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으로 본 한국역사 - 젊은이들을 위한 새 편집
함석헌 지음 / 한길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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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은 1901년 평안북도 용천(龍川)서 2남 4녀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의 함석헌은 겁 많고 부끄럼을 타는 내성적인 아이였다고 전해진다. 1916년 함석헌은 기독교계 덕일 소학교를 거쳐 양시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관립 평양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재학 중 육촌형인 함석은의 영향으로 3.1일 운동(1919)에 참가한다. 3.1일 운동은 젊은 함석헌의 삶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데, 종교인으로서의 사회 참여 의식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함석헌은 함석은의 지도하에 3.1운동에 직접 관여하게 되는데 손수 태극기를 찍어내고 독립선언서의 사본을 만들어 동포들에게 나누어 주며 시위를 독려하였다. 만일 3.1일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그저 "의사가 됐던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무슨 공부를 하여 일본 사람 밑에 있어 그 심부름을 하는 한편 나보다 못한 동포를 짜먹는 구차한 지식 노예가 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말한바 있다.

이후 2년간 학업을 중단 사촌형인 함석규의 권유로 한국 민족주의 운동의 지성소로 알려진 오산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1921)한다. 오산학교에서 함석헌은 그의 장래에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남강 이승훈다석 유영모를 만나게 된다. 함석헌은 남강에게서 한국 독립의 중요성을 배우게 되고, 다석에게서는 노장공맹(老莊孔孟)을 비롯한 다양한 고전철학을 배우게 된다. 이후 회고하기를 "다석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였다.

1923년 오산(五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8년 일본 도쿄[東京]고등사범학교에 재학 중 오산학교 동창생인 김교신의 권유로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를 알게 되어 무교회 주의에 영향을 받는데 성서의 진리를 무조건적이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탐구하려는 우치무라의 노력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함석헌은 우치무라에게 세례를 받는 동시에 그의 퀘이커 친구인 니토베 이나조(新戶部稻造)와 함께 퀘이커 모임에도 출석하게 된다. 이때 문하생 6명이 '조선성서연구회'를 결성 (김교신,함석헌,송두용,정상훈,양인성,류석동) 성서를 공부하며 종교적 신앙과 민족애를 접합시키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참 신앙인은 한 쪽을 버리는 대신 그 둘을 함께, 그리고 동시에 끌어안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1928년 동경사범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모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 역사와 지리학을 가르쳤다. 이듬해에 귀국한 오랜 친구인 김교신과 함께 《성서조선》(聖書朝鮮)을 편집하고 글을 실었으며 오산에서 시작한 무교회 모임에 열성적으로 참여한다. 함석헌은 특히 1933년 2월부터 1935년 12월까지 이 잡지에 장문의 글을 연재하는데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이 글을 통하여 함석헌은 식민사관의 왜곡된 논리에서 벗어나 조선사의 진정한 모습에 다가서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역사를 연구하면서 발견한 것은 영광된 민족사가 아니라 굴욕과 시련으로 점철된 참담한 역사였다. 이 발견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다름 아닌 함석헌 자신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관이 일제의 식민사관이 주장하는 대로 패배주의나 숙명론을 준비하는 것은 아니다. 함석헌은 조선의 역사가 '고난의 여왕' 또는 '세계사의 하수구'라는 다만 굴욕의 처소일 뿐 아니라 세계의 불의를 정화시킬 희망의 거처라고 본 것이다. 예수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 고난을 당하였기에 비로소 인류의 해방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런 뜻에서 성경 속의 예수가 '고난의 아들'로서 인류해방자의 몫을 떠맡았다면, 조선의 역사는 그것을 짐으로써 우리 자신을 건지고 또 억압에 신음하는 모든 약자와 씨알을 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의 역사 해석은 핍박과 억압, 어둠과 그늘 속에서 묵묵히 역사를 만들어온 약자와 패배자들의 삶에 정당한 가치와 의미를 되돌려 주는 작업이었다.

1937년 만주를 침략한 일제는 이후 '충성스런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황국서사' 암송이나 신사참배 또는 징용이나 징병, 위안부 등 일본 제국주의에 팽창을 위한 조선 민중의 희생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위기는 함석헌을 비켜가지 않았는데 학생들에게 조선어와 조선역사 대신 일본어로 된 일본 역사를 가르쳐야할 처지에 놓인다. 1938년 봄, 함석헌은 교사자리를 사임 영원히 오산학교 교정을 떠난다.

