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암각화

1. 암각화의 분포

1970년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경남 울주군 천전리 암각화가 발견되고서부터 본격적인 암각화 조사 연구 시작. 그 이후 울주 대곡리, 고령 양전리․안화리, 안동 수곡리, 영일 인비리․칠포리, 영주 가흥동, 함안 도항리, 남원 대곡리, 여수 오림동, 영천 보성리, 경주 석장리․안심리, 고령 지산리 등 모두 16개의 암각화 유적이 발견됨.

우리 나라 암각화 유적의 분포는 한반도의 동남부지역에 편중. 특히 암각화의 주종을 이루고 있는 방패무늬 암각화의 경우 10개 유적 중 9개 유적이 경상북도에 있고 나머지 하나만 전라북도 남원에 소재. 남원 역시 고대 이전에는 영남문화권에 속하거나 영향을 많이 받은 지역. 그밖에 다른 유형의 암각화의 경우 실례가 드물기 때문에 지역 특성을 검출할 수 없음.

이러한 지역 분포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한반도에서 암각화문화가 일반화되지 않았다던가, 숨겨진 유적을 아직도 찾아내지 못한 연유 때문. 그러나 우리 나라의 암각화에 대한 연구조사활동이 초미의 단계에 있는 만큼 단정지어 말할 수 없음. 다만 방패무늬 암각화의 경우 밀집 분포된 양상과 제작 시기를 고려하면 고대국가 탄생기에 영남지방을 거점으로 발달한 특정 문화와 관련 깊을 가능성이 비쳐짐.


2. 암각화의 제작기법과 종류

우리 나라 암각화의 종류는 크게 人物 ․ 動物 ․ 器物 ․ 圖形 ․ 生活像의 다섯 가지 유형으로 구분됨. 암각화의 제작기법은 쪼아새김(pecking), 면새김(engraving), 갈아새김(grinding) 등 세 가지 기법. 유라시아 북반구에 집중된 암각화 제작기법은 일명 트라겐(X-ray)기법으로 대상의 내부를 선과 동그라미로 채우는 방식으로 쪼아새김과 면새김이 주 요소. 우리 나라 대표적인 반구대 암각화는 면새김과 선새김 기법을 주로 사용.


(1) 인물․동물무늬

인물, 동물무늬 암각화는 어로와 수렵을 주제로 사람과 사냥 동물을 사실적 기법으로 새긴 문양. 울산 대곡리가 대표적이며 천전리와 석장리 암각화에도 일부 표현됨. 쪼아새김을 기본으로 면과 선을 파고 새긴 형식. 수렵과 어로의 풍성과 번성을 기원하는 사냥미술로서 그 문화전통이 동북아 대륙의 암각무늬와 맥을 같이함.


① 인물․동물무늬 암각화의 특징

국보 제 285호 울산 반구대 대곡리 암각화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 면새김과 선새김 기법이 혼합됨. 고래․거북이․물개 등 바다짐승들(면새김 기법). 사슴․호랑이․멧돼지 등의 뭍짐승들(선새김 기법). 또한 사람들이 배를 타고 고래를 잡거나 사냥하는 모습, 제사를 지내는 모습, 울타리(동물사육) 등 약 300여 점의 그림들로 가득 채워짐.

같은 태화강 상류의 국보 제 147호 천전리 암각화는 사슴 등 주로 뭍짐승과 사람(탈 포함)을 면새김한 그림. 기하무늬(갈아새김) 형상들이 먼저 새겨진 동물상 그림들 위에 덧새긴 양상으로 원래 동물상들이 암벽 전체에 가득히 새겨져 있었던 것으로 사려됨.

