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ㅣ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참 이상한 소설도 다 있다고 생각하며 첫번째 독서를 마쳤다. 은교와 무재는 알듯말듯 선문답 같은 대화를 주고받고, 한계 상황에 다다른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그림자를 보게 된다는 기묘한 설정, 철거 중인 상가 입주민들의 오래된 삶이 하나씩 소개되고, 은교와 무재는 어제와 다름없다.  

  뭔가 빠뜨린 것이 있을 거라고 두번째 독서를 시작한 것은 예를 들어 이런 문장들 때문이었다. 사람이란 어느 조건을 가지고 어느 상황에서 살아가거든, 어느 정도로 공허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인생에도 성질이라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본래 허망하니, 허망하다며 유난해질 것도 없지 않은가, 하면서요.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요. 어떤 생각을 하느냐고 나는 물었다. 이를테면 뒷집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종이 박스를 줍는 일로 먹고산다는 것은 애초부터 자연스러운 일일까,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살다가 그런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사정인 걸까, 하고 말이에요. 너무 숱한 것일 뿐. 그게 그다지 자연스럽지는 않은 일이었다고 하면, 본래 허망하다고 하는 것보다 더욱 허망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고요. (p.144)     

  너무 숱한 것일 뿐. 그게 그다지 자연스럽지 않은 현실을 다루되, 작가 김이설의 소설이 얼음송곳으로 정수리를 내리찍는 강렬함이었다면 황정은의 소설은 미지근한 여름비를 맞고 났을 때처럼 노곤하고 서늘했다. 외계 소설이 들끓는 이천년대라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젊은 작가들을 보고 있으면 소설이 응당 있어야 할 자리에서 제몫을 하고 있구나 싶어 다행스럽고, 반갑다.  

  이 시(詩)적인 소설은 소란스런 요설은 저만치 접어두고, 고요히, 곱씹으며 읽어야 한다. 나의 첫번째 감상처럼 참 이상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두번째 독서에서는 그동안 스스로가 얼마나 탐욕과 상처의 언어에 길들어 있었는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유곤 씨나 오무사 할아버지 같은, 숨겨진 삶, 사라진 누군가를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어릴적 우리 동네에 '김씨 아저씨'가 살았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것이 내가 아는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그 아저씨를 김씨, 또는 김씨 아저씨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들은 김씨 아저씨를 싫어했다. 지저분한 차림새에 늘상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아저씨는 길에서 나를 보면 히히거리며 쫓아왔다. 쫓아오고 싶어 쫓아오는 게 아니라 아저씨를 보자마자 내가 무조건 겁에 질린 얼굴로 내달렸기 때문에, 그 모습이 재밌어서 쫓아왔던 모양이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김씨 아저씨가 어때서, 네가 귀여워서 그러는 거다, 라고 하셨다. 부모님과 이야기할 때 김씨 아저씨는 조금 멀쩡해 보이는 것도 같았지만 나만 보면 왜 더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겁을 주는지 알 수 없었다.   

  어느 날, 동네에서 김씨 아저씨가 사라졌을 때 엄마와 아줌마들의 수다 속에서 아저씨가 감옥에 갔다는 사실을 알았다. 원래 아저씨는 동네 땅부잣집 머슴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지독하던 지주 노인네가 부려먹을만큼 실컷 부려먹고는 세경을 주기 싫어 누명을 씌워 감방에 보낸 것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아저씨가 참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무서운 사람이 안 보이니 마음만은 편했다. 아저씨는 얼마 후 감옥에서 나와 몇 달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성희롱은 물론 억지로 오줌을 먹는 등, 감방에서 별별 짓을 다 당한 까닭이었다. 엄마는 그 지주 노인네가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몇년 후, 그의 큰아들이 가해자도 없는 원인불명의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동네 사람들이 의심쩍게 수군거리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지주의 큰아들은 늦은 밤, 도로 한복판에서 히히거리며 쫓아오는 김씨 아저씨의 그림자라도 보았던 걸까.        