1940년 평양 근교의 송산 농사학원(松山農士學院)을 인수, 원장에 취임 학생들에게 성경, 역사, 조선어를 가르치고 오후에는 모두 농사를 지었으나, 곧 계우회 사건(1940.8)으로 1년간의 옥고를 치른 뒤 다시 《성서조선》(聖書朝鮮) 사건(1942.5)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미결수로 1년간 복역하였다. 2년 동안의 감방 생활을 견디며 함석헌은 러스킨의 예술관과 공리적인 사회 경제관에 깊은 공감을 느꼈으며, 톨스토이의 저서를 읽고 그의 인도주의적 신앙과 거기에서 바탕을 둔 무정부주의적 사상에 감동을 받았다. 또한 반야경(般若經), 법화경(法華經), 무량수경(無量壽經), 금강경(金剛經) 등 다양한 불경을 섭렵하였다. 그는 감옥을 '인생의 대학'으로 여겼다.

이후 8.15광복 때까지 함석헌은 은둔생활을 하였는데 그 기간동안 함석헌은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독서에 열중하였다. 그는 노장(老莊)을 읽는 동안 종교(특히 무교회 운동)의 역할과 불의한 정치권력(특히 일본 제국주의)과의 관계를 천착하기 시작하였는데, 점차 자기 중심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던 무교회 운동에 대해 비판적인 안목을 보이기 시작했다. 우치무라의 사상적 그늘에서 탈피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우치무라의 관점과 세 가지 면에서 다르다는 것을 자각하였는데 우선 그는 무교회 모임의 회원들이 '세속인'과 일반 정치 문제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에게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웃의 친구가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무교회 운동은 회원들 간에 서로 수평적이고 동등한 인간관계를 결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실세계나 이웃과의 관계도 소홀했다. 두 번째로, 함석헌의 예수관과 속죄론에 대한 이해가 우치무라의 시각과는 달랐다. 속죄란,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하느님과 죄에 빠진 인류 사이에서 중개자가 된다는 것이다. 우치무라 또한 이러한 대속관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함석헌은 이러한 대속관에 동의하지 않았고, 자유인으로서 사람들이 각자의 죄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함석헌에게 예수의 속죄는 주체적 개인과 하느님 사이의 하나됨이었고, 이 하나됨은 각자가 예수의 일치됨을 체험할 때 일어나는 것이었다. 세 번째로, 함석헌은 식민지 민중이 된 조선 민족과 식민 지배 세력으로서 일본인이 처한 역사적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했다. 우치무라는 일본의 한반도 식민화 정책에 반대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관동 대지진 때 일어난 조선인 학살 사건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침묵하였다.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함석헌은 그 자신의 종교, 조선인의 종교, 조선인을 위한 종교를 발견하고자 힘을 기울였다.

함석헌은 일제에 의해 모두 네 번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는데 이 시기의 삶에 대해 그는 "나의 유일한 범죄는 내가 한국인이었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식민지 백성의 근본적인 곤경을 이처럼 절실하게 표현한 말도 흔치 않을 것이다.

광복(1945. 8)이 되자, 평북 자치위원회 문교부장이 되었으나 같은 해 11월에 발생한 신의주학생의거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북한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다. 비록 학생 봉기의 직접적인 주동자나 배후 조종자는 아니었지만, 공산당원이 아닌데다 기독교인이었던 그가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불편한 존재로 여겨졌음은 짐작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1947년 단신으로 월남, 1948년에는 각 학교·단체에서 성경강론을 하였다. 이 종교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남한의 총체적 부패와 혼란에 실망한 한편 사회 문제에 무관심하거나 냉담한 보수적 교회에 대해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대부분을 이루었다. 강의를 통해 함석헌은 기독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했고, 이러한 생각을 글로 발표하기도 하였으며, 열린 마음으로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도 받아들였다. 함석헌이 말하는 종교는 제도로서의 종교가 아니라 삶으로 체현되는 종교였다. 따라서 그는 자연스레 조직과 외양을 불리고 가꾸는 데 치중하는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갔다. 이때의 공개강의를 통해 안병무, 김용준, 김동길 등의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성경 공부 모임은 한국전쟁(1950-1953)중에도 계속 되었다.