대곡리 암벽에는 특히 48 마리나 되는 다종의 고래가 새겨짐. 이곳은 고래출몰지역인 울산만에서 20km내외의 거리.(내용: 10~20명 씩 가느다란 배를 타고 수많은 고래들 사이를 용감하게 누비는 모습, 분수모양의 숨을 내뿜는 고래, 머리가 망치처럼 생긴 고래, 새끼를 업은 고래, 고래에 접근하는 배, 작살 꽂는 포수, 작살 꽂힌 고래, 고래를 끌고 가는 배 등 마치 고래사냥의 교과서를 방불케 함) 대곡리 암벽그림 속에 등장하는 성기를 드러내고 춤추는 듯한 인물상- 제사를 주관하는 무당(일본에는 산으로 사냥하러 들어갈 때 산신 앞에서 벌거벗고 제사지내는 풍습이 현재까지 전래됨) 대곡리는 어로․수렵의 양면성. 천전리는 수렵 편향성이 강한 차이점. 원시시대에 식량확보라는 경제적 욕구 충족에 목적이 있었던 것만큼 지리적으로 인접한 대곡리와 천전리 인물동물상 암각화의 문화적 배경은 그들의 경제 주체가 무엇이었든 간에 狩獵 ․ 漁撈와 깊은 연관성을 시사해줌. 이들 암각화의 주인공들은 어로나 수렵의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전문집단으로 사려되며 그러한 기술을 전수하려는 목적으로 암각화를 제작하였을 가능성이 제기됨.


제작시기

이들 암각화의 제작시기는 동물상과 경제상을 들어 신석기시대로 보는 일부 견해도 있음. 그러나 배가 신석기문화 단계의 뗏목이나 통나무배가 아닌 승선 인원 20여명의 捕鯨船. 포경에 사용된 작살과 작살을 쏘는 弩의 그림에서 금속문화를 강하게 느낄 수 있음. 대곡리나 천전리 동물상 암각화는 이미 금속문화 단계에 진입한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임.


(2) 청동의기․도형상

① 석검/석촉무늬 암각화

영일 인비리는 검 두 자루와 살촉 하나를 새긴 모습. 여수 오림동 것은 내려꽂듯 새긴 검 한 자루를 향해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경배하는 사람과 그 뒤에 서서 바라보는 사람, 그 아래 무언가 찌른 듯한 琵琶形銅牟 한 자루를 새긴 형상.

석기나 청동기의 창검류가 일반적으로 고인돌의 부장품이었다는 점에서 이 그림들도 같은 문화의 계통으로 사려됨. 창과 검은 권력과 신분의 상징. 권력을 유지 안보 하려는 의미와 삶과 죽음의 세계를 연결하려는 뜻이 있다고 사려됨. 특히 함안 도항리의 경우 사후 세계의 안녕에 대한 인간의 강렬한 열망을 엿볼 수 있음.


제작시기

영일 인비리는 청동기전기 B.C. 7~6세기, 여수 오림동은 청동기중기 이후 B.C. 6~4세기, 함안 도항리는 청동기후기의 B.C. 5~4세기 고인돌이 축조될 때 새겨진 것으로 추정.


② 기하문 암각화

울주 천전리 암각화가 대표적. 넓고 깊게 선갈아 새긴 동심원, 마름모, 거치무늬, 곧은줄, 굽은줄무늬를 독립 또는 복합적으로 연결한 형상. 또는 사람을 기하학적 도형으로 추상화시킨 형상들.

각 문양의 상징의미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음.

동심원․마름모 - 태양의 상징, 풍요의 기원, 풍우를 주관하는 天神의 의미 등

인면․사람 - 神接한 주술사, 땅을 주관하는 地神 등

갈라진 능형 - 여성의 성기, 다산의 상징. 곡물의 성장과 숙성을 상징 등

다양한 기하무늬들의 조합 - 사물을 개념화시킨 일종의 繪文字, or 반복되는 행위를 통한 주술적 의식의 표상 등

이 그림들은 청동기 이후 농경사회에서 공통적으로 행해진 종족번성과 풍요 기원의 산물로 추정할 수 있음(지배적인 견해). 갈아새김 행위 그 자체가 고도의 수준에 이른 종교 의식이고, 제작 행위가 곧 주술의례이기 때문에 이를 제작한 사람은 전문 주술사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음.

한편 천전리 각석의 중하부의 명문에는 3백여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음. 오른쪽 원명은 법흥왕 12년(525) 진흥왕의 부친인 입종갈문왕(사부지갈문왕)이 가신을 거느리고 서석골에 나들이 한 것을, 또 왼쪽의 추명은 법흥왕이 동왕 26년(539)에 사부지갈문왕을 비롯한 신하들을 거느리고 와서 놀았던 것을 기념 삼아 새겨 둔 것.

