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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그림자 > [퍼온글] 中國 역사서에 나오는 고구려史는 -

고구려史, 中 어떤 책에 나오나
後漢書에 기록 첫 등장
삼국지·자치통감·책부원구등 문헌 수두룩

이선민기자 smlee@chosun.com

입력 : 2004.09.23 17:38 14'

고구려와 고구려인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 중국 역사서는 정사(正史)인 ‘이십오사(二十五史)’와 개인이 쓴 ‘자치통감(資治通鑑)’ ‘책부원구(冊府元龜)’ 등이다.

중국은 한(漢)나라 때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를 쓴 이래 각 왕조별로 역사를 정리했고, ‘명사(明史)’까지 모두 25종을 보통 ‘이십오사’라고 부른다. 이 중에서 고구려에 대한 기록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범엽(范曄)이 지은 ‘후한서(後漢書)’이며, 이후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에 해당하는 중국 왕조의 역사서인 ‘삼국지(三國志)’ ‘진서(晉書)’ ‘남제서(南齊書)’ ‘양서(梁書)’ ‘진서(陳書)’ ‘위서(魏書)’ ‘북제서(北齊書)’ ‘주서(周書)’ ‘수서(隋書)’‘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등에 고구려 관련 기록이 들어 있다.

이십오사 다음으로 고구려 관련 서술이 많은 것은 북송(北宋) 때 사마광(司馬光)이 지은 ‘자치통감’이다. 상고시대인 주(周)나라 위열왕(威烈王) 23년(기원전 403년)부터 오대(五代)의 후주(後周) 말(959년)까지의 주요 사실(史實)을 300종 이상의 원사료(原史料)를 활용하여 연대순으로 정리했다.

또 역시 북송 때 왕흠약(王欽若)과 양억(楊億) 등이 황제의 명을 받아 완성한 사료집(史料集) ‘책부원구’에도 고구려 관련 기록이 보인다.

                                                                                                                                           [조선일보] 기사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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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분벽화


고구려는 우리 민족이 세운 가장 광대하고도 강력했던 제국이었다.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대륙과 인접한 지리적 여건에 따라 백제, 신라에 앞서서 이끌고 많은 영향을 주었다. 고구려의 문화는 호방하고 진취적이며 활력이 넘치는 것이었다. 지역적으로는 중국과 서역의 문화를, 종교와 사상적으로는 불교와 도교를 동시에 수용하는 등 외래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면서도 지극히 독자적이고도 독특한 문화를 창출하였던 것이다.

고구려의 문화적 양상과 특성을 가장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바로 고구려 벽화고분이다. 오로지 단편적인 기록들에 의거하여 막연하게 추상적으로만 짐작할 수밖에 없었던 고구려 문화의 풍부한 내용과 성격을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 바로 고구려 고분벽화들인 것이다.


1. 벽화고분의 분포와 현상

현재까지 확인된 벽화고분은 만주지역〔집안일대〕에 23기, 평양․안악 일대에 68기 등 91기에 이른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대한 연구는 1907년 프랑스의 학자` 솨반느(E. Chavannes)가 산화연총을 학계에 소개한 이래 1930년도의 일본인 연구와 80년도의 중국인 연구로 이어지면서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90년 초 한․중 간의 국교수립과 한국인의 동북지방 방문러시에 따라 집안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93년 고구려문화국제학술대회를 계기로, {아, 고구려전}(조선일보)와 94년 KBS의 {고구려고분벽화}로 국민적 관심사로까지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중국 집안에 분포된 고구려 고분은 대략 1만2천여 기, 그 중에서 제대로 발굴된 고분은 극소수이고 중국 당국의 무관심한 방치로 인하여 유적은 서서히 훼손되고 있다. 그 유명한 수렵도나 무용도의 모습은 일제시대 때 찍은 사진들로만 감상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 이들 벽화는 이제 그 형체만 경우 남아 있을 정도인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북한 당국의 벽화 고분 관리는 비교적 양호하다. 중국 당국이 철문으로 고분 입구를 막는 방식과 달리, 북한은 고분 내에 사면을 유리벽으로 만들고 온도 조정 장치와 입구 조정 등을 통하여 벽화 보존에 노력하였다. 또한 집중적인 연구조사를 통하여 얻어진 결과물들을 한데 모아 책으로 간행하기도 하였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지구촌에서 유래 없는 훌륭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유적의 중요성을 느낀 일본인들도 북한 당국과 협력하여 고구려 벽화들을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의 등록을 추진하고 있다. 더 이상 고구려 벽화 고분이 정치적 논리에 의해서 훼손되어 가는 상황을 막아야 한다. 남. 북한이나 중국 등 모두 이해관계를 떠나 벽화 고분 보존에 모두 노력을 해야 한다. 고구려 벽화 고분은 우리 선조들이 남긴 아주 귀중한 유적이지만, 이제는 우리 것만이 아닌 세계인이 소중히 여기는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관리해야 할 것이다.