1953년 《사상계(思想界)》가 창간된 이후 함석헌은 주로 《사상계》를 통하여 한국 교회와 사회 비판적인 글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예컨데 그는 "종교로써 구원을 얻는 것은 신자가 아니요 그 전체요, 종교로써 망하는 것도 교회가 아니요. 그 전체다." 라며 한국교회와 이승만 정권의 어리석음을 가차없이 비판하고 질책했다. 사회가 처한 어려움이나 문제점에는 냉담하고 교회의 일과 이익에만 관심을 쏟는 '복음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한국 교회에 대해 그가 강한 비판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마침내 1956년 7월 4일 함석헌은 시 <대선언>을 통하여 한국 교회에 대해 기꺼이 이단자가 될 것을 선언했다.

"내 기독교에 이단자가 되리라. 참에야 어디 딴 끝이 있으리요. ....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더 위대하다. ...."

이후 기형화되고 교조적으로 변질된 교회에 대한 비판은 1953년 풍자적인 비평의 글 〈한국 기독교에 할말이 있다〉라는 글로 신부 윤형중(尹亨重)과 신랄한 지상논쟁을 펴기도 해 큰 화제를 일으켰다. 함석헌은 이 글을 통해 한국 교회의 문제점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하면서 기독교가 '마술적'인 면에서 벗어나 사회의 도덕과 정의를 위해서 앞장서야 한다고 역설했으며, 기독교인들에게도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신앙인이 될 것을 권고했다.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로 자유당 독재정권을 통렬히 비판하여 투옥되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라고 말하는 글을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용납할 수 없었다. 함석헌은 57세의 나이로 해방된 나라의 감방에 다시 투옥되어 고문을 견뎌야 했다.

함석헌은 현실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으면서 한편으로 종교적 사유를 정련하는 데도 게으르지 않았다. 함석헌에게는 이제 기독교만이 유일한 참 신앙이 아니요, 성경만이 진리를 대표하는 유일한 경전이 아니었다. 이러한 변모는 1961년에 제목부터 개정한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머리말에서 함석헌은 이렇게 밝혔다. "고난의 역사라는 근본 생각이 변할 리가 없지만 내게는 이제는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도 아니요, 성경만 완전한 진리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결국 따지고 들어가면 하나요, 역사 철학은 성경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 모든 교파적인 것, 독단적인 것을 없애 버리고 책 이름도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고 고쳤다."