명문에는 호세(好世: 진평왕 때 화랑), 수품(水品 : 선덕여왕 때 화랑), 영랑(永郞 : 통일신라 직후의 화랑), 문정랑, 주매랑 등의 이름도 보임. 이러한 글을 본다면 이곳이 화랑들의 국토 순례장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음.  

이 밖에도 함안 도항리 그림은 마치 은하계를 표현한 듯 암벽 전체에 크고 작은 바위구멍을 빼곡이 새겼고 태양이나 큰 별을 나타낸 듯한 겹고리를 장식함.


제작시기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등이 다양하게 제시됨.

그림 전체의 내용에서 당시의 사회는 祭政分離는 물론, 기능과 역학적 관계에 따라 다양하게 분화된 사회를 추정 가능케 함. 따라서 최근에는 이미 철기문화를 접한 고대국가의 태동기인 초기철기시대 초~중기라는 주장이 제기됨.


③ 청동의기형 방패무늬 암각화

철기문화가 들어옴으로써 집단간에 서로 먹고 먹히는 정복 활동이 왕성. 방패무늬 또는 검파무늬 암각화는 사회가 새로운 질서에로 급격히 개편되어 감에 따라 불안해진 집단들이 자신들의 존속을 위해 안보를 기원하는 의미로 제작했다는 견해.

방패무늬 암각화의 전개 과정을 단계별로 살펴보면,

생성기 - 앞 시기의 쪼아새김 전통이 강하게 잔존해 있고 그림 구성이 다양하며 사실적 표현이 강한 경주 석장리와 안심리가 生成期로서 반달돌칼, 홈자귀, 돌검 등 주변 유적의 출토유물의 성격으로 미루어 청동기 후기 어느 시점에서 발생하여 초기철기 초입까지 이르는 것으로 추정.

정형기 - 영천 보성리와 고령 안화리에는 방패무늬 그림 윗면에 머리털 모양의 짧은 선이 새겨짐. 이것은 그림에 군사적 의미가 강화되면서 석장리의 방패무늬가 고깔무늬와 결합해 의인화(擬人化)된 복합형 방패무늬로 발전한 모습. 테두리 삼면에 깃털 같은 방사선을 위엄 있게 갖춘 고령 양전동 방패무늬는 신격화된 祭壇主神으로 자리잡음으로서 형식이 定型化를 이룸. 이 시기의 안보기구(安保祈求)는 그림의 면모와 갈아새긴 기원 행위에서 엿보이듯 이미 집단신앙화의 괘도에 오른 단계임을 시사해 줌. 시기는 보성리가 안화리 보다 다소 앞서고, 안화리가 양전리 보다 다소 앞선 시기의 것이나 크게 묶어 초기철기시대 것으로 사려됨.

변형기 - 변형기에 접어든 칠포리 단계에 이르면 神象의 방패무늬 모습이 군사적 성격이 더욱 강화된 개갑형(鎧甲形)으로 바뀌고 크기도 초대형화 되며 새김도 넓고 깊어김. 이것은 그들의 정치 군사적 현실이 극도로 불안해짐에 따라 집단의 존속을 위한 심각하고 간절한 기원이 있었던 것의 반영. 바로 이 시점이 새로운 철기문화의 도래로 집단간의 정복과 복속이 활발히 전개되어 정치 사회적 질서가 재편되어 가던 역사적 분기점으로 시대구분은 초기철기중기에 해당됨. 이곳에 여성 생식기의 등장은 어쩌면 평화적 개념에서의 종족번성이 아니라 군사력의 절대 요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견해. 남원 대곡리(-1-2-3-4), 포항 칠포리(-1-2-3-4)가 여기에 해당됨.

消滅期 - 마지막 소멸기인 영주 가흥동(-1-2-3), 단계에 이르면 그림의 형식이 지극히 도식화됨. 전통신앙화로 굳어진 기원 행위가 오랫동안 습관적으로 베풀어져 왔음을 뜻함. 정치 질서가 재편되고 사회가 안정됨에 따라 이전 시기와 같이 강렬한 표현은 사라지고 전통적 신앙의례로 전승되어 가는 모습. 이 즈음 성읍국가의 연맹 체제가 성립된 고대국가 탄생기로 시대 구분상 초기철기시대의 마지막 단계.