2. 고구려 고분벽화의 역사적 변천

고구려 고분벽화의 발전 단계는 대체로 3기 또는 5기로 구분하고 있다.

3기구분 : ①인물풍속도 ②인물풍속과 사신도 ③사신도

5기구분 : ①인물풍속도 ②인물풍속 및 사신도 ③장식무늬 고분 ④장식무늬와 사신도 ⑤사신도 고분.


⑴ 초기(인물풍속도)

초기에 해당되는 .A. D. 4~5세기 초반에 인물 풍속을 그린 단실분, 감 또는 측실로 조영된 2실분구조가 주류를 이룬다. 동수묘(안악 3호분/375년-북한에서는 이 묘를 미천왕릉 또는 고국원왕의 것으로 보고있다), 요동성총, 평양 역전 고분, 대성리 1호, 약수리 고분, 복사리 고분, 팔청리 고분, 대성리 2호분, 덕흥리(408년)고분, 안악 2호분, 고산리 9고분, 매산리 사신총, 통구 12호분, 용강(安城洞)대총, 감신총, 연화총, 천왕지신총, 삼실총, 대안리 1호분, 장천 1호분, 가장리 고분 등이 초기 벽화고분에 해당된다.

인물풍속도는 벽그림과 천정그림으로 구분된다. 벽에는 집안 생활풍속도가 그려졌는데 가족, 측근, 시중과 호위무사 등 남녀 인물들이 묘사되었는바, 그 내용은 행렬, 사냥, 씨름, 전쟁, 무악 등이 주류를 이룬다. 그리고 무덤의 입구에는 문지기그림도 나타난다. 벽화에서 볼 수 있는 건물그림에서는 기둥, 주두, 두공, 도리 등이 묘사되어 당시 목조 건물의 형식을 재현시키고 있다. 또한 성곽, 부엌, 마구간, 외양간, 우물 등 각종 건축시설물도 생생하게 표현되었다. 천장에는 일월성신과 비운(飛雲) 등 하늘, 즉 천상의 세계(혹은 내세의 상징)가 묘사되었다. 1970년 발견된 중국 집안 장천 1호분의 예불도는 무덤의 주인인 부부가 부처님께 예배하는 모습으로 경건하고 엄숙함이 종교화로서 최대 걸작이다.


⑵ 중기(인물풍속 및 사신도)

5세기 중반부터 6세기 초반 벽화고분들이 중기에 해당된다. 고분의 내부구조는 대게 인물풍속 및 사신도의 단실분 또는 측실을 갖춘 2실분으로 조성되었다. 쌍영총, 각저총, 무용총, 산련화총, 귀갑총, 안악 1호분, 환문총, 성총, 기마총, 고산리 1호분 등을 들 수 있다.

인물 풍속과 사신도 고분은 인물 풍속도와 함께 사신도가 묘사된 고분이다. 벽화 내용은 전기 인물 풍속도의 벽화보다 더욱 다양한 요소가 그려졌다. 즉 인물풍속도와 함께 청룡, 백호, 현무, 주작의 사신도와 비천, 신선 등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⑶ 후기(사신도)

후기에 해당되는 6~7세기에는 사신도를 그린 단실분이 주류를 이룬다. 강서대묘․중묘, 호남리 사신총, 진파리 1호․4호분, 통구 사신총, 내리 1호분, 오회 4․5호분 등이 후기에 해당된다. 사신도 고분은 벽화가 사신도 위주이다. 고분 내의 4벽에 사신을 묘사하고 천장에는 황룡 또는 연꽃을 중심에 배치하고 일월성신, 서조(瑞鳥), 영초(靈草), 비운(飛雲), 기린(瑞獸 ?), 신선, 비천, 구름, 인동무늬 등을 장식하였다. 그 외에도 장식무늬, 인물 등을 그렸으며, 문에는 문지기도 묘사하였다.