1960년 이후 함석헌은 퀘이커교 모임에 참석하여 종교활동을 하였다. 기존의 교회 조직이나 제도에 회의적이던 그가 300년이 넘는 또 다른 종교 조직인 퀘이커교의 신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우선 함석헌은 퀘이커들의 관심이 죽은 후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곳 세상의 평화와 사회 정의를 이루는 일에 모아지고 있는 데 공감하였으며, 절대계의 진리와 상대계의 진리를 함께 추구하려는 퀘이커들의 열정에 동의하였다. 성속의 구별이 없이 "모든 삶은 신성하다"는 신앙관과 '속 생명'(Inward Life)과 '속의 빛'(Inner Light)이라는 개념도 함석헌이 주장하는 '속알 밝힘'(낱낱의 개인이 인격을 이루고 혼을 기른다.)이라는 말과도 동의를 이룬다. 특히 함석헌은 퀘이커 예배 형식인 침묵과 불교의 참선을, 그리고 노자가 강조한 명상을 모두 본질에서 비슷한 종교적 행위로 보았다. '궁극적으로 모든 종교는 하나'라는 종교적 보편주의는 함석헌에게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1961년 5·16쿠데타 직후 7월 《사상계》에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을 기고 집권군부세력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였다. 사실 1960년 이전부터 함석헌은 한국 사회 현실에 대해 줄기차게 발언해 왔고 그 때문에 권력의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그런 의미로의 행동가로 나선 것은 1961년 5.16쿠데타 이후였다. 1962∼1963년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각지를 시찰(이때 10개월동안 펜들힐에서 수학하였다.)하고 돌아온 후, 귀국하여 안병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의 절박한 심정을 엿볼 수 있다. "일은 드디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 나는 이제 결심했습니다. 극한 투쟁을 하기로, 비폭력의 국민 운동을 일으켜 민정을 수립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짐에 따라 5.16쿠데타와 박정희 정권의 부당함을 정면에서 지적하는 대중 강연회를 잇달아 열었다. 동시에 함석헌은 신문과 잡지등에 부지런히 글을 썼는데 대표적으로 《사상계》 1963년 8월호에 기고한 <3천만 앞에 울음으로 부르짖는다>등이 있다. 이후 언론수호대책위원회·3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민주수호국민협의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1970년 《씨알의 소리》를 발간하여 한국의 민주화와 언론의 자유를 증진하는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이후 《씨알의 소리》는 정권의 탄압으로 폐간과 복간을 되풀이 한다.) 윤보선, 김대중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에 동참하여 공동의장으로 활동하며, 시국 선언을 발표하여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는데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비폭력 저항, 둘째 시민 불복종 운동, 셋째 민주 세력간의 총 단결을 역설하였다. 뒤이어 1976년의 3. 1사건을 통해 유신 헌법 철폐, 박정희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 불구속 기소되고, 1979년의 YMCA 위장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에 회부되는 등 많은 탄압을 받았다. 1970년대 함석헌의 행동이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정치적 투쟁에만 집중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도 함석헌의 눈과 귀는 열려 있었다. 1970년 전태일의 분신과 1977년 8월 '방림방직 대책위' 창립, 같은 해 10월 재야 인사들과 함께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한 협의회'를 만들며 사회적 약자를 위해 투쟁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즉사함으로써 유신체제는 허망하게 무너져 내린다. 동시에 그것은 더욱 포악한 군사 독재의 시작이었다. 게엄령의 해제를 요구하고 대통령 간접선거를 반대하는 평화시위에 참여한 함석헌 등 120여 명을 투옥하여 고문을 가한 보안사의 우두머리가 바로 전두환이었다. 전두환은 이어 12.12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하고 권력을 찬탈한다. 1980년 7월 집행유예로 풀려난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가 강제폐간 되어 문필생활을 중단하였으며, 잔인 무도한 전두환 정권에 맞서는 민주화 세력도 1970년대의 민주화 인사들보다 젊고 더욱 조직적인 세대가 사회의 전면에 나서고 있었다. 그러나 급진적인 주장들이 힘을 얻어 감에 함석헌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힘을 잃어 가는 것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함석헌은 다시 한번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 예언자'의 처지가 된 셈이었다. 1984년에는 민주통일국민회의 고문을 지냈고, 1988년에는 서울평화올림픽의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노태우 정권에 협조하는 행위'로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의인은 그 시대에는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속담은 사실일 것이다. 그의 이 마지막 봉사 후 넉 달 뒤인 1989년 2월 4일 함석헌은 그의 고난에 찼던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의 영원한 외사랑이었던 나라와 민족의 고난은 오늘도 계속 되고 있다. 일평생을 '폭력에 대한 거부', '권위에 대한 저항', '그칠 줄 모르는 진리의 탐구' 등 일관된 사상과 신념을 바탕으로 교조적 종교의 개혁·항일·반독재에 앞장섰다.

p.s - 함석헌 선생 탄생 102주년 기념 예배에서 발표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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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으로 본 한국역사 - 젊은이들을 위한 새 편집
함석헌 지음 / 한길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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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은 1901년 3월 31일 평안북도에서 태어나 1989년 2월 4일 여든 여덟의 나이로 별세했다. 그의 삶은 두가지로 요약된다. 한편에서 그는 거리에서 싸우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함석헌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선을 향한 가장 치열한 싸움의 한 복판에서도 생각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던 철학자였다. 그의 철학의 진정성은 바로 이처럼 그의 철학이 언제나 비극적 현실과의 치열한 대결의 소산이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철학의 가장 심오한 결실을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감히 단언하거니와, 만약 이 책이 없었더라면, 20세기 한국에 철학은 아무 것도 없었을 것이다.