방패무늬 암각화는 보다 강한 집단이 그 힘을 바탕으로 약소 집단을 지배하며 또 다른 사회 질서에로 진입해 간 청동기후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함. 새로운 무기의 발달로 사회 불안이 더욱 고조된 초기철기시대에 성행하다가 고대국가의 탄생으로 안정된 사회질서가 확립된 역사초기에 자연히 소멸해 간 집단안보 기원의 祭壇畵. 

(3) 생활상 암각화

생활상 암각화는 천전리 암각화 중 날카로운 철제 도구로 그어 새긴 세선 그림들. 기마행렬, 항해, 인물, 말, 새, 용을 그림의 소재로 삼아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는 모습들을 사실적으로 매우 생동감 있게 조형.

기마행렬도에 보이는 낙타를 타고 가는 사람, 그 뒤이은 파초선 등 일련의 모습은 여느 행렬 같지 않고 국제교류 의식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해 놓은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어 주목됨.

또한 또 다른 기마행렬도와 연이어 보이는 航海圖가 특별히 주목됨. 이 그림 위에 있는 명문과 연관지어 그림을 부인 非德이 유행(遊行)하는 행차로 보는 견해도 있음. 앞뒤가 치솟은 큰배의 위용, 거대한 돛, 닻을 내리고 정박해 있는 모습은 연안 나룻배가 아닌 외양 범선임이 분명함. 그림의 성격상 어떤 특정 사건이나 사실을 기록하려는 의도를 느낄 수 있음.

그림의 새김세나 형식(모습)이 신라토기에 새겨져 있는 것들과 통할뿐만 아니라 주위에 같은 새김법으로 새겨 놓은 명문들과도 무관치 않음. 따라서 이 그림은 역사시대의 초미부터 통일신라시대에까지 계속해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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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2004-09-11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암각화(상징으로서 예술)은 레포트로 대체함. 추석연휴로 휴강이 끼어 고구려 고분벽화 한주 당겨서 할것임. 착오없도록....

ceylontea 2004-09-10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꾸욱... 퍼가도 되지요??
오랜만에 들러서 좋은 글 올려주셨네요...
바쁘셨군요... 어찌 지내시나 궁금했답니다.

수련 2004-09-11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껏 퍼가세요. 강의용이라서 내용이 좀 지루하기도 하고 딱딱하죠?
실론티님두 잘 계시죠? 예쁜지현이도 잘 자라죠?...
그림자님을 위해 언제 조선후기미술 간추려 보겠습니다.
 

고구려는 4세기~7세기에 걸쳐 우리민족이 세운 가장 광대하고 강혁했던 정복국가였다 또한 문화적인 면에서도 삼국시대의 다른 나라들을 앞서서 이끌고 영향을 끼쳤던 나라였다. 그 문화는 호방하고 진취적이며 활력에 넘치는 것이였고 지역적으로는 중국과 서역(돌궐, 유연)의 문화를, 종교와 사상적으로는 불교와 도가사상을 수용하는 등 외래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 들여 국제적인 동북아 문화권을 형성하는가 하면 지극히 독자적인 독특한 문화를 창출하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이러한 문화적 양상과 특성을 우리에게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고구려 고분벽화이다. 만약 고구려의 고분 벽화가 남아 있지 않다면 우리는 고구려의 문화와 의식세계 그 냉요과 성격을 단지 추상적으로 짐작만 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당시인들의 생활상과 내세관, 문화생활 전반을 이해하는데 없서서는 안될 귀중한 자료이며 삼국시대 미술사뿐 아니라 고대동아시아 미술사 연구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고분벽화에 대한 지금가지의 연구 성과는 묘제형식이나 벽화의 회화사적 위치를 재고하는 미술사적 접근이 주를 이루게 되었으며 제작기법이나 벽화의 물리적 특징을 파악하는 연구는 전무한 실정이었다.