3. 고분벽화의 특징과 상징성

고구려 고분벽화에 담겨진 내용을 통하여 고구려인들의 기상과 종교, 사상, 우주관, 생활상과 풍속, 예절, 남녀 인물들의 복식과 관모, 꾸밈새와 화장법, 각종 시술과 문물, 건축양식과 실내장식, 회화의 기법과 발달정도, 문화의 성격과 변천, 외국문화와의 교류 양상 등등 수많은 것을 엿볼 수

있다. 즉 고구려 벽화는 문화적 보배인 동시에 소중한 역사적 사료인 것이다.

또한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주목되는 것은 벽화내용의 전개가 매우 짜임새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후기의 벽화들은 그 구성이 정확히 맞물리도록 완벽에 가깝게 짜여져 있어 마치 불교회화의 만다라를 보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 밖에도 화려한 채색과 안료의 발달을 엿볼 수 있다. 벽화의 채색은 후기로 내려올 수록 극도로 화려하고 강렬하다. 천 수백 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 빛깔이 선명하게 전해지고 있다. 또한 심한 결로 현상에도 불구하고 박락되지 않은 것을 보면 안료의 제조와 설채(設彩)기법에 수준 높은 과학기술이 뒷받침되고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⑴ 인물풍속도

벽에 그려진 인물풍속도는 대체로 서사적이며 설명적인 경우가 대부분으로 주로 피장자의 생애와 연관 깊은 내용들이다. 벽화 중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전투, 수렵, 씨름, 등 힘과 관련된 주제들이 많이 등장하는 점이다. 이것은 한족이나 북방민족들과 끊임없이 대결해야 했던 고구려인들의 용맹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고구려 벽화는 웅혼하고, 힘차며, 동적이고 긴장감 넘치는 특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힘찬 필치의 특성은 인물 풍속도가 완전히 사라진 후기의 사신도에서도 이어지는바, 형상과 필선이 힘차고 속도감 있으며 팽팽한 긴장감이 넘쳐흐른다. 특히 초기, 중기보다는 후기의 벽화에서 필치의 한층 무르익은 완숙미를 느낄 수 있다. 그 예로서 후기 벽화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많이 나타나는 사신도 용그림의 역동적인 용틀임은 힘찬 필법의 경지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우선 고구려고분벽화의 주된 내용인 인물풍속화를 살펴보면 주인공과 함께 다양한 배경이 공존하고 있다. 사방 벽면에는 건축부재의 기둥과 두공을 그려서 묘실내부를 실제 목조건물과 같이 구성하고, 다양한 무늬를 부가하였으며, 천정에는 해 ․ 달 등 천상의 세계를 묘사하였다. 즉 벽에는 주인공의 현실 세계를, 천정에는 내세의 모습을 반영한 하나의 「소우주」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벽화의 주제는 생전 주인공의 권위와 생활상을 표현한 것으로, 의식주와 풍속 ․ 무용 ․ 음악 ․ 씨름 ․ 사냥 ․ 행렬 ․ 전투 ․ 공양 등의 다양한 주제는 물론 등장인물 각 개인의 개성이 두드러지도록 묘사되었다. 

집안장면에는 거실 ․ 부엌 ․ 마구간 등 각종 건물이 그려지고 있다. 동시에 벽화에 나타나는 인물화는 환상적 인물로 종교와 신화의 세계를 반영하여 ‘인간과 동물’,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표현한 형상이다. 즉 비천․용․기린․학을 타고 비행하는 신인(神人)의 모습이나 우수인신(牛首人身)의 신농씨(神農氏/중국의 전설상의 제왕으로 삼황(三皇)의 한 사람. 백성에게 경작을 가르쳤다고 하며, 불의 덕으로 왕이 된 데서 염제(炎帝)라고도 함), 제륜신(製輪神) 등에서 그러한 의식세계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인물화의 경우, 무용총의 접객도에 나타난 시자와 시녀들의 모습이나, 안악 3호분(冬壽墓)에서 보여준 다양한 수행자들을 거느린 모습, 그리고 약수리고분벽화 주인공의 화려한 행렬도에서 고구려 귀족사회의 생활상을 쉽게 살필 수 있다.


