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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수수께끼 > 수련님의 백제역사재현단지 단청에 관한 小考

 수련님의 페이퍼에 말씀하신 백제역사재현단지의 백제 건축물(실은 이 건축물이라는 것도 백제의 건축 양식에 의한것이 아니라 일본에 남아있는 목조건축이 백제의 영향을 받아 조성된 것으로 판단하여 일본 건축물을 참고한 것이지만...)의 단청 자문작업을 맡으신 모양인데 글의 내용으로 보아서는 일차적으로 동궁의 단청에 대한 작업계획을 마무리 한 것으로 보입니다. 수련님도 말씀하셨지만, 바탕색을 온통 녹색으로 한다는 내용으로 보아서는 내록이나 양녹(이는 청동에 생기는 녹을 수습한 것으로 무척 독성이 강한 화학물이지만 목재의 장기보존을 위해 사용합니다)으로 바탕을 칠하고 그 위에 문양을 넣는 모양입니다.


  여기에서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를 제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은 백제의 문양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의 문양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 문양이 불상이건, 기와이건 또는 금속공예나 벽돌이건 백제의 문양을 찾기는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 수도 지극히 적을뿐만 아니라 일단의 조형물에 나타난 문양이 과연 백제의 단청에 사용되었는가에 관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는 문양이라면 미루어 짐작하여 한 시대의 양식과 조류로써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하겠으나 불행하게도 백제의 문양은 지극히 단편적으로만 알 수 있을 따름입니다.


  지금까지 나타난 백제의 유물에서 문양을 알 수 있는 것을 살펴보면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머리받침과 발 받침의 문양과 왕관에서의 문양...그리고 무덤을 이루고 있는 전돌의 문양(이 전돌은 중국 양나라에서 사용하던것과 똑 같은 문양으로 수입품인지의 여부도 검토가 되었으나 백제에서 모사하여 제작한 제품임이 밝혀졌습니다), 또한 백제 금동대향로에 나타난 문양이나 부여 외리에서 발굴된 연꽃 귀면무늬 전돌이나 산경치 귀면무늬 전돌,  백제의 미소라고 불리우는 서산 마애삼존불상의 광배에 담긴 문양과 그리고 저도 직접 가서 조사를 해 보았지만 일본 호류지(법륭사)에 있는 백제관음상(이 관음상에 백제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백제의 작품이라고 보는데는 다소 무리가 있는 불상입니다)의 광배의 화염문과 연화문... 비조사의 기와에 나타난 문양등입니다. 특히 비조사는 불 타 없어졌지만 비조사 경내에 보관하고 있는 비조사의 기와에 나타난 문양은 백제의 문양임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문양들이었습니다. 이런 문양에서 고구려나 신라의 문양과 비교를 하면 금방 알 수 있는것이 연꽃문양의 연잎이 6옆이 아닌 8옆으로 통일이 되어 사용되었다는 내용등 백제가 고구려나 신라와는 다른 문양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양들이 과연 백제시대의 건축물에 사용이 되었는지는 수련님의 말씀처럼 1500여년을 훌쩍 뛰어넘는 타임머신을 이용하기 전에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양은 당 시대의 보편적인 사용이 전제이기에 당시에 사용되었던 문양이라고 억지로 꿰맞추어 사용할수밖에 없습니다. 문양이야 그렇다치고 그럼 바탕색은 무엇으로 해야할지가 문제가 됩니다. 수련님의 글 내용으로 봐서는 말씀드린대로 내록과 양녹을 사용하는것 같은데 이런 바탕색 사용은 상당한 문젯점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단청 비용이 한 두푼도 아니고 몇 십억이 소요되는데 국적도 없는 단청이 된다면 이는 웃음거리 그 자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고삼국의 회화나 건축물은 고구려 고분벽화를 보면서 연구가 가능합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도교적 영향으로 사람이 죽어서도 이승에서의 영생불멸을 한다고 믿었기에 벽화의 구성이 사람이 살아있던 당시와 똑같이 꾸며져 있습니다. 집의 형태를 그대로 옮겼음은 물론이고 부엌과 푸주간등...그리고 수레와 사냥모습등등 생전에 망자가 했던 내용들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으며 인물조차도 생전 모습 그대로 정좌한 모습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일부 고구려 고분에는 입구가 건축물의 기둥 형태로 제작되기도 했으며 일부 고분에는 차마 제작을 할 형편이 아니었을 경우에는 그림으로 기둥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이런 고구려 고분 벽화는 회화뿐만 아니라 건축사적 입장에서도 상당히 중요하며 그 형태등을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것은 그 당시의 단청 모습은 단지 문양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건축물과 같이 요란한 단청은 없으며 황색, 또는 회색 바탕에 당초문등의 문양으로 단청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단청의 색상은 돌로 만들어진 기둥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 석회를 발랐기에 색상 표현을 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는 어불성설입니다. 고구려인들은 피부색까지도 표현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특히 사신도에서 보면 세부 색감 표현을 위해 상당히 노력을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망자에 대한 예우는 오히려 살아 있을때 보다 더욱 극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단지 이승을 떠났을 뿐이고 저승에서 또 다시 영생을 보낸다고 생각했으니 말입니다.


