의를 지닌다. 세 나라로 나뉘어 치열한 각축을 벌이던 같은

한민족이 이제 하나의 나라 안에서 공존하며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데 함께 참여하게 된 것이다.


통일신라미술 개관

통일신라시대의 미술은 삼국 시대에 비해 보다 화려하고 원숙하며 또한 국제성을 강하게 띄고 있다. 이 시대의 미술은 삼국시대의 지역적 한계를 탈피하여 높은 미적 감각을 보여준다. 조형적으로 사실적인 기법을 구사하고 있지만, 그것을 실물 그대로를 표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미의 세계를 구현하려는 것이었다. 즉 통일된 조화로써 이상적 세계관을 창조하려는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층 무르익은 기예로써 이상적인 조화의 미를 연출하였던 것이 곧 통일신라시대 미술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미술은 다방면에 걸쳐 놀라울 정도로 높은 수준의 발전을 이루었다. 먼저 회화에서는 솔거(率居), 홍계(弘繼), 정화(靖和), 김충의(金忠義) 등의 훌륭한 화가들이 배출되었던 것으로 보아

회화가 크게 발전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솔거(率居)가 그린 황룡사의 노송도(老松圖)에 얽힌 전설, 당나라에서 활약한 김충의(金忠義)에 관한 기록, 당의 대표적 인물 화가였던 주방(周昉)의 그림들을 이 시대 신라인들이 대량 수입하였던 일 등을 고려하면 통일신라의 회화에서는 청록산수 계통의 사실적이면서도 기운 생동하는 산수화와 아름답고 요염한 미인들을 즐겨 다루는 궁정 취향의 인물화가 유행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현존하는 통일신라의 유일한 회화인 화엄경변상도는 이 시대의 세련되고 균형잡힌 불교회화의 성격과 수준을 잘 말해 준다. 또한 전반적으로 동시대의 불상 양식과 궤를 같이 하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미술의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역시 불상과 탑 등 불교 미술 분야임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이 시대의 불교조각은 삼국시대의 전통을 바탕으로 일종의 국제양식인 당나라 불상의 영향을 수용하여 한국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라 하겠다. <군위삼존석불>, 감산사지에서 출토된 <석조아미타여래입상>과 <석조미륵보살입상>, <굴불사지사면석불>, <석굴암 본존불> 등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보면 그 점이 쉽게 확인될 뿐만 아니라 통일 초기부터 8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의 변천 양상이 잘 드러난다. 넓고 당당한 어깨, 가는 허리, 몸에 달라붙은 옷자락, 3곡(三曲)을 이룬 자세, 몸에 비하여 큰 머리, 뚜렷한 이목구비 등이 다소간을 막론하고 공통적인 특징으로 돋보인다. 삼국시대의 고졸한 양식과 구분지어 신양식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 특징들은 석불만이 아니라 금동불에서도 예외 없이 드러난다. 이상적인 아름다움의 세계가 이러한 불상들에서 구체화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미의 특성이 비단 불상에만 나타났던 것은 아니며 회화, 각종 공예, 건축 등 다방면에서 간취되고 있어서 하나의 시대양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의 미술이 이룩한 최고의 업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보는 이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석굴암의 조각, 성덕대왕신종, 다보탑이 우선적으로 고려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석굴암의 본존불과 보살상 등의 조각들을 보면 통일신라 불교미술의 극치가 느껴진다. 미려한 용모, 당당하고 균형 잡힌 몸매, 몸의 윤곽을 드러내는 바람에 나부끼는 듯한 부드러운 옷자락 등의

탁월한 외면적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얼굴 가득히 배어 나오는 해탈과 법열의 내면적 정신세계가 너무도 그윽하고 신비스럽게 표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차가운 돌에 새겨졌음에도 불구하고 살아서 움직이는 듯, 따뜻한 피가 흐르는 듯 느껴지는 것은 비단 혼자만의 착각은 아닐 것이다. 이 석굴암의 조각들을 만들어 낸 작가는 돌을 떡 주무르듯 마음대로 다룰 능력과 돌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을 정도의 신통력을 갖춘,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던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고 믿어진다. 이러한 절정을 고비로 통일신라의 조각이 차차 격을 잃고 쇠퇴하게 된 것은 세상만사가 그렇듯이 필연적인 현상일 것이라고 자위하면서도 아쉬움을 떨쳐 내기 어렵다.

석굴암 못지 않게 통일신라 미술의 수준과 성격을 잘 말해 주는 것은 속칭 '에밀레종'이라고 일컬어지는 성덕대왕신종이다. 빼어난 조형성,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소리, 우람한 크기 등 모든 면에서 단연 세계 제일의 종이라 하겠다. 높이 3.78m, 밑의 지름 2.27m, 아랫부분의 두께가 23cm나 되는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종은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경덕왕 때 시작하여 혜공왕 때에서야 어렵게 완성되었다. 펄펄 끓는 용광로에 아기를 집어넣었으므로 종을 칠 때마다 '에밀레~에밀레'하는 소리가 난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것을 보면 이 종이 얼마나 어렵게 주조되었는가를 짐작케 한다. 대규모의 용광로나 그것을 옮기고 들어올릴 대형의 기중기가 없었던 시절에 이처럼 엄청난 종을 주조해 냈다는 것은 비단 미술사적인 측면에서 뿐만이 아니라 과학기술사적 측면에서도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종은 미술과 과학기술의 발전이 함께 이루어지는 것임을 새삼 일깨워 주기도 한다.

통일신라의 건축과 관련하여 제일 먼저 주목을 끄는 것은 단연 불국사의 다보탑이다. 우아하고 안정감 있는 당당한 형태, 각 부분들이 이루는 균형잡힌 조화와 비례, 밑으로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4각→8각→원→8각으로 거듭되는 변화, 목조탑처럼 다듬어지고 짜여진 세련된 구조 등이 어우러져 석탑인지 목탑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이채롭고 아름다운 보배를 탄생시켰다.

이상의 몇 가지 예들만 보아도 통일신라의 미술이나 문화의 수준이 얼마나 높았던 것이었으며 또 얼마나 창의성이 뛰어났던 것인가를 절감하게 된다. 통일신라의 미술은 중국 수당대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국제적 보편성 이상으로 세련미와 독창성을 유감없이 발현하여 그야말로 금자탑을 이루었음이 확인된다. 또한 이 시대의 미술이 고려에 전해져 그 바탕이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두고두고 우리 모두에게 참고가 되고 있음도 유념해야 할 사항이라 하겠다.

서예의 경우에는 초기에는 진나라의 왕희지체, 후기에는 당나라의 구양순체가 유행하였고, 김인문, 김생 등이 명필로 이름을 날렸다. 특히 각체에 능하여 서성이라고 일컬어지는 김생이 유명한데 고려시대에 그의 글씨를 모아서 새긴 집자 비문(集子碑文)이 오늘날까지 전해 오고 있다.

이 시대의 말기에 이르면 불교 의식을 중히 여기지 않는 선종이 유행하고 정치적 혼란이 겹쳐 불상을 위시한 여러 분야의 조형 미술이 경직되고 쇠퇴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석굴암

경북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891 소재한 국보 제24호 석굴암은 세계의 문화유산으로서 한국의 국보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문화재이다.

석굴사원이 처음 조성된 곳은 인도였다. 인도에서는 불교가 성립되기 이전에 이미 자이나교를 비롯한 각 종교의 수행자들이 굴속에 들어가 수행하는 전통이 있었다. 이것은 곧 척박한 땅과 기후조건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의지와 구도자로서의 수행이 가져온 자연극복의 방편에서 비롯된 것이다. 원래 자이나(Jaina)는 '승리자'라는 뜻으로 인도에서 기원전 6세기경에 시작된 비(非) 브라만(Brahman) 계통의 종교이다. 이 종파는 엄격한 계율 생활과 고행의 실천을 통한 윤회로부터의 해탈을 설파하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이런 전통에 따라 석굴이 발달하기 시작하였고, 곧 이어 불교가 성립된 후로는 석굴내부를 온갖 조각과 회화로 장식한 석굴사원이 조성되었는데 아잔타(BC 2세기~AD 7세기)석굴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이러한 관습이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전래되어 돈황(4세기 중엽)․ 운강(460년대 초)․ 용문(494~)석굴이 개착되었다. 석굴암은 이러한 석굴사원의 흐름을 이어받아 아시아 대륙의 가장 동쪽 끝에서 그 화려한 클라이막스를 이룬 곳이다.

석굴암은 불국사와 함께 김대성(700~774)에 의해 창건되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 의하면,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덕왕 10)에 대상(大相)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佛國寺)를 중창할 때, 왕명에 의하여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상세한 내용은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웠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가난한 대성이 다음 생에서 복을 받기를 바라며 머슴살이로 장만한 밭을 부처님께 받치고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접었다. 대성이 죽은 그날 밤 재상 김문량(金文良) [?~711]의 집에 이상한 사건이 일어났다. "모량리의 대성이라는 아이가 너의 집에 환생하리라"는 음성이 하늘로부터 들려왔던 것이다. 그리고는 곧바로 김문량의 아내가 임신하여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아이는 손바닥에 '대성'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진 쇠붙이를 쥐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대성이라 하고 모량리에 사는 전생의 가난한 어머니를 시중의 집으로 모셔와 편히 살게 하였다"는 내용이다. 

재상의 집에서 환생한 김대성이 장성하여 하루는 토함산에 올라 곰을 사냥하였는데, 꿈에 곰이 나타나 "어찌 네가 나를 죽였더냐"고 원망하였다. 대상이 두려워 용서를 빌자 곰은 자신을 위하여 절을 지어달라고 청하였다. 잠에서 깨어난 대성은 크게 뉘우치고 이 후 사냥을 그만 두었으며, 곰을 잡았던 자리에 장수사(長壽寺)를 지었다. 또한 사람으로 살면서 영(靈)을 등한히 하였음을 깨닫고 현세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모량리의 전생 부모를 위하여 석불사(석굴암)을 세웠다고 전한다.

상기의 내용은 불교의 인과응보(因果應報) 설화를 기반으로 한 요소가 엿보이는 전설적인 유래이다. 그러나 대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환생(還生)하였다는 김대성은 성덕왕(재위 702~737) 때의 중시(中侍)로 있었던 김문량이 실존인물임에 비추어, 그의 아들인 김대정(金大正)이 대성과 동일 인물인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따라서 김대성은 왕명을 받들어 토함산의 정상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전개하여 불국사와 석굴암이라는 김씨 왕족(金氏王族)을 위한 2대 사찰의 건립에 원을 세웠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생애를 마감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 후 김대성 생전에 완공을 보지 못한 석굴암의 조영사업은 국가가 마침내 완성시켰다. 이 점은 분명히 석굴암의 창건이 김대성이라는 개인의 원력(願力)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왕실을 비롯한 당시 신라인 모두가 염원한 거족적인 일대 불사(佛事)였음을 추정케 한다. 그것은 특히 석굴암의 방위(方位)가 김씨 왕족의 공동묘역(共同墓域)인 신라의 동해구(東海口)와 일치하고 있음을 보아도 더욱 뚜렷해진다. 동해구란, 삼국통일의 영주 문무왕(文武王)의 해중릉, 즉 대왕암(大王巖)이 자리잡고 있는 곳을 말한다. 문무왕은 욕진왜병(欲鎭倭兵)하고자 동해의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이승에서까지 국가수호의 집념을 잃지 않겠다는 군왕이었다. 이와 같은 호국사상은 동해구의 유적인 해중릉을 비롯하여 감은사(感恩寺)나 이견대(利見臺), 그리고 석굴암과 동해구와의 관계 등에서 같은 맥락으로 파악될 수 있다. 이 점은 석굴암의 창건주인 경덕왕의 선왕인 효성왕 역시 화장 후 산골(散骨)된 곳이 바로 이 동해구이었음으로, 석굴암 대불의 시각(視角)이 동남동 방향의 동해구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과 강한 연관성을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신라인의 믿음과 호국정신의 요람으로서 국찰(國刹)도 같았던 석굴암의 존재를 뚜렷이 부각시켜 주는 예라고 하겠다. 이로써 석굴암이 지니고 있는 신앙적인 측면은 물론, 조형적인 면까지 신라미술의 최고 절정을 이룬 민족 최대의 석조미술품으로 꼽아 결코 손색이 없는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인도와 중국에는 석굴암보다 더 큰 석굴들과 큰 불상들이 무수히 많지만 이처럼 짜임새 있고 체계적이며 기하학적으로 치밀하게 계획되어 조성된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석굴암 창건 이후로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는 어떠한 모습으로 전래되었는지 알 길이 없으나 조선시대의 화가인 겸재 정선(鄭敾)[1676~1759]이 그린 산수화 속의 석굴암으로 보아 적어도 2~3백년 전까지만 해도 석굴암이 잘 보존되어 있었음을 추정케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시대에 일인들이 보수를 하면서 당시 신소재로 각광받던 시멘트로 석굴암 돔을 싸 막았는데 결국 이는 석굴암 내부에 습기가 차는 원인이 되었다. 광복 이후 1961년부터 전면적으로 다시 중수했으나 내부 벽면에 물방울이 생기는 등 문제가 생기자 석굴암 내부에 인위적으로 환기장치를 만들어 놓았다. 또한 석굴암에 외부 자연환경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목조전실을 설치하고 목조 전실과 석굴암 사이를 유리벽으로 막았다. 따라서 일반 관람객들은 안타깝게도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본존불을 친견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석굴암의 조형성