⑵ 인물도와 복식

안악3호분과 덕흥리고분의 주인공 초상화에서는 주인공의 권위와 위상을 확인할 수 있도록 주변에 다양한 시종자를 함께 묘사하였다. 주인공은 아담한 실내장식과 화려한 복장, 머리에는 백라관을 쓰고 있다. 원래 고구려의 나관은 백 ․ 청 ․ 비나관이 존재하였음을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 벽화에서 그대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안악3호분의 행렬도에는 수많은 수행원을 거느린 주인공이 백라관을 쓰고 있다. 그 외에도 덕흥리 고분벽화의 주인상 역시 백라관을 쓴 채 위엄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벽화에 나타난 인물상에서 가장 화려한 것은 여인의 복식이다. 안악3호분의 여주인과 시녀들, 무용총의 접객도, 수산리 고분벽화의 행렬도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복식은  매우 다양하고 화려함을 보여준다. 특히 여자의 머리모양은 더욱 다양한데 얹은머리․ 내린머리(애교머리) ․ 올린머리 등으로 한껏 멋을 부린 모습이다. 그리고 어떤 여인은 멋과 실용성의 능률을 위해 머리에 수건을 쓴 모습인데 약간 앞으로 젖힌 수건을 살짝 접은 형상으로 표현되었다. 대게 벽화에 그려진 여인들의 용모는 화려하고도 다양한 머리형태와  무늬 있는 복식, 사뿐한 버선발, 그리고 갸름한 얼굴 등이 여인상의 공통된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남자 인물상의 경우, 절풍(折風)은 주로 새털(鳥羽)이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구분되며, 문관의 모자로 생각되는 책(責)은 뿔이 난 것과 없는 것이 있다.

고구려고분벽화에 나타난 여인의 복식이나 외형에서 두드러진 차이점은 신분에 따라 저고리와 바지의 통이 다르다는 것이다. 지배계급일수록 남녀 모두 바지통이 넓어 좌식계급으로서 비활동적인 생활상을 나타낸 듯하다. 또한 고구려 복식의 실용성과 장식성은 단정하면서, 아름다움보다 빈번한 외침과 혹한과 같은 자연적인 악조건을 극복하려는 독자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남성상은 왕 이외에는 주로 기사와 역사가 중심이 된다. 대체로 말을 타고 달리며 수렵 ․ 전쟁을 상징하는 장면들이 대표적이다. 특히 무용총의 기사도는 상무(尙武)적이며 호전적인 고구려인의 기질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용감한 고구려인의 기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통구12호묘와 삼실총의 벽화이다. 아울러 고구려 인물상을 대표하는 벽화로는 삼실총의 역사도를 들 수 있는데 가슴보다 굵은 팔뚝에서 패기 넘치는 힘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둥글고 긴 얼굴, 짙은 눈썹, 그리고 크고 순한 눈을 볼 때 상무적이며 전투적인 고구려인상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삼실총의 역사나 안악 3호분의 주인공 등은 알맞게 살이 쪘고 갸름하며 여유 있는 낙천적 용모로서 결코 무섭지 않은 인상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삼실총의 무인상 역시 갑옷은 입었으나 얼굴은 통통하고 순하게 생긴 모습이다.

고구려 벽화에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등장인물이나 동물, 그리고 모든 주제가 조화와 균형을 이룬다는 점이다. 5회분 4․5묘의 [태양신과 월신]이나 [화염문 사이에 낀 남녀상] 등은 색감이나 구도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 무용총 기사의 경우 백마(위)와 흑마(아래)를 각각 타고 서로 반대방향으로 달리고 있다. 또한 무용도의 경우 무용수의 복장이 서로 상․하복의 색깔이 엇갈리게 채색하였다. 즉, 전자의 상의(저고리)가 붉고, 하의(바지)가 흰색이면, 후자는 상의가 흰색이며 하의는 적색으로 대칭을 이루었다. 좌우․전후의 대칭적 조화는 접객도의 탁자 모습에도 보여 진다. 이러한 조화와 균형의 미는 인동당초문의 경우에도 예외 없이 나타나고 있다.


⑶ 가무도

고구려인물화에서 특기할 또 다른 사항은 노래와 춤을 즐기는 가무도이다. 빈번한 전쟁 속에서 여유와 긴장완화를 노래하는 고구려인의 현실감각은 진(晉)나라의 학자 진수(陳壽:233~297)가 편찬한 ꡔ삼국지(三國志)ꡕ 「위지」 동이전의 <其民喜歌舞 國中邑落 暮夜男女群聚 相就歌戱>라는 기록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고구려인들이 집단 가무를 통하여 결속과 단합을 꾀하였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기록이다.

가무도에는 각종 악기가 그려졌는데, 『수서(隋書)』에는 비파․오현․피리․생(笙)․퉁소(簫)․요고․패 등 14종류가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벽화상태가 거의 원형을 잃고 있기 때문에 모두 다 확인할 수는 없으나 다양한 악기는 찾을 수 있다. 특히 5회분 4호묘의 요고, 무용총의 횡적(젓대), 강서대묘의 대각(쌍나팔), 집안17호묘의 각(나팔)과 현금 등이 대표적인 악기들이다.