  요즘 고궁 건축물이나 절간에 칠해지는 단청은 언제부터 시작이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다만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알 수 있듯이 상당히 오래전부터 단청작업이 있었던것만은 사실입니다. 단청에 대해서는 중국의 송나라때 집필된 "영조법식"이라는 책에 건축물의 구조와 더불어 어떤 그림이 들어가야 하는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알 수 있는 단청이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지금처럼 요란한 채색이 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하나의 규범으로 "영조법식"이 만들어 졌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조법식은 우리 나라의 경우 고려시대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려시대 이전의 상황을 어떻게 짐작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해답은 불행하게도 No입니다.  그리고 바탕색으로 사용되는 양녹이나 내록도 언제부터 사용되어졌는지 명확하게 알 방법이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나라에서는 단청에 대한 연구가 매우 미진합니다. 연구라고 해보았자 실은 최근의 몇 몇 연구가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는 회화는 하나의 기술로서 예술로 인정을 하고 있음에도 단청이라는 작업은 단순한 기능으로서 기능인의 채색작업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단청에 대해서도 소득수준의 향상과 더불어 하나의 예술분야로서 인식이 되기 시작했으며 점차 단청 연구 인구가 늘어갈 것으로 판단이되지만 단청이란 기껏해야 200년 정도가 수명인지라 특별한 보존대책이 강구되지 않은 건축물에서의 단청을 볼 수 있는 경우란 거의 없습니다.  한마디로 단청의 변천과정이나 문양등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청에 사용되는 문양도 어떤 통일된 문양이 없이 전국 각지에서 단청 작업자의 개인적 사고에 의하여 멋대로 행해져서 단청을 연구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고단한 작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제에 백제 역사단지 재현 건축물에 송대의 단청 양식도 아닌 그 후대의 단청양식으로 녹색 투성이의 단청을 한다면 과연 그 건물이 제대로 백제의 단청을 재현한 건축물로서 빛을 발할 수 있을까요? 물론, 당시에 내록이 안쓰였다고는 확실하게 말씀드리기 곤란하지만 한편으로는 당대에 내록이 쓰였다는 확답도 없기에 대충 그러려니 하면서 현재의 단청 바탕을 기본 바탕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북한은 평양의 동명왕릉을 정비하면서 왕릉앞에 대규모의 사당 건축을 하고 그 건축물(시멘트 건축물입니다만)에 고구려 고분 벽화를 참고로 하는 단청 작업을 하였는데, 이 작업도 북한에서는 상당히 고민을 많이 한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현대 단청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단청 형태를 보이고 있으나 이마저도 맞는지 틀리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이렇게 옛 단청이라고 복원한 경우가 있습니다. 부여의 정림사지에 세워진 기념관에 백제의 단청이라고 하여 단청이 되어 있지만 이 단청으로 인하여 상당한 논란이 일었습니다.  과연 아무도 가보지 않은 백제시대의 단청을 어떻게 천연덕스럽게 백제 단청의 재현이라고 했느냐는 문제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단청에 종사하시는 분들의 입장에서는 요즘의 단청이 눈에 익어 새롭게 재현한 단청에는 거부감이 생길수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중요한것은 고증에 입각한 단청이라 할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백제 단청에 수련님 말씀처럼 내록이나 양녹으로 푸르딩딩하게 바탕색이 칠해진다면 정말 가관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곳에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대규모의 건축물인데 건축물이 온통 푸르딩딩 하다면 과연 단청이 제 맛이 날까가 걱정입니다.  아마도 문양 작업이 선행되어 그나마 극히 일부만 남아있는 백제의 유물로 문양은 대강 만들어 졌을것으로 판단이 되는데 이렇게 어렵게 만든 문양을 엉뚱한 바탕색으로 망친다면 안타까운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뿐만아니라 백제역사재현단지에의 단청을 보고 각각의 기능만을 고집하는 단청인들이 어떤 말들을 할것인지는 불을보듯 뻔하다고하겠습니다. 한편으로는 백제의 문양도 백제 유물을 통해 나타난 문양을 그대로 사용해야지 현대적으로 재해석을 한다거나 또는 임의로 변경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금제 관식의 화염문 속에는 꽃이 들어있는데 이 꽃을 현대적 개념의 단청처럼 연꽃이나 연등초의 형태로 변형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변형은 백제의 단청 재현이 아니라 현대적 해석에 의한 현대단청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수련님이 밤잠을 못이루시겠다는 이야기에 충분히 공감을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백제 문양부터 재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상의 광배나 기타 백제의 유적에 나타난 모든 문양을 종합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백제 금제 관식에 나타난 화염문 속에 들어있는 꽃봉오리도 단순하게 연꽃으로 넘어가서는 안될일입니다. 특히나 비조사에 있는 백제 와당은 상당한 문양 자료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기와는 건축물과는 땔래야 땔 수 없는 중요한 것이기에 백제 와당의 문양은 상당히 소중한 자료로 받아들여야 할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바탕색에 관한 문제로 백제 당시의 단청을 내록 일색으로 푸르딩딩하게 한다는 것은 후대 단청작업자들의 어리석은 발상이라는 것입니다. 