  이 소설을 읽으며 지난 날, 기억의 후미진 저편으로 사라졌던 아저씨, 아줌마,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그림자를 하나씩 바라보고 읽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늦었지만, 내 유년기의 목소리로 김씨 아저씨에게 이별의 말을 전하고 싶다. 아저씨, 잘가. 이젠 쫓아오지 말고 푹 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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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날이라고 엄마가 닭을 삶았는데 나는 보신탕이 먹고 싶었다. 작년까지는 시장에서 고기를 사와 엄마가 직접 손질해서 끓여주셨지만, 올해는 영달이도 있고 왠지 께름칙했다. 남편한테 말했더니 괜찮게 하는 집이 있다며 데리고 갔다. '하얀집'이라는 간판을 건 가정집 겸 식당이었는데 초복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손님이 바글바글했다. 탕을 먹을까 하다가 좀더 푸짐하게 먹고 싶어 보신전골을 시켰다. 먼저 고기를 부추와 곁들여 남김없이 먹은 다음, 나중에는 밥까지 볶아먹었다. 남편 말대로 맛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집에서 먹는 것만큼 깔끔하거나 넉넉하지는 않았다.     

  연애 시절, 데이트를 할 때도 우리는 삼계탕, 보신탕 등 탕을 참 많이 먹었다. 한여름, 한낮에 만나면 보충수업으로 지쳐 있는 그와 여름만 되면 이따금씩 어지럼증이 도지던 나는 탕을 먹자는 데에 의기투합했다. 교육청 근처의 허름한 식당, 콩국물을 넣고 끓여낸 삼계탕이 고소하니 맛있었고, 여고 골목의 뚝배기 위에 접시 올린 보신탕집도 괜찮았다. 터미널 맞은 편의 추어탕집은 우거지와 깍두기가 맛있었다. 그렇게 뜨끈한 탕을 먹고 나서 아이스크림이나 아이스커피 한잔이면 눈이 반짝, 팔다리가 번쩍, 옹골찬 기운이 다시금 샘솟는 느낌이었다.   

  비실대던 여름, 한의원에 갔더니 내게 권해주는 음식들이 또 탕이었다. 대개 혐오식품으로 인식되는 것들이라서 왜 난 하필이면 이런게 먹고 싶지, 했는데 몸에서 먼저 알고 내가 먹어주기를 기다렸다니, 다소 비약인지는 몰라도 참 신기했다. 한의사는 많은 근력을 요하는 운동은 삼가하고 꾸준히 그 음식들을 챙겨 먹으라 했다. 탕이라는 것이 영양만큼이나 열량도 높아 그것만 꾸준히 먹다가는 건강 챙기려다 건강 해치는 꼴이 되겠지만, 요즘도 기력이 달리면 인삼 넣고 푹 고아낸 닭, 훈제 오리, 얼큰한 보신탕부터 생각난다. 그런 것들을 원없이 먹고 나면 영달이도 거뜬히 안아줄 수 있고 잠을 조금 덜 자도 갤갤대지 않는다. 당분간 특별히 먹고 싶은 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런데 삼계탕도 아니고 보신탕에 대한 호의를 공공의 장소에서 드러낸다는 것은 아직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보다. 작년 어느 날, 막 여름이 시작될 무렵, 부장 선생님이 나에게 조만간 남자들끼리 철엽을 할 계획인데 먹을 줄 알면 끼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좋아하고 잘 먹는다고, 끼워달라고 그랬더니 옆의 연세 지긋한 선생님이 눈을 내리깐 채 말하기를, "여자가 무슨... 혹시 먹을 줄 알아도 그걸 입밖에 내는 게 아니지." 순간 여자, 라는 말이 귀에 탁, 걸려 "먹는 음식 앞에서 여자, 남자가 어딨나요. 너무 옛날 생각 아녀요?" 라고 대꾸했다. 부장 선생님도 오늘 아침 인성지도 주제가 양성평등이었다면서 우스갯소리 섞어 핀잔을 주자, 선생님은 입은 미소를 짓고 있으나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내가 미혼이었다면 "더군다나 처녀가..."라고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 이후로 나는 말을 아끼는 동시에, 남녀가 유별하고 신구 역할이 확연히 구분된 학교 분위기에 적응하기로 했다. 짜증스럽고 권태로웠지만 어쩌랴. 사람은, 더욱이 나이 든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여하간 올해 여름도 내 몸은 내 마음보다 먼저 원하고 있다. 이 지치는 여름을 무사히 나려면 먹어야 산다. 어제 보신을 했으니 오늘 저녁엔 차가운 냉면을 먹을까. 이럴 땐 아직 분유밖에 못 먹는 영달이가 안쓰럽다. 좀더 크면 세상의 모든 맛과 멋을 가득가득 보여주고 싶다. 정의 앞에 평등하듯 음식 앞에 평등하다는 것도. 몹쓸 비유에 갸웃거리겠지만 엄마의 심정이 그렇듯 절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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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9 14: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1 0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pjy 2010-07-19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상당히 그런!음식 좋아하는데요^^ 자기네도 먹으면서 이상하다는듯 쳐다보는 경우도 종종있어요--;