석굴암의 구조적 특색은 무엇보다 화강암(花崗岩)의 자연석을 다듬어 인공적으로 축조한 석굴사찰이라는 점이다. 즉, 인도 ․중국 등의 경우와 같이 천연의 암벽을 뚫고 조성한 천연석굴이 아니다. 이와 같은 토목기술을 바탕으로 이룩된 석굴의 기본적인 평면구조는 전방후원(前方後圓)의 형태를 취하면서 네모진 공간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로 나뉘어져 있다. 주실에는 단독의 원각(圓刻) 본존상(本尊像)을 비롯하여 보살과 제자상 등이 있으며, 전실에는 인왕상(仁王像)과 사천왕상(四天王像) 등을 부조(浮彫)하여 배치하였다. 이 전실의 기능은 곧 예배와 공양을 위한 장소이다. 천장은 궁륭형(穹챘形)의 둥근 양식이며, 그 위에 연화문(蓮花紋)의 원판을 두어 천개(天蓋)로 삼고 있다.

조각상의 배치는 전실부터 시작하여 팔부신중(八部神衆) 8구, 인왕(仁王) 2구, 사천왕 4구, 천부(天

部) 2구, 보살(菩薩) 3구, 나한(羅漢) 10구, 감불(龕佛) 8구와 본존여래좌상 1구가 봉안되었다. 이들 불상의 배치에 있어 두드러진 특징은 무엇보다 좌우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고대 조형미술의 기본원칙을 충실히 따르는 것으로 석굴의 안정감을 일층 강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조각상 가운데 가장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본존여래좌상이다. 이 석굴 자체가 본존상을 봉안하기 위하여 조영되었던 만큼 그 의미가 매우 큰 불상이다. 예배의 주대상이 곧 이 본존상임은 물론, 중앙에 자리잡아 석굴의 내부공간을 구획한 신라 조각미술의 결정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뛰어난 작품이다. 본존상은 연화문이 새겨진 대좌(臺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있다. 광배(光背)는 석굴 후벽의 천장 밀에 둥근 연화판석(蓮花瓣石) 1매로 조성하였다. 이는 전실의 법당에서 본존상에 예배할 때, 동일시각 위에 놓여지는 치밀한 계산에 따라 처음부터 마련된 것이다. 본존상의 양식적 특징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 7세기 후반부터 유행하여 고려 전기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여래좌상의 기본양식이다. 법의(法衣)는 오른쪽 어깨를 벗고 왼쪽 어깨에 가사(袈裟)를 걸친 우견편단(右肩遍袒) 양식을 보이고 있다. 또한 수인(手印)은 악마의 유혹을 물리친다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결(結)하고 있으며, 머리는 육계와 나발(螺髮)로 조형되었다. 상호(相好)는 원만한 모습에 자비(慈悲)로운 미소를 보여주고 있으며, 신부(身部)는 매우 당당할 정도의 거구로서 장부의 상으로 묘사되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에 올려놓고 두 번째 손가락을 다음 손가락 위에 겹쳐 운동감을 나타낸다. 왼손은 두 발 위에 놓아 편안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어떻든 본존상의 신앙적인 의미와 조형적인 가치가 훌륭히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부드러운 자태와 인자한 표정에서 고도의 조각술을 살필 수 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불교의 구원상(久遠像)을 형상화한 것이다.

본존불의 명호

석굴암 본존상에서 중요한 부분은 명호이다. 지금까지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그것은 석가여래로 통칭되어 왔으나 이는 뚜렷한 오류임이 구명되었다. 즉, 19세기 말엽 중수 당시의 현판(懸板)에 미타굴(彌陀窟)이라는 기록이 있었다는 점과, 오늘날까지 전래되고 있는 편액(扁額)에도 수광전(壽光殿)이라는 표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분명히 ꡐ무량수(無量壽) ․무량광(無量光)ꡑ을 뜻하는 수광(壽光)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자료는 본존상의 명호가 석가여래 아닌 아미타불(阿彌陀佛)임을 말해주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또한 신라시대에 보편적이던 우견편단과 항마촉지인은 곧 아미타불이었다는 점도, 본존상의 명호를 밝히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이는 영주(榮州)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에 안치된 본존상이나 군위(軍威) 팔공산(八公山)의 석존 본존상 등 같은 양식의 불상에서도 분히 입증되고 있다. 이와 같은 신라 불상의 양식계보로 비추어 볼 때 석굴암 본존불상의 명호는 7~8세기 신라에서 유행했던 아미타불임이 분명한 것이다.

한편 김대성이 현세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전세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세웠다는 창건 유래 역시 미타정토(彌陀淨土)를 표현한 것으로, 동해구의 유적과도 연관되고 있다.

이상의 여러 관점에서 석굴암 본존상의 명호는 마땅히 신라인의 정토신앙을 기반으로 한 아미타불이며, 왕족의 발원에 의해 이루어진 거국적인 불사(佛事)이었음을 확인케 한다. 석굴암은 1995년

유네스코에 의해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 종묘와 함께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신라종 그 위대한 탄생(가나아트 2000년 여름호 게재/곽동해)

1.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한국종의 신비한 조형에 관한 수수께끼는 이 땅에서 미술사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20세기 초반부터 국내외 학자들의 지대한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그 조형의 상징성은 신비에 쌓인 채 명쾌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이유인즉 동서고금을 통하여 한국종만큼 독특하고도 신비로운 조형적 창의성을 발휘한 예가 없기 때문이다.

1970년대 후반까지 대부분의 학자들은 한국종만이 가지고 있는 음통의 비밀이 중국 고동기 용종(甬鍾)을 모방한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초반 황수영 박사의『삼국유사․만파식적』설화 상징설이 발표되면서 한국종의 조형적 탄생문제가 한층 더 큰 이슈로 쟁점화 되었다. 황 박사의 논리는 조형의 유사성을 비교한 <용종기원설>과는 달리 사료의 내용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차츰 그 타당성에 무게가 실려졌다. 그리고 20여 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종의 조형적 탄생에 대하여 정설로 굳어지는 듯 하였다. 그러나 학계 일각에서는 <용종기원설>을 주장하거나 <만파식적상징설>을 부정하는 시각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 잇달아 발표된 종관련 저서와 논고에는 분명 <만파식적상징설>을 아예 언급조차 않거나 부정하는 내용이 실려있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종의 신비로운 탄생에 대한 수수께끼는 풀릴 수 있을까?

2. 신라종의 새로운 탄생을 위하여

오늘에 전하는 가장 오랜 한국종은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의 신라종(725년)이다. 따라서 한국종의 기원은 곧 신라종의 태생과 맞물려 있다. 오늘날까지 추론된 신라종의 조형적 탄생에 대한 일반적인 가설은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이른바 외국 유입설과 신라 고유의 창출설이다. 그 중 외국 유입설은 기원전 중국 주대(周代)에 유행한 고동기 용종(甬鍾)을 모방했다는 주장이며, 신라창출설은

북모방설, 만파식적설, 솟대기원설 등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기원문제에 대하여 그토록 다양한 주

장이 제기된 것을 보면 한국종의 조형성은 분명 신비에 쌓인 트러블메이커인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은 공감을 얻고 있는 것이 <용종기원설>과 <만파식적상징설>이다. 최근 경주박물관의 강우방 관장이 발표한 내용은 중국종에서 영향받은 7세기 풍탁형 소종에서 발전한 신라종의 새로운 창출을 주장하지만, 결론적으로 중국종 모방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⑴ 중국 고동기의 용종 기원설

용종(甬鍾)은 중국 서주시대(B.C. 1111~770)에 출현하여 전국시대(B.C. 480~259)까지 유행하였던 고동기(古銅器) 악종(樂鍾)의 하나이다. 광복이후 주로 선진시대 무덤에서 출토되고 있는 용종은 진시황이 대륙을 통일한 후에는 다른 악종들과 더불어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한 용종을 모방하여 신라종의 조형적 창출이 이루어 졌다는 주장이다. 용종기원설은 일찍이 미술사 선구자인 고유섭 선생이 처음으로 제기하였으며, 그 후 김원룡 박사 등 많은 후학들에 의하여 추종된 논고이다. 그러나 우현 선생의 견해에는 인접국의 종에 비하여 신라종의 탁월함을 설하기 위한 목적이 은연중에 드러난다. 이것은 "중국과 일본종에 비하여 신라종이 가장 고식(古式)이다"라는 글에서 느낄 수 있다. 즉 신라종이 가장 전통적인 양식을 갖추었다는 주장이다.

한국종의 조형이 용종을 모방하였다는 논리는 외형상 특징에 있어서 부분적으로 몇 가지 유사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용종기원설은 상호간의 조형을 조목조목 비교 열거하는 치밀함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논고가 제기된 초기에는 상당한 설득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 주장은 양자간의 단순한 형태의 유사점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조형의 상징성을 밝히지 못한 맹점이 있다. 따라서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문점이 따른다.

첫째, 용종과 신라종은 약 1천여 년 정도의 시대 차이가 있다. 즉 악기의 용도로서, 묘의 부장품으로 매장되어 진시황 통치 이후에는 중국에서조차 자취를 감춘 용종을 신라종이 어떻게 모방할 수 있었을까?

둘째, 용종의 '간(幹)ꡑ부분인 수두문이 발달하여 신라종의 용두(龍頭)로 변화하였다는 주장도 무리가 있다. 원래 '간ꡑ의 기능은 종을 매달기 위한 장치로서 용종의 출현 초기인 기원전 10~9세기경에는 수두문이 조형되지 않았다. 시대가 내려오면서 그 고리에 수면(獸面)이 부가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형상이 지극히 미약하여, 신라종의 극사실적인 용뉴(龍 )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지나친 비약이라는 지적이다. 차라리 신라종의 용뉴는 같은 시기의 중국과 일본종을 닮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신라종의 용뉴에서 음통을 제거하고 용만을 역방향으로 대칭 시키면 당시 중국종이나 일본종의 쌍용뉴와 방불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용종의 '용(甬)'자는 문자 그대로 솟아오른 조형을 의미한다. 원래 용종은 은대(殷代)의 요(鐃)를 거꾸로 한 형태에서 발전하였다. 즉 용은 요의 손잡이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용'에는 음통의 기능성이나 <만파식적>과 같은 상징적인 의미가 결여되었다. 더욱이 연꽃 위에 안치되어 소중한 신격까지 부여받은 성덕대왕신종의 음통을 보더라도 양자간의 조형의도는 분명 다르다. 단순히 형태가 비슷하다해서 상호간의 상관성을 논한다는 것은 무모함이 있다.