백제의 색감은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 없는 지경이지만 동 시대의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나타나는 색채는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동 시대에 특별히 다른 채색안료가 있었다면 몰라도 고구려나 백제나 동일한 채색재료를 사용했다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일부에서는 무덤과 집은 다르다고 하여 서로간의 색상의 차이를 논할수도 있으나 분명히 인식해야 할것은 고구려 고분의 묘사는 고구려인의 실생활을 그대로 묘사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무덤이기에 그렇다고 운운하는 논리는 맞지 않는것입니다. 이러한 논리의 전개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제작 사유에 대한 명확한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기에 발생되는 오류라고 할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내용은 실은 상당한 전문적인 내용으로 일부 읽으시는 분들께서는 이해가 어려울수도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수련님의 짧은 단청에 관한 글을 보면서 고민하시는 내용이 제가 평시에 갖고 있는 생각이 필요할것 같아 말씀을 드리는바이며, 백제의 문화를 재현한다는 것은 최대한 그 당시의 모습과 근접해야 한다는 명제임을 생각할 때 관련되는 제반 자료의 종합적인 검토가 선행이 되어 충분한 논의 끝에 결정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 것입니다. 시행청에서도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공기에 쫒겨 급하게 진행할것이 아니라 충분한 검토를 거쳐 시행토록 하여 막대한 예산의 낭비는 물론이고 잘못 시공됨에 따른 갑론을박도 충분한 자료나 관련근거의 제시로 마무리를 해야 할것입니다. 백제에 관한 사료나 근거가 없다하여 대충 한다는것은 오히려 백제의 예술을 왜곡시키는 사례임을 관련자들은 명확하게 인식해야 할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작업은 단청업자의 요구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한다거나 섣부른 결론으로 시행을 하게 되면 엄청난 부작용이 뒤따른다는점을 반드시 명심을 해야 할거입니다. 특히나 이러한 작업에 관한 사항들은 역사에 남는 일로서 관련자는 모두 우리의 역사를 되새긴다는 명확한 사명감을 가져야 할것입니다. 그런 사명감이 결여되어 섣부른 결론에 이르러 전혀 엉뚱한 단청이 만들어 진다면 관련자들은 그 오명을 후대에 남길 수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최대한 백제의 단청에 근접한 작업을 할 수 있어야 할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단청 작업을 조속히 마무리 해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점입니다. 단청의 주 목적은 건축물의 장엄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목재의 보호라는 이유가 가장 우선하기에 몇 년 늦어졌다해서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것은 가장 사실에 입각한 고증작업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자료가 부족하면 몇 년이 걸리더라도 문양부터 차근차근 짚어가면서 제대로 된 단청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백제역사재현단지의 건축물부터 이론이 많으나 일단은 일본에 전래된 백제 양식을 역으로 되살려왔기에 별다른 시비 사항이 없다고 보겠으나 백제 단청은 일본에 있는 동사(東寺)를 비롯한 옛 백제계 양식의 속에 있는 단청들도 참고를 해야만 할것입니다.  제가 직접 가본 동사의 5중탑 내부에는 어느 시대인지는 모르지만 단청이 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에 대한 사진 촬영도 했었기에 앞으로 나오는 백제역사재현단지의 단청과 비교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백제 재현이 현대 단청과 짬뽕이 되어 나타난다면 구태어 백제의 단청이랍시고 비싼 예산을 들여서 단청 작업을 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그냥 현대식 단청으로 작업을 하면 될 일이지...백제의 단청이랍시고 시행한 작업이 전혀 엉뚱한 시대불명이요 국적불명의 단청이 되어버린다면 구태어 백제 단청을 찾는 작업을 할 필요가 없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렵게 많은 예산을 들여 시행하는 백제역사재현 사업이 잘 마무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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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미술은 부처가 35세에 성도한 후 최초로 건축한 불찰(불교사찰)인 기원정사나 죽림정사의 성립과 동시에 발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부처가 생존해 있던 당시에 불상이 제작되었다는 전설도 있지만 어디 까지나 그것은 시원적인 또는 전설적인것에 불과하다고 할수 있습니다. 따라서 불교도들에 의해 참다운 조형활동이 시작된 것은 부처가 열반에 든 이후였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 견해일 것입니다. 그것은 부처가 열반에 든 직후에 세워진 8탑의 건립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처가 쿠시나가라에서 80세로 연반하자 당시 독실하게 불교를 믿던 8국의 왕들이 서로 사리를 가져가겠다는 사리분쟁이 일어났는데 도로나 바라문의 현명한 중재로 여덟나라에 공평하게 나누어 동시에 탑을 세우게 한것이 근본 8탑이 되었습니다. 탑은 불교건축에서는 가장 중요하고 필요불가결한 것이며 불교에만 있는 건축형식으로서 불탑에 대한 숭배사상은 시대가 지날수록 더욱 성황을 이루어 수많은 탑들이 조성되었습니다. 인도의 아쇼카왕이 8만4천탑을 건립했다는 전설은 이러한 상황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탑은 절의 중심이가 불교도의 주 예배대상이고 불교미술의 주류였던 것입니다.