깐따삐야 2010-07-21 09:21   좋아요 0 | URL
흠, 그렇군요. 사람이 먹을 거 앞에선 정직해진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가 봐요.

무스탕 2010-07-19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변 신경쓰지 말고 맛있는거, 몸에 좋다는건 챙겨드세요.
전 제가 멍멍은 안먹자 주의여서 안먹는거지 신랑이랑 애들까지도 먹이는걸요. 것도 기회가 닿으면 집에서 끓여서까지요 :)

깐따삐야 2010-07-21 09:27   좋아요 0 | URL
네, 아무렴요. 신경 쓰다간 먹은 영양이 다 소모됩니다.ㅠ
무스탕님처럼 본인은 안 먹지만 나머지 가족들에게 해먹이는 경우를 봤어요. 근데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아요. 냄새부터 싫어하는 사람도 많이 있더라구요.

조선인 2010-07-20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이 찾는 음식을 먹는 게 건강에 최고입니다. ^^

깐따삐야 2010-07-21 09:27   좋아요 0 | URL
그쵸? 영달이 가졌을 땐 열무김치가 그렇게 당기더니 말이죠.^^

비로그인 2010-07-20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보신탕을 즐겨 드시는군요!
이 느낌표는 반가움도 뜨악스러움도 아닌, 음식에 대한 저의 좁은 폭을 나타내는 것일 뿐이어요. 저는 몹시 가리는 음식이 많은데다, 가끔은 양념도 가리고 물맛도 가리는 아주 까칠한 입맛이기에 가끔은 제가 즐기지 않는 음식이 신기해 보이기까지 했어요. 음식에 대한 사람의 기호가 문화에 대한 기호라면, 전 어디에도 머무를 수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너무 많아서 나열하지 못할 정도니까요)

생각나면 먹어야지요. 사람은 먹어야 하고, 기왕 먹을 거라면 즐겁게, 맛있게 먹어야 하니까요. 그것이 육식동물이자 사람의 운명이에요.

깐따삐야 2010-07-21 09:32   좋아요 0 | URL
Jude님처럼 호리호리하신 분들은 달리 날씬하신 것이 아니라 대개 가리는 음식이 많더라구요. 물만 먹어도 살찐다는 것은 말도 안되고 확실히 이것저것 잘먹는 사람이 살도 찌는 것 같아요. 저는 가리는 음식은 거의 없는데 맛없는 것은 안 먹습니다.^^

고기를 즐기는 편은 아닌데 요즘은 기력이 쇠해서인지 단백질 음식이 당기네요. 이럴 땐 콩이나 계란으로도 대체가 불가능해요. 원래 몸무게까지 겁나먼 나날이 기다리고 있는듯.ㅠ

노이에자이트 2010-07-20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든 남자들끼리 놀러가는 데에는 여자는 안 가는 게 좋습니다.그 중엔 여자에게 지저분한 농담하며 느끼하게 구는 남자가 꼭 몇명씩 있거든요.더군다나 야외에 놀러가서 술한잔 들어가면 매너 꽝인 남자...