넷째, 용종의 용은 무(舞)위의 중앙에 위치하여 대칭의 중심을 이루었다. 신라종과 같은 시기의 중국과 일본종의 용뉴도 좌․우 대칭을 이룬 모습이다. 그러나 유독 신라종의 음통은 천판의 중심에서 한 쪽으로 치우쳐 있다. 나아가 동서고금을 통하여 대칭성을 탈피하여 조형된 종고리 형상이 신라종 밖에 없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신라종의 용뉴는 세계 최초로 대칭미학의 고정관념을 탈피한 엄청난 파격의 조형물인 셈이다. 

⑵ 만파식적 상징설

삼국통일의 영주 문무대왕이 승하한 후 유언에 따라 불교식으로 장례를 집행하였다. 그리고 동해구 큰 바위에 장골하니 오늘의 대왕암을 말한다. 이와 함께 대왕께서 왜군을 물리치고자 창건한 감은사, 아들 신문왕이 조성한 이견대와 더불어 이른바 동해구 3대 유적이 완성되었다. 그러한 대규모 왕실사업과 더불어 발생된 기사가 바로 만파식적설화이다. 그 내용인즉 "동해에서 용이 가져다준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으니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낮고, 가뭄에 비가 내리고, 장마와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잠잠해졌으므로 만파식적이라 칭하고 신라의 국보로 삼았다"는 것이다.

설화의 내용대로 만파식적은 대나무로 만들어 졌기 때문에 그 형세가 둥근 원통형이며 마디가 있어야 한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신라종 정상에 조형된 수수께끼의 원통을 만파식적의 상징으로 보고자 한 것이다.

또한 신라종의 용 모습은 두 발을 앞․뒤로 벌려 몸통 뒤에 밀착된 음통을 짊어지고 힘차게 기어오르는 모습인데, 이것 또한 설화의 내용 중에 용이 대나무를 등에 짊어지고 바다에서 육지로 힘차게 기어 나오는 장면으로 보고자하였다.

내용과 같이 만파식적 상징설은 신라종의 신비한 조형을 당시 신라의 정세와 관련되어 파생된 정신적 상징에서 찾고자 하였다. 따라서 내용 면에서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으나 그 조형이 분명하지 않다면 자칫 부정될 수 있는 단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신라종의 원통유절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여기에 한층 더하여 성덕대왕신종의 음통은 천판에서 수직을 이루지 못하고 한쪽으로 약간 기운 모습이다. 종 전체 또한 음통이 설치된 방향으로 기우러 걸린 모습이 최근의 종합조사에서 밝혀졌다. 그러한 현상은 음통의 하중에서 비롯되었다. 즉 음통을 설치하였는바 그 하중으로 인하여 전체균형이 상실된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몸체의 균형이 훼손될 정도로 무리하게 음통을 설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3. 만파와 대나무

⑴ 대나무를 조형한 신라종의 음통

만일 신라종의 음통이 만파식적을 표현한 것이라면 내용 그대로 대나무형상 이어야 한다. 그리고 형세가 둥근 원통이며, 속이 비었을 뿐만 아니라 외부에는 마디도 있어야할 것이다. 따라서 만일 한국종의 음통이 대나무를 조형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만파식적상징설>이 보다 설득력을 얻게됨은 당연한 일이다.

가장 오래된 상원사종의 음통은 연판문과 당초문 등 각종의 문양으로 장식되었으나 분명 마디가 확인된다. 그러나 그것을 대나무라고 보기에는 다소 억지일 수 있다. 성덕대왕신종의 음통 역시 연판문으로 장식하였지만 보다 분명한 마디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대나무 모습 그대로는 아니다. 죽절의 조형은 천흥사명 고려종(1010년)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2개의 융기선을 돌려 전체를 5마디로 구성하고 마디의 내부에는 당초문을 장식하였다. 그런데 천흥사종의 음통에서 문양을 삭제한다면 대나무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형상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음통의 대나무형상은 계속해서 대부분의 고려후기종에서도 재현되었다. 그리고 한국종에서 조형되고 있는 음통의 죽절형상은 계속해서 고려후기를 거쳐 조선중기 범종까지도 명확한 모습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혹자는 음통에 문양이 장식되었기 때문에 대나무가 확실치 않다는 주장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나무를 그대로 묘사한 것은 없을까? 만일 그러한 조형이 있다면 한국종의 음통이 만파식적을 상징한다는 주장이 보다 확실한 근거를 얻게되는 셈이다.

그런데 현재 전남 구례 화엄사에 소장되고 있는 강희61년 (1722년) 유마사명종에서 대나무 형상이

확인되었다. 종의 전체적인 모습은 조선중기 이후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중형종이다. 주조기술의 쇠퇴로 인하여 세부표현이 도식적이며 문양 또한 섬세하지 못하다. 그러나 용뉴는 한 마리의 용이 몸통으로 대나무를 휘감은 모습처럼 조각되었다. 마치 세 마디로 구성된 대나무를 천판 위에 그대로 밖아 놓은 듯한 모습인 것이다. 바로 이 종은 신라종의 음통이 곧 대나무로 만든 만파식적을 상징하였다는 사실을 밝혀줄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셈이다.

⑵ 만파(萬波)를 조형한 고려종

앞서 한국종의 음통이 만파식적을 상징하는 대나무라는 사실이 조형을 통하여 밝혀졌다. 그런데 설화의 내용과 같이 용이 대나무를 등에 지고 수면 위로 올라온 순간을 묘사하였다면 천판은 곧 수면을 의미하게 된다. 이 점에 단서가 될 수 있는 고려종 2구가 있다. 13세기 유물로 추정되는 연천출토고려종 용뉴에는 한 마리 용이 죽절을 등에 지고 힘차게 상승하는 모습이 생생히 묘사되었다. 그런데 용의 몸통이 밀착된 천판 주위에 희귀하게 조형된 파도형상을 확인 할 수 있다. 현재 중앙국립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종을 자세히 관찰하면 그것이 마치 파도인지 구름인지 식별하기 애매하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만파(萬波)라 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와 유사한 또 하나의 고려종이 발견되었다. 현재 일본 후쿠오카시 시립박물관에 소장된 고려종은 앞서 소개한 연천출토 유물과 매우 닳은 꼴이다. 용뉴 또한 거의 비슷한 형상인데 그 종에도 파도가 조형되었다. 그것은 마치 수면위로 거칠게 일어난 파도가 역연한 형태이다. 한 마리 용이 대나무를 짊어지고 수면위로 힘차게 솟구쳐 오른 순간 수면에서 거친 파도가 일어난 상황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죽절과 더불어 한국종의 음통이 만파식적설화를 바탕으로 창출된 조형임을 확인시켜주는 결정적 단서가 되는 것이다.

3. 동서화합, 남북화합을 위하여

지금까지 신라종의 음통에 관한 기능성 및 상징성에 관한 연구나 용의 조형적 연구는 많았으나 용의 상징성 연구는 아직껏 한차례도 없었다. 그러나 필자는 신라종의 한 마리 용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적 접근을 시도하고자 한다. 과연 신라종의 단용이 의미하는 상징성은 달리 어떻게 해석되어야할 것인가? 

우리 나라 역사의 개설서 격인 『문헌비고』에 보면 신라 시조 원년에서부터 조선조 1714년(숙종

40년) 사이에 무려 29차례나 용의 출현기록이 보인다. 그런데 그러한 기록은 모두 왕과 관련이 있다.

예로부터 용은 임금이나 제왕의 상징으로 이용되었다. 용의 장엄하고 화려한 성격 때문에 흔히 위인과 같이 위대하고 훌륭한 존재로 비유되면서 왕권이나 왕위의 상징으로 비유된 것이다. 왕의 얼굴을 <용안>, 의복을 <용포>, 지위를 <용위>, 덕을 <용덕>이라 칭한 것이 그 예이다. 또한 임금의 평상을 <용상>, 수레를 <용가․용거>, 임금이 타는 배를 <용선>이라 불렀다. 이처럼 임금과 관계되는 것에는 거의 빠짐없이 <용>이라는 접두어를 붙여 호칭하였던 것이다. 이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용의 무한하고 경이로운 조화능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용=군왕=하늘'이라는 절대적인 상징의 연결관으로 발전하여 마침내는 국가보위를 위한 호국룡사상을 탄생케 한 것이다. 특히 신라의 용은 곧 호법용이요 호국용이었다. 신라의 영원한 왕권과 호국을 기원하는데 용이 이용되었는바, 황룡사구층탑이라든가, 삼국통일대업을 이룬 문무왕이 죽어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되겠다고 한 내용도 임금은 곧 '호국용'이라는 등식의 성립을 말해준다.

만파식적설화도 신라임금을 상징하는 호국룡을 주연으로 등장시킨 역사적 드라마의 한 테마로 해석되어야 한다. 설화가 성립된 시기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의 일이다. 당시 구 백제인와 고구려인들은 통일국가라는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채 수구주의적 자세를 취하였다. 게다가 대외적으로 왜구 침범까지 빈번하여, 왕실의 앞날은 지극히 혼미한 정세에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즉 무엇인가 호국적인 차원에서 통일신라의 백성이 하나가 되는 정신적 합일점을 찾아야만 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위기국면을 돌파하려는 목적으로 형성된 설화가 곧 만파식적설화이다.

설화가 완성된 후 성덕왕이 즉위하였다. 왕은 35년간 재위하면서 선정을 베풀어 나라의 기반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신라는 8세기 전반의 성덕왕(702~737) 말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안정되고 태평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그런데 8세기를 전후하여 당시에 중국과 일본에서 만들어진 종들의 용뉴는 모두 두 마리의 용이 조형되고 있다. 만일 그러한 종이 신라에도 있었다면 당시 백제나 고구려 출신의 망국인들에게 그것이 곧 두 임금의 상징으로 비춰지지 않았을까?

나라를 잃은 구 백제인과 고구려인 들에게 두 마리 용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곧 자신들의 망국 왕과 새로운 통일국가 왕이라는 두 임금의 상징을 느끼기에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그 점을 간파한 신라왕실에서 통일국가의 유일한 임금을 상징하는 한 마리 용을 신라종에 조형하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신라 최고종인 상원사종(725년)이 성덕왕 24년에 만들어졌으며 그 이전의 종은 현재 단 한 점도 전해지지 않는다. 우리 나라에서는 6세기 중반에 이미 범종이 주성되었음이 기록을 통하여 밝혀졌다. 그리고 오늘날 중국과 일본에는 신라종보다 앞선 6~7세기 종들이 상당수 전해진다. 유독 한국종만은 오늘날까지 상원사종 이전의 것이 한 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상원사종의 주조기술은 동일한 합금재료를 사용한다면 새 천년을 맞이한 오늘날 첨단과학시대의 주조기술로도 재현하기가 쉽지 않다. 즉 상원사종은 그 이전에 많은 주종경험과 주조기술의 시행착오를 거쳐서 얻어진 기술력의 산물인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까지 단 한 점도 발견되고 있지 않은 상원사종 이전에 주성된 범종들의 행방이 사뭇 묘연해진다. 그 종들은 모조리 어디로 갔을까? "통일신라에는 오로지 한 임금만이 존재할 뿐이다"라는 의미를 표방하기 위해서 한 마리의 용뉴를 창안하였고, 그 이전의 쌍용뉴종들은 혹시 에밀레종과 같은 새로운 거종을 만드는 데에 재활용하지 않았을까? 이것은 또 다른 설화를 꾸미자는 것이 아니다. 구리의 채광이 여의치 못했던 당시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그러한 발상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를 종합하면 신라종은 백제와 신라, 또는 고구려와 신라의 화합을 상징하는 우리 나라 최초의 동서화합, 납북화합의 상징조형물임이 분명하다.

당시 신라의 정세는 지금의 한반도가 직면한 정신적, 이념적 장벽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우연치고는 지나치게 유사한 판국이다. 지금 우리 민족이 1천 200여 년 전에 울렸던 화합의 종소리를 다시 한번 울려야 하는 실정에 있다하면 지나친 기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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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ylontea 2004-09-22 0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좋은 글을 잘 읽고.. 퍼갑니다...
즐겁다고 일만 너무 열심히 하지 마시고... 건강하셔야 해요..