철저히 무시당해온 이 책의 가치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1932∼3년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을 1950년에 단행본으로 펴낸 것이다. 그 후 1961년 펴낸 셋째 판에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고 책이름이 바뀌었고, 1965년 펴낸 넷째 판에서 내용적으로 지금 우리가 보는 최종적인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책이 가진 비할 나위 없는 가치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참된 가치는 지금까지 철저히 무시당해왔다. 왜냐하면 이 책은 한국의 철학계에서 한 번도 철학책으로서 대접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작해야 그것은 딜레탕트 역사학자가 쓴 정체가 모호한 종교서 정도로 치부되었을 뿐, 본래적인 의미의 철학적 저작이라고 인정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 책이 진정한 철학의 고전인 까닭은 그것의 주제가 자기인식이기 때문이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물감이 아닌 개념으로 자기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남의 초상화를 자기의 자화상이라 생각했던 가련한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철학에서 우리의 자기상실을 정당화하기 위해 언제나 보편학으로서의 철학의 이념에 기대왔다. 그러나 그것은 한갓 이념일 뿐,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 속에서 보편적 진리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우리의 철학계는 외래 이론의 홍수 속에서 자기망각의 늪에 빠져 있었다. 함석헌의 가치는 그가 이런 상황에서 처음으로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소크라테스적 질문을 치열하게 던졌던 데 있다.

그런데 반성과 자기의식은 언제나 자기에 대한 회상으로 발생한다. 그런 한에서 한겨레의 자기인식은 역사의식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물음 속에서 대답되고, 이 물음은 다시 우리가 걸어온 역사를 통해서 대답될 수밖에 없다. 이 때 역사란 지나간 사실이 아니라 역사와 “지금과의 산 관련”을 의미한다. 그것이 함석헌이 말하는 뜻으로 본 역사이다.


“역사란 지금과의 산 관련”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경우 역사와 지금 사이에 어떠한 산 관련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역사를 긍정하기엔 우리의 역사가 너무도 비참한 고난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지나간 역사는 지금의 눈으로 볼 때 어떤 뜻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함석헌의 가치는 그가 우리 역사의 이런 모습을 얼버무리거나 미화하지 않고 도리어 철학이 대답하고 극복해야 할 궁극적 과제로서 제시했다는 데 있다. 우리 역사에 끝없이 널려 있는 아무런 뜻 없는 비참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에 의미가 있는가. 아니라면 그렇게 단절되고 의미 없는 역사를 살아온 우리는 또 누구란 말인가.

함석헌은 고난의 의미를 말함으로써 이 물음에 대답하려 했다. “사람은 고난을 당해서만 까닭의 실꾸리를 감게 되고, 그 실꾸리를 감아 가면 영원의 문간에 이르고 만다.” 고난은 진리에 이르는 길이다. 함석헌은 이 깨달음 속에서 우리 역사의 뜻을 찾으려 했다.

오랫동안 철학은 빛을 향한 오름길이었다. 그러나 참된 빛은 가장 깊은 어둠으로부터 도래하는 법이다.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우리 민족이 가장 깊은 어둠 속에 있었던 시대에 우리에게 비친 한줄기 새로운 빛의 씨앗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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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총 총무원장님이 세수 64세로 세상의 연을 다 하시고 떠나셨습니다.

큰스님의 열반은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불교교리로 봐서는 그다지 놀랄일도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놀랄일이 있습니다.  슬픔중에 웃을일이 있습니다.

그분은 가셨지만 그분의 마음은 영원히 산자들의 마음에서 흔들리고 있습니다.

생명을 사랑하는 살아있는 흔들림....

산자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나의 마음도  따뜻하게 흔들리는 요즈음 입니다.

지난학기 수강하였던 예쁜 학생이 교수님 보고싶었다며 달려와 얼싸안았을때보다....더욱 흔들리는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큰 스님....큰사랑 속에서 영원히 흔들리시옵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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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아 2005-09-15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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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그림자 > [퍼온글] 中國 역사서에 나오는 고구려史는 -

고구려史, 中 어떤 책에 나오나
後漢書에 기록 첫 등장
삼국지·자치통감·책부원구등 문헌 수두룩

이선민기자 smlee@chosun.com

입력 : 2004.09.23 17:38 14'

고구려와 고구려인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 중국 역사서는 정사(正史)인 ‘이십오사(二十五史)’와 개인이 쓴 ‘자치통감(資治通鑑)’ ‘책부원구(冊府元龜)’ 등이다.

중국은 한(漢)나라 때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를 쓴 이래 각 왕조별로 역사를 정리했고, ‘명사(明史)’까지 모두 25종을 보통 ‘이십오사’라고 부른다. 이 중에서 고구려에 대한 기록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범엽(范曄)이 지은 ‘후한서(後漢書)’이며, 이후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에 해당하는 중국 왕조의 역사서인 ‘삼국지(三國志)’ ‘진서(晉書)’ ‘남제서(南齊書)’ ‘양서(梁書)’ ‘진서(陳書)’ ‘위서(魏書)’ ‘북제서(北齊書)’ ‘주서(周書)’ ‘수서(隋書)’‘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등에 고구려 관련 기록이 들어 있다.