깐따삐야 2010-07-21 09:35   좋아요 0 | URL
그런 것 같아요. '야외에 놀러가서 술 한잔 들어가면' 보신탕 속의 바로 그 내용물로 화하는 사람들이 꼭 있죠.ㅠ
 

 # 책이 구해졌다. 기대 반, 체념 반이었는데. 온라인의 놀라운 힘이란. 소설은 수기와 소설 중간 쯤 된달까. 어떤 선배들은 작가와 주인공을 똑같이 놓고 보는 게 가장 저급한 독서라고 했는데 이런 책을 만나면 그럴 수밖에 없다. 많은 부분 허구가 가미되었을지라도 체험이 아니고는 절대 이렇게 못 쓴다, 싶은 구절들이 대부분이었다. 불우한 여자의 성장기(한편, 그 후의 이야기가 반드시 나올 것만 같은)이자 예술가 소설일 수도 있는데, 문학적 완성도를 넘어서 바닥까지 가본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진정성이 있었다. 이러한 진정성과 마주하면 글을 쓸때 개요를 짜라, 은유는 직유보다 더 고급한 비유법이다, 등등의 도식적인 말들은 영 무색해지고 만다. 더욱이, 대개 작가들의 성장소설에는 자기동정이나 자기합리화가 은연 중에 엿보이기 마련인데 이 소설은 그야말로 얄짤없었다. 그 산뜻한 매서움이 좋았다.      

# 백만년만에 H 언니와 연락. 요즘 영국 여행 중이라고. 언니는 나와 달리 대학원 생활이 재미없단다. 무슨 수업을 들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듣자하니 지도교수님마저 지루한 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당시, 나는 복학생, 언니는 늦깍이 편입생이었다. 둘 다 학구열에 불타던 시절이었는데 늘상 충혈된 눈으로 만나 이것저것 숱한 이야기를 나눴다. 각자 발령을 받고 몇 년 전, 모교 근처의 술집에서 오후 네시 쯤, 아무 손님도 없는 곳에서 둘이 삼겹살을 구워먹었다. 6,70년대 영화 포스터를 천장과 벽에 덕지덕지 붙여놓은 집이었는데 술집 이름도 자유부인인가 뭐인가 했다. 둥글둥글 잘생긴 젊은 사장님이 있었고 고기가 끝내주게 맛있었던 기억. 내가 어려서 실수한 것도 많았을텐데, 어떤 장면은 두고두고 되새김질이 되어서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하는데, 다행히도 언니는 나를 똘똘하고 거짓없는, 이라고 황송하고 쌈빡하게 떠올려주었다. 두터운 원서를 무슨 잡지책 보듯 편안히 읽던 모습, 두눈을 반짝이며 파안대소를 하던 순간, 어깨에 빼뚜름히 매고 다니던 검정 가죽가방 등, H 언니는 몇몇 삽화와 더불어 인상적인 사람으로 남아있다.  