수련 2004-09-23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사실은 일....재미있기도 하고 재미 없을때도 많아요. 하지만 하기 싫어도 해야할때가 있기에....
스스로에게 재밌다고 최면을 걸어두고 한답니다.
두리만 아는비밀 이예요~~~~ㅎㅎ
 

신라의 미술


신라의 건국과 발전

한반도 동남단의 경주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조그마한 나라, 신라(BC57~AD668)는 6세기 이후

점점 강성해져서 마침내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루었고, 우리 나라의 미술문화 발전에도 혁혁한 업적을 남겼다. 알에서 태어났다는 박혁거세를 시조로 하고 있는 신라는 본래 여섯 부족으로 이루어진 연합체 또는 성읍국가에서 본격적인 중앙집권적 왕국으로 발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의 나라 이름도 신로, 사라, 서라, 서야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었으나 이것들은 모두 읍리를 뜻하는 사로와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여진다. 신라 초기에는 박․석․김의 3성이 임금을 배출하다가 4세기 중엽에 이르러 김씨 왕조의 전통이 확립되고 국호도 신라로 굳어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신라는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통합하고 본격적인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었다.

신라는 17대 왕인 내물마립간(356~401)부터 22대 지증왕(500~513)까지의 사이에 국가다운 면모를 일신하였는데 왕의 칭호가 사용된 것도 이 때부터이다. 즉 지증왕때 마립간을 왕으로 바꿔 처음으로 호칭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라가 왕권을 굳건히 하고 다방면에 걸쳐 융성하게 된 것은 23대 법흥왕(514~539), 24대 진흥왕(539~575)을 거쳐 29대 무열왕(654~661)에 이르는 시기였다. 법흥왕 때 금관가야를 멸망시키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528년), 연호를 건원으로 정하였다. 또한 율령을 공포하였고, 무엇보다도 처음으로 불교를 공인함으로써(527년) 불교문화를 꽃피우게 될 바탕을 마련하였다. 이 밖에도 백제의 사신을 따라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521), 중국 남조와의 교섭을 도모한 것도 대외교섭의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신라 24대 진흥왕은 신라의 영토를 획기적으로 확장시키고 국기를 튼튼히 함으로써 훗날 통일을 도모하는 기반을 다졌다. 진흥왕은 가야를 통합하고 동남해상의 해상권을 장악, 백제와 연합하여 한강유역에 진출한 뒤 훗날 그 지역을 독식하였다. 한 걸음 나아가 황해를 장악하고 확장시킨 영토 곳곳에 순수비를 세웠으며 불교의 진흥, 화랑도 편제(576), 거칠부의 국사 편찬(545), 등의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다졌던 것이 그의 주요 업적들로 꼽힌다.


신라 미술 개관

힘차고 동적인 고구려의 미술, 부드럽고 인간미 넘치는 백제의 미술과는 달리 신라의 미술은 토속성이 강하고 사변(思辨)적인 성격이 현저하다. 또한 부장품들 중에는 로마나 이란 계통의 유리그릇을 비롯하여 외국에서 전래된 것이 분명한 것들도 꽤 포함되어 있어서 신라문화의 활발했던 국제적 교섭을 일깨워 주기도 한다. 이러한 외래문화 유물들은 신라가 한반도의 동남단에 치우쳐 있었던 관계로 외국과의 문화적 교섭은 어려웠을 것이라는 종래의 막연한 통념이 그릇된 것이었음을 명백하게 밝혀준다. 또한 경주 등 중심지역과는 달리 순흥 등 신라의 외곽지역에서는 적석목곽분이 아닌 석실봉토분을 축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벽화를 그려 넣었던 사실이 밝혀져 중앙과 변방의 문화적 차이를 여실히 드러내기도 하였다.

고구려, 백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신라의 미술 역시 고분미술과 불교미술로 대별할 수 있다. 경주를 비롯한 신라 중심지의 평야지대에는 왕가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대규모의 고분들이 산재해 있는 바 이들 고분들은 신라 특유의 적석목곽분들임이 몇 차례의 고고학적 발굴을 통하여 확인되었다. 목곽을 설치하고 시신을 목관에 넣어 안치한 후에 그 목곽을 수많은 돌과 점토로 쌓아 덮고 그 위에 다시 흙을 다져 올려서 동산처럼 만든 무덤이 곧 적석목곽분이다. 이러한 묘제는 석실로 되어 있는 고구려나 백제의 대부분의 왕릉들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목곽이 썩으면 그 위에 쌓여 있던 돌과 흙이 무너져 내려 시신과 부장품을 완전히 덮어 버리기 때문에 방으로 되어 있는 무덤들과는 달리 도굴이 매우 어렵다. 신라 고분의 이러한 구조적 특성으로 인하여 무덤 안에 부장되었던 많은 유물들이 도굴되지 않은 채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천마총, 황남대총 등은 지금까지 발굴된 신라의 대표적 적석목곽분들이다.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화려함의 정수를 보여주는 금관을 비롯하여 각종 목걸이, 귀걸

이, 팔찌, 반지 등의 장신구들, 무기, 금․은제 그릇, 토기류, 유리 그릇류, 공예품에 그려진 그림 등 종류가 다양하고 그 양도 풍부하다.

한편 신라는 6세기에 제도를 중국식으로 바꾸고 불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이면서부터 미술문화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종래의 신라 고유의 토속적 특성에 국제적 성격이 두드러지게

가미되면서 더욱 세련되고 조화로우며 국제적인 성향의 미술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점은 특히 신라의 불교미술문화에서 더욱 뚜렷하게 간파할 수 있다.

불교가 신라에 처음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눌지왕(417~457) 통치 시기였으며, 이차돈의 순교를 겪고 공식적으로 승인된 것은 법흥왕 14년(527)이었다. 이로써 종래 신라 사회를 지배했던 무속신앙, 자연숭배, 조상숭배 등 토속적인 원시신앙 이외에 외래의 국제적 신앙인 불교가 신라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삼국 중에서 가장 늦게 불교를 공인하는 등 보수적 색이 짙었던 신라에서 가장 찬란한 불교미술문화가 이룩될 수 있었던 것은 신라인의 잠재력을 잘 보여주는 일이다. 신라는 불교를 공인한 후 머지않아 흥륜사, 영흥사, 황룡사, 분황사 등의 대찰들을 건립하기 시작하였다. 흥륜사는 법흥왕 21년(533)에 착공하여 10여 년 뒤인 진흥왕 5년(544)에 완공되었다. 사원의 남쪽에 연못과 남문이 있었고 그 뒤에 금당과 회랑이 있었는데 금당 안에는 벽화와 고승의 소조상이 있었다고 <삼국유사>에 전해진다. 이로써 당시의 절은 후대와 마찬가지로 불교회화, 조각, 공예, 건축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회화는 경주의 천마총과 황남대총이 발굴되기까지는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들 고분에서 출토된 천마도(天馬圖), 기마인물도, 서조도(瑞鳥圖), 우마도(牛馬圖) 등을 통하여 신라회화의 진면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그림들은 모두 화원의 작품이기보다는 공장에 의한 일종의 공예화이다. 고신라 말기에 왕실의 회화에 관한 업무를 관장했던 채전(彩典)이 설치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당시의 회화 수준은 고분에서 출토된 공예화보다 훨씬 높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 중 공예품을 가장 많이 남겨놓은 것은 신라이다. 그 이유는 상기한 바와 같이 고분의 구조가

도굴하기 어려운 구덩식 돌무지 덧널무덤[竪穴式積石木槨墳]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벽과 천장이 없기 때문에  고구려 무덤에서 볼 수 있는 벽화 등의 회화에 대한 자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신라고분에서 출토된 공예품들은 금관․금띠․금귀고리․금팔찌․금가락지․목걸이 등 순금제품과 유리잔․유리병․숟가락․구리솥․은제 합(盒)․ 방울․순금제 고배(高杯) 등으로 매우 다양하고 화려하다. 이 들 대부분은 금관총․금령총․서봉총․천마총․황남대총 등에서 출토된 것들이다. 신라의 공예품들은 신라인의 호화로운 사치성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미적인 우수함과 함께 왕권의 상징물로서 더 큰 의미를 느낄 수 있다.

신라 미술의 사변적인 특성은 고분에서 쏟아져 나온 금관을 비롯한 금속공예품과 토기 등에서도 잘 나타난다. 금속 공예품들은 매우 정교하고 호화로우며 간혹 현대적인 미감각을 풍겨주기도 한다. 특히 신라의 금관은 하늘숭배사상을 바탕으로 토템과 수목 숭배사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어 당시 신라인들의 내세관적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유리공예는 당시 고구려․백제는 물론 중국에서조차 볼 수  없었던 신라만의 산물로서 멀리 유라시아 서단지역과의 동서교류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이 밖에도 신라 토기는 다소 조방하고 거칠며 문양은 기하학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기마 인물형 토기에서 볼 수 있듯이 조형성이 뛰어난 특성도 보여준다. 또한 무덤에 발견된 각종의 토우들은 당시 신라인의 생활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각광받고 있다.

천마도 - 천마를 타고 온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천마도(국보 207호)는 말이 진흙길을 달려 갈 때 말에 탄 사람의 발 부분에 진흙이 튀지 않도록 말의 배 부분에 대는 말다래 또는 '障泥'라는 마구에 그려진 그림을 말한다. 가로 75cm, 세로 53cm 크기의 자작나무 껍질로 만들어진 말다래에 채색을 사용하여 천마를 그린 것이다. 그림은 마치 이 말다래를 사용한 말이 천마처럼 하늘에 훨훨 날아오를 정도로 잘 달려주기를 바라는 원력을 엿볼 수 있는 듯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이 그림은 신라시대 회화 작품으로 몇 안돼는 귀중한 예이다. 이 그림이 출토됨으로서 후에 황남동 155호분은 천마총이라 명명하여지게 되었다. 천마 그림은 이후 여러 곳에서 나타나게 되는데, 장례와 관련된 곳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곧 죽은 이의 영혼을 하늘로 실어 나른다는 신라인의 내세관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1973년 경주에서는 우리나라 고고학사상 최초로 대규모의 신라고분발굴이 이루어졌다. 그 가운데 미추왕릉 지구의 155호 고분은 규모도 클 뿐만 아니라 도굴되지 않았던 까닭으로 출토유물에 대한 국민적 기대감이 대단하였다. 그리고 기대에 부흥이라도 하듯이 엄청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금관과 관모, 관장식, 허리띠, 귀걸이 등의 찬란한 금제 장신구를 비롯하여 무려 1만 2천여 점에 달하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던 것이다.

천마도는 이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회화작품으로서는 유일한 것으로 2장의 말다래에 그려진 그림이다. 말갈기와 꼬리를 곧추세우고 마치 구름 위를 달리는 듯한 백마는 힘찬 기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당시 신라에서 말의 역할은 매우 커서 보화와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신라가 백제로부터 말을 들여오는 대가로 황금과 구슬, 명주 등을 보냈다는 내용에서 잘 알 수 있다. 당시 사회에서 말은 누구나 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지배계급의 특별한 교통수단이자 권위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처럼 소중한 말의 말다래에 천마를 그린다는 것은 곧 강력한 지배력의 표징으로 해석할 수 있다. 더욱이 그 말이 소수의 특권층만이 탈 수 있었던 백마라는 사실은 곧 절대권력의 상징임을 쉽게 느끼게 해준다.

삼국유사에 신라의 박혁거세(朴赫居世/B.C.57~A.D.4)는 한 마리 백마가 가져온 알에서 탄생했는데 그 백마는 하늘로 날아갔다고 기록되고 있다. 또한 신라와 백제의 임금이 모여 회맹단(會盟壇)을 쌓고 하늘에 고하여 두 나라간 평화의 서약을 했을 때에도 백마를 제물로 삼았다는 내용도 전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백마가 하늘의 사자이었음을 의미하며 고대 신라 사회에서 왕은 곧 하늘의 자손이었음을 천명한 것이었다.