⑷ 서수․서조․사신도

동물화는 인물풍속화와 함께 고구려 고분벽화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주제이다. 벽화에 등장하는 동물에는 말 ․ 소 ․ 개 ․ 범 ․ 사슴 ․ 닭 등의 실제동물과 청룡 ․ 백호 ․ 주작 ․ 현무 등 이른바 사신도와 같은 환상적 동물이 있다. 환상동물에는 그 외에도 날개와 발을 가진 물고기(안악 1호분), 삼족오와 두꺼비의 일․월신(쌍영총․각저총), 기린도 등과 같은 특이한 형상의 모습도 등장한다. 무엇보다도 5회분4호묘에서 보여주는 해와 달의 신은 세발까마귀와 두꺼비를 머리에 이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과 동물의 결합이라는 고구려벽화의 특징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동물화에서 볼 수 있는 날개 달린 물고기나 날개 달린 사슴(안악1호분), 천마도 등은 고구려인의 환상과 꿈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다신교적 의식세계를 표방한 것으로 사료 된다.

날개 달린 물고기나 인두작신(人頭雀身)의 형상은 『산해경』에 보이는 비중원적 요인의 특징으로 고구려 문화의 성격을 가늠케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용을 탄 인간과 우두인신(牛頭人身), 수신양두인(獸身兩頭人/아래는 동물이며 위는 머리 둘을 가진 인간), 그리고 인두작신(덕홍리 고분․삼실총)과 같이 인간과 동물의 공생을 통해 다신교적인 고구려인의 의식이 중원문화와는 분명 다른 북방 문화의 영향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인간과 동물과의 공생관계는 용이나 뱀만이 아니고 소(5회분5호묘)와도 연결되며 주작(삼실총)과도 공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물화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사신도이다. 이는 단순한 환상의 동물이 아니라 방위신 내지는 도교를 포함한 종교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우선 청룡은 동방의 수호신으로 네 발을 갖고 있어 외형상으로는 백호와 비슷하지만 머리 부분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청룡은 긴 혀를 갖고 있으나, 백호는 큰 눈과 날카로운 이빨이 있을 뿐이다. 북방수호신인 현무도는 거북과 뱀이 머리를 마주 대고 얽힌 형상으로 힘과 아름다움이 자연스럽게 표현되고 있으며 박력 있는 생동감으로 고구려벽화의 활달한 필치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현무는 거북과 뱀이 뒤엉킨 모습이 대부분이나, 약수리고분과 삼실총의 예처럼 양(염소)과 뱀이 어울린 형상도 드물게 나타난다. 남방수호신인 주작은 상상의 새로서 닭이나 봉황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날개와 꼬리가 길고 크다. 따라서 5회분5호묘에는 유난히 빨간 날개를 가진 새가 주작으로 표현되었고, 무용총에는 수탉이 그 역할을 맡았다.

이러한 동물화에서 특기할 것은 고구려와 신라의 문화적 관련성이다. 태양 속의 까마귀(三足烏)가 결국 예언자로서의 새(朱雀)로 연결되었으며 고구려의 주작과 신라(天馬塚)의 새가 형태나 특징이 거의 유사한 모습이다. 이러한 양국간의 유사성은 장천1호분의 천마그림과 경주 천마총의 천마도와의 유사성과 함께 고구려 문화의 신라전파를 추정케 한다. 고구려벽화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새는 사자(死者)를 하늘로 연결하는 사자(使者)로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변한․진한에서 장례 때 새 깃을 함께 묻어 죽은 사람이 하늘로 날아가기를 빈다는 기록을 구체화시킨 것이라 하겠다.


⑸ 패턴장식

장식화에는 식물무늬․기하무늬․운문․기둥무늬․별자리 등이 있다. 식물무늬는 연꽃무늬와 인동문이 특히 많은데, 전자는 무용총과 삼실총에서, 그리고 후자는 강서대묘와 사신총에서 진면목을 볼 수 있다. 기하무늬에는 원형․거치문․귀갑․병풍무늬 등이 있으며, 구름무늬가 두드러진 소재이다. 기둥무늬는 무용총이나 각저총에서 볼 수 있는 지상건물처럼 보이게 한 것으로 기둥․두공․도리 등을 묘사한 것이다. 별무늬는 무덤 천정에 그려져 있는 것으로, 진파리 4호분이나 장천1호분의 성좌도도 그 일종이다.