이런 현상은 제작기법이나 물리적 특성을 살피기 위해선 현장 관찰과 과학적인 조사가  뒷받침되어야 하나 분단의  현실적 측면에서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기존 연구를 주도해온 고고학이나 미술사학자들이 접근하기에는 다소의 관점차이가 있기 때문에 위와 같은 연구가 이뤄지지 못하였다.

지금까지 조지벽화(자연석 표면을 다듬어 화면을 조성한 후 그 위에 직접 채색 표현한 형식의 벽화)를 제외하고 화장지 벽화(벽체 조성후 회나 흙으로 벽면을 마감하여 화면을 구성하고 그 위에 채핵한 벽화기법)의 형식을 한 고분벽화에 대한 고고학계나 미술사학계의 기존 논문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묘실을 석재로 쌓고 들 표면에 석회를 바른 다음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2. 석회는 (또는 호분)두께가 0.5센티내지 1센티되도록 정제하여 바르고 표면을 매끈하게 마감한 다음 그림을 그렸다.

3.벽화는 붉은 색 또는 검은색 선으로 밑그림을 그린다음 다시 결정적인 먹선으로 백묘를 하고고 색을 칠해 완성하였다.

4.안료는 대체로 천연광물성이지만 식물성 역채채료도 일부 보존재로로 사용하였으며, 적,황, 녹, 흑, 백색등이 주를 이루고 금은박 및 옥,상감기법까지 동원하여 장식하기도 했다.

5. 안료는 주로 아교 특히 개가죽 아교에 섞어 그렸다.

6. 고구려고분벽화는 화면이 둗기전에 그림을 그리는 방법과 듣은 다음에 그리는 방법 두가지고 있고 앞의 기법은 프레스코화법과 유사하다.

이 외에 앞으로 안료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어야 하고 지금까지의 기법의 연구가 전체를 말 할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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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04-08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침 고구려 고분벽화 이야기를 읽던 중이라 많은 참고 되었습니다. 감사히 퍼가겠습니다. 넙죽~
 

   불교미술은 부처가 35세에 성도한 후 최초로 건축한 불찰(불교사찰)인 기원정사나 죽림정사의 성립과 동시에 발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부처가 생존해 있던 당시에 불상이 제작되었다는 전설도 있지만 어디 까지나 그것은 시원적인 또는 전설적인것에 불과하다고 할수 있습니다. 따라서 불교도들에 의해 참다운 조형활동이 시작된 것은 부처가 열반에 든 이후였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 견해일 것입니다. 그것은 부처가 열반에 든 직후에 세워진 8탑의 건립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처가 쿠시나가라에서 80세로 연반하자 당시 독실하게 불교를 믿던 8국의 왕들이 서로 사리를 가져가겠다는 사리분쟁이 일어났는데 도로나 바라문의 현명한 중재로 여덟나라에 공평하게 나누어 동시에 탑을 세우게 한것이 근본 8탑이 되었습니다. 탑은 불교건축에서는 가장 중요하고 필요불가결한 것이며 불교에만 있는 건축형식으로서 불탑에 대한 숭배사상은 시대가 지날수록 더욱 성황을 이루어 수많은 탑들이 조성되었습니다. 인도의 아쇼카왕이 8만4천탑을 건립했다는 전설은 이러한 상황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탑은 절의 중심이가 불교도의 주 예배대상이고 불교미술의 주류였던 것입니다.

   이렇듯 탑이 불교신앙의 중심이 되었던 시대에는 아직 불상이 나타나지 않은 시기였다고 보는것이 정설입니다. 그후 기원후 1세기경이 되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붓다의 모습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본생도나 불전도 등에 붓다가 표현되기 시작하였으며 불상만 단독으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변화가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체로 기원후 1세기 경 불교 자체의 교리적인 화와 외래의 영향등으로 불상이 제작되었다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불상의 발상지는 대개 두곳이 거론되고 있는데 하나는 인도 갠지스강의 중북부에 위치한 마투라 지방이고 또다른 하나는 인도인도서북부 아프카니스탄쪽이 있는 간다라 지방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마투라 지방은 인도의 상업과 정치의 중심지로서 전통이 강한 곳이었으므로 고대신상조각의 전통이 불교교리의 변화에 따라 발상되어 불상으로 나타났다고 보여지며 간다라 지방은  중근동 혹은 중앙아시아와 인도를 연결하는 관문이였기 때문에 외래적인 요소가 강하게 작용하였고 기원후 1세기를 전후해서는 헬레니즘문화의 영향을 받아 간다라지방의 불상이 제작되어지기 시작했다고 판단되어 집니다.