# 엄마로서, 딸로서,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그리고 내 일터에서, 결국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다는 자각이 자학으로 이어질 무렵, 너야말로 천사병 걸린 푼수 아니냐고 엄마로부터 꾸지람을 들었다. 당신 딸이 방바닥을 누비면서도 코큰 소리를 했으면 하는 게 모든 친정엄마 마음이겠지만 출산 후에 엄마의 수고가 너무 많아 그 점이 가장 아프다. 내가 커감에 따라 엄마 고생도 좀 덜어지겠지, 생각했는데 어째 점점 더 들러붙는 형국이다. 나의 전반적 심경에 대해 남편은 교사들은 순진해서 죄책감을 느끼는지 몰라도 당신 또래 여자들은 대부분 다들 그래, 라는 위로도 책망도 아닌 담담한 시선을 보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인지,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것인지, 아무렇지 않아야 한다고 내내 다짐하는 것인지, 원래 남이었지만 참 남 같다. 그새 바깥 바람 맛을 들인 영달이는 아파트 단지 둘레둘레를 해찰하러 다니느라 바쁘고, 매일 밤, 어깻죽지가 뻐근한 나는 빨래 안 마르는 장마, 이 눅눅하고 끈적거리는 여름이 언제끔 끝날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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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서른한 살이고 직업이 있고 결혼을 했고 남편이 있다면, 가끔씩 덫에 걸렸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가끔이 아니고 자주일 수 있다. 안정적으로 아이를 돌볼 사람도 없고 직장에서는 위에서 아래에서 당신을 압박하는 일이 많다. 승진은커녕 유부녀인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비판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남편은 당신이 버는 돈은 좋아하면서, 이익의 대가로서 가사노동이나 시집 동원 행사의 분담이라는 반대급부를 자발적으로 할 마음이 없다. 돈은 벌어도 쌓이는 것은 없고, 남편이 없었더라면 자녀가 없었더라면 내가 직장에서 더욱 성공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갈등과 회의가 당신을 짜증나게 할 것이다. 당연하다. 
  그러나 불만을 말하지 마라.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부러워하는 당신 또래의 여성들이 눈을 흘길 것이다. 당신은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다. 가진 것이 많으면 할 일이 많은 것이라고 생각해라. ......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독립한 당신, 이제 서른한 살이다. 서른까지 남의 손에 의해 차려진 잔칫상만 받았다. 서른한 살, 이제 당신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잔칫상을 차리기 시작해야 한다. (pp.140~141)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를 읽던 중, 내 나이 서른 하나. 위 대목이 눈에 띄었다. 같은 서른한 살이라도 얼마간의 개인차야 존재하겠지만 대개는 맞는 말이고 공감했다. 특히 '덫에 걸렸다'는 생각, '갈등과 회의가 당신을 짜증나게 할 것'이라는 부분은 한 마디도 토 달지 않고 예, 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런데 가려운 데 살살 긁어주는 것 같더니 불만을 말하지 말란다. 또래 여성들이 눈을 흘길 뿐더러 가진 것이 많으면 당연히 할 일도 많은 법이라고 입에 재갈을 물려버린다. 더구나 인간으로서 독립을 이룩했으니 네 손으로 네 잔칫상을 차려야 하지 않겠냐며 무거운 과제를 던져준다. 일순간 비장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잠시 뿐. 과연 내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독립했는가? 자문한 결과 글쎄, 라는 허랑한 대답만 돌아왔다.   
  
  글쓴이 말 맞다나 직업도 있고, 결혼도 했고, 아기도 낳고, 누가 보면 가진 것 많아 보이는데 나와 관련된 소유물이나 인연들이 점점 늘어갈수록 역시 나란 인간은 나 하나 건사하기에도 벅차구나, 하는 씁쓸한 자각만 되돌아온다면? 자신의 그릇 크기를 모른 채 냅다 남들 하는 건 다 쫓아하려다 보니 뱁새가 가랑이 찢어진 격인가. 욕심은 많으면서 힘든 것은 감당하지 않으려는 비겁함인가.     

  어느 날 문득,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을 넘어서 머리 끝까지 짜증이 엄습할 때가 있다. 하지만 내 재능은 내 꿈에 미치지 못할 뿐더러 지금도 늦지 않았어, 라고 결의하다가도 나는 왜 이렇게 이기적일까 싶어 마음을 한겹 두겹 접는다. 더욱이 매우 총명한 여인이었음에도 의무와 책임으로 일평생을 산 엄마를 보고 있으면 그저 입 다물고 지금 있는 자리에서나 잘하라는, 자조 섞인 자책만 남는다.  
 