천마도는 이처럼 신라인의 사상과 사회 발전상을 잘 느끼게 해주는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신라의 높은 회화수준을 보여주는 유일한 유물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구름 위를 질주하는 천마를 활달한 필치로 그려낸 신라화가의 솜씨에서 그 유명한 솔거로 대표되는 찬란했던 신라회화의 전통을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2천년 전 유라시아대륙 동서 교류의 산물 신라 유리병


경주에 분포되어 있는 신라고분군에서 각종 장신구와 다양한 형태의 그릇 등 유리제품이 많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이 유리 제품들은 당시 신라문화의 국제성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서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출토된 유리제품들은 당시 신라인들이 제작한 것들도 있지만 외국에서 수입된 것들도 상당수에 이른다. 이른바 '로만글라스(Roman glass)'라 불리는 이 유리제품들의 수입은 로마에서부터 근동지방과 중아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이르는 저 유명한 실크로드를 통하여 전래된 것들이었다.

서봉총에서는 유리로 된 길다란 끈이 그릇 표면에 덧붙여져 간단한 장식효과를 낸 유리 그릇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표형분인 황남대총의 남쪽무덤에서는 유리끈을 망처럼 엮어 그물무늬를 연출한 유리잔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끈무늬장식 유리그릇들은  기원전 5세기경 남부 독일이나 시리아 지방에서 만들어진 로마계 유리제품의 특징으로 밝혀졌다.

또한 동일무덤에서 출토된 봉수형(鳳首形)유리병의 조형은 그리스의 '오이노코에(oinochoe)'라 불리우는 화병형태의 유리제품과 조금도 차이가 없다. 이 병은 포도주를 따르는  주전자인데 '대롱불기기법'으로 제작되었다. 그런데 대롱불기기법은 로마에서 처음 발생하여 기원후 1세기경에는 전 로마제국으로 확산되어 로만글라스의 탄생을 가져오게 된 것이었다.


유리의 종류→● 나트륨 = 소다유리 ● 칼륨 = 포타쉬유리 ● 납 = 납유리

황남대총구슬유리→Si + 나트륨 + 석회 = 소다석회유리<오늘날 대부분의 유리성분으로 로만글라스와 같은 것임>

황남대총의 북쪽무덤에서 발견된 갈색의 나무결무늬 유리잔 역시 남부 독일 쾰른에서 출토된 로마계 유리잔을 방불케 한다. 황남대총의 북쪽무덤과 천마총에서 출토된 거북등무늬 유리잔도 페르시아 사산왕조의 그릇 표면을 커트하여 만든 거북등무늬 유리그릇과 유사한 것이다. 그러나 신라의 커트형 글라스는 실제로 유리를 커트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커트글라스형의 틀 속에 녹인 유리를 부어 넣어서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천마총 커트글라스와 유사한 유리잔이 남부 독일 쾰른에서 출현되고 있다.

금령총에서 출토된 푸른반점무늬 유리그릇은 유리 표면에 푸른색의 유리 알갱이를 덧붙인 것으로, 같은 수법의 그릇들이 남부 러시아, 남부 독일 등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미추왕릉지구 고분에서는 인물이 象嵌된 유리구슬이 발견되었다. 지름이 1.5cm로 아주 작은 감청색 구슬 표면에 색색가지 유리를 삽입하여 그림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이 작은 구슬에 묘사된 인물들이 서방인의 용모를 보여주는 것이어서 크게 주목을 받았다. 묘사된 두 사람의 얼굴모습은 좌우가 연결된 눈썹에 눈이 크며, 입술을 붉은 색으로 표현한 서구적인 인상이다. 머리에는 마치 관을 쓴 것처럼 색색의 유리로 장식하였고, 인물상의 상부에는 부리와 발이 적색과 황색으로 표현되어 마치 오리 같은 흰 새 세 마리 묘사되었다. 또한 그 옆으로 꽃나무 가지가 장식된 모습이다. 이와 같이 인물상을 장식한 유리구슬은 1~2세기경 이집트나 시리아 연안 지방에서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따라서 신라의 인물상감구슬도 그러한 기법으로 제작된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아울러 이 구슬의 출처 역시 이집트나 시리아 지방과 무관하지 않음을 시사해준다.

이렇게 신라에서 출토되고 있는 유리 제품들은 2000여 년 전 유라시아대륙의 서단 로마지역에서 동단의 신라를 연결해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설사 신라의 유리 제품들이 신라고유의 것이라 하더라도 그 기법의 전래는 분명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따라서 이들 유리 제품들은 신라문화의 국제성과 개방성을 알려주는 귀중한 유물로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토우로 보는 신라인의 생활상


천년왕국 신라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많은 문화유산을 남겨 놓았다. 특히 8세기에는 고구려와 백제를 제압하고 그들의 역동문화와 화려문화를 고스란히 넘겨받아 통일신라의 황금기를 꽃피웠다. 그러나 그 이전 삼국기의 고신라는 힘차고 대륙적 기상이 넘치는 고구려나, 해양문화의 꽃을 피운 나무와 기와의 나라 백제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거대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그저 소박하면서도 투박하고 작은 나라였다. 그 신라인들의 흙으로 빚어낸 것이 바로 신라토우이다.

‘토우’란 글자 그대로 흙으로 빛은 인형을 말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토우는 사람의 형상뿐만 아니라 각종의 동물, 생활용구, 집, 배 등의 ‘이형토기’라 불리는 것을 망라한다. 따라서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하여 당시 고구려 풍속을 알 수 있듯이 다종다양한 신라의 토우에서 신라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토우의 기원과 용도

신라토우는 5~6세기경에만 성행했고 물론 고구려나 백제에는 없다. 토우는 대부분이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원래 토우는 사후의 세계를 믿었던 신라인들이 무덤에 넣기 위한 부장품으로 만든 것이었다. 아울러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기 위하여 지내는 제사에 받치는 희생물의 대용이나, 숭배의 대상(불상), 장난감 등 여러 이유로 만들어졌다.

토우의 종류

토우는 인물이나 동물 등 독립된 형태와 고배의 뚜껑이나 항아리의 주둥이 부분에 부착되어 조형된 것의 두 종류가 있다. 토우의 크기는 대략 5~10㎝정도로 작다. 「주검 앞에서 슬퍼하는 여인」처럼 3.2㎝짜리이거나 커봐야 얼마 되지 않는다. 이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신라인은 흙으로 온갖 모습을 빚어냈다.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하는 남녀상」은 남자 8.4㎝ 여자 8.6㎝의 크기인데 신라의 현악기 중 하나로 추정되는 악기를 타는 남자와 이에 맞춰 가슴에 손을 모아 노래하는 여인의 모습이다. 남자의 표정은 즐거움에 겨운 밝고 건강한 모습이라서 '신라인의 미소'의 전형으로 손꼽히며 전체적으로 풍기는 해학과 풍류도 충분히 표현되고 있다. 「아이를 낳고 있는 여인」과 같은 작품에서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남녀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인물상을 그려내고 있으며 호랑이 ․ 원숭이 등 동물과 전투용품 ․ 생활용구 등도 포괄하여 만들어졌다.

그밖에도 지게를 진 모습, 장군(항아리)을 짊어진 모습, 보따리를 말잔등에 묶은 나그네, 두 발이 묶인 멧돼지를 말에 실은 사냥꾼, 무릎을 꿇은 모습, 배를 타고 노를 젖는 모습, 괭이를 어깨에 메고 절하는 모습, 칼을 차고 말을 탄 모습, 물구나무 선 모습, 상체를 심하게 구부린 형상, 두 손을 목뒤로 돌려 잡고 몸을 힘껏 구부린 자세(요가 모습), 학가면을 쓰고 학춤을 추는 사람, 가무상, 잡기상, 거문고 ․ 피리 ․ 비파 ․ 가야금 ․ 제금 ․ 장구 등의 주악상, 여인상, 노인상, 남성상, 동자상, 노골적인 성애장면(남녀 교합상), 가슴과 둔부가 강조된 풍만한 여성상, 과장된 남녀의 성기, 기마인물상, 애교 있는 오리형상, 각종 희노애락의 얼굴표정 등.

토우에서 나타나는 신라인의 기예

신라토우는 토기와 더불어 신라인의 흙 다루는 솜씨를 다분히 느낄 수 있는 조형예술의 장르다. 이러한 신라인의 기예는 신라말기를 거쳐 고려초기에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는 한국도자예술의 밑거름이 되었다. 토우를 빛은 솜씨가 서툴다거나 단순해 보인다고 해서 천박하다거나 예술미가 배제된 것은 결코 아니다. 신라토우는 과감한 생략과 왜곡을 통하여 주제를 강렬하게 표현함으로서, 결코 화려하지 않은 소박함과 순수미를 자아낸다. 단순하게 표현되거나 아예 추상화된 토우의 얼굴표정 하나하나에서 극도로 정제된 인간미를 느낄 수 있다. 그러면서도 세련된 절제미와 살아 숨쉬는 생명력을 중시했다. 또한 여기에다 질박한 신라인의 마음가짐과 여유를 그려냈고 더러는 익살과 해학도 엿보인다. 신라토우는 신라인이 몇 줌 안 되는 흙으로 빚어 낸 삶의 미학이자 신라만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독창적인 예술장르인 것이다.



신라 금관 - 사후세계를 위하여

삼국 가운데 유일하게 신라에서만 사용했던 독특한 모양의 금관. 그 안에는 신라 왕족, 나아가 그 사회 전체의 신앙과 체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들어 있다. 그 주인공에 따라 기본 형태와 단수, 장식을 달리한 금관의 특성을 통해 5~6세기 신라인의 사고체계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미술품인 금관은 왜 그런 모양으로 조형되었을까? 고구려나 백제의 왕보다 유독 신라의 왕이 극도로 화려한 금관을 사용했던 배경은 무엇일까? 신라 땅에서 금이 많이 생산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신라 사람들이 금에 특별한 애정을 가져서이었을까? 나뭇잎 모양의 장식과 푸른색 곡옥이 어느 것은 무려 100개도 넘게 달려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 금관, 금동관, 은관에서 보이는 재료의 차이는 주인의 재력의 차이일까, 신분의 차이일까? 신라금관에 대한 이런 몇 가지 의문을 풀어보기로 하자.

신라금관은 경주 시내에 있는 적석묘라는, 강돌을 수북하게 쌓아 만든 특수한 고분에서만 발견된다. 적석묘는 신라 왕족만의 묘제이다. 따라서 금관은 신라의 왕이나 왕족의 것이다. 반면 금동관은 적석묘 뿐만 아니라 왕족보다 신분이 낮은 귀족의 묘제인 석실묘에서도 여러 개 발견되었다. 따라서 순금관은 왕, 혹은 왕에 버금가는 신분의 인물이 사용한 것임에 틀림없다.

또 금관이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서만 발견되는데 비해 금동관은 신라의 영향력이 미친 경상남도로부터 경기도 파주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금, 은, 동의 차이는 분명히 그 주인공의 사회적 신분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경주 호우총에서 금동관과 함께 발견된 호우는 고구려가 광개토왕비 축조를 기념하여 만든 것이다. 신라의 어느 왕족에게 선물로 건네진 이 항아리에는 서기 415년에 해당하는 ‘乙卯年’이란 글자가 명기되어 있다. 또 쌍분인 경주 황남대총의 북분에서는 금관과 함께 ‘夫人帶’란 글자가 새겨진 은제 허리띠와 ‘辛卯年(511년)’이란 명문이 새겨진 은합이 발견되었다. 이로써 금관은 5세기부터 6세기 초까지 유행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 기간의 신라왕은 모두 김씨족이다. 그리고 이들 내물(奈勿), 눌지(訥祗), 자비(慈悲), 소지(炤知), 지증(智證) 다섯 사람의 칭호는 ‘왕’이 아니라 ‘今’ 또는 ‘干’이었다. 이는 북아시아 퉁구스어를 사용하던 유목민족의 수장을 일컫는 말로, 지증의 아들 법흥이 선대의 전통신앙인 시베리아계 샤머니즘을 포기하고 중국을 통해 들어온 불교를 공인하면서부터 이런 칭호가 사라지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법흥왕 자신의 주검도 매장하지 않고 불교식으로 화장을 하였으며, 따라서 금관을 사용하던 선대의 전통도 단절되게 된 것이다.