장식화에서 가장 많은 것은 연꽃이다. 연꽃무늬는 대체로 비슷한 형태를 갖고 있으나, 무덤에 따라 그 모양이 약간씩 다르게 묘사되었다. 연꽃무늬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표현은 만개된 연꽃의 형상으로서 진파리1호묘의 현실 중앙 천장 연꽃그림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꽃문양도 다양한 형상으로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특히 연꽃을 옆에서 묘사한 경우와 연봉우리 형상도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연꽃 위에 사람의 두상을 표현하거나 보주와 화염무늬를 장식한 경우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연화문은 고구려의 본격적인 불교의 유행과 더불어 망자의 연화화생, 정토화생을 상징하는 교리적 의미를 그림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또한 장식무늬에서 큰 비중을 갖고 있는 인동당초무늬는 여러 가지 모양을 하고 있다. 특히 사신총(집안)의 것은 나뭇잎 가운데 꽃망울이 있는 것과 새모양으로 색깔을 달리하면서 당초문 형식으로 이어지는 것은 그 멋과 예술적 감각이 뛰어나다. 그러나 대부분은 같은 무늬를 연결시킨 것이다. 그 외 구름당초도 있으며, 무용총과 각저총의 측면 연화문(博山文)도 있었다. 이러한 장식무늬는 그림의 주인공이나 주제를 부각시키며 공간을 메우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 무늬는 대개 천정 고임부분을 장식하였고, 그림과 그림사이를 연결시키는 고리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동당초문의 유행은 중동 및 서역문화와의 밀접한 관련을 찾을 수 있다.

장식무늬 중에 특이한 것은 성좌도이다. 현실천정 꼭대기에는 대부분 성좌도가 있다. 동쪽에는 태양(3발까마귀)이, 서쪽에는 달(두꺼비)이 있고, 몇 개의 동심원이 그려져 있으며, 거의 북두칠성이 예외 없이 나타나있다. 이러한 성좌도에서 고구려의 천문학이나 과학의 높은 수준을 확인할 수 있다. 성좌도의 내용에서 『삼국사기』에 보여진 혜성․오성․태백․토성 등의 출현은 단순한 천변(天變)이 아니라, 정치적 의미가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장천1호분에 있는 성좌도는 북두칠성이 남북으로 교차되어 있으며, 달에는 두꺼비 외에 토끼형상이 이용된 것도 있다.

이 밖에도 벽화의 소제로 풍경화가 그려지기도 하였다. 풍경화의 소제로는 산, 나무, 구름 등이 주로 등장하고 있는데 그 형태가 단순화되거나 상징화 또는 도식화된 형상이다. 풍경화는 벽화의 주제로서 단독으로 그려진 예는 없으며 주로 수렵도의 배경으로 활용되었다.