  어쩌면 좀더 젊은 날의 나는 매일매일 뭔가 새로워지지 않으면 안 되는, 조금의 가시적인 발전이라도 눈에 보이지 않으면 안 되는, 촘촘한 강박 속에서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실제 키는 버얼써 멈췄지만 인생의 키가 조금씩 조금씩 커지고 있다는 진실, 혹은 착각 속에서 살았다. 그것은 즐거운 고통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조금씩 낡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기 낳고 생긴 흰머리라든가, 메모하지 않으면 잊어버리기 일쑤인 몹쓸 기억력 때문만은 아니다. 뭔가 몽땅 털린 듯한 기분이다. 위의 글쓴이는 서른한 살의 내가 가진 것이 많다는데 이 싹쓸이 당한 듯한, 도둑맞은 듯한, 허하기 짝이 없는 느낌은 무어라 설명할 것인가.   
 
  영달이가 선물해 주는 나날의 기쁨과는 별개로, -나란 여자는 엄마씩이나 되어가지고 어떻게 그것을 또 별개로 분류할 수 있는지 그조차 참 별스럽지만- 그저 요즘 내 마음의 결이 요모양 요꼴이다. 엄마를 제외한 주변 사람들은 갑자기 나를 어른 취급하려고 난리법석들이지만 서른한 살의 나는 내 손으로 나만의 잔칫상을 차리라는 주문이 막막하고 버겁게만 들린다. 마치 네가 좋아하는 음식은 다 빼고 한번 자알 차려봐, 라는 말처럼 답답하고 밍밍하고 지루하게 들린다.   
 
  오즈의 마법사, 용기가 필요한 사자가 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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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네에 카페 형식의 제과점이 새롭게 문을 열었다. 몸무게가 눈꼽만큼씩 빠지고는 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머나먼 지라 웬만하면 피해가려고 했는데 후텁지근한 오후, 팥빙수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영달이를 어르고 계실 엄마 생각도 났다. 입구에 들어서니 먹음직스러운  갈색의 향연이었지만 엄마한테 혼날까봐 찹쌀도너츠와 팥빙수만 달랑 주문했다.  

  의자에 앉아서 포장을 기다리고 있는데 맞은 편에 눈이 안 보일 정도로 새카만 썬글라스를 낀 아줌마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원래 주문 기다리면서 멍때리는 걸 즐기는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나른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가게 홀 저편에서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 그 아줌마가 거친 음성으로 빵이 부스러졌네 어쩌네 하며 따지고 있었다. 일행인지 단발머리를 한 다른 아줌마도 뭐라뭐라 거드는 중이었다.  

  나는 왜 당연히 제과점 주인 아저씨는 살짝 뚱뚱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두 아줌마 곁에서 설명을 하고 있는 아저씨는 그냥 마른 정도가 아니라 거의 환자 수준이었다. 어깨는 뾰죽하게 올라갔고 푹 패인 볼은 주변의 오동통한 빵들과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아줌마들은 뭔가 시원시원하거나 너스레 섞인 응대를 기대했는지 모르지만 창백하고 가냘픈 아저씨는 이미 할 말은 다 했다고 생각하는지 빵 박스에 테입만 부치고 있었다.   