   마투라. 간다라 이 두 계통의 불상 발생에 대해서는 논의가 분분하지만 불상제작의 엄격한 규제가 풀리게 된 것은 불교교리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는것이 일반적입니다. 당시에는 간다라 지방이건 마투라 지방이건 유부계통의 불교가 지배적이였지만 신생 대중부 계통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던 때 였습니다. 대중부는 불교의 대중화운동을 가장 중요시했던 대승불교의 전신으로 대중을 제도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은 부처님의 형상을 만들어 그 위대성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시청각적인 교화의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불상은 삽시간에 예배의 주된 대상으로 되면서 사원의 중심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절의 중심이 탑에서 불상으로 바뀌게 되자 불교미술의 주역도 불상이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새로운 불교미술 시대가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가 바로 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시기로 佛像時代라고 하고 불상이 없고 탑만 있었던 기원전 시기를 無佛像 時代라고 한답니다. 불상시대를 불교식으로는 像法時代라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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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18 2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누아 2004-03-19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상이 나타나기 전에 그림에서는 부처님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 불경스럽게 느껴졌던지 보리수나 부처님의 발(가섭에게 보여주셨던)을 부처님 자리에 그렸다고 하더군요. 지금도 어떤 절에는 녹야원에서 부처님이 다섯 비구에게 설법하시는 장면에서 부처님 자리에 법륜이 그려져 있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수련 2004-03-19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있게 읽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부처님의 모습을 실재로 그리는 것이 불경스러웠다는 것 보다는 반야심경에 보면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것이 공이라는 뜻이죠. 일시무일시 석삼극 무진본...이런 말도 있죠~~ 초기 무불상 시대는 공사상 때문에 불상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부처님은 그림으로 나타내기는 너무 신성한 존재였던것이지요(그렇게 보면 실재 모습을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웠다는 것과도 상통하겠군요) 하지만 불상의 출현은 분명 주변 여러나라와의 문화교류로 인한 영향때문이었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조선인 2004-10-21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전 불화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직 말씀이 없으시네요. 언제쯤 다시 이어주실 지.

수련 2004-10-21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이 게으름을 알아차리셨군요.
불화는 차츰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요즈음 여러가지 일이 복잡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죄송합니다.

조선인 2004-10-21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죄송하다뇨.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그저 은근히 기다린다는 정도의 뜻이었습니다. 저같은 문외한이 보기엔 기존 책들이 전문용어가 많아서요. 미술용어도 그렇고, 불교용어도 그렇고. 그에 비해 님의 글이 술술 읽혀서. 혹시 책을 추천해주셔도 좋구요. *^^*
 

고구려 고분벽화의 제작시기보다 수세기 앞선 무덤이 중국의 진시황릉이다. 이 고분에는 벽화가 있는것은 아니지만 고구려 고분벽화와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기 위해 간단히 멘트합니다.( 완전히 발굴이 끝나면 상황이 달라질수도~)

진시황릉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은 드물것입니다. 우리나라   예술의 전당에서도 관련 전시회가 있었고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묘의 부장품 들이 관심을 끌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원전 221년 진나라 왕 영정은 여섯나라를 쳐부수고 전국을 통일함으로써 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 왕조의 황제가 되었답니다. 진시황은 즉위 후 함양에 대규모 궁실 공사를 일으킴과 동시에 자신의 능묘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 공사는 기원전 210년 진시황이 세상을 떠나고 2세가 즉위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섬서성 임동에 자리잡은 서산 최고봉의 북쪽 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진시황릉은 흙을 달구질해 바른 네모뿔 모양으로 높이 쌓은 지상의 봉분은 남북 길이 350M 동서길이 345M 높이가 47M에 이르는 거대한 묘입니다.< 중국사기>와 <>진시황본기>에 따르면 능묘 안에는 진주와 보석을 비롯해 모형 궁궐과 갖가지 장식품을 가득 넣었고 위에는 해, 달, 별 등의 천문도형을 아래에는 강, 내, 호수, 바다 같은 지리 모형을 만들어 놓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강과 내에는 수은을 흐르게 하고 묘실 도굴과 파괴를 막기 위해 장인들로 하여금 자동 발사되는 활을 만들게 하여 문위에 설치했다고 합니다. 아직 묘의 발굴이 모두 진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최근 과학적인 방법으로 묘실을 탐사한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묘실 안에는 확실히 수은이 저장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1970년대 고고학자들에 의해 일부 발굴된 병마용은 능묘 밖 동쪽에 위치해 있는데 진흙으로 만든 인형인 도용이 수천건, 도마가 수백필, 전차가 수십대 도용이 손에쥔 무기 1만여점 등이 출토이었다고 합니다.