4. 벽화의 기법

고구려 벽화는 벽면에 회를 바르고 완전히 건조한 후에 채색하는 방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것을 가리켜 혹자는 서양의 프레스코(fresco)기법으로 단정하는 경우가 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고대 로마시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프레스코기법은 벽에 바른 석회 바탕칠이 건조하기 전에 물이나 석회수로 갠 내(耐)알칼리성 토성안료를 빠르게 채색하는 방법으로 ‘부온 프레스코(buon fresco)’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벽화기법은 마르기 전까지 채색이 가능한 예정부분(조르나타: giornata)에만 회반죽을 바르고 채색을 하는데, 정해진 시간에 조르나타가 다 채워지지 못하면 건조된 부분의 회반죽을 긁어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또한 스며든 채색이 마르면서 나타나는 특성상 고구려 벽화에서와 같이 활달한 필치의 구사는 아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고구려 벽화의 채화기법은 이와는 근본이 다른 방식이다. 석면(石面) 위에 회반죽을 바르고 완전히 건조한 다음 자유롭게 채색한 방식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기법을 오히려 석회바탕이 완전히 마른 상태에서 석회수로 갠 안료나 템페라(tempera)로 채색하는 세코(secco, 프레스코 세코라고도 한다)기법에 가깝다. 템페라는 라틴어의 ‘temperare(안료와 매체의 혼합)’를 어원으로 하는 그림물감의 일종으로, 난황․난백․아교질․벌꿀․무화과나무의 수액 또는 양이나 염소, 기타 수피(獸皮)로 만든 콜로이드 물질을 단독 또는 적당하게 혼합한 매개제로 채색의 정착을 기한 불투명 물감이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이와 유사한 밀타회 채색기법을 이용하여 제작된 것으로 사료된다. 밀타회기법은 채색의 피막이 견고하고 내구성․내수성이 강한 특징으로 삼국시대부터 전통적으로 사용된 채색 방식이다. 밀타유는 들기름이나 오동기름을 질그릇에 끓이고, 납에 열을 가하여 얻는 밀타승(密陀僧) 즉 산화납(Lead Oxide)을 혼합하여 끓인 것을 식힌 다음 여과하여 만든 기름이다. 이것에 동양 고유의 안료를 혼합하여 채색하는데, 그 특성이 서양의 채료인 유화(油畵)와 비슷하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바로 이러한 기법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자유로운 묘사와 활달한 필치의 구사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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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4세기~7세기에 걸쳐 우리민족이 세운 가장 광대하고 강혁했던 정복국가였다 또한 문화적인 면에서도 삼국시대의 다른 나라들을 앞서서 이끌고 영향을 끼쳤던 나라였다. 그 문화는 호방하고 진취적이며 활력에 넘치는 것이였고 지역적으로는 중국과 서역(돌궐, 유연)의 문화를, 종교와 사상적으로는 불교와 도가사상을 수용하는 등 외래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 들여 국제적인 동북아 문화권을 형성하는가 하면 지극히 독자적인 독특한 문화를 창출하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이러한 문화적 양상과 특성을 우리에게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고구려 고분벽화이다. 만약 고구려의 고분 벽화가 남아 있지 않다면 우리는 고구려의 문화와 의식세계 그 냉요과 성격을 단지 추상적으로 짐작만 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당시인들의 생활상과 내세관, 문화생활 전반을 이해하는데 없서서는 안될 귀중한 자료이며 삼국시대 미술사뿐 아니라 고대동아시아 미술사 연구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고분벽화에 대한 지금가지의 연구 성과는 묘제형식이나 벽화의 회화사적 위치를 재고하는 미술사적 접근이 주를 이루게 되었으며 제작기법이나 벽화의 물리적 특징을 파악하는 연구는 전무한 실정이었다.

이런 현상은 제작기법이나 물리적 특성을 살피기 위해선 현장 관찰과 과학적인 조사가  뒷받침되어야 하나 분단의  현실적 측면에서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기존 연구를 주도해온 고고학이나 미술사학자들이 접근하기에는 다소의 관점차이가 있기 때문에 위와 같은 연구가 이뤄지지 못하였다.

지금까지 조지벽화(자연석 표면을 다듬어 화면을 조성한 후 그 위에 직접 채색 표현한 형식의 벽화)를 제외하고 화장지 벽화(벽체 조성후 회나 흙으로 벽면을 마감하여 화면을 구성하고 그 위에 채핵한 벽화기법)의 형식을 한 고분벽화에 대한 고고학계나 미술사학계의 기존 논문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묘실을 석재로 쌓고 들 표면에 석회를 바른 다음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2. 석회는 (또는 호분)두께가 0.5센티내지 1센티되도록 정제하여 바르고 표면을 매끈하게 마감한 다음 그림을 그렸다.

3.벽화는 붉은 색 또는 검은색 선으로 밑그림을 그린다음 다시 결정적인 먹선으로 백묘를 하고고 색을 칠해 완성하였다.

4.안료는 대체로 천연광물성이지만 식물성 역채채료도 일부 보존재로로 사용하였으며, 적,황, 녹, 흑, 백색등이 주를 이루고 금은박 및 옥,상감기법까지 동원하여 장식하기도 했다.

5. 안료는 주로 아교 특히 개가죽 아교에 섞어 그렸다.

6. 고구려고분벽화는 화면이 둗기전에 그림을 그리는 방법과 듣은 다음에 그리는 방법 두가지고 있고 앞의 기법은 프레스코화법과 유사하다.