  썬글라스 아줌마는 소보루빵을 이리저리 뒤집어보며 빵이 이렇게 큰데 네살짜리들이 먹을 수 있을까, 단발머리 아줌마는 네살이 안되는 애들이 몇이나 되는지 전화해서 물어볼까, 등등 못마땅한 얼굴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어디 어린이집에라도 보낼 모양인 것 같았다. 아줌마들은 우유도 한 박스 샀는지 아저씨는 우유 박스에도 테입을 붙이고 있었다. 이거 상온에다 보관하면 안되죠? 내일까지 괜찮아야 하는데. 썬글라스 아줌마의 질문. 나는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한때 커피와 빵과 책이 있는 가게를 갖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곳에 부스러기 안 나오는 소보루빵, 한여름 상온에서 자신있게 버틸 수 있는 우유를 찾는 손님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더욱이 네살짜리들이 먹을 수 있는 크기의 소보루빵이라니. 나라면 다른 데 가세요, 는 너무 얌전하고 니가 만드세요, 그러지 않았을까.  

  이번에 이사 준비를 하면서 예전에 혼수를 했던 가구점을 다시 찾았는데 그 자리에 다른 상가가 들어와 있었다. 연락처를 찾아 연락해보니 가게가 잘 안 되어서 그만두었단다. 엄마는 그 내외 인상을 보고 그럴 줄 알았다면서 우리야 적정 가격에 혼수 잘해서 좋았지만 그렇게 곧이곧대로, 능수능란하지 못해서는 장사로 돈 벌기 어렵다고 하셨다. 아저씨는 기억하고 연락해줘서 고맙다면서 다른 가게를 소개했는데 영악한 엄마는 그 아저씨마냥 참해 보이는 아저씨가 운영하는 다른 가게를 뚫어놓으셨다. 나중에 영달이 가구도 거기서 하라면서.  

  내가 원래 좀 가냘픈 사람들만 보면 무턱대고 마음이 약해지긴 한다만, 오늘 제과점 아저씨를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우리 아파트 단지 앞에서 채소 늘어놓고 파는 쌍둥이 아버지는 하도 말을 잘해서 꼭 오이 사러 갔다가 가지까지 사게 만드는데 이 아저씨는 멀뚱멀뚱 할 말만 하고 있으니, 더욱이 우리 동네는 학교가 많아서 아줌마들 천지다. 밥 안 하고 빵 사먹으러 나오는 것도 아줌마들이고 아이들 간식빵 사러 나오는 것도 아줌마들이다. 종방된 시트콤 '태희, 혜교, 지현이'의 태희, 혜교, 지현이고픈 아줌마들이 넘쳐나는 곳이란 이야기다. 이런 동네에서 빵장사를 하려면, 적성에 안 맞아도 여차저차해서 개업을 했다면, 좀 변할 필요가 있다. 우선은 살을 좀 찌워 인상을 부드럽게 만드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으려나.  

  비단 오늘 일 뿐만이 아니고 간혹 이런 비슷한 상황을 우연찮게 보게 될 때가 있다. 그때마다 장사나 해볼까, 란 말을 함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되겠단 생각을 한다. 가히 소비자 전성시대라지만, 그 방향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같은 소비자 입장인데도 니가 만드세요, 란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르는 인간들과 맞닥뜨릴 때가 있다. 날은 덥고 불쾌지수 팍팍 솟는 나날들, 나도 이사 준비하느라 거래 중인데 돈이나 지불하면 됐지 스트레스까지 얹어주는 소비자는 되지 말아야겠다.     

  어쨌거나, 팥빙수와 찹쌀도너츠는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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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0-07-01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희, 혜교, 지현이에 나오는 아줌마들이라니...ㅎㅎ. 적어도 그런 아줌마는 되지 말아야징. 장사는 정말 아무나 하는게 아니죠. 전 그냥 지금 이대로가 좋아용.

깐따삐야 2010-07-05 13:40   좋아요 0 | URL
장사는 정말 아무나 하는 게 아니죠? 제과점 아저씨도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실지도 몰라요.ㅠ

Mephistopheles 2010-07-01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난 이런 장사 못할꺼에요. 아마 소보루빵 어쩌고 4살짜리 애들이 먹을 수 있냐 어쩌고 하면...애들 입을 찢으세요 그럼 한 입에 꿀꺽입니다. 이런 말 하고도 남을 성질머리에요.