이십오사 다음으로 고구려 관련 서술이 많은 것은 북송(北宋) 때 사마광(司馬光)이 지은 ‘자치통감’이다. 상고시대인 주(周)나라 위열왕(威烈王) 23년(기원전 403년)부터 오대(五代)의 후주(後周) 말(959년)까지의 주요 사실(史實)을 300종 이상의 원사료(原史料)를 활용하여 연대순으로 정리했다.

또 역시 북송 때 왕흠약(王欽若)과 양억(楊億) 등이 황제의 명을 받아 완성한 사료집(史料集) ‘책부원구’에도 고구려 관련 기록이 보인다.

                                                                                                                                           [조선일보] 기사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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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사의 선물 ..르네브(시인;김정화) 어느날 금빛 날개 치며 천사가 찾아와 상자 하나를 건네주고 갔습니다 한번도 본적 없는 눈부시는 예쁜상자는 문도 뚜껑도 없이 형용할수 없는 빛을 내뿜고 있었습니다 알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뜻의 선물인지... 누가 내게 보내 왔는지.... 주소도 씌어 있지 않았습니다 궁금하지만 물어 볼 사람 없어 선물에게 물었지요 넌!.. 누구니?..누가 보냈니?... 그때 빛 속에서 소리가 들려 옵니다 당신의 사랑 이랍니다 내 사랑?.... 그대가 어릴적 소망 하던 사랑을 잊었나요?. 한가지 부탁이 있어요 지금처럼 그렇게 사랑 할수 있나요?. 당신의 사랑이 없으면 전 죽고 말거든요 손 끝에 시리듯 만저져 옵니다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 얼마나 순결한 사랑인지 이제야 알것 같습니다.선물의 의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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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巖 2004-12-31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련 2005-01-01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수암님두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수암님께서 직접 하신 전각 작품인가 봅니다.

근하신년~~참 좋네요~~!
그런데...목전각 인가요??

목전각을 한지에 찍으신것 같기도 한데...


水巖 2005-01-03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나무에 각한것인데 카드로 보내려고 두꺼운 모조지에 찍었답니다. 잘 안찍어져서 힘도 들었죠. 판각부분에 인쇄 잉크를 로라로 묻히고 대나무자를 칼처럼 깎어서 뒤에서 문질러서 찍은거랍니다. 한지에다 찍으면 잘 찍어지지만 배접을 해야되고 또 카드처럼 쓰기엔 좀 불편하고 해서요. 그림 매트로 쓰던 250g 모조지인가 그럴겁니다.
20여년전에 만든 카드랍니다. 우측 도장은 淸音이라고 제가 石刻한건데 사진이 잘 안나와서 보실수가 없군요.


수련 2005-01-03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네...수고 하신 흔적이 보입니다. 그런데 한지에 배접하지 않은 방법으로 잘 찍힐수 있는것이 있는데....인사동 전북지업사 등에 가보면 한지판낼을 조그맣게 만들어 파는데 그곳에 판화를 찍으면 바로 작품화 되더군요. 저도 그것을 몇번 사용해본적이 있는데....괜찮더군요. 혹시 해 보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어려운 석각작업도 하시는 군요. 석각이 어려우실때는 석고를 물에 개어 굳혀서 해보시면 힘들이지 않아도 각이 잘 되고 재밌는 경우가 있더군요. 해 보셨을 지도....

水巖 2005-01-05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석고는 힘들지 않지만 찍고 났을때 맛이 석각같지는 않죠. 매끄럽고 부드러운 맛, 아무래도 석각이 지닌 천연의 맛이 안나지 않을가요?

그래서 쉬운 석판이나 아연판을 이용한 리도그라피 대신 목판을 고집함도 나무에서 느껴지는 맛이 또 부드러우면서도 예리해서 힘들게 작업들 하죠. 지난번 인사동에 갔다가 한지 판넬을 보긴 했습니다만 워낙 그 동네에서 떠난지가 오래되서 그냥 지나쳐 갔답니다. 좋은 이야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