   이렇듯 탑이 불교신앙의 중심이 되었던 시대에는 아직 불상이 나타나지 않은 시기였다고 보는것이 정설입니다. 그후 기원후 1세기경이 되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붓다의 모습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본생도나 불전도 등에 붓다가 표현되기 시작하였으며 불상만 단독으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변화가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체로 기원후 1세기 경 불교 자체의 교리적인 화와 외래의 영향등으로 불상이 제작되었다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불상의 발상지는 대개 두곳이 거론되고 있는데 하나는 인도 갠지스강의 중북부에 위치한 마투라 지방이고 또다른 하나는 인도인도서북부 아프카니스탄쪽이 있는 간다라 지방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마투라 지방은 인도의 상업과 정치의 중심지로서 전통이 강한 곳이었으므로 고대신상조각의 전통이 불교교리의 변화에 따라 발상되어 불상으로 나타났다고 보여지며 간다라 지방은  중근동 혹은 중앙아시아와 인도를 연결하는 관문이였기 때문에 외래적인 요소가 강하게 작용하였고 기원후 1세기를 전후해서는 헬레니즘문화의 영향을 받아 간다라지방의 불상이 제작되어지기 시작했다고 판단되어 집니다.

   마투라. 간다라 이 두 계통의 불상 발생에 대해서는 논의가 분분하지만 불상제작의 엄격한 규제가 풀리게 된 것은 불교교리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는것이 일반적입니다. 당시에는 간다라 지방이건 마투라 지방이건 유부계통의 불교가 지배적이였지만 신생 대중부 계통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던 때 였습니다. 대중부는 불교의 대중화운동을 가장 중요시했던 대승불교의 전신으로 대중을 제도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은 부처님의 형상을 만들어 그 위대성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시청각적인 교화의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불상은 삽시간에 예배의 주된 대상으로 되면서 사원의 중심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절의 중심이 탑에서 불상으로 바뀌게 되자 불교미술의 주역도 불상이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새로운 불교미술 시대가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가 바로 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시기로 佛像時代라고 하고 불상이 없고 탑만 있었던 기원전 시기를 無佛像 時代라고 한답니다. 불상시대를 불교식으로는 像法時代라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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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18 2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누아 2004-03-19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상이 나타나기 전에 그림에서는 부처님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 불경스럽게 느껴졌던지 보리수나 부처님의 발(가섭에게 보여주셨던)을 부처님 자리에 그렸다고 하더군요. 지금도 어떤 절에는 녹야원에서 부처님이 다섯 비구에게 설법하시는 장면에서 부처님 자리에 법륜이 그려져 있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수련 2004-03-19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있게 읽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부처님의 모습을 실재로 그리는 것이 불경스러웠다는 것 보다는 반야심경에 보면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것이 공이라는 뜻이죠. 일시무일시 석삼극 무진본...이런 말도 있죠~~ 초기 무불상 시대는 공사상 때문에 불상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부처님은 그림으로 나타내기는 너무 신성한 존재였던것이지요(그렇게 보면 실재 모습을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웠다는 것과도 상통하겠군요) 하지만 불상의 출현은 분명 주변 여러나라와의 문화교류로 인한 영향때문이었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조선인 2004-10-21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전 불화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직 말씀이 없으시네요. 언제쯤 다시 이어주실 지.