순금관이 발견된 금관총, 금령총, 천마총은 모두 단분이다. 각각의 무덤의 주인공은 일단 위의 다섯 왕 가운데 한 명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쌍분인 서봉총과 황남대총의 금관은 모두 북분에서만 발견되었다. 황남대총의 북분은 ‘부인대’라는 명문으로 보아 그 주인공이 여자였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신라의 여자 왕족은 쌍분의 북분에 매장되는 특수한 풍속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남자의 무덤으로 생각되는 단분에서는 머리 위에 살짝 올려놓는 마늘 모양의 금제 모자가 발견되고, 여자의 무덤으로 생각되는 서봉총의 북분에서는 최근까지도 내려오는 ‘굴레’라는 여자아이의 삼각형 모자가 발견되었다. 금관의 모양만으로는 주인공의 성별을 알 수 없지만 모자의 모양으로 뚜렷이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5~6세기의 신라에는 여왕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관을 사용한 여인이 두 사람이나 있었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라 할 수 있다. 즉, 왕이 아닌 여인들도 금관을 부장품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왕의 전유물로 각인되었던 금관의 용도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이 절박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아울러 신라사회를 이해하는데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한편, 고대사회의 남녀평등사상까지도 추정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

고신라의 실존인물 가운데 ‘鳥生夫人’이라는 흥미로운 이름을 가진 여인이 있다. 이는 곧 ‘새가 낳은 여자’라는 뜻으로, 자비 마립간의 여동생이자 지증 마립간의 친어머니였다. 그런데 서봉총에서 발견된 금관의 뒷부분에는 나뭇가지에 세 마리의 새가 앉아 있다. 새는 북아시아의 여러 민족이 조상신으로 여기는 토템이다. 이런 전통은 고고학 유물로도 남아 있는바 유목민의 오래된 신앙임을 증명한다. 또한 기원전 8~3세기 스키타이, 북아시아 흉노족의 모자에 달린 금제 鳥形장식은 신라 서봉총의 금제 모자에 달린 새와 일맥상통하는 조형양식인 것이다.

지금도 북아시아인 사회에서는 영특한 인물을 낳고자 하는 여인이 높은 나무 밑에서 祈子 행위를 할 때 나무 위에 새가 날아와 앉으면 아이를 잉태한다고 믿고 있다. 이렇게 태어난 인물은 위대한 지도자가 되며, 그가 죽으면 그 생명을 하늘나라로 돌려보내는 존재 또한 새라는 것이다. 새장식은 이런 사유체계가 조형예술로 표출된 것으로 사료된다.

한편 금관 전면의 出자형 장식에 이어 양 옆 뒤로 솟아난 듯이 장식된 條形장식에 대하여 동물의 뿔이라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되었다. 중앙아시아 북부지역의 유목민족은 식량감으로 기르던 사슴을 잡은 후에는 그 머리의 뿔을 뒤집어쓰고 영혼 천도제를 지내는 풍습이 있다. 즉, 인간에게 고기를 제공한 사슴의 영혼을 위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사슴뿔을 조형한 금동관은 이를 증명해 주는 자료이다. 또한 오늘날 러시아 바이칼호 주변 타이가지역에서 목축으로 살아가는 유목민들은 사슴고기를 주식으로 삼고 있다. 이들 역시 사슴을 잡은 후에는 반드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역시 사슴머리에 돋아난 뿔을 머리에 착용하는 풍습이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따라서 신라금관에 조형된 條形장식은 짐승의 뿔을 표현한 것으로 유목민족의 四有체제가 반영된 신라 특유의 조형예술임을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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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2004-09-14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제와 신라의 미술에 대해 따로 올렸으나 수업은 예술품 하나하나 영상을 통하여 보면서 할것임. 사전에 복습해 오기바람.

잉크냄새 2004-09-14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퍼를 읽다보니 문득 요즘 문제시되고 있는 중국의 고려사 왜곡 문제가 남다를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좋은 자료 잘 읽었습니다.

수련 2004-09-14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직접 현장에 가서 보는 느낌은 또 다르답니다. 여름방학에 중국즙안에 가서 느
낀것인데...그들은 남의 잔치에 축포를 터트렸더군요. 씁쓸했습니다.
중국사람들도 오래된 문화재가 돈이 된다는걸 알거든요.

ceylontea 2004-09-14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의 잔치에 축포를 터뜨렸다라는 말이 묘하게 울림이 있습니다... 참 속상해요...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한테 우습게 여겨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옛날의 그 뛰어난 문화가... 그것도 우리 것이라고 인정받기 어려워지니 참 많이 답답하고 속상한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요?
 

백제의 미술


백제의 건국과 발전

백제는 온조왕(溫祚王)을 시조로 하여 BC 18년 현재의 한강 북쪽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건국한 고대 삼국 중의 하나이다. 온조왕은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朱蒙)의 셋째 아들이다. 온조는 동명성왕의 전처 소생인 유리(琉璃)가 북부여로부터 졸본부여(고구려)로 들어와 고구려의 태자가 되자 동복형 비류(沸流)와 함께 남하하여 비류는 미추홀(종전에는 인천으로 비정하였으나, 최근에는 충남 아산시 인주면 지방이라는 설이 유력)로 가고, 온조는 하남의 위례성(경기 광주로 비정하였으나 최근에는 충남 천안시 입장면 호당리라는 설이 제기됨)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라 칭하였다.

얼마 뒤 비류가 죽고 그 백성들이 위례성에 모여들어 국호를 백제로 고치고 동명왕묘를 세워 제사를 지냈다(이상은 모두 BC 18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BC 5년(온조왕 14)에는 남한산에 천도하고 9년에는 마한을 멸망시켰으며, 10년에는 아들 다루를 태자로 책봉하였다. 백제가 한강 유역을 통합하고 율령을 반포하는 등 실질적인 시조로 등장한 것은 고이왕 때부터이다. 또한 근초고왕 대에는 마한 전역을 통합한 뒤 크게 발전하여 역대 31왕으로 이어지면서 660년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할 때까지 고대국가로서 큰 축을 형성하였다.

유리한 자연환경과, 지배층이 북방 유이민을 모체로 한 단일체제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등의 이점으로 일찍부터 정치 ․문화적 선진성을 과시하고, 4세기 중엽에는 일본, 중국 랴오시[遼西] 지방 ․산둥반도[山東半島] 등지와 연결되는 고대의 해외 상업세력을 형성하였으며, 특히 일본 고대문화의 지도자 역할을 하였다.


백제 미술 개관

백제는 마한의 한 국읍세력의 일파로써 백제국(伯濟國)이 성장, 발전하여 이룩된 국가이다. 기록에 의하면 백제는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한 북방 이주민으로, 종족적으로는 고구려와 같은 뿌리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백제미술의 근간은 고구려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백제․신라가 국가로 성립, 거듭 발전하면서 각국간에 정치․경제․지역적인 환경의 차이, 대외관계 등에 따라 상호 견제와 영향으로 독자적인 미적 특성이 발달되기 시작하였다.

원래 북방적인 성격을 가진 백제의 미술은 해상교통이 발달되어 점차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불교미술과 중국의 남조 문화를 수용하여 온화하고 우아하며 향토적인 색채의 미적 특성을 발전시켰다. 백제의 미술은 부드럽고 모나지 않으며 인간미가 넘치고 세련미를 보여준다. 이러한 특색은 5세기부터 7세기 중엽까지의 고분벽화, 불상, 와당을 비롯한 공예품, 탑 등의 미술 전반에 걸쳐 볼 수 있다.

삼국시대의 가장 큰 사상적인 변화는 무엇보다도 대륙에서 전래된 불교사상과 그 영향을 받은 미술품이다. 불교는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수용한 고구려보다 12년 후인 침류왕 2년(384년)에 중국의 남조에 해당되는 동진으로부터의 전래되었다. 이전에도 외국의 문물이 직접 교류되어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문화적 접촉이 있었음을 고분의 축조나 출토유물의 성격에서 알 수 있다. 불교의 영향으로 한성시대부터 사찰의 건축과 불상을 조성하였으며, 불교 용구의 생산 역시 한성시대부터 사비시대까지 이어져 문화의 핵심이 되었다.

백제미술의 발전 단계는 정치적인 변천과 맥락을 같이하여 한성시대(BC 18~475년), 웅진시대(475~538년), 사신시대(538~663년) 등 왕도의 천도와 같이 3기로 구분할 수 있다.

한성시대는 초기의 약 500년간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나 현존하는 미술품은 거의 전무하며, 고고학적 발굴자료에 의해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문헌자료에 의하면 마한이 3세기 후반부터 진나라에 조공무역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계의 돌무지무덤[積石塚]인 경기 양평, 문호리, 삼곶리, 가락동, 석촌동, 연천 등에서 토기, 대롱옥[管玉], 널무덤[土壙墓]출토 흑유거치무늬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중국 동진에서 수입된 4~5세기 미술품은 청자 도연편(陶硯片), 흑갈유 전문편(錢文片), 청자 사이호(四耳壺), 법천리 청자 양형기(羊形器), 화성군 천계호(天鷄壺) 등이 있다. 불교의 전래와 함께 한산에 절을 세우고 승려를 두었다고 하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웅진시대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백제세력이 위축되면서 64년간 천도했던 시기였다. 초기에는 지방호족과의 충돌로 다소 혼란스러웠지만 곧 국내를 정비하여 신라와 동맹을 맺고, 불교를 발전시키는 한편, 중국 양과의 문화적 교류를 통하여 새로운 발전의 기틀을 만들었다. 6세기 전반에 축조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속공예품을 위시하여, 새로운 전축분 축조, 대통사 창건, 수원사 등과 같이 불교중흥의 바탕을 이룩하였다. 불교에서 외래양식 수용은 북위와 동시에 동․서위 양식을 받아들여 강건한 기상이 보이는 한편, 백제적인 우아함과 세련된 기법으로 승화시켰다.

백제의 웅비시기라할 수 있는 사비시대는 부여로 천도된 123년 동안을 말한다. 백제 중흥의 깃발을 펄럭이었던 성왕(523~554)은 불교를 장려하고, 중국 양나라와 교류을 통해 새로운 선진 문물을 수용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미륵사, 왕흥사와 같은 대찰이 창건되었는데 사료에 ꡒ사찰과 탑이 매우 많다ꡓ라고 기록될 정도로 부흥하였다. 중국 양쯔강[揚子江] 유역의 남조 문화뿐만 아니라, 북조와의 연관성을 미적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백제미술은 국제적이고, 개방적이면서 백제적인 특징을 찬란하게 승화시킨 절정기의 높은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백제의 회화는 능산리고분의 비운문과 연화문에서 볼 수 있듯이 부드럽고 완만한 움직임의 느낌을 자아낸다. 또, 부여 능산리 고분의 사신도는 매우 세련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백제의 회화는 6세기에 일본으로 수출되어 일본 회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597년 일본에 건너간 아좌태자는 일본 성덕태자의 초상을 그렸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부드럽고 인간미가 넘치는 백제 미술의 특징은 불상에서도 잘 드러난다. 서산 마애삼존불은 양식적인 면에서 외래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들의 얼굴은 복스럽고 밝은 웃음으로 가득 차 있어 '백제의 미소'라 불린다. 밝은 웃음이 가득한 복스러운 얼굴에서 백제의 특유의 미소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부여 군수리 절터에서 발견된 금동보살입상과 말기의 대표작 금동관세음보살상은 그 기법이 고졸한 것으로 백제의 온화함에 중국 남북조의 영향이 가미되어 있다. 이러한 불상은 일본에 전해져서

아스카 시대 조각의 터전을 이룩하였는데, 나라 법륭사 백제관음과 광륭사의 목조반가사유상 등 훌륭한 불상 조각품을 탄생케 하였다.