<진시황 본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지고 있답니다.

"매장이 끝나자 어던 사람이 말하기를 장인이 기계를 만들었고 함께 참여한 노예들도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그들의 숫자가 많아서 누설될 것이라 했다. 장중한 샹례를 마치고 보물들도 다 파묻히자 묘도의 중앙문을 폐쇄하고 바깥문을 내려 장인과 노예들을 모두 가두니 다시는 빠져 나오는 자가 없었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진시황릉의 비밀을 보장하기 위해 무덤을 제작했던 장인들과 숱한 인부를 모두 묘실속에 가두어 죽여 버렸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70만며명의 인력을 동원해 세운 진시황릉의 비밀 역시 금세기 까지 땅속에 묻혀있었습니다. 

아직까지 고구려 고분속에는 산자를 매장했다는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역시 우리민족은 휴메니스트-

소수의 비밀을 위하여 힘없는 사람덜을 주기다니...무서운 중국사람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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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18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불교는 다 알아시피 인간 스스로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는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엄격히 말하면 미술 같은 것은 전혀 필요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불교가 일반 민중의 구제를 가장 큰 사명으로 삼는 이상  그들에게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불교의 진리를 이해시켜야 하는 도구가 필요한 것입니다. 일반대중은 처음부터 불교의 심원한 진리를 이해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그들을 쉽게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신앙의 대상인 부처님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이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탑, 불상, 탱화 등이 조성되고 그것들을 신격화 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 불교미술의 중심이 된 것입니다. 불교미술에는 건축(목조건축 탑), 조각, 공예(종, 목어, 운판, 공양구, 향로,  등), 회화(탱화-불화, 단청) 등 종류가 다양하고  그 표현 기법은  수 없이 많지만 그 중 불화는 어떤 특별한 법칙이 정해져 있는 도상학이라는 규정같은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불화를 그리는데 자신이 원하는 곳에 존상을 배치하고 싶다고 해서 자기 나름대로 아무곳에나 존상(불, 보살 , 천왕, 신중 등)을 배치했다고 가정합시다. 이것은 도상학에 어긋나는 그림이 되어 불화라고 불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불화(탱화)는 엄격히 도상학에 근거해서 작업을 하는 미술로 표현기법은 다양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변상도라고 불리우는 그림은 부처님의 생애나 불교의 진리등 (불교경전속의 내용)을 알기쉽게 그림으로 풀이해 놓은 모든 그림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상도를 통틀어 불화라고 하는데, 다시말하면 이러한 불화는 화사가 싫든 좋든 도상학에 근거해서 제작해야만 숭배의 대상으로서 그림의 가치가 있는 것이랍니다.

우리가 사찰에 가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것이 석탑일 것입니다. 탑은 돌아가신 부처님의 뼈(사리)를 봉안하는 일종의 부처님의 무덤으로 보시면 됩니다. 부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무덤은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부처님의 어던 흔적이라도 대해야만 부처님이 말한 그 진리의 말씀도 실감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뼈를 모신다는 것은 후대의 불교도들에게는 신앙심의 결정체를 모시는 것이 되었으며 불교의 구체적인 진리에 한층 더 다가서는 것이라 할 수 있답니다. 이러한 이유로 탑은 불교의 대표적인 건축미술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불교미술품 중 불상은 언제 부터 만들어 지기 시작 했을까요?(다음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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