수련 2004-10-21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이 게으름을 알아차리셨군요.
불화는 차츰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요즈음 여러가지 일이 복잡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죄송합니다.

조선인 2004-10-21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죄송하다뇨.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그저 은근히 기다린다는 정도의 뜻이었습니다. 저같은 문외한이 보기엔 기존 책들이 전문용어가 많아서요. 미술용어도 그렇고, 불교용어도 그렇고. 그에 비해 님의 글이 술술 읽혀서. 혹시 책을 추천해주셔도 좋구요. *^^*
 

불교는 다 알아시피 인간 스스로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는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엄격히 말하면 미술 같은 것은 전혀 필요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불교가 일반 민중의 구제를 가장 큰 사명으로 삼는 이상  그들에게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불교의 진리를 이해시켜야 하는 도구가 필요한 것입니다. 일반대중은 처음부터 불교의 심원한 진리를 이해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그들을 쉽게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신앙의 대상인 부처님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이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탑, 불상, 탱화 등이 조성되고 그것들을 신격화 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 불교미술의 중심이 된 것입니다. 불교미술에는 건축(목조건축 탑), 조각, 공예(종, 목어, 운판, 공양구, 향로,  등), 회화(탱화-불화, 단청) 등 종류가 다양하고  그 표현 기법은  수 없이 많지만 그 중 불화는 어떤 특별한 법칙이 정해져 있는 도상학이라는 규정같은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불화를 그리는데 자신이 원하는 곳에 존상을 배치하고 싶다고 해서 자기 나름대로 아무곳에나 존상(불, 보살 , 천왕, 신중 등)을 배치했다고 가정합시다. 이것은 도상학에 어긋나는 그림이 되어 불화라고 불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불화(탱화)는 엄격히 도상학에 근거해서 작업을 하는 미술로 표현기법은 다양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변상도라고 불리우는 그림은 부처님의 생애나 불교의 진리등 (불교경전속의 내용)을 알기쉽게 그림으로 풀이해 놓은 모든 그림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상도를 통틀어 불화라고 하는데, 다시말하면 이러한 불화는 화사가 싫든 좋든 도상학에 근거해서 제작해야만 숭배의 대상으로서 그림의 가치가 있는 것이랍니다.

우리가 사찰에 가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것이 석탑일 것입니다. 탑은 돌아가신 부처님의 뼈(사리)를 봉안하는 일종의 부처님의 무덤으로 보시면 됩니다. 부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무덤은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부처님의 어던 흔적이라도 대해야만 부처님이 말한 그 진리의 말씀도 실감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뼈를 모신다는 것은 후대의 불교도들에게는 신앙심의 결정체를 모시는 것이 되었으며 불교의 구체적인 진리에 한층 더 다가서는 것이라 할 수 있답니다. 이러한 이유로 탑은 불교의 대표적인 건축미술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불교미술품 중 불상은 언제 부터 만들어 지기 시작 했을까요?(다음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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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적 의미의 단청이란 붉은 색과 푸른색의 조화를 뜻하는 말로  최상의 축하라는 의미로도 쓰입

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말하는 단청은 목조건축물에 문양을 그리고 채색을 하는것에 국한하여 쓰입니다. 우리나라의 단청의 역사는 그 유구로 보아 고구려 시대까지 올라갑니다.