이 외에 앞으로 안료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어야 하고 지금까지의 기법의 연구가 전체를 말 할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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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04-08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침 고구려 고분벽화 이야기를 읽던 중이라 많은 참고 되었습니다. 감사히 퍼가겠습니다. 넙죽~
 

고구려 고분벽화의 제작시기보다 수세기 앞선 무덤이 중국의 진시황릉이다. 이 고분에는 벽화가 있는것은 아니지만 고구려 고분벽화와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기 위해 간단히 멘트합니다.( 완전히 발굴이 끝나면 상황이 달라질수도~)

진시황릉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은 드물것입니다. 우리나라   예술의 전당에서도 관련 전시회가 있었고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묘의 부장품 들이 관심을 끌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원전 221년 진나라 왕 영정은 여섯나라를 쳐부수고 전국을 통일함으로써 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 왕조의 황제가 되었답니다. 진시황은 즉위 후 함양에 대규모 궁실 공사를 일으킴과 동시에 자신의 능묘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 공사는 기원전 210년 진시황이 세상을 떠나고 2세가 즉위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섬서성 임동에 자리잡은 서산 최고봉의 북쪽 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진시황릉은 흙을 달구질해 바른 네모뿔 모양으로 높이 쌓은 지상의 봉분은 남북 길이 350M 동서길이 345M 높이가 47M에 이르는 거대한 묘입니다.< 중국사기>와 <>진시황본기>에 따르면 능묘 안에는 진주와 보석을 비롯해 모형 궁궐과 갖가지 장식품을 가득 넣었고 위에는 해, 달, 별 등의 천문도형을 아래에는 강, 내, 호수, 바다 같은 지리 모형을 만들어 놓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강과 내에는 수은을 흐르게 하고 묘실 도굴과 파괴를 막기 위해 장인들로 하여금 자동 발사되는 활을 만들게 하여 문위에 설치했다고 합니다. 아직 묘의 발굴이 모두 진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최근 과학적인 방법으로 묘실을 탐사한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묘실 안에는 확실히 수은이 저장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1970년대 고고학자들에 의해 일부 발굴된 병마용은 능묘 밖 동쪽에 위치해 있는데 진흙으로 만든 인형인 도용이 수천건, 도마가 수백필, 전차가 수십대 도용이 손에쥔 무기 1만여점 등이 출토이었다고 합니다.

<진시황 본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지고 있답니다.

"매장이 끝나자 어던 사람이 말하기를 장인이 기계를 만들었고 함께 참여한 노예들도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그들의 숫자가 많아서 누설될 것이라 했다. 장중한 샹례를 마치고 보물들도 다 파묻히자 묘도의 중앙문을 폐쇄하고 바깥문을 내려 장인과 노예들을 모두 가두니 다시는 빠져 나오는 자가 없었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진시황릉의 비밀을 보장하기 위해 무덤을 제작했던 장인들과 숱한 인부를 모두 묘실속에 가두어 죽여 버렸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70만며명의 인력을 동원해 세운 진시황릉의 비밀 역시 금세기 까지 땅속에 묻혀있었습니다. 

아직까지 고구려 고분속에는 산자를 매장했다는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역시 우리민족은 휴메니스트-

소수의 비밀을 위하여 힘없는 사람덜을 주기다니...무서운 중국사람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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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18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옛사람들은  죽어서도   영원히

                                살수 있다는 영혼 불멸설(도교적 신선사상)을 믿었습

                   니다. 따라서 고분은 죽은자의 쉼터 혹은 새로운 삶터였고 그 속에 그려지는

         벽화에는 죽은자의 땅과 하늘 그 안에서 새 삶을 누리는 모습을 담으려고 했을 것 입니다.

또한 죽은자의 무덤을  잘 꾸미는 것은 산자의 몫이였고 죽은자의 장식품이 산자의 자랑거리기

도 했습니다. 현재 발굴되는 고구려 무덤들은 그 시대를 대표했던 왕의 무덤이었거나 왕실관 관

련된  사람들의 무덤이었을 것이라고  판단되어 집니다. 따라서 이들의 무덤을 일반인의 무덤과

는 달리 특별하게 꾸미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을 것이고 덕분에 우리는 고구려시기의 지배계층의

생활풍속과 정신세계를 엿볼수 있는 행운이 있는 것입니다. 

  그시대 사람들이 무덤에 그림을 그렸던 이유는 먼 후대 사람인 현재의   우리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던 의도는   결코 아니였습니다.

 현재 우리는 무덤의   피장자을 위해 최선을   다하던 그시대   화사들이 그려놓은 장식문양들을

보고 그 상징성과 아름다움을 분석하고 연구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고구려 사람들이 죽은자의 안식처에그림을 그렸던 긍극적인 목적은 죽은자를 위한 최대

한의 의전 행위였던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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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ylontea 2004-03-16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따금씩 방송을 통해 보게 되는 고구려 고분 벽화의 그림을 보면 참 감동적입니다.
죽은자를 위한 최대한의 의전 행위로 죽은자의 안식처에 그림을 그렸다는 말씀에 공감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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