깐따삐야 2010-07-05 13:41   좋아요 0 | URL
헉!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메피님 무섭...;;

skul23 2010-07-02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세상엔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있는듯..아저씨가 너무 안됬어요 ㅠㅠ...근데 팥빙수가 먹고 싶네요 이 시간에 +ㅁ+...크큭..

깐따삐야 2010-07-05 13:42   좋아요 0 | URL
덩치라도 좀 있으셨다면 덜 안되게 보였을텐데. 너무 홀쭉하셔서 안쓰러웠어요. 빵 많이 드시고 살 좀 찌셨으면 좋겠어요.

도넛공주 2010-07-02 0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빵집.........남의 일이 아니네요 이거.

깐따삐야 2010-07-05 13:45   좋아요 0 | URL
아, 도넛공주님도 빵 굽는 일을 하시죠? ^^ 근데 대부분의 손님들은 저렇게 유별나지 않을 것 같아요. 대개는 조용히 빵을 고르고 계산을 하고 많이 파세요, 하고 나가주지 않을까요?

조선인 2010-07-02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벌써 팥빙수를 드셔도 되나요? 조심하세요. 전 큰 애 낳고 부주의해서 이가 여러 군데 깨져나갔어요. 잉잉

깐따삐야 2010-07-05 13:48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출산하고 얼마 안되서 반팔 입고 한의원 갔다가 의사샘한테 혼났죠.ㅠ 낼모레면 백일인데 저는 백일 전에 먹어서는 안될 찬음식들을 이미 잔뜩 먹어버렸답니다. 나중에 고생하면 어쩌죠.

이잘코군 2010-07-02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사는 정말 함부로 할 게 못된다눈... 온갖 일들을 다 치를 각오를 해야 할 거 같아요. 여기 둥글 저기 둥글하는 성격도 필요하고. 내 성격엔 이런 장사는 못하겠다. -_- 그래도 혹시 누가 빵집 차려주면 변할지도 몰라요.

깐따삐야 2010-07-05 13:50   좋아요 0 | URL
맞는 말씀이에요. 방송에 나오는 대박집들 보면 정말 온갖 일들을 다 치르고도 끊임없는 인내와 노력을 거듭하여 결국 성공했더라구요. 장사나 해볼까,로 시작했다가는 쪽박 차기 십상이라는. 저도 혹시 누가 빵집 차려주면 일단 거절하진 않겠지만.ㅋㅋ

보석 2010-07-02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정말 소비자 권리도 중요하지만 이건 좀;;;

깐따삐야 2010-07-05 13:52   좋아요 0 | URL
우리 동네에 저런 아줌마들이 우글우글한다는 게, 누군가의 눈에는 나도 볼썽사납게 보일지 모른다는 게, 여러가지로 짜증납니다.

레와 2010-07-02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절묘한 제목! ^^:

깐따삐야 2010-07-05 13:55   좋아요 0 | URL
본인들 귀찮으니까 사먹이는 거면서 엄청 따지더라구요. 하긴, 저런 아줌마들이 더 따져요.

비로그인 2010-07-02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난 장사 하면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

그런데 원래 살이 안찌는 사람들이 있어요. 거의 계속 그 체중을, 무슨 짓을 해도 도돌이표처럼 찍는 사람. 그 아저씨도 그런 분일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아주머니들 등쌀에 어찌 하루를 보내셨을꼬...

깐따삐야 2010-07-05 14:00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장사하면 망하겠구나, 하는 자각.

그런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 나름대로 불만일텐데 불어난 체중 때문에 우울한 저는 딴나라 얘기 듣는 듯 부럽네요. Jude님은 원래 체중으로 다 돌아오셨죠? 아, 저는 처음에 확 빠진 후 계속 제자리 걸음이에요. 그나저나 저런 손님 왔다가면 하루 종일 재수 없을 것 같아요.