현존하는 건축물 유물은 없지만 고분벽화의 그림에 목조건축물 부재에 단청이 되어 있고 최근에

는 고분속 실재 목재부재에 단청이 되어 있는 흔적도 발견되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목조건축물에 본격적으로 일정한 체계를 지닌 단청

을 했던 것으로 판단되어 집니다.

현존하는 목조 건축물 단청의 유물중 가장 오래된 것은 남한의 봉정사 극락전 ,수덕사 대웅전, 부

석사 무량전 북한의 성불사 응진전, 박천심원사 보광전, 연탄 심원사 보광전 등 고려시대 건축

물에 그려단청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단청도 딱히 고려시대의 단청으로 속단할 수 없습니다.

이는 단청안료의 수명한계로 인하여 박락되고 퇴색되어 후에 보수단청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격적인 단청의 문양을 알아볼 수 있는 시기는 조선 중기 이후로 보면 될것 같습니다.

단청의 색은 오방정색과 오방간색을 이용하고 있으며 윗쪽은 녹색위주 아랫쪽은 붉은색 위주로

상록하단의 원칙을 지켜 채색하고 있습니다. 이는 색채에 자연의 채광을 과학적으로 적용한 예에

해당되는데, 어두운 곳에서는 푸른색이 채도가 높아보이며 밝은 곳에서는 붉은 색이 채도가 높아

보이는원리를 적용한 것입니다. 따라서 지붕이 햇볕을 가리고 있는 창방이상은 주로 청색위주의

채색을햇볕을 강하게 받는 기둥쪽은 붉은색 위주의 채색을 하게 된답니다.

단청의 문양은 종교적인것, 주술적인것, 교화적인 것 등 수 없이 많으며 이들은 강한 상징성을 내

포하고 있어서 우리는 문양을 통하여  우리민족의 정서의식을 알 수 있고 신앙의 추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단청에 쓰이는 안료로는 처음에는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자연안료를 사용했지만 현재는 대

부분 공업용 안료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문화재 청에서는 시아닌 그린 등을 이용. 재조하여 사

용하는 안료도 있지만 대부분은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나라는 3500여개의 사찰과 유교건축물, 관아 건축물 등에 단청을 하고 있는데 일년에 드는

예산 만도 백억은 족히 넘습니다.

이는 일반건축물과 문화재 건축물을 합한 숫자이며 앞으로는 더욱 늘어날 전망입니다.

우리가  오래된 사찰에 가서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는 것이 단청일 것 입니다.

목조건축물의 꽃이라고 불리우는 단청은 우리민족의 정서를 듬뿍 담고 있는 우리의 전통예술의

일부인 전통미술로서 단청문양은 세계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은 수준높은 디자인의 보고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단청에 대하여 써보았는데....자세하고 깊이있는 내용은 차츰 써 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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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가분아저씨 2004-03-17 0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단청의 안료를 전부 수입에 의존해 쓰고 있다니..안타깝습니다. 시대적 추세라면야 할 말 없겠지만 보존성이나 질감 표현이나 그밖에 문제점이 더러 있을텐데 어쩔 수 없는 모양이지요?
오방정색과 오방간색은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채광을 적용한 상록하단의 원칙은 처음 알았네요.
꾸벅!
바쁘시더라도 한 수 배우겠습니다.

수련 2004-03-17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료개발이 시급한 문제입니다.
고려시대 불화를 그렸던 당채나 진채를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시대는 조선시대보다 앞선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물감의 질은 무척 좋았습니다.
물론 당나라에서 수입한 물감에 의존했을 가능성도 높지만 우리화사들이 만들어 썼을 물감들도 적잖게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현재의 우리는 그시대를 따라갈수 없을까? 아니면 노력을 하지 않는것일까요? 저부터 반성해 봅니다.

조선인 2004-04-08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라이언 베리 선생님도 안료에 대한 아쉬움을 많이 말씀하시더군요. 공업용 안료는 나무에 슴벅이는 때깔이 다르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