공주 송산리의 무령왕릉은 무령왕에 대한 기록인 지석과 함께 금제 관식, 무기, 그릇, 구리 거울 등 많은 껴묻거리가 발견되어 당시의 발전된 공예 미술을 여실히 보여준다. 최근에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백제 금동대향로는 도교와 불교의 상징성이 동시에 반영된 훌륭한 공예품으로 밝혀지고 있다. 또한 산수문전은 산수화의 본고장인 중국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는 백제인의 수준 높은 기예를 시사해 주는 중요한 예술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늘날 전하는 백제의 건축물은 없다. 그러나 문헌사료에 백제의 공장들이 신라의 황룡사 9층탑과

일본의 법륭사, 사천왕사, 법륜사등을 건축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건축에서 백제시대 건축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석탑으로는 목조탑의 건축 양식을 모방한 초기 양식의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균형이 잡힌 아름다움을 잘 나타내고 있는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이 있다. 미륵사지 탑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석탑으로서 9층이며, 우리 나라 탑 건축의 원류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그 구조가 목조 건축의 양식을 번안한 백제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이 탑은 각층의 체감률이 심하여 안정감이 강조되면서도 단순하고 명쾌한 균형미를 잘 나타내고 있어 전체적으로 내강의 힘을 느낄 수 있다.

무녕왕릉과 백제의 영화

무녕왕릉은 백제 제25대 무녕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에 위치해 있다.


무녕왕릉의 발견

1971년 문화재관리국에서 공주의 한 고분에 물이 스며들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 뒤쪽에 도랑을 파는 공사를 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한 인부의 괭이 끝에 벽돌이 걸렸는데 그것이 바로 무녕왕릉 앞면 벽의 윗 모서리였다. 이어서 계속 파고 내려가 보니 벽돌로 막고 강회를 발라 단단하게 막은 입구가 나왔다. 무덤이 틀림없었으나 당시에 누구도 그 무덤이 무녕왕의 것이었다는 것을 몰랐으며, 또한 도굴되지 않은 처녀분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신라고분과는 달리 백제고분은 도굴 당하기 아주 쉬운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당시까지 백제고분은 처녀분으로 발굴된 것이 전무한 실정이었다. 그러나 우연히 발견한 이 고분은 처녀분임과 동시에 무덤 안에 무덤주인의 이름을 알려주는 지석까지 매장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한국고고미술사계의 일대 쾌거라 할 수 있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64년 동안 백제의 수도이었던 공주는 잃어버린 백제의 옛 영화를 그대로 간직한 무녕왕릉을 지켜오다가 1,300년만에 비로소 세상에 내놓게 되었던 것이다.

출토현황

능은 경사면의 풍화암반층을 굴착하고 벽돌로 연도와 현실, 배수구를 만들고 그 위에 분구를 조성

한 아치형 전축분이다. 원형인 분구의 지름은 약 20m이며, 현실의 바닥에서 분구의 가장 높은 지점까지는 7.7m이었는데 토압이 현실에 적게 미치도록 분구의 중심을 현실의 중심보다 5.8m 위쪽에 조성, 축조하였다. 봉토는 현실 주위의 풍화암반을 평평하게 깎아낸 후 석회를 섞은 흙으로 쌓아 원형을 만들었다. 현실은 장방형의 단실분으로 남북 4.2m, 동서 2.72m이며 높이는 3.14m에 이른다. 현실의 내부는 남쪽의 벽면에서 1.09m를 제외하고 모두 바닥보다 21cm 높게 하여 왕과 왕비의 합장관대로 하였다. 네 벽 가운데 남․북벽면은 밑에서 천장부까지 수직으로 올라갔고, 동․서벽은 벽면의 상부에서 차츰 안으로 기울어지는 아치형 천장을 구성하였다. 벽면의 벽돌을 쌓은 방법은 길이모쌓기와 작은모쌓기를 반복하였는데, 길이모쌓기는 4개의 벽돌을 누여 포갰고, 작은모쌓기는 1개의 벽돌을 세워서 배열하였으며, 공적법(空積法)을 사용하였으나 벽돌과 벽돌 사이에 간간이 석회나 진흙이 끼어있다. 아치형 천장의 구성은 남북의 수직 벽 최상부의 좁아진 부분에서 작은모쌓기를 생략하여 벽면을 좁혔으며, 동서의 벽은 7단, 8단에서 작은모쌓기에 키가 작은 사다리꼴의 벽돌을 사용하거나, 길이모쌓기도 벽돌을 3개로 줄이고, 그 중 1개는 횡단면이 사다리꼴로 된 것을 사용하여 점차 만곡도(彎曲度)를 증감시켜 완성하였고 천장에서 벽돌의 이음새에는 석회를 발라 견고하게 하였다.

현실을 구축한 벽돌에는 사격자(斜格子)의 망상문(網狀紋)에 6~8엽의 연화문, 그리고 인동문(忍冬紋)이 장식되어 있는데, 길이모쌓기의 벽돌과 작은모쌓기의 벽돌에 시문된 형태가 다르다. 길이모쌓기의 벽돌에는 망상문과 연화문을 1개의 벽돌 안에 시문하였지만, 작은모쌓기의 벽돌은 연화문 반절과 인동문을 배치하며 2개의 벽돌을 맞대어 문양이 완성되도록 하였다. 현실의 벽면에는 5개의 보주형 등감(燈龕)이 설치되었는데 북면에 1개, 동․서면에 각각 2개씩이 있으며, 보주형의 윤곽을 따라 화염문이 채색되었고, 주위에는 등잔불에 그을은 흔적이 남아 있다. 현실의 바닥과 관대는 벽돌을 이중으로 깔았으며 밖으로 드러나는 윗면의 벽돌을 삿자리모양으로 배열하였고, 밑부분의 벽돌은 석회를 발라 암반에 고정시켰다. 관대는 암반층인 지반 자체를 높게 깎고 벽돌을 깐 것이다. 연도는 현실의 남벽 중앙에 설치되었는데 길이 2.9m, 너비 1.04m, 높이 1.45m로 현실과 같은 아치형이며, 바닥에는 삿자리모양으로 벽돌을 깔았는데 현실의 바닥보다 높아 관대와 동일한 면을 이루었다. 연도 입구의 좌우에는 塼壁을 수직으로 쌓았는데 그 높이는 3.04m이다. 연도의 전축방법은 현실과 동일하나 문양을 구성하는데 있어 8엽 연화문을 구성하는 전을 사용하지 않았다. 배수구는 현실과 연도의 경계부에서 시작하여 연도의 가운데 바닥 밑으로 설치되었으며, 남북으로 19.7m의 길이에 이르게끔 벽돌을 사용하여 구축하였다.

연도 입구에 놓여 있던 지석에서 보면 무녕왕은 523년 5월에 사망, 525년 8월에 왕릉에 안치되었고, 왕비는 526년 11월에 사망, 529년 2월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왕릉은 왕이 죽기 11년 전인 512년에 이미 축조준비가 되어 있었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108종 2,906점에 이르고 있다. 중요한 것으로는 연도 입구에 동발 , 청자 육이호 등이 쓰러져 있었고, 바로 그 뒤에는 왕과 왕비의 지석 2매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 오수전(五銖錢) 한 꾸러미가 얹혀 있었으며 지석 뒤에는 석수(石獸)가 남쪽을 향하여 지켜서 있었다. 현실의 남쪽에도 동발과 청자 사이호 등이 쓰러져 있었으며, 현실의 관대 위에는 원래 왕의 목관은 동쪽에, 왕비의 목관은 서쪽에 놓여 있었던 것이 썩으면서 쓰러져 서로 겹쳐져 있었다. 목관의 판재들 밑에서는 왕과 왕비가 착장하였던 장신구들과 몇 점의 부장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중요장신구로는 왕의 것으로 보이는 금제관식 1쌍, 금제뒤꽂이 1개, 금귀걸이 1쌍, 은제과대와 요패 1벌, 금동신 1쌍, 단룡환두대도와 金銀裝刀子 각 1개 등과 왕비의 것으로 보이는 금제관식 1쌍, 금제귀걸이 2쌍, 금목걸이 2개, 은팔찌 1쌍, 금팔찌 1쌍, 금은장도자 2개, 금동신 1쌍 등이 출토되었다. 그밖에 왕과 왕비의 두침(頭枕)과 족좌(足座)가 관 안에 놓여 있었고, 중요부장품으로는 청동거울 3개, 금팔찌 1쌍, 은팔찌 3쌍, 청동용기, 은제탁잔(銀製托盞) 등이 있었다. 여기에서 발견된 지석은 삼국시대 고분 가운데서는 최초로 피장자와 축조연대를 확실히 밝혀주는 자료가 되고 있으며, 왕과 왕비의 관식 등도 백제문화의 수준과 풍속의 일면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무녕왕릉의 역사적 의의

71년 7월 충남 공주 웅진동 송산리 고분군서 발견된 무령왕릉은 한일역사학계에 엄청난 충격을 던졌다. 그후 30년. 무령왕릉의 발굴에 따른 연구성과는 어떤 것이며 그것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공주대 부설 백제문화연구소(당시 소장 朴秉國)는 1991년 10월 18,19일 이틀간 공주시 문화회관 소강당에서 {무령왕릉의 연구현황과 제 문제}란 주제로 학술회의를 열고 그 동안의 연구성과를 점검하는 한편, 백제사 연구의 진로를 모색했다. 참가학자들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을 비롯, 모두 108종 2906점에 이르는 유물의 학술적, 문화재적 가치에 대해 논의하고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고 있는 왜, 양과와의 관계, 백제를 둘러싼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에 대해 진단했다. 학술회의에서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관재의 나무 종류를 농학자가 분석, 백제와 왜의 관계를 규명하는 논문을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박상진교수(경북대)는 {백제 무령왕릉 출토관재의 수종}이란 발표에서 {무령왕릉에서 사용하고 있는 관의 목재는 일본열도 남부지방에만 분포하는 금송(金松)임을 각종 검사를 통해 확인했다}며 따라서 이 관재는 당시 倭서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박교수는 {이 원목은 가공 전 직경 1백30cm, 길이 3m, 무게 3.6t이며 수령은 3백년이상으로 추정되는 거목으로 당시 두 지역간의 엄청난 교역규모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관계연구에도 중요한 증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석(매지권 국보 제163호)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일종의 묘지매입문서를 말한다. 무녕왕릉 연도중간 석수 앞에 나란히 놓여졌던 2개의 지석은 각각 왕과 왕비의 것이다. 이 지석에는 왕의 출생연도나 경력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고 장례에 필요한 기사만 명기하였다. 왕비지석의 뒷면에 묘지매매계약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매지권임이 분명하다.

지석에는 모두 53자가 새겨져 있다.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사마왕은 무령왕 생전의 칭호이고, 무령왕은 돌아간 뒤에 붙인 이름이다)이 62세가 되는 계유년(523) 5월 7일에 돌아가시니 을사년(525) 8월 12일에 장사를 지내고 다음과 같이 문서를 작성한다"는 내용이다. 그 문서란 바로 다른 돌인 매지권을 말하는데, 토지신으로부터 땅을 샀음을 밝힌 것이다. 거기에는 돈 일만문(文)과 은 일건을 주고 토왕, 토백, 토부모와 상하 지방관의 지신들에게 보고하여 (왕궁의) 서서남방의 땅을 사서 묘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왕의 매지권은 너비 41.2cm, 길이 약 35.1cm,두께 약 4.5cm, 왕비의 매지권은 너비 약 42.4cm, 길이 약 54.5cm,두께 약 4.3-6cm 로서, 장방형 판석 앞뒤면에 행선을 긋고, 육조체의 영향을 받은'해

서'로 음각하였다. 왕의 매지권 앞 면은 무녕왕이 양나라로부터 받은 작호, 무녕왕의 사망시 나이와 시신을 능묘에 안장한 시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주요부장품

진묘수(국보 제162호)는 무덤을 지키는 짐승을 말한다. 무령왕릉 진묘수는 뭉툭한 코에 툭 튀어나온 눈을 하고 입을 벌린 채로 지석 뒤쪽에서 버티고 서 있었다. 양쪽 옆구리에 날개 같은 것이 조각되어 있고 머리에는 나뭇가지 모양의 철제 뿔을 달고 있어 현실적인 동물 모양이라기보다는 상상의 동물이라고 보아야 옳을 듯하다. 입술에 붉은 칠이 있고 몸에도 칠을 했던 흔적이 있어, 붉은 색으로 잡귀를 쫓는 전통을 따른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 돌짐승은 악귀를 막고 사자를 보호하려는 뜻에서 놓은 것으로 중국 한대 이래의 풍습을 들여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국의 것은 대개 흙으로 조성하는 것에 견주어 돌로 만든 것은 역시 뛰어난 문화적 소화력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겠다.


금제경식 (국보 제158호/ 한 쌍. 길이 각 14cm, 16cm/ 국립공주박물관)

왕비 쪽에서 출토된 목걸이로 아홉 마디로 된 것과 일곱 마디로 된 것 두 종류이다. 이 중 일곱 마디 목걸이는 발굴 당시 아홉 마디 목걸이의 밑에서 겹쳐 나와 먼저 착용된 것으로 보여진다. 일정한 간격으로 활처럼 휘어진 육각의 금봉을 각 마디의중간부는 굵게 하고 끝은 차츰 가늘게 하여 고리를 만들어 다른 것과 연결시킨 다음, 남은 부분을 세몸에 감아서 풀리지 않도록 하였다. 1개의 금봉에 고리와 매듭을 겸한 솜씨가 매우 뛰어나다. 두 목걸이 모두 한 끝에 목에 걸기 위한 세환이 끼워져 있을 뿐 매우 간단한 구조를 하고 있지만, 미적 감각과 함께 세련되어 보인다.


금제뒤꽃이 (국보 제159호/ 길이 18.4cm/ 국립공주박물관)

위가 넓고 밑으로 긴 역삼각형이며, 밑은 세 가닥의 긴 핀 모양으로 되어 있다. 윗면 중앙에는 보주형 돌기가 있어서 마치 새의 머리 같이 보이고, 좌우는 호형을 그리면서 굴곡 진 형태로 날개처럼 보인다. 좌우의 측선은 안으로 차츰 좁혀져 있는데 윤곽을 따라서 융기선이 한 줄 찍혀 있다. 삼각형부는 아래위로 구분하여 그 구획선과 상단 윤곽에는 점렬문을 찍었다. 그 가운데 상부에는 좌우에 팔화형을, 그사이 아래․위로는 원점을 두드러지게 찍었으며, 구획의 아랫부분에는 S자형의 쌍선을 대칭으로 그린 다음 그 여백에 꽃무늬를 찍었다. 왕의 머리위치에서 발견되었고, 끝이 새줄로 갈라진 점으로 보아 머리에 꽂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금제수식부이식 (국보 제157호/ 길이 11.8cm, 8.8cm/ 국립공주박물관)

왕비의 크고 작은 두상의 세환식 귀걸이다. 한 쌍은 복잡한 형식의 길고 짧은 두 줄의 수식에 달려 있고, 또 다른 한 쌍은 한 줄로만 되어 있다. 앞의 귀걸이 중 긴 가닥에는 4 개씩의 원형 영락이 금사슬에 7단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맨 끝에는 작은 고리를 연결하여 여덟 개의 원형 영락을 단 아래에 탄환모양의 수하식이 매달려 있다. 이러한 탄환모양의 수하식은 고구려의 유적에서는 발견된 일이 있으나 신라 유적에서 는 그 예를 볼 수 없다. 짧은 줄의 수식은 다른 한 쌍의 것과 거의 같은 수법으로 긴 가닥에서의 탄환모양 장식이 없고, 잎사귀모 양의 영락과 담록색의 둥근 옥이 달려 있다. 잎사귀형 영락 아래에는 사익형의 초실형 수식이 있고, 맨 끝에는 작은 돌기가 달려 있다.


금동용봉대향로와 백제의 위대한 예술성

1993년 부여 능산리 고분군과 부여 나성 사이의 백제시대 집터를 발굴하던 중에 거대한 향로가 출토되었다. 「금동용봉대향로」,「금동용봉봉래산대향로」라 불리게된 이 향로의 출현은 백제 공예사 뿐만 아니라 , 나아가 삼국시대 우리 나라의 미술사를 다시 쓰게 하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궁중에서 사용하는 물건을 제작하였던 공방터의 바닥 진흙 속에 파묻혀 있던 체로 출토된 이 향로는 공기가 통하지 않았던 까닭으로 거의 녹이 슬지 않고 본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전고 64cm 나 되는 이 거대한 향로는 아주 섬세한 조각과 화려한 장식들로 장엄되었다. 하부 받침은 머리를 들어올린 용의 입에 마치 큰 연꽃을 물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조각되었으며, 연꽃 위에는 여러 개의 산들이 중첩되어 솟아오르고 있다. 그리고 맨 꼭대기에는 한 마리의 봉황이 날개를 활짝 젖힌 체로 사뿐히 앉아 있는 모습이다. 향로의 뚜껑부분은 불로장생의 신선들이 살고 있다는 중국 동쪽 바다 가운데 봉래산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꼭대기의 봉황 역시 봉래산에 살고 있다는 상서로운 전설 속의 새로 보이는데 천하가 태평할 때 세상에 나타난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 봉황은 음악이 있는 곳에서 저절로 노래하고 춤추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예로부터 춤과 음악이 있는 곳에 흔히 동반되었다. 봉황의 모습은 깃털과 벼슬, 부리, 발가락 4개 등 세밀한 표현으로 꼬리를 길게 날리고 양 날개를 퍼득이며 막 비상하려는 듯 조형되었다. 눈은 아래의 산을 내려다 보는 듯 하고 날개와 뒷 꽁지에는 화염문이 장식되어 있다. 머리부위와 몸통은 둥근 구슬로 연결되었고, 보주 바로 밑 목덜미에는 향연구멍이 두 개 있고 양다리를 밟고 있는 형상이다.

봉황은 고대로부터 신성시 여긴 상상의 새이다. 수컷을 봉(鳳), 암컷을 황(凰)이라고 하는데 그 생김새는 문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 <주서(周書)>에 이르기를 “형체가 닭과 비슷하고 뱀의 머리에 물고기의 꼬리를 가졌다"고 한다. 또한 <설문해자>에 ”봉의 앞부분은 기러기 뒤는 기린 뱀의 목, 물고기의 꼬리, 황새의 이마, 원앙새의 깃, 용의 무늬, 호랑이의 등, 제비 의 턱, 닭의 부리를 가졌으며 오색을 갖추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악집도>에는 닭의 머리와 제비의 부리 뱀의 목과, 용의 몸, 기린의 날개와 물고기의 꼬리를 가진 동물로 봉황의 모양을 묘사 하고 있다. 봉황은 동방 군자의 나라에서 나와서 사해의 밖을 날아 곤륜을 날아 지나 지주 의 물울 마시고 약수에 깃을 씻고 저녁에 풍혈에 자는데 이 새가 세상에 나타나면 천하가 크게 안녕하다고 한다. <산해경>에서도 “이 새는 먹고 마시며 절도에 맞고 절로 노래하고 춤을 추는데 이 새가 나타나면 천하가 태평하다>고 설하고 있다. 또한 봉황은 갑골문에서 상제의 사자, 또는 천자의 상징으로서 인식되기도 하였다.

74개나 되는 산봉우리 사이사이에는 온갖 진기한 영물들이 피어나듯 장식되었다. 호랑이, 코끼리, 원숭이, 사슴, 멧돼지, 등 실존하는 짐승들 39마리가 16명의 인물상과 함께 조각된 모습이다. 정상부 봉황의 바로 밑에는 5인의 악사가 빙 둘러앉아 마치 천상계의 음악을 연주하고 있으며, 악사들 바로 뒤에 작은 구멍을 뚫어 향의 연기가 피어 나오도록 장치했다. 또한 산골마다 자리한 각 인물들은 명상에 잠기기도 하고 낚시를 하는가 하면 머리를 감고 말을 타고 달리거나 사냥을 하는 등 다양한 모습이다.

몸체는 만개한 연꽃으로 사이사이에 두 신선과 날개 달린 물고기를 비롯한 수중생물 총 26마리가 조각되었다. 이러한 몸체를  한 마리의 용이 세 발을 이용하여 바닥에 안정케 하고 머리를 처 들어 받쳐 물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한 발을 허공에 힘차게 쳐들고 있는 모습은 용의 기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요소이다. 하부의 연꽃은 만물의 생명이 연꽃에서 탄생한다는 연화화생관(蓮華化生觀)을 표현한 것이다.

이 향로의 전체구조는 음양의 체계를 적용하여 하나의 우주를 완성하고 있다. 하부 수중계는 음(陰)의 대표 격인 용을 등장시키고, 그 위 몸체에는 수중 또는 물가와 관련된 동물과 연꽃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지상계를 상징하는 뚜껑에는 산악과 선인들과 짐승을 배치하였으며, 천상계인 정상에는 양(陽)을 상징하는 봉황과 원앙을 장엄한 것이다.

이 향로는 일찍이 봉래산 향로가 유행하였던 중국 한나라의 유물과는 도저히 비견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봉래산 신앙의 원조인 중국에서조차 최고수준의 청동기 제작기술로도 실현하지 못하였던 백제의 용봉향로는 전 세계인이 또 한번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위대한 예술품으로 홀연히 우리 곁에 돌아온 것이다.


산수문전으로 보는 백제 회화의 경지

‘산수화'란 말 그대로 산과 물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즉 자연을 그린 풍경화의 일종인 것이다. 산수화는 혼란기이었던 중국의 육조시대(六朝時代, A.D. 265~581)부터 시작되었다. 극심한 정치적 격정을 겪었던 당시 지식인들은 세속을 떠나 자연 속에서 자연과 교감하며 사는 이른바 호복한상(濠僕閒想)의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렇게 이상적인 삶의 혜택을 누릴 수 없었으므로 그 대신 환상적인 절경의 산수화를 그림으로 제작하여 벽에 걸어놓고 감상하는 기풍이 유행하게 되었다. 바로 거기에서 “산수화의 태동"이라는 인류예술사의 큰 발자취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늘날 당시의 그림은 단 한 점도 전해지지 않는다.

1937년 봄 충남 부여군 규암면 외리에 위치한 백제의 옛 절터에서 문화재 발굴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출토된 150여 개의 벽돌 속에서 산수무늬벽돌이 발견되었다. 물론 산수문전은 중국에서조차 전무한 것으로 매우 진귀한 것이다. 백제의 산수화 역시 단 한 점도 전해지지 않는 상황에서 화상전의 출현은 우리 나라 산수화의 시작이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벽돌에 부조된 산수문전(山水紋塼)의 그림은 매우 도식적이긴 하나 백제 산수화의 발달 정도를 짐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걸작이다.

화면의 하부에는 흐르는 강물이 도식적으로 표현되었고 그 위로 기암절벽과 산들이 중첩되어 자리하였다. 세 개의 봉우리를 가진 산들의 정상에는 저마다 송림(松林)으로 우거진 형상이며, 하늘에는 상서로운 구름이 배치되어 조화로운 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기암과 봉우리형 산들이 겹겹이 중첩되어 서로 견주듯 조화를 이루고 은연중에 원근감을 보여준다. 중앙의 절벽 뒤에는 기와집 한 채가 소담스럽게 표현되었고 오른쪽 기암 사이에는 승려로 보이는 인물이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인물상은 그 동안 탁본으로 닳아져 모습이 많이 희미해졌다. 둥글둥글한 산 모양이 더없이 부드러워 백제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보는 듯하다. 또한 살짝 도드라진 양각에 한 겹 얇은 테두리를 넣어 현대적인 미감을 연출하고 있다. 마치 신선경 또는 무릉도원을 꿈꾸었던 백제인의 산수사상을 한껏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산수문전은 전체적으로 백제 특유의 유연하고 부드러운 양식으로 한 폭의 산수화라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더욱이 이것이 벽돌에 부조로 표현되어 구워진 것으로 장인(匠人)의 솜씨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당시 화가들의 작품 수준이 상당한 경지에 있었다는 추측을 쉽게 해 본다. 나아가 이 산수문전은 백제뿐만 아니라 중국에조차 남아있지 않은 육조시대 산수화의 양상까지도 짐작케 하는 소중한 작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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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2004-09-15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송한 말씀입니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관심이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관심이 가다보니 알게되고 알다보니 가르치게 되나봅니다. 더욱이 백제 역사재현단지의 단청자문건으로 백제의 문양을 깊이있게 연구해야할 필요성 역시 간과할 수 없었구요~~~퍼가시어서 잘 활용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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